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빵 냄새로 에워싸인 집안은 오후의 느긋함과 물려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며칠 전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여고 선배가 코비드 진단을 받았다. 최소 10일간 집 밖을 나올 수 없게 되어 오래 전 잡힌 여고 동창 모임이 취소되었다. 그는 평소 내가 힘들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준 고마운 선배이다. 이번 기회에 자그마하게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 몸보신이 될 만한 삼계탕 두 팩을 한국 식품점에서 사 왔다. 요리라고 내세울 게 없는 내 입장에서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라곤 레시피대로 따라 하면 어김없는 결과물이 나오는 베이킹뿐이다. 개중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옥수수빵이라도 만들어 곁들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재료를 준비했다. 오븐을 예열하는 동안 잽싸게 빵 반죽을 서둘렀다.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가져다주면 따끈한 옥수수빵과 차를 곁들여 선배가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화씨 350도까지 오븐 온도를 올리는데 예열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빵틀에 반죽을 담고 기다리는 데 아직도 예열 중이었다. 마침내 예열이 끝나 베이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클락과 영의 교차로에 위치한 우리 집은, 오가는 지인들이 들르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코비드가 끝나면 마음 맞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우리 집에 수시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걸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람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기 전 예열 시간이 꽤 필요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초대하면 집부터 청소해야 하고 대접할 음식도 충분히 마련해 두어야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가끔 지인이 예고 없이 찾아올 경우, 집이 엉망이거나 먹을 게 아무것도 없으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남편은 사람들이 근처에 온 김에 우리가 보고 싶어서 들르는 것인데,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지 않냐고 하면서 나의 이런 강박을 안타깝게 여긴다. 항상 청결한 집안을 유지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먹거리도 준비되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는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려는 배려심도 있겠지만 타인에게 나를 품위 있게 유지하려는 욕구가 강해서가 아닌가 싶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과 나눈 대화 시간이고, 어느 것도 그 시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시험 전에도 그랬다. 공부를 하기 위해 무작정 책상 앞에 앉아 바로 시작하지 못했다. 시험 직전까지 어떤 과목부터 먼저 할 것인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할 것인지 전체 계획부터 세워야 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 주변 정리를 하고 책상을 최적의 환경으로 말끔히 구비해야 했다.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다 보니 막상 책을 펼쳐 들고 공부를 시작할 때는 에너지가 바닥이 났다.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며 가벼운 책도 읽고 멍하니 앉아 공상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정작 본 공부를 하기도 전에 지쳐 잠이 들곤 한 적이 많았다. 예열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 때문에 어느 시험이고 만족할 만큼 공부하고 치렀던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런 습관을 고치기는커녕 내가 단지 끈기가 부족하여 열심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가정주부로 지내다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으로 당선되어 등단한 것은, 많은 작가 지망생에게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은근히 품고 살았으니 말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습작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박완서 작가처럼 소설 한 편이 뚝딱 나올 걸로 착각하고 보낸 예열 시간이 자그마치 몇 년이던가. 하지만 수필로 간신히 등단하여, 한 달에 한 편 쓰는 데도 헉헉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라 한계가 있다고 불평하며 기필코 소설을 쓰겠다고 작심한 세월 또한 몇 년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비대면 모임으로 문인들을 만나다 보니 공연히 문학에 대한 열정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변명까지 덧붙이곤 한다. 여전히 예열 중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예열 시간... 어떤 작업을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다. 빵을 보기 좋고 맛있게 만들기 위해 오븐의 예열 시간이 필요하듯 무슨 일을 할 때 대부분 요구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과정이, 시간 운용 능력이 서툰 탓이었는지 게으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능력 부족이었는지 일상생활에서 순기능을 한 적이 제대로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가 어떤 일을 행하는데 적절한 예열 시간인지 아직도 가늠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도 알고 싶지 않은 능력의 한계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이처럼 예열 시간을 늘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빵이 다 구워졌다는 소리가 울린다. 오븐 기계가 요구하는 예열 시간을 충족시키고 난 뒤 베이킹을 했으니 분명 맛있는 옥수수빵이 만들어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