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체육사(體育史)
영광체육의 역사는 대단하다. 일제시대에 체육을 통한 항일정신을 발산시켰으며 남승룡 선수 초청 마라톤대회와 영광축구단의 호남축구대회 우승 등으로 인근지역의 체육정신을 선도해 나갔다. 본지는 이달 말 종합체육센터 준공을 기점으로 영광체육의 부활을 모색하고자 영광체육의 과거를 뒤돌아보고 현재를 재조명하면서 미래를 창조키 위한 ‘영광체육사’를 연재 한다 <편집자주>
글싣는 순서
1. 영광체육의 발자취
2. 대회 개최 및 참가 활동
3. 엘리트체육과 과제
4. 종목별 체육활동 현황
5. 체육시설과 스포츠마케팅
우리나라의 체육...
우리 선조들의 체육은 무예적인 궁술, 검술, 기마술과 유희적인 공차기, 씨름, 널뛰기 등이 생활속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으로 인한 양반들의 소극적인 신체활동으로 설날이나 추석 등의 민속 명절과 1895년 갑오경장을 전후한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한 근대적 기반을 갖춘 사학들의 학교체육이 시작되면서 1896년 서울 동서문동밖 삼선평(현 삼선교부근)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운동회인 외국어학교의 화류회가 열렸다.
이후 학교 운동회가 여러 학교로 퍼지면서 육상경기 위주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학교 체육 과목으로 체조와 교련, 유희 등과 축구, 농구, 스케이팅이 채택되면서 1908년께 최초의 근대적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와 대한국민체육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된 1910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문화와 체육을 제한하는 무단통치로 체육활동이 성장을 멈추었으나, 1919년 3, 1 운동의 충격으로 인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 1920년 7월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지방의 체육 활동도 싹을 티우며 각종 체육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7년 전에 맥이 꿇긴 조선체육회를 재건하고 육상과 축구, 농구 등의 경기단체가 재건되거나 창립되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최초로 런던올림픽에 참가하였다.
70년대 들어 눈부신 경제 성장과 함께 정부는 국민체력 향상과 국위선양을 위한 방안으로 집중적 체육정책을 추진하면서 전국체육대회와 전국소년체육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한데 이어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2002 월드컵축구대회 개최 등으로 체육 선진국으로 도약하였다.
특히 88 올림픽이후 세계적 추세에 따른 사회체육의 일환으로 생활체육을 시작해 이제는 엘리트 체육과 맞먹는 체육단체로 성장하면서 국민건강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영광 체육의 출발점은?
영광지역의 체육은 조선시대 민속놀이 위주였으나 일제시대 학교에서 실시하는 체육교육과 서울 등지의 유학생들이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축구와 야구, 체조 등의 경기를 선보이면서 근대체육이 시초가 되었다.
특히 1925년 가을에 ‘재미하와이교포모국방문친선야구단’이 영광군청년회의 초청으로 지금의 영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영광야구단과 친선경기는 영광 최초의 국제대회로 보인다.
1933년 서울 유학생들이 덴마크 닐슨북 도수체조를 영광읍 도동리 진명사 앞마당에서 가르치면서 체육의 장점을 체험하고, 체육을 통한 군민 단합과 항일정신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1934년 4월 영광읍 교촌리 향교에서 영광군체육단(단장 위계후)을 창단했다.
영광군체육단은 이듬해인 35년 4월 15일에 영광과 장성, 고창, 정읍 4개시군 연합운동회를 제1회로 명명해 영광에서 최초로 개최한데 이어 3회째 개최했으며, 37년 4월에 개최한 시민운동회에서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와 함께 출전해 3위에 입상한 순천출신 남승룡 선수를 초청, 시범 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이렇게 체육단의 활동이 활발해 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이해 9월에 체육단 간부 4명을 구속하고 체육단을 해체시켰다.
그러나 체육활동의 필요성이 더욱 강해진 군민들은 1940년 2월 영광축구단을 결성, 호남축구대회 우승을 비롯해 전남도대회에서 3차례나 우승하였으며, 소년축구단도 조직해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으며, 호남축구대회를 영광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영광의 체육 발전과정
영광체육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그동안에 억눌렸던 기개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1946년 4월에는 호남축구대회를 개최해 전주와 남원, 군산, 이리, 임실과 영광 등 6개 팀이 참가하는 성대한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946년 영광군체육회가 발족되어 초대회장에 조영규씨가 선임되어 축구와 배구 종목을 성행시켰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체육활동이 52년 부활되면서 2대회장에 정헌조씨가 선임되어, 매년 군내축구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60년에 윤동중씨가 3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61년 5,16으로 인해 체육회가 해산되면서 민간인 체육회장을 마감했다.
4대부터 체육회장은 군수가 당연직으로 맡게 되어 김홍영 군수를 시작으로 강종만 군수까지 29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민간인은 상임부회장에 임명되면서 실질적인 체육회를 총괄운영 체제로 전환되어 김자현, 서용주, 조영표, 조영기, 김승우, 김광엽, 채성수, 정용재, 정현진씨 등 9명이 선임되어 체육발전에 앞장서 일했다.
군내체육대회는 77년 시작된 군민의 날 행사의 읍면대항 체육대회가 시작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1회 대회는 육상(100m, 400계주, 단축마라톤)과 축구, 씨름 등의 경기가 열렸으며 격년제로 2년마다 체육경기가 열리고 있다. 29회 대회인 2005년에는 육상과 축구, 배구, 씨름, 궁도, 탁구, 테니스, 배드민턴, 게이트볼, 줄다리기 등 10개 종목의 경기가 열렸다.
영광체육단 사건은?
일제는 1912년 당시 각 보통학교 대항전으로 개최해오던 연합운동회를 열지 모사도록 금지령을 내리자 1916년 3월에 위계후, 정인영, 김은환 씨 등이 주축이 되어 영광청년회를 창립하고 공차기, 달리기,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등의 소규모 군민운동회를 개최하여 항일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강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보통학교운동회 이외는 체육을 위한 집회와 활동이 중지되었다.
1933년 서울 유학생을 중심으로 도수체조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체육단체의 필요성을 공감해, 34년 4월 교촌리 향교 명륜당에서 영광체육단을 거군 적으로 창단했다.
영광군체육단이 인근 4개시군 연합운동회를 개최하고 남승룡 선수 초청마라톤대회 개최 등으로 활동이 활발해지고 항일사상이 고조되어가자 일제 경찰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37년 9월 16일 밤 지역지도층 인사 3백여 명을 검거해 투옥한 사건이 영광체육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위계후, 조운, 정태병, 이을호 씨 등이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본 기사 내용에 오류가 발견되면 연락 주십시오, 또한 영광체육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고자 합니다. 영광에서 이루어진 체육과 연관이 있는 내용에 대한 문건이나 사진이 있으시면 협조 부탁드립니다. 내용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데 자료가 없으시더라도 연락주시면 구두증언을 받겠습니다. 필히 연락 바랍니다
영광신문 061-353-0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