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전복구이>
전복만 하는 곳은 처음인 거 같다. 심지어 해안가에 가도 전복만이 아닌 여러 해물을 같이 취급하는데 내륙에서 전복만 하는 전문점이어서 눈길을 끈다. 전복장과 전복죽 등 전복요리만을 취급하는데,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므로 순수하게 전복을 먹고 오는 기분이다. 집에서 손질하기 쉽지 않은데, 구이도 해주고 죽도 해주면서 집에서 먹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가격이다. 편하게 전복을 실컷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딱 적당한 집이다.
1 식당 얼개
상호 : 서민전복구이/ 서민수산
주소 : 군포시 군포로735번길 16
전화 : 031-391-0999
주요음식 : 전복
2.먹은날 : 2021.10.29.저녁
먹은음식 : 전복구이 작은판 27,000원(2인 가능), 전복죽 7,000원(2인 가능)
3. 맛보기
전복을 그대로 굽는 것은 아니고, 살짝 간장 양념에 졸이는 느낌이다. 요리를 한 것이므로 전복이 껍질에 붙어 있지 않고 모두 담겨 있기만 해서 먹기가 편하다. 실제로 현장에서 굽는 것도 아니고 요리된 것을 후라이팬에 담아 가져다 줄 뿐이다. 하지만 전복 살도 쫄깃하고 탱탱하여 신선도는 그만이다. 집에서 전복 손질에 씻어내기가 쉽지 않은데, 깔끔하게 손질한 것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전복죽. 전복라면이 더 끌렸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정통음식 전복죽을 주문했다. 정말 향토적인 맛이다. 전복도 많이 들어 있고, 내장을 넉넉하게 넣어 향과 맛이 전복을 온통 담고 있다. 전복을 먹은 끝이라 전복 궁기가 빠져서, 자칫 죽의 진가를 놓칠 것이 염려될 뿐이다.
찹쌀이 아닌 멥쌀죽이다. 찰기는 없으나 대신 향토적인 맛이 느껴진다. 그 자리서 먹을 때는 찹쌀 아닌 죽이 더 죽다운 느낌이다. 퍼지지는 않아서 멥살전복죽의 맛을 제대로 느낀다. 아쉬운 것은 죽이 약간 식은 거. 이 값에 바로바로 꿇여내지는 못하나보다.
3. 먹은 후
1) 금정역 먹자골목
금정역 먹자골목 안에는 수많은 식당이 있다. 특히 이런 먹자골목에서는 전문화가 경쟁력을 갖는 거 같다. 작은 식당이지만 손님이 가득, 자리가 없다. 신선한 재료로 최대한 재료맛을 살리면서 많은 양을 제공하는, 간단한 방식이 영업 비결이다. 박리다매에 재료의 신선성과 간단한 조리법을 더해 경쟁력을 확보했다. 영업이 안 될 이유가 없는 거 같다. 정공법의 소박한 영업 자세에 응원을 보낸다.
영업시간을 보니 밤 1시까지이다. 주로 식사보다 술안주로 먹는 것이다. 맥주보다 소주가 더 적합한 거 같다. 대부분 손님들이 소주잔과 함께 하고 있다. 소주의 진한 맛과 전복의 우아한 맛의 거리가 더 매력이다. 전복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생활의 여유, 대한민국 삶의 현장 여기까지 왔다.
2) 전복을 잡아 진상하던 제주의 해남(海男) 포작인
전복은 완도에서 전국 생산량의 80%가 나온다. 완도에 가서 먹은 거보다 더 푸지게 먹은 거 같다. 생산량이 넘치는 완도에서는 다양한 전복식품을 개발한다. 전복요리를 새로 개발하려 애쓰고, 전복을 이용한 다른 음식도 개발하고자 한다. 장보고빵은 전복을 통째로 넣어 구운 빵이다.
여기서는 전복을 통으로 굽고 고전적인 전복죽을 끓인다. 물론 내장을 잊지 않고 잔뜩 넣어서 말이다. 바야흐로 전복의 시대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런 상은 옛날 나랏님도 받기 어려운 상이었을 거다. 물론 생전복을 운반하기 어려워서 그렇겠지만, 전복을 누구도 이렇게 흔하게 먹을 수가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조에는 2년(1778) 5월 29일
“제주(濟州)에서 회복(灰鰒)을 진상하는 문제는 전복을 잡는 자의 폐해가 아주 심하다. 이와 같은 진상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영구히 제감(除減)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홍국영이 아뢰기를,
“만약 이 폐해를 제거한다면 제주의 전복을 잡는 백성이 지탱하여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조 4년 11월 29일
“그대가 해읍(海邑)을 맡았을 때 전복(全鰒)을 따는 일을 보았는가? 그 일이 매우 고생스럽다는데 그런가?”
하니, 유의양이 아뢰기를,
“선왕조께서 일찍이 ‘누가 접시에 담긴 전복이 한점 한점 어민의 신고(辛苦)임을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복을 따는 때에 보니, 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민폐도 많았습니다.”
실록에는 제주도의 전복 진상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그 노고를 염려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전복이 한점 한점 어민의 신고(辛苦)라 이해하였고, 정조는 드디어 영구히 제감(除減)하도록 하였지만, 진상을 폐한 것은 아니다. 제감은 진상 분량을 줄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전복은 제주에서 많이 잡았다. 전복을 잡는 것은 대대로 남성의 일이었다. 이런 남성을 포작인(鮑作人)이라고 했는데, 포인(鮑人), 포작(鮑作), 포작한(鮑作漢),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汗)이라고도 일컬었다. 제주말로는 ‘보재기’라고 했다. 포작인은 해산물 채취를 하는 남자인데, 어포(魚鮑)를 떠서 말리는 일도 했다. ‘포작인(鮑作人)’이라는 말은 어포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해산물 중에서도 주로 전복을 잡아 진상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진상품을 싣고 뱃길을 운반하는 역할도 했다.
