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에 다녀 왔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의 근거지이므로 바라보는 내 마음이 삐딱하였다.
그러나 성을 둘러싼 사방의 깊은 해자와 성벽에 사용된 거대한 돌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세 일본에 거대한 공사를 해낼 수 있는 권력, 재력, 기술력과 인원 동원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히데요시는 1594년과 1595년, 실제로 1년 반에 걸쳐 자신의 권력의 상징인 오사카성을 완성하였다.
명나라를 침략할 야망을 품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대한 성을 쌓고 있는 동안
조선 양반 사대부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할복자살로 죽자 농민 출신으로 가신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 투쟁 끝에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정권을 잡은 다음 해 1583년 11월에 오사카로 본거지를 옮겨 1년 반만에 당시로서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을 쌓았다.
그리고 기고만장한 히데요시는 1586년 오사카성으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를 불러서 자기 속내를 드러냈다.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주겠다. 그러니 정벌하러 떠날 때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명나라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해 주겠다”고 하였다. 1590년 전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공공연하게 조선 정벌을 말했다.
조선은 일본의 변화와 조선 침략의 야욕에 대한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조선 왕 선조는 일본이 사절단 파견을 요청해오자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범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속내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정사는 서인의 황윤길이었고 부사는 동인의 김성일이었다. 사절단은 20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들은 1590년 4월에 도착하여 일본 왕이 예를 갖추어 써주는 국서를 받고 1591년에 조선에 돌아왔다.
일본 국서 문제로 조선 사절단은 1년 이상을 일본에 머물렀다. 그들은 머무는 동안 히데요시가 세운 어마어마한 오사카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온 신식무기인 조총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사 김성일은 정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조선 유학자의 자존심과 허세를 부리며 격식과 예의를 갖춘국서를 받고자 항변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일본에서 낭비하였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무례한 일왕의 답서를 증거품으로 들고 빨리 돌아와서 조정에 고하고 나라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하게 하였을 것아다. 그러나 1년 동안 일본을 돌아보고도 야만인들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보았다. 1년을 허송세월하고 돌아가는 사절단이 얼마나 답답하고 불쌍하면 당시 대마도 도주가 조총 두 자루를 황윤길에게 선물로 바쳤겠는가? 조총을 버친 대마도 도주의 속 뜻은 정신 차리고 일본 침략을 대비하라는 암시가 아니었을까?
조선 임진왜란의 비극은 명나라 정벌의 야망을 품은 히데요시가 이웃 나라의 정권을 잡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신으로 가서 적국의 의도를 파악하고도 당파에 사로잡혀서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국가야 망하든 말든 당장 자신들의 기득권만 생각하는 양반관료들의 당파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유성룡은 동인에 속한 김성일 변명해주고자 “징비록”에서 김성일이 사신으로서 보고를 마치고 궁궐을 빠져 나오며 자기에게
“제가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그렇게 말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이 김성일이 한 말이라고 해도 “도요토미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며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입니다.” 황윤길의 보고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정면 반박해서 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 넣고
백성들을 살상과 기아로 죽게 만들고 수십만 명을 포로로 잡혀가 노예로 팔리게 만든 그의 오판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되거나 변명이 될 수 없다. 용서될 수 없다.
유성룡 또한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신이지만 그가 김성일이 임금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되었다.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말을 듣고도 무심하게 흘렸다는 것은 그 또한 같은 당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내심 그의 주장을 지지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김성일의 있는 그대로 보고하면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판단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조선 팔도강산이 애놈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총칼에 난도질 당하지 않았는가?
나라와 민족보다 가문과 당파의 기득권을 생각하는 당파싸움을 유산으로 물려준 조선 관료양반들의 행태가 이 땅에서 언제 사라질 것인가!!!
히데요시 동상은 자기가 세운 오사카성을 바라보고 있다.
오사카성 정면 앞 뜰에 히데요시가 심었다는 430여 년의 고목이 있다.
고목 앞에 있는 표지판.
고목과 오사카성(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증축, 그 후 퇴락한 성 전체를 1953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2013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정면
성을 떠바치고 있는 축대의 돌들, 특별히 모든 모서리의 돌들이 수톤이 나가는 돌들이다. 1591년에 이 성의 축대를 본 조선의 사신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자가 성의 사면을 둘러싸고 있고 외부로 통하는 다리가 정문과 후문 두 개 뿐이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후문으로 이어진 다리.
축대와 성벽의 경사가 심해서 난공부락이었으나 1612년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해자의 일부를 메꾸어서 성을 점령했다고 한다.
복원돤 오사카성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의 유지와 조감도.
인공으로 판 해자. 지금은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다.
또 다른 면의 해자.
해자에서 운행되고 있는 유람선.
피라미드 돌만큼 크고 무거운 축대의 돌들.
잘 다듬어진 돌들의 균형.
깡다구와 오만, 패기가 느껴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