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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은殷)나라 시대 1– 상인, 맥수지탄, 은감불원
정권을 잡은 자천을은 부족 이름을 따라 나라를 ‘상商’으로 칭했다. 자천을의 시호는 ‘탕湯’으로, 역사에서 그는 탕왕湯王으로 불린다. 나라를 세운 대부분의 시조가 그러하듯 탕왕도 ‘의롭고도 자비로운 명군(의자왕義慈王?)’으로 소개된다.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줄 알았고, 국가의 틀을 단단히 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즉위 후 7년 동안이나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되자 손톱과 머리카락을 자르고 목욕재계한 다음, 제 한 몸을 제물로 바칠 터인즉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간청했다. 갸륵하고도 기특한지고! 감동한 하늘이 그 즉시 단비를 내려 상나라 땅을 촉촉하게 적셨다.
설마? 탕왕의 인자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화일 터이나, 역사적 시각으로 보자면 상나라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는 고증도 된다. 그 시대에는 임금이 곧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국가의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점을 쳐서 결정하는 신정神政이 당시의 통치시스템으로 채택되었다.
탕왕 이후 멸망할 때까지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기는데, 19대 세조世祖 때에는 지금의 허난성(하남성河南省) 안양현 부근의 은殷으로 천도한다. 이때부터 상나라는 제법 나라다운 골격을 갖추게 된다.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는 까닭이다.
상나라는 중국 사학계에서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전설적인 국가로만 존재했다. 유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899년 청나라 말기에 ‘용골龍骨’이라는 이름의 한약재로 거래되고 있던 거북이의 배딱지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연구 결과, 대다수의 갑골문자 유물은 상의 수도였던 은허殷墟(은의 폐허)에서 나왔으며 이로써 전설로만 전해졌던 상이 중국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거북이의 배딱지나 짐승의 견갑골을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상나라 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문자를 새겼다는 기록과 일치했던 것이다. 이 상형문자는 한자의 원형임이 밝혀짐으로써 ‘갑골문자甲骨文字’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부침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한때 잠시 국력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이후 대체로 어리석고 포악한 왕들이 대를 이음으로써 슬슬 민심이 이반되고 있었다. 민심이 떠나면 나라가 위험해진다.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폭정은 극에 달했으며, 망국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주왕이 본디 그렇게 어리석거나 포악하지는 않았단다. 오히려 총명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용맹하기까지 했단다.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엄친아’.
“주왕은 두뇌가 뛰어나고 달변가였다 신하들이 어줍잖은 이론으로 자기주장을 내세웠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했다. 사물을 보는 눈이 밝았으며 재능과 체력이 남달랐다.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았으며, 용기 또한 대단했다.”
헌디, 이 엄친아께서 어찌하여 갑자기 폭군으로 변모하게 ‘되었스까’? 여자 때문이었다. 하나라 멸망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은 여인 말희가 그랬던 것처럼 ‘달기妲己’라는 여인이 희생양이 된다. 주왕이 달기의 미모에 미혹,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된 것으로. 훗날 사마천 같은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사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사실 달기는 주나라 수령 발의 동생 공자 단이 상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한 공작으로 이웃 유소씨有巢氏 부락에서 태아 때부터 입양하여 교육한 여인이었다. 달기라는 이름도 제 이름 단旦에 '계집 녀女'자를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단은 달기에게 웃는 모습, 음식 먹는 법, 대화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를 사로잡는 교태를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그 결과, 달기는 주왕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인간병기가 되어 있었다. 얼굴은 천하의 미인, 몸매는 낭창낭창, 고고한듯 표독한듯 뜨거운 동시에 얼음처럼 차가웠다. 문득 내보이는 애처로운 표정은 보는 남자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기도 했으니,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세상 모든 남자들의 쪽을 못쓰게 할 정도였다나.