포작인은 말하자면 해녀의 대응어 해남인 셈이다. 전복은 수심 20미터 이상 들어가 따야 해서 해녀 아닌 해남, 포작인의 일이 되었다. 조선조 당시 잠녀라 불렸던 해녀는 미역 채취 등 비교적 용이한 일을 했다. 전복은 따는 일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모두 수탈당해야 해서 몸도 마음도 견디기 어려웠다. 전복 채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도망뿐이어서 야반도주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상소문에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해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해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란 목자(牧者)보다 10배나 됩니다. (중략)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포작인에게는 시집도 오려 하지 않아, 홀아비로 비참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 인조 7년인 1629년에는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려 200년 동안 풀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 인간의 권리인 이동권을 제한하는 통제정책을 편 것이다. 제주에서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반기지 않았다. 포작인은 과도한 노역으로 도망가거나 익사하거나 하여 열에 두셋밖에 남지 않았다 한다. 보통 이것이 제주에 여자가 많은 중요한 원인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 조에는
“포작인(鮑作人)들이 제주에서 와서 전라도ㆍ경상도 두 도의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데, 몰래 도둑질을 하니 그 조짐이 염려스러우나, 다만 현재 드러난 죄상(罪狀)이 없으므로 죄를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또 비록 본토(本土)로 쇄환(刷還)시키고자 하나 반드시 생업(生業)에 안주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이어 성종 16년 조에는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前日)에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을 두루 살펴보니, 포작간(鮑作干)이 해변(海邊)에 장막[幕]을 치고 일정한 거처(居處)가 없이 선상(船上)에 기생(寄生)하고 있는데, 사람됨이 날래고 사나우며 그 배가 가볍고 빠르기가 비할 데 없어서, 비록 폭풍(暴風)과 사나운 파도(波濤)라 하여도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려함이 없으며, 왜적(倭賊)이 이를 만나도 도리어 두려워하고 피해서 달아납니다. 신이 그 배 가운데를 보니, 큰 돌[石]이 수십 개 있으므로, 신이 쓸 데를 물어보았는데, 대답하기를, ‘왜선(倭船)을 만났을 때 이 돌을 사용하여 던져서 치면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연해의 여러 고을에서 봉진(封進)하는 해산(海産)의 진품(珍品)은 모두 포작인(鮑作人)이 채취(採取)하는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포작인이 이따금 상선(商船)을 겁탈(劫奪)하고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며 살해하는데, 간혹 사람이 쫓아가는 바가 있으면 왜인의 신발[倭鞋]을 버리고 가서 마치 왜인이 그런 것처럼 한다 합니다. 이것은 포작간에게도 해로움이 있으니, 청컨대 연해 여러 고을로 하여금 소재(所在)해 있는 곳에 따라서 곡진(曲盡)하게 무휼(撫恤)을 더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작인은 거처(居處)가 일정함이 없고 성품이 흉한(凶悍)하니, 이심(離心)하게 하여서는 안된다. 마땅히 존휼(存恤)을 더하라.”
하였다.
포작인은 도망쳐 경남 전남 연안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는데, 배를 의지해서 보트피플로 살며 흉포하여 왜적도 두려워했다고 했다. 이런 그들을 육지에서는 한라산의 다른 이름인 두무악(頭無岳)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먼저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만든 사회문제를 따져 보는 것이 순서이다. 다행히 슬기로운 임금은 말했다. 이심(離心)하지 않도록 존휼(存恤)을 더하라. 마음이 떠나 배반하지 않도록 위로하고 구휼하라. 실제로 이들이 왜적의 앞잡이까지 하였다고도 한다.
지독하게 험한 일을 한 덕분에 더 험한 곤경에 처해 생사의 위기에 놓인 채 연안을 떠돌았던 포작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보재기의 애환을 오늘날 포시랍게 양식 전복을 거의 식사 대용으로 삼을 수 있는 우리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포작인이 채취하지 않아도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하여도 전복죽을 끓이려면 귀한 식재료 다루는 손이 떨릴 지경의 귀한 식품이었다. 남방의 굴, 북방의 곰 발바닥, 동방의 전복, 서역의 말젖을 중국에서는 4대 산해진미로 치기도 했다 한다. 4대 진미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에게도 전복은 조개의 왕으로 알려진 귀하디 귀한 음식이고, 지금은 그보다 덜 귀하긴 해도 여전히 가장 맛잇는 음식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올해는 코로나로 전복이 안 팔려 어가가 최악의 불경기를 겪고 있다. 전복 어가를 위해 전남에서는 소비 판촉전을 넘어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전복을 중심에 두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에서 극도의 풍요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 혼란스럽다.
전복 하나가 참으로 많은 인간사를 담고 있다. 전복, 알고 먹으면 더 맛있을 수 있고, 더 의미있는 밥상일 수 있다. 내가 먹는 밥 한그릇, 내가 먹는 반찬 한 접시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마음은 그대로 사람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밥상에 세상이, 인심이 담겨 있어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사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 우선은 상층의 특별음식을 보통사람의 일상 음식으로 만들어준 그 수많은 손들에 감사한다. 또한 좋은 식재료답게 이렇게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준 이 식당 종사자분들께도 감사한다. 근대에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가 이룩했던 상향평등화가 밥상에서도 이루어지는 실상을 확인한 기분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창일의 갯마을 탐구, 동아일보 칼럼, 2020
기타 자료
#금정역맛집 #금정역먹자골목 #전복구이 #제주 #포작인 #해남 #보재기 #전복진상 #금정맛집 #군포맛집 #전복구이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