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1. 16-18세기의 걸쳐 봉건제에 기초한 구체제는 새로운 구조적 변화를 겪어야 했다. 구체제가 새롭게 맞이한 것은 자본주의적 흐름이었고 기술의 확산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각각의 나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고 충돌했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 속에서 어떤 나라는 ‘의회적 민주주의’로 발전했으며, 어떤 나라는 파시즘적 국가로 변화였고, 또 다른 나라들은 ‘공산주의’를 채택하였다. 이런 역사적 동인에 대한 분석은 주로 정치적, 이념적, 경제적 영역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그러한 변화를 추동시킨 주역을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통해 접근하였다. 반면 ‘농민’과 ‘지주계급’의 역할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베링턴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각각의 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과정과 배경을 농촌사회와 상층지주계급 그리고 농민의 입장에서 전개한다. 무어의 입장은 ‘농촌’이 변화의 추진세력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결정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서구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민주주의 수립과 연관된 지주계급과 농민의 역할을 정리해본다.
2. 영국은 가장 빠르게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국가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계급이 일명 ‘젠트리’계급, 즉 농촌의 상층지주계급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토지의 소득산출 기능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고 빠르게 농업의 상업화를 추진하였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은 농업구조를 상업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작농이나 소규모 차지농들은 몰락하였으며 대규모의 농업을 중심으로 개편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들이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의회를 구성하여 왕권과의 균형을 맞추었으며 실제적인 정치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개혁이 하층계급의 희생을 가져온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되지만 상대적으로 법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개혁은 영국 정치의 안정을 가져왔고 자본주의 발전에 공격적으로 대항한 ‘차티스트 운동’에 대해서도 온건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영국의 상층지주계급은 빅토리아 시대의 전반적 발전에 동참했고 계속 부르주아지와 자본가다운 면모를 획득했기 때문에 유럽 대륙의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발전에 반대할 이유가 훨씬 적었다.”
3. 반면 프랑스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프랑스의 지주계급은 여전히 봉건적 구조 속에서 소작농들의 지대를 통해 생존하였고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계급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법적인 지위와 농민부과조라는 특징이 당시 프랑스 지주계급의 성격을 말해준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프랑스 사회의 변화는 급격하게 전개된다. 세제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어떤 개혁도 추진하지 못한 프랑스에서 지주계급은 정치적 책임감을 박탈당했으며 소소한 이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런 대조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 속에서도 결국 ‘민주주의’ 국가로 바뀐 가장 중요한 원인은 ‘프랑스 혁명’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로의 과정은 더 폭력적이었으며 더 많은 희생을 동반해야 했던 것이다.
4. 누적된 착취에 희생당하고 있던 농민들은 혁명의 이상에 찬동하였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도시빈민과 농촌빈농들이 협력하여 혁명의 열기를 확산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도시빈민과 농민들의 이해관계는 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도시민중 세력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당 세력은 도시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가격을 통제하였고 곡물을 강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곡물 비축도 금지시켰다. 이러한 혁명정부의 정책은 농민들의 반발을 가져왔고 더 이상 혁명이상에 동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저자가 볼 때, 농민들의 혁명 참여는 ‘토지 소유’에 대한 욕망과 세금축소에 대한 희망 이외에는 다른 특별한 이념적 방향은 없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점차 혁명에서 이반하기 시작하였다.
5. 저자는 농민들의 이탈이 프랑스 혁명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다고 본다. 성공을 거뒀던 봉기는 대부분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이 지지가 사라지자 혁명의 열기는 식었고 추진력은 약해졌다. 농민이 실제적으로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결국 산악당 세력은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겼으며 급진적인 혁명의 실험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혁명은 영국에서의 농업의 상업화 현상과 같은 사회적 역할을 달성하였다.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제거시켰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체제의 국왕와 귀족의 특권 및 봉건영주의 권리가 제거되어야 했다. 혁명은 다른 방식으로 이러한 구체제의 잔재를 폐기시켰다.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 이전의 면모를 벗은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대신한 부분적 대용물로서의 또는 역사적인 대안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부르주아 혁명의 추진력이 미약했거나 그것이 유산된 곳에서 나타난 결과는 다른 국가의 경우 파시즘이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였다.”
6. 영국과 프랑스가 다른 방식을 통해 전통적인 봉건농업 구조를 탈피하고 자본주의적 변화로 향하고 있을 때, 서구의 마지막 민주적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신생국가 미국이었다. 저자는 미국의 진정한 혁명을 18세기 독립혁명이 아니라 19세기 벌어진 ‘남북전쟁’이라고 강조하였다. 남부의 ‘프렌테이션 노예제’ 농업이 남아있는 한 자본주의로의 온전한 발전과 민주주의적 체제로의 전환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결정적인 도약이었다. 이는 적어도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에서의 절대군주제도의 폐지와도 같은 행위였고 더 큰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본질적인 전제였다.” 저자의 설명은 당시 논쟁이었던 ‘남북전쟁’이 반드시 필요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것은 낡은 체제가 존속하는 한 새로운 변화, 즉 민주주의적 체제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7. 저자는 서구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영국, 프랑스, 미국)의 민주적 체제로의 전환을 추적하면서 계급의 역할 특히 상층지주계급과 농민들의 역할에 주목하여 사회적 변동에 끼친 힘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동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수동적으로 변화에 따라간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낡은 군주제나 소수 집단의 권력이 장악한 경우에는 정치적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변화의 추진세력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아래로부터 분출되어야만 혁명의 민주적 성격은 강해진다는 점도 확인했다. 국가의 권력기관과 소수의 권력층에 의해 주도되는 소위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은 결코 민주주의 체제로 가지 못했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파시즘’ 체제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8. ‘민주주의’는 시민 모두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개념이 담겨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많은 국가들 중에는 소수의 특권 세력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으며 국민들의 실제적인 정치참여에는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가짜 민주주의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시키는 진정한 원동력은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얼마큼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투쟁이 있었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는가가 민주주의 체제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만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비슷한 형태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위로부터 주어진 개혁이라면 국민들의 권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허구적 형태가 되기 쉽다. ‘민주주의는 피로서 쟁취된다.’는 말의 뜻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실제적인 투쟁과 노력이 가미되지 않는다면 특정 집단의 권력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의 실질적인 요구를 법과 질서의 틀 안에서 요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교묘한 법에 의해 죄절되었을 경우에는 더 큰 가치적 개념을 통해 투쟁하는 것, 이러한 노력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과거의 역사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 민주주의의 발달이 인류 공동체가 살아 남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