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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형태의 백제 금동신발 나주에서 출토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무렵 조성된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금동신발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형태를 자랑하는 유물이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정촌 고분에서 발굴됐습니다.
나아가 흙으로 쌓은 봉분 하나에 시신을 묻는 시설 9곳을 설치한 이른바 '벌집형 고분'인 이 무덤에서는 금제 귀걸이와 금제 장신구, 마구 ,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석침(돌배게), 그리고 각종 토기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학술정비 차원에서 이곳을 발굴 중인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지난해 확인한 돌방과 돌덧널, 옹관(독무덤) 등의 각종 매장주체시설 9곳 중에서 올해 돌방무덤 3기에 대한 내부 조사를 시행한 결과 이런 성과를 얻었다고 오늘(23일) 밝혔습니다.
이 중에서 금동 신발을 출토한 1호 돌방무덤은 규모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는 가장 크다고 연구소는 덧붙였습니다.
돌방 내부는 바닥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엔 돌로 문틀을 만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출토 당시의 모습
금동신발의 투영 사진 신발 바닥의 문양
신발 바닥의 연꽃봉오리와 도깨비문양(투시사진)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로 발등 부분에는 용 모양 장식이 있고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를 부착했습니다. 바닥에는 연꽃과 도깨비 문양을 투조(뚫어만듦)와 선각으로 꾸며 화려하게 장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소장은 "특히 신발 바닥 중앙에는 8개 꽃잎의 연꽃무늬를 삼중으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꽃술을 새겼다"면서 "도깨비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됐다"고 덧붙였습니다.
금동신발의 바닥
이상준 소장은 "그간 무령왕릉을 비롯해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지에서 백제 금동신발은 발견됐지만,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일부 장식이 손상된 채 수습됐다"면서 "하지만 정촌 고분 금동 신발은 용 모양 장식과 발목 덮개, 연꽃과 도깨비 문양 등의 장식이 완벽한 상태로 확인됐다"고 말했습니다.
신발 외에도 1호 돌방무덤에서는 마구와 고리칼, 금제 장신구 등이 함께 출토됐습니다.
연구소는 이들과 비슷한 유물이 남원 두락리와 월산리의 가야계 석곽 무덤을 비롯해 경주 황남대총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어, 무덤 주인공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와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연구소는 앞으로 돌방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법 등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유물 수습을 완료하고, 다음 달 말에는 최종 발굴 성과를 발표함과 동시에 현장을 방문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 설명회를 개최할 방침입니다.
더불어 인근 지역 같은 벌집형 고분인 복암리 고분군과의 상호 연관성 등을 검토해 국가지정문화재 확대 지정 등 최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연구소는 덧붙였습니다.
마한의 수장, 백제의 금동신발을 신다
발굴 전의 고분 모습
정촌 고분 발굴조사는 삼국 시대 복암리 일대 마한 세력의 대외관계와 세력 동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하고 있다. 2013년 조사에서는 고분의 규모와 다양한 매장시설(돌방, 돌덧널, 옹관) 9기가 확인되었다.
올해는 고분 안에 만들어진 3기의 돌방무덤에 대한 내부 조사를 시행하여, 금동 신발, 금제 귀걸이, 금제 장신구, 마구,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토기, 석침(石枕), 개배(蓋杯, 뚜껑 접시) 등의 중요 유물이 확인되었다.
※ 돌방무덤: 석재를 쌓아서 만든 무덤
※ 돌덧널무덤: 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
※ 옹관묘: 독무덤이라고도 하며,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 석침: 네모난 돌의 가운데를 죽은 이의 머리에 맞게 움푹 파이게 만들어 머리를 고정한 돌배게
▶ 마한․백제 지역 최대 규모 돌방무덤 확인
금동 신발이 출토된 1호 돌방무덤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내부 구조는 돌방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에는 석재 문틀을 만들었다.
벌집형 고분의 형태
금동신발이 발견된 1호 석실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로 한짝의 발등 끝부분에 용머리 비녀 모양의 장식이 있으나 다른 한짝은 장식이 부러져 사라졌고. 두 짝 모두 발목 부위에 장화처럼 덮개가 있다.
바닥판은 화려한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위아래로 용(혹은 괴수) 두 마리의 얼굴, 갈기, 인동초 무늬가 뚫음(투조), 선각 기법으로 들어갔다
신발 앞부분의 장식
신발 앞부분에 용머리상을 장식한 것은 처음 드러난 백제의 독창적 디자인이다.
공주 무령왕릉,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분 등에서 출토됐지만, 장식이 거의 온전하게 다 나온 것도 처음이다. 이한상 교수는 “고대엔 용을 옆모습만 주로 표현했는데, 이와 달리 입에서 서기를 내뿜는 입체상을 빚어냈다.
