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정재춘의 전화를 받고, 88홈피에 그를 위한 축하연을 갖자는 글을 올리고부터 하루 종일 88홈피를 들락거리게 되었다.
전영배 목사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뭔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분으로 기억된다. 그런 그분의 열정이 배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원목사에게 감사한다. 특히 원목사에게는 그가 펴낸 "그저 무뤂만 꿇으소서" 을 소포로 받고 답례를 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이렇게 또한 덧붙여 좋은 글을 올려 주었으니 나같은 평신도를 위해 적당한 분량의 꼴을 멕여주는 그의 목양적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그래도 이번 30주년을 통해 들어오게 된 88홈피에 올려진 동문들의 글을 통해 도저히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것 같던 왕년의 악동들이 이젠 매주 예배에 잘 참석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펜젤러 목사님의 차선책으로서의 교육사업(문화선교)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도 전선생님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감한다. "오직 예수"라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우리들 학창 시절, 우리들의 선생님들에게서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배재정신의 근본은 어디에 있을까? 오늘 내 모교를 추억해 보면서 요사이 서울YMCA 내부 문제 때문에 YMCA 지역실무자로서 다시 오늘날 한국교회를, 기독교를 성찰하면서 함께 생각해 본다.
한국YMCA 최초의 YMCA인 배재학당YMCA(이승만, 윤치호 등등 지도력 배출)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배재에 대하여 좀더 깊이 사고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책임하게 툭 건드리는 그런 비판이 아니라 전 선생님과 같이 그런 고민과 열정이 배재의 앞날을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
솔직히 현재의 배재고등학교 교육에 대한 고덕동 사는 학부모들의 불만을 일축하지는 말 일이다. 이제 조만간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와 같은 귀족학교로 될 소지도 있는 것이 배재와 같은 전통명문 사립이다. 이곳 홈피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배재재단의 재정이 상당히 튼실하다는 것도 이런 장래를 예견케 해주는 것 같다.
한국 근대교육의 큰 기둥 배재를 다시 명문 중의 명문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 앞서 정말 필요한 것은 다시 한번 배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성령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내가 말을 하기 시작하니,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시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11:15-18)>
-끝-
培材가 한국의 Harvard가 될 것인데...
전영배 선생님의 편지
이 글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에 성경을 가르쳐 주셨던 전영배 선생님의 서신입니다.
전 선생님은 우리 배재 고등학교에서 성경과 Chapel 시간과 농촌봉사대와 Y.E.S club과 가훈 전시회등을 통해 배재 정신을 널리 고양시키려고 노력하셨고, 후에는 대전의 배재 대학에서 윤리와 신학을 가르치시다가 근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전 선생님은 자신의 젊은 날을 오로지 배재에서만 가르치고 봉직하시다 은퇴하셨으므로 현재는 배재대학교의 명예교수가 되어계십니다.
이 글의 추신 부분에 나오는 인물은 배재 출신으로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를 설립하신 초대 교장 고(姑) 길영의 선생을 지칭하는데, 전 선생님이 이분의 제자였답니다.
元聖雄 목사에게
정말 이번 미국 여행은 잘 하신 일로 감사할 일입니다.
다 때에 맞게 주시는 하느님의 계획된 恩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 다녀오라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듯 합니다. 나도 2여년 가까이 미국 체재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미국 여행에서나 구라파 여행에서, 경험은 경험이고 느낌이지만, 실상 거기서 직접 본 것은 단편적 지식이요 경험이지 實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 공부할 때 좀 어림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말은 美國에서 늘 사는 교포들도 그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Ruth Benedict 여사가 쓴 菊花와 칼 (The Chrysantheinum and Sword-Pattern of Japanese Culture Boston 1946)을 읽으면서 입니다. 女史가 日本에 가보지 않고 1944년에 미국무성의 요청으로 쓴 것입니다. 學問연구에서 그 對象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 하는 편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한 책이라 하겠습니다.
부분적 체험이 전체적 방법론을 망치기 쉽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여행자가 銘心해야 할 경구인 듯 합니다. “나무만 보고 山을 못 보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인 듯 합니다.
Chicago대학교 神學部에서는 東洋人에게 神學博士 學位를 주지 않는다는 말을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양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Hebrew思想을 터득할 수 없다는 그들의 오만도 있겠으나, 그것은 우리가 반성할 점인 듯 합니다. 동양인의 ‘Shame’의식이 기독교의 ‘Sin’의식을 갖기에는 우리의 역사적 체험이 옅은 듯 합니다. 내 자신이 그렇지요. 누가 보지 않으면 Sin을 짓는 Shame의식이 그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지난날의 삶이 그토록 부끄러우나 그것이 체질화 되었으니 어찌할 것입니까?
培材30年에 대한 Meditation의 결산이 그렇게 생각하게도 합니다. Appenzeller 선교사의 次善策으로서의 “敎育宣敎”는 “福音宣敎”를 잊게 했다는 내 생각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God first the first”를 잊은 비신앙심이 培材가 한국의 Harvard가 될 것인데 오늘로 固着되게 했다고 여기며 培材에서 30여년 은혜를 입고서도 Ambivalence한 감정이 가시지 않는 것도 그래서 입니다. “할 것 다 챙기고 여력이 있으면 福音이라”는 의식이 배재학당 운영 주체자들의 의식이었다는 단점은 제가「기독교 교육」과목을 가르칠 때 “Tabernacle”에 관한 강의에서였습니다. 培材大 神學部의 復活과 大學敎會 설립의 의미, 그 뿌리도 亦是 그 같은 理念에서 熱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카고에 계시는 이경희 목사님이 뒤늦게 告白했다는 전언은 培材人들이 지향해야 할 좌표를 보여 준 것이라 思料되는 것입니다.
이제 培材運營主體의 變化는 당시에 Appenzeller가 시도할 수 없었던 狀況이 준 次善策을 本意의 最善策으로 回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것을 願하실 것으로 미물 같은 저의 소견을 밝혀봅니다. 이야기가 번거로워졌습니다. 배재 88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2004. 1. 30 田英培
추신;
“Study without thought is in vain;
thought without study is dangerous”라는 공자의 말은 培材敎育에서도 참고할 교훈이라고 여겨집니다.
여기 培材가 낳은 良心敎育者의 이야기를 그의 20週忌를 맞아 쓴 글 읽어 주십사하고 한부 부끄러움 모르고 부칩니다. 그는 약관 19세 때 三一運動을 주도한 한 사람으로 6개월 실형을 살고 3년의 집행유예를 받아 배재 Appenzeller목사의 도움으로 진학(광도고사)하여 교사가 된 분, (창씨개명 거부) 仁中, 濟物浦高校 초대 교장으로 初有의 무시험 감독고사를 지금까지 실시하는 전통을 세운 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