일단 단은 달기를 고향 유소씨 부락으로 돌려보냈다. 마침 그 부락에 기근이 들어 주왕에게 보낼 공물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상왕조에서 독촉이 심해지자 유소씨 부락 수령은 공물 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뭐 보낼 게 있어야 보낼 게 아닌가? 이 때였다. 단이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유소씨 부락에 요런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천자(주왕)께서는 미녀를 귀히 여기는 소중한 심성을 지녔는 바, 귀국의 달기 하나면 능히 천만금의 조공으로도 얻지 못할 기쁨을 천자에게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뭄속의 단비, 이게 웬 희소식이란 말인가. 유소씨 수령이 수소문하여 달기를 찾아 만나보니 허걱! 그 미모와 몸매 무엇보다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 있는 교태에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아깝다! 아까워서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도리없다. 목숨이 미인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수령의 철학이었다. 한숨 푹푹 내쉬면서 달기를 공물로 바칠 수밖에.
허얼∼
그렇게 달기를 맞이한 주왕은 입만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여인이? 그 동안 난 세상을 헛 산 거야.' 그렇게 달기는 바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단에게 배운 대로 주왕에게 갖은 악행을 부추겼다.
주왕은 달기에 폭 빠져서 모든 정사政事를 올스톱하고 정사情事에만 탐닉했다. 하나라대의 주지육림을 재도입하여 날이면 날마다 음주가무로 세월을 보냈으며, 포락형까지 부활시켰다. 왜? 달기가 포락형을 즐겨 관람(?)했으니까.
상황이 이러하자 모반을 꾀하는 세력이 비 온 뒤 대밭의 죽순마냥 쑥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세력이 창昌이 이끄는 주周부락이었다. 죽은 듯이 엎드려 지내던 창이 드디어 칼을 뽑았다. 그간 은밀하게 도모한 세역들과 규합하여 주왕을 치러 나선 것이다.
“아, 클났네. 이러다가는 다 죽어. 이렇게 해서 걔네들한테 뒤집어씌우고 저렇게 좀 해봐.”
주왕은 반란군이 성문 바로 앞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깜짝 놀라 대책을 강구해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주왕은 매우 ‘폼나게(?)’ 삶을 마감한다. 달기와 함께 갖은 보물을 채운 높은 건물 녹대鹿臺에 올라 스스로 불 질러 타 죽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제 목숨을 반역자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그 알량하고 거룩한 자존심. 그런데 그 자존심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반란군들이 불에 탄 주왕의 시체를 찾아내었고, 창이 직접 나서서 세 발의 화살을 꽂았다.
첫번째 날린 화살은 금시(금화살), 하늘의 뜻을 거역한 죄. 두번째는 은시(은화살), 나라를 망하게 한 죄. 세번째가 동시(동화살)이었으니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를 묻는 퍼포먼스였다. 이어 금도끼로 참수되어 백기를 단 창 끝에 효수된다.
이로써 상나라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백성들도 근거지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게 된다. 유랑은 곧 살아남기 위한 행위 아닌가. 죽으려고 작정했다면 상나라에 충성심을 표하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어야 옳다. 살기 위해 유랑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땅뙈기 하나 없는 유민들이 떠돌아다니면서 먹고 살아갈 방법은? 그들은 당시 중국인들이 가장 비천하게 여겼던 장사를 택했다. 이에 주나라 사람들이 장사하는 상나라 유민들을 폄하하는 뜻으로 ‘상인商人’이라 했으며, 그 뜻이 굳어져서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까지 미천한 상나라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란 의미로 ‘상업商業’이라 하게 되었다.
허나, 본디 '사농공상士農工商' 은 춘추전국시대에 士(학자), 農(농민), 工(장인), 商(상인) 네 직업으로 백성을 통칭하던 용어였다. 게다가 초창기의 士는 학자가 아닌 병사를 의미했다. 전국시대 후기의 제가백가 논문집인 『관자管子』에서는 '사농공상 네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곧 나라의 기본 백성이라[士農工商四民者 國之石民也]하였고, 공자가 편찬한 역사서 『춘추』<곡량전>에선 '사상공농'으로 '상'이 '사' 다음에 나오는데, 어느 쪽이든 백성을 통틀어 부르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신분제 개념으로 고착되고 만다.
