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인의 초청(눅14:15-24)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큰 잔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을 설명
하십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여 "큰 잔치"라고 하셨어요. 그렇습니다. 천
국은 잔치 집과도 같습니다. 잔치는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때가 되면 열립니다.
오늘 비유에도 보면 잔치 준비와 초청, 그리고 그 잔치가 어떻게 되는지 결과
까지 잘 보여줍니다. 잔치는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죠. 괴롭고 지치고 힘든 일
이 아닙니다. 잔치는 어떤 경사 때문에 열립니다. 그래서 잔치를 여는 주빈
(host)도, 잔치에 참여하는 손님들도 모두 기쁘고 즐겁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곳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을 눈여겨봅시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항상 본문의 맥
락(context)을 살펴야 합니다. 성경의 맥락을 살피지 않고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 한계성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
나가 예상치 않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15절,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왜 이 사람이 여기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
상황은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만찬을 할 때입니다. 14장 1절부터 이어
지는 이야기입니다.
2. 이 만찬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습니다. 왜 즐거워해야 할 잔치 자리가 유쾌
하지 못했을까요? 만찬을 초청한 목적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지
도자가 예수님을 만찬에 초대하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예수님을
존경하고 환영해서가 아니라, 시험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초청 동기가 삐뚤어
졌으니 잔치가 유쾌할 수가 없었죠. 예수님을 올가미에 넣으려고 수종병 든 한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왔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보고 예수님을 정죄
하려고 했어요.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도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쳐주
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의도를 아셨고, 그들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하셨
습니다. 결국 그 만찬에 참여한 바리새인들의 입장이 애매하게 되었어요. 그때
에 한 사람이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분위기를 전환한다고 외친 말이 바로, "하
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세상이 재미없다고 탄식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틈을 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큰 잔치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 떡을 먹는 잔치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 비유 내용
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그 의미를 되새길수록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은 앞서 말한 것처럼 초상집이 아니고 잔치 집입니다. 잔치는
일정을 잡아 놓고, 사람들을 청합니다. 이런 문화는 오늘 우리 에게도 동일합니
다. 초대장을 미리 보내고 때가 되면 초청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결혼잔치나,
돌잔치나, 회갑-칠순-팔순 잔치 등 모두 마찬가지에요. 장수시대-100세 시대를
사는 오늘은 회갑이나 칠순 잔치는 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3. 요즘은 우편만이 아니라 휴대폰 등 SNS를 통해서 초청장을 보내지요. 카톡
을 통해서 여러 장의 신랑-신부 사진과 예식장 장소 위치 및 약도, 인사말까지
다 상세하게 받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세계에서는
종들을 통하여 일일이 잔치 사실을 알리고, 당일에 또 종들을 보내서 잔치 자
리에 오라고 전합니다. 잔치에 오라고 초대한 “어떤 사람”은 오늘 비유의 주인
공입니다. 비유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주인공이 점점 크신 분으로 나타납니
다. 잔치 날이 되어 종들을 보내 잔치 자리에 오라고 했는데, 첫 번째 초청된 사
람들 모두가 잔치의 초청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왜 잔치에 오기를 거절했
는지 다 말하지 않고 세 사람만 예를 들었습니다. 한사람은 밭을 샀고, 두 번째
사람은 소를 사서 시험해야 한다고 하고, 셋째 사람은 결혼하였으니 가지 못하
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잔치에 갈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말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를 말
하며, 또 가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과거 번역, 용서해 달라)고 까지 매우 예의바
르게 거절의사를 전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화가 크게 났습니다. 왜 주인이 화를 발했습니까? 초대받은 자들
이 잔치 자리에 오지 않을 것이면 처음에 초청을 할 때 사정을 이야기했어야 합
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고 당일에 종을 보냈더니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잔
치 자리에 올 수 없다고 통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언행은 주인의 첫
초대를 무시하고, 초청한 분을 멸시한 것이에요. 잔치를 초청한 주인의 명예를
완전히 추락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도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이 오지 않으면 황당한데,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분은 임금님-왕입니다.
4. 잔치 자리에 오지 못하겠다는 세 가지 변명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 가
지 모두 세상일입니다. 내게는 세상일이 중요하고 나는 이 일에 관심이 있으니,
당신이 초청한 잔치 자리에는 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잔치 초청을 무
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에요. 이렇게 첫 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누
구이겠습니까? 이 비유는 천국비유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초청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도 경건한 자라고 자청하던 자들
이에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레위인들, 회당장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모
두 예수님이 전한 천국에 대해 실망을 했습니다. 주님이 전하는 천국복음에 관
심을 갖지 않고 자기들 임의로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며 살겠다고 의사표시를 하
고 말았습니다.
