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http://cafe.daum.net/cgsbong/21mg/6944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담임목사 김종웅
전능자 하나님 본문 : 욥기 - 42:1-6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신명이나 도깨비가 아니라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서 성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사도신경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중 전능자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전능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호칭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호칭이 나오지요. 엘로힘(Elohim), 여호와, 엘 샤다이(El Shaddai), 엘 엘리온(El Elyon) 등이 그것인데, 그 중 전능자 하나님을 뜻하는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총괄해서 요약한 호칭입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 즉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어디에나 계시며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이런 모든 의미를 내포한 호칭이 엘 샤다이인 것이지요.
1. 돌의 역설과 여러 가지 질문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특히 그런데, 모든 학문이 그렇듯 철학도 올바로 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지만, 그릇되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 중에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더러는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지요. 돌의 역설이란 “하나님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다면, 들 수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이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들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궤변이지요.
2. 대답들 사람들은 왜 이런 생각들을 할까요?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질문들은 구태여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만 그런 질문을 많이 하던 시절에는 그것들에 대해 전문으로 대답하는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나 본성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으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것 같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은 본성에 위배되는 일들은 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하고 실족하기도 하지요.“하나님은 수영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이 수영을 하지 못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수영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력이라는 과학의 법칙에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본성은 초월자이기 때문에 수영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3.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사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생각은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해봤을 겁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신데 왜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가?” 주로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공격할 때 던지는 질문이지만, 교인 중에서도 이런 문제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았을까, 몰랐을까?”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아셨을 텐데 왜 그것을 만들어 놓았느냐는 것이죠. 선악과만 만들지 않았다면 타락하고 구원하는 복잡한 일들을 안 해도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모두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성도가 그런 의문을 제기하면 믿음이 없어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며 회피하지요. 그래서 우리 속에 많은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예의상 다 아는 것처럼 어물쩡 넘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지 못하는 것이에요.
4.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독재자와 같은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옛날 절대 군주들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절대 군주일지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선한 왕이라 하지 않고 악한 왕이라 했잖아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절대 군주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악한 왕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말 한 마디로 법을 만들고 말 한 마디로 법을 깨뜨릴 권세를 지닌 절대 군주라 할지라도 그 힘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백성들을 위하여 그 힘을 제한하고 법을 지켜 나가는 왕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왕을 성군(聖君)이라고 부르지요. 전능자 하나님을 독재자와 같이 생각해서 우리의 신앙이 실족되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잘못된 전제 또 우리를 많이 실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한탄입니다. 이런 우(憂)를 범하지 않으려면, 설교자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해야 하고 교인들은 간증보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보기 때문이고, 간증은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화해서 말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것이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는, 설교자나 간증자가 오로지 자기 관점으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보면서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증이나 설교를 들어 보면 성경의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의 편을 들어 주는 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은 교인들은 ‘나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잘해 드렸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고 실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그런 생각에는 유대교의 영향도 큽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유대인의 편을 들어 주는 분으로 해석합니다. 이를 선민사상(選民思想)이라고 하는데, 기독교 안에도 이런 생각들이 많습니다. 특히 20세기 말에 번영신학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런 오해가 많아졌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간증에서도 하나님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편을 들어 주는 분으로 곧잘 이야기하지요. 내 편을 들어 주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포기되지 않으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사가 사형선고를 내려도 대통령이 사면해 주면 살아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어도 대통령이 특별 사면만 하면 다 풀려나지요. 대통령은 여러분을 하루아침에 재벌로 만들어 줄 수도 있고, 재벌을 하루아침에 거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큰 권력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힘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사용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불리하도록 사용한다면 우리가 그런 대통령을 존경할 수 있을까요? 자기와 동문이라고 장관 자리를 내 주고 사업권을 내 주는 대통령이라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것이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잘못된 대통령이나 폭군 같은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전지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 화를 파괴적인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상담학에서 어떤 양육 태도가 가장 문제가 되는지 아세요? 