각설하고, 역사에서 승자는 늘 망국의 임금을 매몰차게 몰아붙인다. 하나라 걸왕과 더불어 주왕紂王까지 천하에 몹쓸 인물로 그려놓았다. 주나라 수령 창의 아들을 죽인 다음 국을 끓여 제 아비에게 마시도록 강요했다. 사람을 죽여 젓갈로 담갔다는 끔찍한 기록도 있다.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던 숙부 비간比干까지 참혹하게 죽였다. 제발 폭정을 멈추라고 간언하자, 표독스런 달기의 충동질에 의해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라는데, 한번 확인해 봅시다.”하고서는 살아있는 비간의 가슴을 갈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숙부인 기자箕子도 주왕에게 간언을 했다가 바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미치광이 행세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나서야 주周나라에 항복했다. 『사기』에는, 주 무왕이 그 대가로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중국의 여러 사료에 이런 기록이 있지만, 우리 사학계에서는 기자가 동東(조선)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기자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최초로 기자조선이 언급되었지만 고조선에 포함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후조선後朝鮮’으로 표현할 뿐 기자에 대한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후기인 숙종 때 평양에 ‘기자릉箕子陵’이라는 가묘를 축조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기자를 기리는 제사가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있다. 불교를 대신하여 유학이 세를 불리던 시기로서 이때부터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면 된다.
유교의 한 뿌리인 성리학性理學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왕조 때에는 기자동래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다.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사대주의자들이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은 당연지사. 옳다구나 하고 중국의 현인賢人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로 받아들였던 거다. 이것이 기자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다.
근대 이후의 한국사학계는 기자가 비록 실제인물이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교통 사정, 기자릉의 허구성 등 모순을 지적하고 기자동래설은 곧 ‘썰’로서, 모화사상의 산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설에 관하여 한중일 3국 사학계의 입장이 매우 다르며, 어느 쪽이 딱 옳다고 할 수 없다. 사료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기자는 고조선에 갔다가 잠시 돌아오는 길에 멸망한 조국 상(은)나라의 수도였던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그만 ‘울컥’하여 <맥수가麥秀歌>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화려했던 궁궐은 흔적조차 없고 그 터에 보리, 기장 같은 곡물이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나라 왕족으로서 참담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보리이삭은 쑥쑥 올라오고[맥수점점혜麥秀漸漸兮]
벼와 기장도 이리저리 자라고 있네[화서유유禾黍油油]
저 교활했던 철부지(주왕)여[피교동혜彼狡童兮]
말을 듣지 않더니 (이리 되고 말았구나)[불여아호혜不與俄好兮]
기자가 한숨을 내쉬면서[탄嘆] 시를 읊었다고 하여 ‘맥수지탄麥秀之嘆’이란 관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조국의 멸망을 한탄함’이라는 뜻이다. 맥수는 보리대가리 즉 보리이삭이다. 고대 중국의 시가를 모아 엮은 『시경詩經』에서도 상(은)나라의 망국에서 교훈을 얻으라는 글을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가 거울삼아야 할 것은 멀리 있지 않았으니, 바로 앞 왕조 하의 멸망이라[은감불원殷鑑不遠 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라 했다. 이 구절에서 앞 글자만 똑 따낸 새로운 성어가 생겼는데 ‘은감불원殷鑑不遠’이다. ‘주위의 실패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상商(은殷)나라 시대 2– 강태공, 복수불반분, 이포역포, 백이숙제
자고로 새 왕조가 구왕조를 멸망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한 법. 주周나라 역시 백성(이웃 제후국들)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여론 조작에 들어갔다. 먼저 상왕조 주왕의 폭정과 함께 그가 미인 달기에 빠져 국정에 소홀했던 점을 강력하게 질타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뭔가 좀 부족하다. 주왕이 비록 폭정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하늘님의 아들 천자天子가 아닌가? 천자를 내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에게도 하늘이 내린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잠깐! ‘백성百姓’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넘어가자. 백성에서 ‘백百’이란 딱 100의 수를 지칭하는 접두사가 아니다. 매우 많다는 뜻이다. ‘성姓’은 곧 종족, 따라서 백성이란 수많은 종족이란 뜻이다. 그런데 당시에 성을 가진 종족이라고는 호족 세력들뿐이었다. 노비들은 물론 농공상 직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성이 없었다. 고로 여기에서 백성이라 함은 어느 정도 무리를 이루고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진 집단을 뜻한다. 백성을 위해, 백성의 뜻에 따라 등등의 수사에서 백성이란 결국 통치 지원이 가능한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체 국민들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예부터 힘이 없는 자는 백성 축에 끼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다. 선거 때만 제외하고.
