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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aders of World Nations Prayers Federation
국가기도 세계지도자 기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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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령강림절 후 열네 번째 주일)
2018. 08. 26.
본문 : 마태복음 5장 3-12절
제목 : “온유한 사람의 복” (Blessed are the meek)
설교 : 윤 사무엘 목사
◇ 주제 : 모세처럼, 우리 주님처럼 온유한 자가 되어 주님의 뜻에 순종하자.
◇ 교독 : 11번 (시17편), 예배의 부름 (롬 11:33-36)
◇ 찬송 : 452장(통505장), 427장(통516장)
● 성경요절 (마 5: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개역한글)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KJV)
● 설교말씀
오늘은 산상보훈(山上寶訓)에 나오는 팔복(八福, the Beatitudes 중 세 번째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마 5:5) 말씀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여기서 온유(溫柔)란 단어는 헬라어로 '프라우스 (πραυς, praus)' 인데 통제된 능력으로서, 이 말은 난폭한 야생마가 훈련과 연단을 통해 주인이 쓰기에 잘 준비된 말(駿馬)로 변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미국 서부지방을 개척할 때 들에서 자라던 야생마를 훈련시켜 준마(駿馬)로 만드는데 요즘도 텍사스주에 가면 로데오 (Rodeo) 게임이 바로 이를 재현하는 것이랍니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의 사람이 말씀으로 부드러워져 (soft and gentle, yielding, given to forbearance under injuries) 순종의 사람이 된 상태를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할 수 없는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녹아져 내려 (melting down) 구원을 받고 의인의 반열에 들어선 사람을 ‘온유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뜻과 교만을 내리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submissive to the Divine will) 사람이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이런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약속의 땅’을 말합니다. 시편 37:11에 있는 대로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和平)으로 즐기리로다”고 말씀하신 대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풍성한 축복을 받아 평화 속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 5장 22절에 보니 성령의 열매 중 '온유'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앞서 살핀 두 가지 복 있는 사람과 다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한 자이며, 애통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강포(强暴)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세상을 정복할 것임이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정복하면 반드시 실패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최후 여생을 보낼 때에 ‘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그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나사렛에 자란 청년 예수는 오직 사랑으로 세계만민을 정복하였다’고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칼이 아니라 온유가 세상을 정복합니다.
먼저 '온유한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온유하신 삶을 모범으로 보이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Learn of me, for I am meek and lowly in heart and ye shall find rest to your souls. 마 11:29)
주님의 온유를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면서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의 온유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이사야 42장 3절에 있는 대로 주님의 모습은 상한 갈대로 꺼져가는 등불의 모습이지만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주님의 온유하신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또한 메시야 예언을 한 말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소나 염소는 도살장으로 끌려 갈 때 반항하고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양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털 깎고 있는 양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때로 털 깎는 기계가 양의 등살에 상처를 입히어 피가 나도 잠잠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요 1:29)고 하지 아니했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2-25절에 보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온유라는 단어와 겸손이란 단어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겸손한 모습이 바로 온유한 모습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3-45)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주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병환자를 찾아가셔서 손에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실 때의 주님의 눈은 부드럽고 인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손에 앉으시고 축복하시는 모습도 온유하신 모습입니다. 삭개오의 집을 심방하시며,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 받으시고,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순종합니다. 자기 고집을 피우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순종합니다. 감람산 겟세마네(감람원) 동산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시지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반항하지도 않고 오직 참고 인내하며 범사에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시고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13)고 시험 합격을 선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의 약속, 자식의 약속, 축복의 약속을 실현하셨고, 독자 이삭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의 모습을 보일 때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구스(에디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으나 모세는 일체 대꾸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들이 비난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Now the man Moses was very meek, above all the men which were upon the face of the earth.”(민 12:3)고 했습니다.
모세도 처음부터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을 때 다섯 번씩이나 이집트로 가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일을 사양을 했습니다. 이런 야생마같은 모세가 열가지 재앙, 출애굽의 기적, 마라의 기적, 르비딤에서 승리,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 말씀대로 성막을 제작, 하나님께 예배드림 등의 훈련과 연단을 통해 그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온유하지 못한 자를 철저하게 깨뜨리고 많은 기적과 이적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십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세례를 받고 아라비아 광야에 3년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한 후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쓰시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천국은 '온유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을 쓰시며 그를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시고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나아가서 천국은 '온유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온유란 따스하고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럽습니까? 온유란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명랑한 달이 비추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밝히 비춥니다. 아집, 고집, 선입주견, 독선으로 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바로 비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의 특색은 온유입니다. 마음이 온유해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고 또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맡기십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같은 눈으로 보아도 날카롭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냉안시 혹은 백안시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민망히 보셨다고 했습니다(요 11:33). 대중을 볼 때에도 온유한 눈이 있고 냉혹한 눈초리가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노를 그치게 한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잠 15:1). 사랑이 담긴 음성은 언제나 부드럽고 친절합니다.
온유는 결코 약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유능제강 약능승강’(柔能制剛 弱能勝强) 이란 말이 있는데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생물계를 살펴보면 강대하고 포악한 짐승들은 이미 멸종이 되었거나 또는 그 수가 점점 줄어갑니다. 반면에 양이나 소같은 온유한 짐승들은 날로 그 수가 증가해 갑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대로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갚습니다(롬 12:17-21). 자기를 핍박하는 자에게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라(롬 12:14)는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음은 우리가 성령님안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기 전에는 우리 마음의 밭이 길가처럼, 돌짝밭처럼, 가시덤불처럼 흉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을 먹고 자라며 성령님의 기름 부음의 역사로 우리 마음밭이 옥토로 변하여 마음의 여유가 생기며 부드럽고 따뜻해집니다. 이런 마음으로 전도하고 봉사해야 상대방도 변화가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지 않습니까? 하루는 바람과 햇빛이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저 지상에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고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모자를 벗길 수 있는지? 그 외투를 벗길 수 있는지? 내기를 시작했습니다. 바람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내가 벗길 수 있다고 바람을 갑자기 일으키니 그 사람은 가다가 ‘이거 바람이 부네’ 하고 모자를 꽉 내려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도 센 바람을 일으키니 외투 단추 세 개를 채웁니다. 할 수 없이 바람은 강풍을 내려보냈더니 이번에는 단추도 다 잠그고 한 손으로 모자를 꽉 눌러 쓰더랍니다. 이번에는 햇빛 차례입니다. 햇님이 방긋거리며 비치기 시작하니 그 신사가 ‘이거 더워지는군’하며 모자를 벗고 가더랍니다. 좀더 세게 비치니 ‘오늘은 외투가 쓸데 없구나’하고 외투를 벗더랍니다. 그래서 햇빛이 이겼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강한 속에서 부드러움, 안아줌, 품어줌이 중요합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것이 크고 강한 바람도 아니었고, 지진도 아니었고, 큰 불도 아니었습니다. 세미한 음성이 그의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그는 온유한 사람이 되어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목사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이 목사님은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 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 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 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이 노인은 온유해진 나환자 자녀로 부터 따뜻한 사랑을 발견하였고, 그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국세지 기도용사 여러분! 모두 다 '온유한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완악하고 불순종하고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위로하고 훈훈한 예수님의 햇빛을 비추어 그들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말씀의 씨앗을 부지런히 심으면 그 옥토밭에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서 우리는 주 안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의 기도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기 원합니다. 아직 야생마 기질이 많은 저를 순종의 온유로 훈련시켜 주셔서 주님의 준마(駿馬)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אמן !
국세지 (국가기도 세계지도자 기도연맹)
한국 국가기도운동
감람원교회 윤 사무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