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여승' 일엽 스님은 숨겨진 선승
일엽 스님(가운데 맨 뒷줄)이 법문을 하면 가톨릭 수녀와 원불교 교무들도 멀리서 찾아오곤 했다. 1966년 7월 수덕사에서 법문 후에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김일엽문화재단]
스캔들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숨겨진 선객(禪客)이었다. 주인공은 일엽(一葉·1896~1971) 스님.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910년대 일본 유학,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시대상에 맞선 자유연애, 수덕사 만공 스님을 만난 후의 출가와 수행.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당대의 여걸이다.
오죽하면 그를 모델로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까지 나왔을까.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이 노래 탓에 수덕사는 한동안 ‘비구니 사찰’로 오해를 받았다. 수덕사 사하촌에 ‘수덕사의 여승’ 노래비가 세워진 적도 있다. 사찰 앞에 어울리지 않다고 본 스님들이 없앴다고 한다. ‘일엽’은 늘 연예 뉴스의 초점이었다. 그 뒤에 숨겨진 ‘수도자 일엽’ ‘선객 일엽’은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일엽 스님의 4대 손자뻘 제자 경완 스님의 말이다. 그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하나씩 꺼냈다. 거기에는 날이 시퍼런 일엽의 구도심과 선(禪)적 안목이 깃들어 있었다.
경완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 스님이 30년간 입승(선방의 반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견성암은 국내 첫 비구니 선원이다. “일엽 스님은 앉아서 주무실 때가 많았다. 정확한 기간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잘 때도 눕지 않고 좌선함)를 하셨다고 한다.” 신여성 김일엽은 당대의 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춘원 이광수가 그에게 ‘일엽(一葉)’이란 필명을 지어줬다. 그런 일엽도 출가 후에는 펜을 꺾었다.
거의 3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내가 남과도 연결돼 있다. 그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이치를 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 여기에는 나와 세상이 함께 숨을 내쉬고, 함께 들이마시는 불이(不二)의 안목이 녹아 있다.
경완 스님은 숨은 일화를 또 꺼냈다. 해방 전, 북쪽에서 가장 유명한 선방이 금강산 마하연이었다. 일엽은 스승 만공 스님을 따라 그곳에 갔다. 만공은 근대의 대표적 선지식 경허의 맥을 잇는 선사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일엽에게 농을 던졌다. “밤새 어느 방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늦었나?” 일엽 스님은 태연하게 침묵으로 답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성(性)적인 농담으로 들린다. 좀 더 들여다보면 상대의 공부를 가름하는 선문답이다. ‘어디서 헤매다가 이제야 자신을 찾아왔나?’라는 물음에 ‘헤매던 그 자리와 내가 선 이 자리가 둘이 아니다.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다’는 답을 침묵으로 던진 셈이다.
만공 스님은 그런 일엽의 공부를 인가했다. 그리고 ‘도엽(道葉)’이란 법호를 내렸다. ‘세존의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 소식에’라는 일엽 스님의 게송이 있다.
출처 : 중앙일보
‘예 이제 같은 별이 새삼스레 밝았으랴.
밥상의 밥을 보고 밥인 줄 뉘 모르랴
다만 별빛의 꿈 돌려서 처음의 빛 얻음이라.’
일엽 스님은 꿈속의 밥, 꿈속의 별을 허물었더니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빛나는 밥과 별이 있더라고 노래했다.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였다면 그의 선사적 면모가 이토록 오래 숨겨져 있었을까. 말년에 건강이 악화됐다.
수덕사의 환희대란 암자에서 요양하다가 “나는 갈 때 대중처소에서 가고 싶다”며 평생 수행했던 견성암으로 옮겼다. ‘일엽 스님이 위독하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을 보며 스님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 가서 정진하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일엽 스님이 출가 후 30년 만에 썼던 책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됐다.
◆일엽 스님=1896년 평남 용강군 출생. 부친은 개신교 목사였다. 가족을 모두 잃고 17세에 혼자 남았다. 외할머니 뒷바라지로 이화전문 졸업. 1919년 일본 도쿄의 영화학교에서 유학했다. 귀국해 시인·수필가·평론가로 활동하다 1933년께 출가했다. 1971년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