그렇다면 주周나라는 어떤 식으로 정통성을 내세웠을까? 답은 주나라 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였다. 용비어천가가 무엇인가? 이성계의 손자 이도李祹(세종)가 정인지·권제·안지에게 주문하여, 아버지(태종)와 할아버지(태조 이성계)에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출신 성분조차 모호한 그 윗대 할아버지들을 총동원시키고, 그들을 조선의 토대를 세우고 하늘로 날아올라간 여섯 용龍으로 미화하여 백성들에게 ‘공갈’친 가사歌辭이다. 새 왕가의 근본이 고려왕조보다 훨씬 훌륭하니 이젠 옛 나라는 싹 '잊어불고' 조선왕조에 충성하라는 메시지였다.
실제로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이는 무왕武王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으로서는 무왕을 천명을 타고난 사람으로 보기에는 뭔가 미흡했던 모양이다. 『사기』에서 그는 무왕의 조상을 총동원하여 그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같은 책 <주본기周本紀>에 뜬금없이 그의 조상을 오제五帝 중 한 분인 제곡帝嚳을 재등장시킨 것이다.
내용인 즉, 제곡의 비妃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으며, 소문이 두려워 강원이 갓난아이를 길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밟으려 하지 않았고, 숲에 버리려 했지만 인파가 많아 버리지 못하였으며, 얼음 위에 버렸더니 새들이 품어 갓난아이의 체온을 유지하자 비로소 그 아이를 기르기로 했다고 써놓았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삼[마麻]이나 콩 심기를 좋아하여, 요 임금과 순 임금이 그에게 후직后稷이라는 직책을 맡겼는데 직책이 곧 그의 이름이 된다. 중국에서 후직은 지금까지도 신농씨와 함께 농업의 신으로 추앙받는 신이다. 주족이 대대로 후직을 이어받은 것은 하나라 때까지였다. 그런 고로 하왕조에 충성했던 주족은 새로 들어선 상왕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후직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까닭은 무왕의 시조 즉 희姬씨 성의 시조가 바로 후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왕조보다 정통성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대목이다.
실제로 주족周族이 일어난 지역은 위수渭水(웨이수이) 인근으로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했으니, 유학儒學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중국고대 사료가들이 검토한 결과 후직을 시조로 삼아도 뒷말 없을 만한 곳이었다. 초기에는 다 그러하듯이 주족의 문화도 오랑캐 수준이었으나 12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구궁단푸)’ 때에 이르러 화하華夏(문명화 된 중국 한족의 조상)의 풍속을 받아들여 면모를 일신하고 조악하나마 나라의 꼴을 갖추게 된다. 주나라가 들어선 다음에 그는 ‘태왕太王’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변방의 한 세력으로서 상왕조를 섬기기는 했지만, 주족의 고공단보에게는 일찍부터 천하를 제 손에 넣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 중 세째 아들인 계력季歷이 대를 이었다. 계력은 창昌(문왕)을 낳았고. 창은 발發을 낳았으며, 발이 곧 실제적으로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된다. 고공단보의 첫째 태백과 둘째 아들 중옹은 주족을 떠나 머나먼 양자강 하류에 정착하여 전국시대의 실력자였던 오吳나라를 세운다.