고대 금동신발 공예의 정점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바닥판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세겹으로 놓고, 중앙에 꽃술까지 새겼다.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동시기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사원의 연화 무늬와 흡사해 불교의 연화왕생 사상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바닥판 동물은 뿔 달렸고 아래턱이 좁으며, 삐져나온 송곳니, 부릅뜬 눈매 등에서 용의 얼굴이란 견해가 유력하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백제 정부가 영산강 지역 세력한테 회유를 위한 하사품으로 내린 물건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동안 금동 신발은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고창 봉덕리, 공주 수촌리, 고흥 안동 고분 등에서 발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일부 장식이 손상된 채 수습되었다. 그러나 정촌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 신발은 용 모양 장식과 발목 덮개, 연꽃과 도깨비 문양 등의 장식이 완벽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특히, 신발 바닥 중앙에 장식된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하였고, 중앙에 꽃술을 새겼다. 도깨비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되어 있다.
한편, 금동 신발은 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물로,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시점과 토착세력과의 관계 등 당시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 금동 신발의 의미: 백제의 지방 지배와 관련된 사여품(하사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돌방무덤내 마구류
고분내에서는 전형적인 경상도 가야토기 계통의 뚫음창 토기류(대부직구호), 나팔 모양 주둥이에 몸체에 구멍 뚫린 고대 일본의 스에키 토기(유구광구소호)가 백제식 토기류와 섞여 나왔다.
고리큰칼은 작은 칼이 옆에 딸린 얼개로 출토됐다.
경주 신라고분에서 주로 확인되고, 호남에는 없는 형식이어서 왜 묻혔는지 궁금증을 낳는다.
이런 양상들로 미뤄 무덤 주인이 영산강가에 정착한 왜계나 가야계 유력자일 가능성이 있어 한·일 학계의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덤 내부와 돌베개
▶ 백제, 가야, 신라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마구, 칼, 장신구도 출토
금동 신발 이외에도 마구와 고리칼, 금제 장신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유물은 남원 두락리, 월산리의 가야계 석곽을 비롯하여 경주의 황남대총 등에서 확인된 바 있어,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와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돌방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법 등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 수습을 완료하고, 올해 11월 말에 최종 발굴 성과를 발표함과 동시에 현장을 방문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의 상호 연관성 등을 검토하여 국가지정문화재 확대 지정 등 최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 복암리 고분군: 1996년부터 5회에 걸쳐 발굴되었으며, 금동 신발, 은제 관식, 고리칼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영산강 고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평가됨
정촌고분
영산강 북쪽지역에 자리한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잠애산. 참나무 숲으로 이뤄진 이곳 산사면에 삼국시대 이 지역 최대 규모의 방대형(네모난 평면에 윗면이 평평한 형태) 정촌고분이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칠조산'이라 불리는 7기의 고분이 복암리 평야에 있었다고 전한다. 복암리 고분군이다.
정촌고분은 잠애산(해발 112m)의 서쪽 사면에 축조돼 평지나 낮은 구릉에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등 영산강 유역의 다른 고분들에 비해 탁월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정촌고분 주변은 과거부터 나주 임씨 집성촌이 마을을 이뤄왔다. 고분 위로 임씨 가문 소유의 정자가 있어 일제강점기 때 도굴의 위험을 피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고분에서 출토된 기왓장들과 기둥의 흔적들이 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남아있는 고분의 크기는 짧은 변 37.3m, 긴 변 40.0m, 높이 11.6m 규모다. 하지만 고분의 정상부가 후대에 일부 훼손됐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원래 고분의 높이는 13m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외벽은 사면보호와 장식효과를 위해 돌을 깔아 놓았고, 둘레에는 석축을 쌓아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석축을 지지하는 장대석이 고분 북쪽과 서쪽 사면 중하위에서 자리한다.
정촌고분 안에는 돌방무덤(석재를 쌓아 만든 무덤), 돌덧널무덤(지하를 파서 직사각형 덧널을 짠 무덤), 옹관묘(항아리를 맞붙여 관으로 쓰는 무덤) 등 9기가 확인됐다. 이 중 3기의 돌방무덤에 대한 내부 조사가 올부터 실시됐다.
금동 신발이 나온 1호 돌방무덤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복암리 대고분군에서 발견된 석실의 1.5배 크기다.
내부 구조는 돌방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에는 석재 문틀을 만들었다. 고분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돌덧널과 옹관 등 6기는 대부분 훼손된 상태다. 대신 남서쪽 사면에 설치된 굴식돌방과 남동쪽 기저부에서 확인된 돌덧널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향후 조사가 기대되고 있다.
영산강 주변 마한·백제 시대의 수많은 고분들과 출토유물은 서해안 연안 해로와 강줄기를 따라 교역의 요지가 됐던 이 지역의 위상과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나주 지역의 마한 토착세력들이 당시 인접해 있던 백제, 신라, 가야국 등으로부터 직접 지배당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해 왔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백제 금동신발로는 17번째 출토품이다.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의 크기로, 발등 끝 부분에 용머리 장식이 올려졌는데, 이런 장식의 신발 출토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신라를 통틀어 처음이다.
용머리 장식은 대롱처럼 연결돼 탈 ․ 부착할 수 있게 했는데, 한 짝은 용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 짝엔 온전히 남아 있다.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를 부착했고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23개를 붙였다. 바닥 한복판에는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한 연꽃무늬가 있고 연꽃 중앙에는 꽃술을 새겼다.
연꽃의 앞뒤에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용 얼굴 2개가 정면으로 묘사돼 있는데 용의 머리에 난 뿔과 귀, 코, 이빨까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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