임청각(臨淸閣) ;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징
경북 안동시 법흥동 법흥교 옆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조선 중기인 1519년 건립돼 보물 182호로 지정돼 있다. 영남산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고 99칸을 배치한 살림집으로 지었다. 대청에 걸려 있는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로 알려졌다.
500년 역사의 임청각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석주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님>
석주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식솔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만주 망명길에 올랐고 여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은 물론이고 임청각까지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성지나 다름없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으려고 마당 한가운데로 중앙선 철길을 내고 행랑채와 부속건물 등 50여칸을 뜯어냈다. 집은 반 토막 났고 철도로 막혀 입구를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어보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이 "석주 이상룡 선생 등 아홉 분 독립투사 배출한 곳",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공간"으로 일제가 99칸 대저택을 반 토막 내 지금은 70칸만 남아 마당만 6개 남아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인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기에 살림채·사당·별당 등으로 처음 지어졌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당시 영산 현감인 이증이 안동의 아름다움에 빠져 입향조가 됐다. 그러곤 이증의 셋째아들인 중조 때 형조좌랑을 역임한 이명이 건축했다. 임청각이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징 공간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이상룡 선생 때부터다. 이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만 9명이 가족 중에서 나왔다.
아들 이준형(1895~1942)공과 손자 이병화(1906~1952)공, 동생 이상동(1865~1951)공, 조카 이형국(1883~1931)공, 조카 이광민(1895~1945)공 등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부인 김우락(1854~1933) 여사와 며느리 이중숙(1875~1944)여사, 손부 허은(1907~1997) 여사까지 하면 12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양반가로 귀하게 생활했지만 가족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이 중 이 선생의 아들인 이준형 공은 아버지가 죽자, 몇 년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도 더 살 수 없다며 자결했다. 손자인 이병화 공은 1934년 일본 경찰서를 습격한 혐의로 신의주에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7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임청각 옛 모습

1763년 임청각의 11대 주인이었던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이 그린 임청각

임청각 복원 조감도
첫댓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한량없는 분들에게 머리 숙여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수 많은 애국지사 덕분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편히 집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