창은 민심을 잘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상나라로부터 서백西伯(서방의 지도자)이라는 벼슬을 얻지만, 한때 견제를 받아 아들을 잃었으며 본인도 은허에 볼모로 잡혀 갔던 적이 있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치욕이었으며, 결국 상나라를 뒤엎겠다는 마음을 가진 충분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많은 뇌물을 바치고나서야 볼모에서 풀려난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이를 갈면서 군사력을 기르는 동시에 자신의 뜻을 함께 펼칠 현인賢人을 찾아나섰다.
한편, 위수 부근의 한 오두막집에는 두 노인 내외가 살고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남편이라는 작자는 평생 집에 돈 들여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낸다. 당연히 그의 집에서는 빈 쌀독을 긁어대는 아내 마씨부인의 바가지 소리로 아침이 시작되었고, 아내의 구박과 잔소리로 밤이 깊어가곤 했다. 남편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성은 강姜이요, 이름은 여상呂尙이라, 염제신농씨의 51세손으로서 우리나라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조상이기도 하다는데….
문왕, 무왕, 성왕, 강왕 4대에 걸쳐 태사太師(영의정)를 지냈으며, 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제齊나라를 봉작 받은 시조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능력 없고 초라한 노인네에 불과했다. 눈만 뜨면 마누라의 잔소리를 피해 위수 가에서 바늘 없는 낚싯대를 던져놓고 하염없이 찌만 바라보고 있었다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어르신, 곧은 낚시 바늘로 어떻게 물고기를 잡으세요?”라고 비웃기라도 하면, “허허, 난 사람을 낚을 겨.” 했다는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거사를 도모할 만한 인물을 찾아다니던 서백 창이 이 소문을 듣고 위수로 왔다. 당시 여상의 나이는 무려 80세. 창의 입에서 '영감님'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영감님, 입질은 좀 있소이까?”
“몇 십년만에 지금 처음으로 입질이 온 것 같으요.”
“그, 그렇다면 그 입질은 내가 한 거요?”
“딱 맞춰부렀소. 당신이 시방 내 미끼를 딱 물어버린 것이요.”
더 이상 긴 이야기가 무에 필요하겠는가?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단 몇 마디 주고받은 끝에 서백 창은 노인이 비범한 인물임을 대뜸 알아보았다. 당장 할아버지 태왕太王이 그토록 염원[망望]했던 인물이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칭했으며, 그 날부터 여상은 주나라의 재상이 되어 4대에 걸쳐 활약했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 ‘강태공姜太公’, ‘때를 기다리는 사람’ 또는 본뜻과는 달리 ‘낚시에 미친 사람’으로도 사용된다.
서백 창이 죽은 후인 1046년 2월 겨울, 여상은 그의 아들 발(무왕)을 도와 목야전쟁牧野戰爭에서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나라 군을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기적을 일으켰으니, 과연 무왕의 할아버지 태왕이 고대하던 사람이라 할 만 했다. 서백 창은 사후 문왕文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여상은 공을 인정받아 무왕으로부터 제齊나라의 공작(제 태공)으로 봉작되었다.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했다.
강태공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동양철학의 최고봉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그가 저술했다는 설이 있는 병법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두 부분이나 차지할 정도이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한 바 있다.