바로 이중 메시지를 주는 태도라고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자기 기분에 따라 이럴 땐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럴 땐 저렇게 이야기하면 아이는 헷갈리게 되고 불안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는 늘 같은 기준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잖아요. 우리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능력을 행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6. 하나님은 만능 로봇이 아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독재자도 아니지만, 비인격적인 법칙이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도 아니십니다. 우리 교회에 정재훈 씨라는 프로골퍼가 있어요. 요즘 성적이 안 나와서 인상이 약간 어두운 것 같은데, 골프의 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정재훈 씨가 하나님께 골프를 가르쳐 드린다고 필드에 같이 나갔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 “티샷은 드라이브로 힘껏 치시면 아마추어는 약 230-240야드 나가고, 프로는 270-280야드 정도 나갑니다. 그리고 아이언을 잡으세요. 7번쯤 잡아서 치면 150-160야드 정도 나갈 겁니다. 그러면 그린에 투 온 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깃대 근처에 붙여서 투 퍼터를 하면 파(par)가 됩니다.” 이러면서 골프를 가르쳐 드렸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야 이놈아! 한 번에 집어넣으면 될 걸, 왜 이리 여러 번으로 나눠서 넣으라고 하느냐?!” 하고 호통을 치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골프공을 칠 때마다 홀인원을 하면 골프가 재미있을까요, 없을까요? 재미없겠지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야구나 모든 게임이나 우리의 인생이 재미가 있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만 되지 않기 때문 아닌가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녀를 이와 같이 양육해서 그들에게서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삶을 모두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듯이 하나님에게도 그런 착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 주는 것이 능력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아닙니다.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가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 참된 자식 사랑이지요.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니까 자녀의 인생에 낙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결혼할 때 집 사 주고 살림 다 갖추어 주니까 결혼 생활이 밋밋해지는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옛날 사람들처럼 아끼고 모아서 자기 힘으로 냉장고 하나를 장만했을 때의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물론 이전과는 많이 변한 이 시대에 예전 방식만 고집하면 곤란하겠지만 기본적인 생각의 변화는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함을 마구 휘두르는 그런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것은 간증이 잘못되고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독재자 같이 생각하거나, 원리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기계나 로봇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7. 성경에 나타난 전능자 하나님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인 성경을 읽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그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입니다. 유대인들만 사랑해서 특별히 구원하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성품은 ‘창조’와 ‘구원’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이런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성경적 심리학, 성경적 상담학, 성경적 경영학, 성경적… 이런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우리를 구원하신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8. 창조에 나타난 전능자 하나님 “하나님” 하면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과 우리 인생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연상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런 하나님을 보셔야 됩니다. 설교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요? 예로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선친은 생전에 자식들을 향해 “두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책 한 권 읽은 사람”인데 조금 알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 반드시 다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편협한 사고에 대한 경계를 그런 식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지요. 한동대학교 총장으로 계시는 김영길 박사는 원래 불신자였습니다. 그분의 형님은 김호길 박사로 포항공대 총장을 지냈고, 안동에서는 수재로 아주 유명한 가문입니다. 김영길 박사가 미국 나사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온 우주만물을 연구하다 보니까 결국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이었다고 합니다. 과학은 제대로 공부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께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요. 옛날에 소련 우주인이 최초로 달나라에 가서 뭐라고 했습니까? 태양계 천억 개가 모여 은하계가 되고, 은하계 천억 개가 모여 우주가 된다는데, 겨우 달나라에 가서 보고는 “내가 하늘에 갔더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참 웃기는 일 아닙니까?
9. 구원에 나타난 전능자 하나님 지난 심야 기도회에서 보았던 김우현 감독의 영화 기억나시죠? 뇌성마비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인데, 예수를 알기 전 희망이 없던 때의 모습과 예수를 영접하고 난 뒤의 변화된 모습을 담은 것이지요. 그 영화를 보면 뇌성마비인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너무나 기쁘고 당당하게 말하잖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인생을 비관하고 원망하며 살던 사람이 여전히 인생의 객관적인 환경은 변한 것이 없지만 구원을 받고 보니 자신의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것이 보여야 됩니다. “하나님 잘 믿었더니 복을 주시더라. 잘 믿지 않았더니 벌을 주시더라.” 이러한 기복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에서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지혜가 보여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야 합니다. 한국에도 어거스틴과 같은 훌륭한 신학자가 나온다면 참 좋겠습니다.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렇게 설명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죄가 전혀 없이 완전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는데 사탄이 온전한 인간을 망가뜨려 죄인이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었는데 사탄이 망가뜨릴 인간이라면 하나님은 불완전하지 않느냐는 의심 말이지요. 하지만 어거스틴은 그렇게 망가진 인간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표현인 예수님을 통하여 사탄에 의해 망가진 인간을 회복시키셨고, 그 인간은 원래의 아담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이지요. 아담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보면서 어거스틴처럼 이런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탄에 의해서 인간이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망가진 인간을 회복시키셨고, 성령을 통하여 아담보다 더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아니할 능력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에 따르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몸이 새롭게 변화되는 재창조가 일어나는데, 그때 우리는 죄를 지을 능력이 전혀 없는, 오로지 의만 행하는 인간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사탄에 의하여 죄인이 된 인간의 모습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차원을 넘어 더 완벽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서 이런 하나님이 보여야 됩니다.