종들이 돌아와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주인님, 아무도 잔치 자리에 오지 않겠다
고 합니다. 잔치 주인은 종들의 보고를 듣고도 그 날 잔치를 포기하지 않았습
니다. 초청에 오지 않은 자들에게는 화가 났습니다. 노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합니다. 주인은 화가 났지만, 종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며 초청
하라고 급하게 보냅니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들이 급히
나가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 자리가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초청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내에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입니다. 요즘 말로 소외된 자들
을 다 불러 오라고 주인이 특별 초대를 했어요.
5. 하나님은 교만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자, 평범한 사
람들과 소외된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실 때 놓치면 그 기회는 다른
사람이 누립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리가 차지 않았어요. 주인은 세 번째 초청
을 강행합니다. 23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
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세 번째 초청자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유대 민족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그는 열방-모든 민족
-전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사랑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습니다. 여기서 잔치 주인이 누구인지 여기서 좀 더
확실해집니다. 잔치 주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대단히 크신 분입니다.
그 분은 세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분, 이 분의 잔치초청에 오고 안 오는 선
택이 우리 인생의 운명을 결정짓게 하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내세
에까지 영원히 우리 인생을 결정짓게 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예
수님은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
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땅에서 최고의 기적은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방언과 치유, 임재의 경험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면,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영원한 유익이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이제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이 있습니다. 진정 거듭난 자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
시다.
6.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인류 역사는 오늘 비유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초청의 역사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하나님은 각 시대 사
람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알라고! 나를 알
고 오라는 초청이 예언자를 통해서 성경 기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
을입고 직접 오셔서,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초청하셨습니다. 이 초대에 대한
응답 여부는 각 사람이 결정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신하여 답할 수 없고, 자
녀라도 부모를 대신해서 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이신 하나님의
초청에 사람들은 겨우 밭과 소와 결혼을 핑계로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것들이 필요하죠. 밭과 소가 있어야 농사를 짓습니다. 경제문제 해결됩니
다. 결혼도 해야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 없
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이런 것들은 다음 차원으로 미룰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애에 엄청난 기회에요. 아무에게나 이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닙니
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들만 부르십니다. 일생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많은 밭을 소유하였다고
해서 구원의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소들을 소유했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평생 모은 재산-소유로 결정되지 않습니
다. 또 결혼을 잘해서 배우자와 자녀들과 행복한 생활 잘하다가 죽었다고 천
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베푸시는 천국 잔치 자리에 참여할 자
격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차선의 우선권에 매여 우리의 궁극
적 관심사-최고 큰일인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며 영생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7. 반면, 어떤 열악한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회개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온전한 회개 가운데 변화되어서 그때 단
한 번의 기회로 영생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D. L. 무디가 술 취한 사람에게 전도하니, 사람들이 수군거
렸습니다. 그때 무디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19세기 최고의 전도자다운 말입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 부흥
사였습니다. 그때는 TV는 물론 라디오 방송도 없었고, 마이크도 없던 시절에
육성으로만 설교하여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습니
다. 20세기 최고 전도자 빌리 그래함을 능가하는 대단한 영적 부흥사로 하나
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술 취한 사람에게도 전도해야 한다는 메시지입
니다. 어떤 형편에 있는 사람이든지 우리가 할 일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것입니다. 나머지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에요.
8. 오늘 우리 삶은 너무 바쁩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요. 그저 덤벙덤
벙하다가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매일 하루가 너무 짧아요. 하지만 아무리 바
쁘고 할 일이 많아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잊지 말고 삽시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오늘 나눴습니까?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며 사는 것입니
다. 내 삶이 어떤 형편에 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가난하고 병들었어도 괜
찮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이런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
에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가 이런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께 고침 받고 새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 병들었으니 병원에나 가보라고 할 것이 아니고, 하나
님께서 친히 치유해주시도록 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어제 회복캠프를 마치고 각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치유와 회복을 주셨습니다.
두 주후에는 선교지 순회사역 가운데 신학특강과 신학생들을 위한 회복캠프,
청소년 어메이징 캠프를 통해서 열방에 있는 청소년-청년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주시는 은혜와 은사의 도구로 우리교회가 쓰임 받습니다. 참 멋진 일입니다. 아
무나 할 수 없는 일-사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영혼의 참
자유와 전인적인 치유의 기회를 주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역사와 은혜와 은사를 제한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강의하되 죽은 신학 아니고 살아 있는 신학, 말씀을 전하되 죽은 말씀-도덕적
인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을 움직이는 말씀 사역을 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빼앗기지 않고 누리는 우리
포항 빛내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