여상의 마누라 마씨부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십 년 함께 살았지만 끝내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는 여자가 정상이 아니다. 언제 강태공이 한번이라도 아내에게 자신의 깊은 속내를 밝히고 협조를 구한 적이라도 있었던가? 설사 그 깊은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평생 백수로 지내는 남편을 용납할 여자는 별로 없다. 서백 창이 채가기 전에 이미 여상은 마누라에게 내침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남편이 재상이 되었단다. 인두겁을 썼다면 평생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는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마씨부인이 느긋한 마음으로 여상을 찾아가서 재결합하자고 했다. 요즘 상식으로는 여상이 "아이구, 마누라. 그간 나땜시 고상 많이 혔제."하고 받아줄 만도 했지만 호랑이가 궐련 피우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안색이 싹 바뀌더니 옆에 있는 물동이를 깨버리고는 마씨부인에게 쏟아진 물을 다시 담아보라고 했다.
“아니, 영감! 쏟아진 물을 워뜨끼 다시 퍼담는다요?”
“그라제?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기 한번 헤어진 부부는 합쳐질 수 없는 겨.”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이 때 여상이 ‘폼 잡고’ 한 말은 지금까지 남아 관용어로 쓰이는데,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지난 일을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는 뜻인데 영어에도 ‘It is no use of crying over the spilt milk.’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여상을 속 좁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주구장창 마씨부인만 나쁜 년이 되어 있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가서, 여상이 무왕과 함께 상나라 주왕을 치려 할 때 이해할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변방국 중에 고죽국孤竹國이라는 나라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는 공자公子(제후국 수장의 아들)형제가 있었다. 백이가 첫째이고 숙제가 셋째였는데, 아버지 고죽군은 장자를 제쳐두고 막내에게 수령 자리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당연히 숙제가 수령 자리에 올랐어야 했다. 헌데 아! 이런 착해빠진 동생이 다 있나?
“아무리 아버지 뜻이라지만서두 성님을 두고 지가 워뜨끼 그 자리에 오르겄수? 성님이 수령 허쇼∼.”
숙제가 자리를 양보하자 착하기로 따지자면 동생 못지않았던 백이가 펄쩍 뛰었다.
“동상, 그게 뭔 말이여? 아부지 유언을 따르지 않겄다는 말이여?”
“아, 나 몰랑!”
서로 곤란하다면 제비뽑기로 결정하거나 몇 년씩 나누어 통치하면 될 텐데, 이 두 형제 참 대책 없다. 기껏 합의한 방법이 둘 다 나라를 떠나는 것이라니…. 백이가 먼저 괴나리보따리를 들고 출가하고 이어 숙제가 그를 따른다. 형제애만 중요할 뿐 남은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을까? 다행히 둘째가 어부지리로 수령이 되어 나라를 경영했다고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들이 고죽국을 떠나 닿은 곳은 어디였을까? 주周 부락이었다. 서백 창이 워낙 주위의 민심을 크게 얻음으로써 그를 흠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그랬을까? 어느 정도는 시대의 흐름, 곧 대세를 따랐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곧 범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스탠스'를 취한다. 한시가 급한데 주왕紂王을 치러가는 무왕의 앞을 딱 가로막고는 ‘뜬금포’를 날린다.
“어르신(서백 창) 장례식도 아직 안 치렀다믄서 워찌 전쟁을 하려 허슈? 건 효孝가 아니쥬. 한 말씀 더 올릴까유? 주나라는 엄연히 상나라의 신하 국인데, 워뜨키 신하가 임금을 주살허려 헌데유? 그건 인의仁義이 아니쥬! 안 그류?”
어쩌자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그대로 두는 건 인의란 말인가? 백이와 숙제에겐 명분과 체면만 중요했을 뿐 현안에 대한 대안도 대책도 없었다. 무시할까 하다가 무왕이 하도 기가 막혀 한 마디 했다.
“백성들이 죽든 말든 이대로 두고 보자는 말인가!”
“그건 지들이 알 바 아니구유. 지금 주왕을 쳐부수겠다는 공의 행위를 유식헌 말로다가 ‘이포역포以暴易暴’라 헌다는 건 알어유? 말을 안 들으면 잘 구슬리는 게 인자가 헐 일이란 말여유. 때린다고 개과천선할 것 같으유?”