10. 욥기에 나타난 전능자 하나님 오늘의 본문인 욥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 옛날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지식이 백지가 되어야 은혜가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적 전제를 없애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의 주제를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고난을 오래 참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두 배의 복을 주셨다는 것이 욥기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세상의 상대적 진리와 다를 게 무엇인가요? 욥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욥이지요. 그런 욥을 두고 사탄이 하나님께 뭐라고 하나요? “하나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은 선한 사람이었고 말썽부리는 자녀도 없었습니다.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제지간에 우애하고 화목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냐는 것이죠. 그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뭐라고 하시죠? 그의 모든 ‘까닭’을 거두어 가되 생명은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욥의 자녀들은 죽고, 아내도 떠나고, 재산도 모두 날아가고, 심지어 그의 몸은 병이 듭니다. 다른 병은 아프면 죽어버리면 끝인데 피부병은 죽지도 않고 고통을 줄 뿐입니다. 욥이 재 가운데에서 기왓장으로 자기의 몸을 긁어도 시원하지 않은 그런 극한적인 상황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뭐라고 하지요? 욥이 당하는 환난은 그가 남들 모르게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그런 주장은 당시 사람들의 신학과 경험과 사회 통념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욥은 더욱 죽을 지경이 됩니다. 가뜩이나 힘든데 친구들까지 그의 죄 때문이라며 그를 탓하니까요. ”나도 남들을 향해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줄은 모르겠다. 나의 억울함을 누가 하나님께 아뢰어 달라.” 욥은 이렇게 항변하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욥은 고난 이후 더 의로운 모습으로 변합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서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이제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홀로 영광을 받으실 분”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승리가 있어야 됩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옷을 사 주고 학교에 보내 주어서 효도를 한다면 시험을 통과하기 전의 욥과 같은 것입니다. 철이 들면 “부모님은 부모님이기 때문에” 효도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적인 싸움이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은 “나의 목사님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사람이 진짜 교인 입니다.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는 “내가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에” 최고로 여기는 것이 진짜 교회 사랑이지요. 제가 여러분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집사님은 ~했기 때문에 사랑해.” 한다면 그건 까닭이 있는 사랑이지요. 그저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의 집사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에요. 사탄과 하나님의 싸움에서 욥의 경건과 의가 더 확실히 드러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탄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이렇게 욥의 구원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11.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나타난 전능자 하나님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고난을 물리치고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병이 치유되고 부자가 된다는 주장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 역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탄은 예수를 없애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으려고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헤롯을 통하여 구원의 싹을 자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0년 후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려고 하시자 사탄이 다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실 때 사탄이 나타나 세 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하지요. 그런데 이 시험은 우리가 당하는 그런 시험이 아니라 구원사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도 그러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탄의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사역의 중간에 사탄이 다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적(sign)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신 뒤,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의 구원 역시 “예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할 때에, 영접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탄의 유혹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그것을 알게 한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를 갖춘 말로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을 꾸짖는 표현입니다. “메시아가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하는 정도의 어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십니다. 사탄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도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리스도냐?”라며 인간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지 말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으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소멸해 버리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그에 대한 확실한 표적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지요.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하여 확실한 표적을 보이시자, 사탄의 세력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 거짓말한다는 말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믿겠습니까? 부활은 우리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시체를 훔쳐가고 거짓말을 한다는 주장이 더 믿을 만할 겁니다. 역시 완벽한 사탄의 승리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하나님의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뒤 그 증인이 되었고,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삶이 바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세상의 지혜로운 것보다 더 지혜롭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세상의 지혜를 파한다.”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완벽한 사탄의 책략을 세상 사람들의 눈에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파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여러분이 깨달으셔야 합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원의 역설을 통하여 역사 속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12. 약속에 대한 전능자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독재자의 전능함도 아니고, 잘 보이는 사람의 편을 들어 주는 편애의 전능함도 아니며, 도깨비 방망이나 로봇처럼 모든 일을 뚝딱 해내는 전능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바로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능력입니다. 자신의 모든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는 능력의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지요.
1) <재림 약속에 대한 보증>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역사에서 성취되었나요?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지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예수님과 시간과 공간적으로 함께 있었던 사람들만 그분의 보호를 받았지만, 이제 영으로 오신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에 편재하시며 교회 안에 거하시면서 모든 이들과 언제나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믿게 되는 건가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재림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구원의 보증이라고 하지요.
2) <심판 약속에 대한 보증>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최후 심판은, 주후 70년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철저히 파괴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심판을 보면서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 재림과 함께 있을 것임을 믿게 되지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것은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성품인데,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많은 약속을 하지만 그것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 전능하지도 못하고 전지하지도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한 것이지요.
13. 전능자 하나님을 알게 되면
l) <찬양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런 찬양을 할 때도 감격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순간의 감정일 뿐 의지적인 결단을 일으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창조와 구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고 그분께 완전히 굴복하면, 예배적인 찬양이 넘쳐나서 하늘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3-4절을 보세요. 이제까지 욥은 얼마나 많은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하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아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욥의 깨달음입니다. 이제까지 이치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말을 했고, 깨닫지도 못한 일을 가지고 말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들을 말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찬미의 마음이지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우리 입술에서 나오게 되는 말은 딱 한 마디입니다.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헤아리지도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늘어놓으면 여러분의 인생이 안개 속만 허우적거리게 되고, 교회생활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하나님 혹은 야구할 때마다 홈런을 빵빵 치게 해 주는 만능의 하나님을 기대하지 말고, 완벽한 창조와 구원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분 앞에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약속 하신 구원의 축복을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면서 찬양과 기쁨이 넘쳐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