행동은 간디요, 말씀은 공자님이다. 현실은 개에게나 줘버리고 명분만 중시하는 지극히 아마추어적 정치평론이라는 뜻이다.
이포역포란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꾼다’는 말이다. 두 형제의 말이 하도 가당치도 않아 무왕이 검을 들어 내치려했지만, 강태공 여상이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말리는 바람에 그들을 지나쳐 계속 상나라 수도로 진격했다. 그 결과, 백이와 숙제의 명분과는 관계없이 결국 상나라는 멸망했으며 천하는 주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백이와 숙제의 행적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니 ‘오버’의 극치라 할 만했다. 상나라 천자에 대한 충성은 버릴 수 없으며, 상나라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 영주로서 주나라가 주는 녹봉을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살았단다. 고작 이런 시나 읊으면서… 그래, 잘 났다.
저기 저 서산에 올라[등피서산혜登彼西山兮]
고사리를 캔다네[채기미의采其薇矣]
포악을 포악으로 바꾸고도[이포역포혜以暴易暴兮]
잘못을 느끼지 않는구나[부지기비의不知其非矣]
이를 <채미지가采薇之歌>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고사리’는 사실 ‘고비’라 옮겨야 옳다. 한자로 고비는 ‘미薇’라 쓰고 고사리는 ‘궐蕨’이라 쓰기 때문이다. 고사리와 고비는 각각 양지식물과 음지식물로서 생활조건과 생태가 다르다. 같은 양치식물이지만 고사리는 양지에서 한 뿌리에 하나의 줄기만 나오고, 고비는 음지나 습지에서 한 뿌리에 여러 개의 줄기가 나온다. 맛은? 맛은 물론 모양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니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는 제쳐두고 꼭 고비만 골라 먹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고사리든 고비든 산나물만 뜯어먹고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미'든 '궐'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나보다 깐깐한 사람이 있었다. 이치에 닿지 않는 일에 대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왕미자. 수양산에서 백이와 숙제가 지나치게 오버하는 꼬락서니를 보고는 지나치지 않고 기어이 한마디 거든다.
“거 참, 디게 이상하네. 주나라 꺼는 모지리 다 안 묵는다 카디마는, 주나라 산에 살믄서 주나라 고사리를 묵는다 카는 게 말이 되능교?”
때린 데 골라 때린 격. 그렇잖아도 이미 망신살 뻗은 사람들한테 양미자의 비아냥은 좀 과했다. 소위 ‘팩트 폭력’이다. 남산골 샌님 마냥 몇 끼나 굶고도 낲들 앞에서 이를 쑤시는 백이와 숙제에겐 너무나 치욕스런 말이었던가 보다. 그날부터 ‘꽁해진’ 두 사람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누워서만 지내는데…, 오래지 않아 굶어죽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왜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을까? 어찌 상나라의 부패와 주나라의 정통성을 크게 부각시키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백이와 숙제의 불사이군 자세를 칭송함으로써 가치의 혼돈을 일으키게 하는가 말이다. 간단하다. 가치의 상충 따위는 제 알 바 아니니 그저 눈 딱 감고 『사기』저술 당시의 통치이념으로 등장한 ‘충忠’에 충실하기위해서였다.
백이와 숙제의 정신은 우리나라에서도 은은하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여말조선초麗末朝鮮初의 유학자 길재吉再선생에 의해서였다. 이색, 정몽주 선생과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추앙받고 있는 그는, 이성계·조준·정도전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계림부와 안변 등의 경사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 양성에만 전념했다. 조선 영조 때에 와서야, 선생의 덕을 기려 구미에 정자를 지었는데 ‘채미정采薇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을 백이숙제의 충절에 비유한 이름이다. 한편,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사람의 이름이면서 ‘마음이 맑고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다음은 주周나라(서주西周) 편입니다.
첫댓글 역사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한 권 갖고 싶네요
재미있는 역사 정말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한수 잘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