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앎은 상처를 기꺼이 입어야 생긴다 / 이훈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7.
상처 입을 수 있는 마음 / 이훈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때로 즐거운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쳤다가도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물론 마음이 약해졌을 때다.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장 건강한 몸은 금방 지치는 몸이다. 자신은 지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김연수, <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 <<지지 않는다는 말>>, 마음의숲,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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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단체에서 온 메일에서 이 문장을 읽었다. 그 편지는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 하지만 그 약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를 옮기고 지은이와 책 제목을 적어 놓았다.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밀리의 서재’(https://www.millie.co.kr/)를 검색했더니 마침 저 책이 있다. 이 밖에도 김연수의 책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그의 인기와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20년 전에 나도 상처를 두고 뭐라고 한 적이 있었던 게 떠올라서 찾아서 다시 읽어 봤다. 말의 마술사 정현종 시인의 산문에 이끌려 쓴 것인데 소설가의 깊은 눈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솔직한 독후감이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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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을 수 있는 권리 / 이훈
젊은 날의 좌절과 방황은 사실 지나고 보면 찬란한 것이다. 아픔 없는 성숙은 성숙이 아니며, 그들이 살아 있는 생명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이며 상처는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생명 현상이다. 더구나 어른들보다 훨씬 순수하고 활기 있는 감수성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독립적인 생의 기간 동안, 그들의 열렬한 호기심과 욕망을 이러저러한 체험을 통해 충족시키지 말라는 법은 없다.(정현종, <젊은 날의 사랑 연습>,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민음사, 1975, 134쪽.)
벌써 가을이다. 지난여름의 막바지는 정말이지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 거듭 닥친 태풍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 피해의 정도를 생각하면 도대체 상대가 되지 않아 같이 말하기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아폴로 눈병 때문에도 많이들 고생했던 것이다. 병이 널리 퍼져서 학교가 쉬는 일도 생겼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눈병에 걸린 학생이 일부러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 스스로 그 병에 걸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기도 했다는 점이다. 눈이 아픈 사람을 멀리서 보는 일도 피하고만 싶었던 소심한 어른과는 달리 우리 어린 학생들은 장난삼아 즐거이(?) 병을 앓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이들의 가벼운 행동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처를 입겠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그지없이 통쾌하기도 했다. 그렇다. 젊은이는 뭔가 어른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날마다 학교에 가는 일이 지겨워서 일부러 앓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가볍다고만 볼 것은 아니다. 상처를 입음으로써 학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얼마나 못 견뎠으면 그랬을 것인가! 아울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은 젊은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살아 있는 것치고 아픔이 없이 잘 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태풍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크기는 했지만 그것을 견딘 나무는 이제 웬만한 바람에는 꺾이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상처가 두려워질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상처가 나면 잘 낫지도 않는다. 마음의 아픔도 그렇다. 좀 좋게 말하면 편안해져서, 부정적으로 보면 자신의 건강만을 생각하는 폭 좁은 사람이 돼서 그럴 것이다. 어떤 때는 그런 모습이 몹시 서글프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맹목적인 열정에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그러면 대부분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그 자신도 웃음을 사기 쉽다.
그런 점에서 다시 강조하건대 상처를 받는 것은 젊은이가 누릴 수 있는 복된 권리다. 그러니 우리 젊은이들은 모험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실패를 미리 두려워하지 말자. 무모하다싶게 달려들어 보자. 이런 시도가 결코 괜한 낭비만은 아니고 앞으로 할 일을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여기자. 상처를 입어 아프면 어떤가. 젊음의 힘으로 곧 낫고, 우리를 더 굳세게 만들어 줄 텐데! 젊은이에겐 실수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젊음을 찬란하다고 한 것일 게다.(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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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 글을 김연수의 문장 옆에 놓고 보면, 상처 자체를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드러난다. 그때 내게 이런 눈이 있었다면 ‘용감하게 달려들어 보자’는 계몽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그래서 얻을 상처의 뜻을 읽는 데 초점을 맞췄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고 손을 뻗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나를 넘어서는 관계도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처 입지 못하는 무능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실례는 우리 윤석열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이 사람은 사고가 나면 책임지거나 사과할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다. 김연수의 저 문장을 보고서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한다’고 해야 맞다는 깨달음이 왔다. 사고로 죽거나 피해를 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린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거의 혼자만 말하고 비판을 듣지 않으려고 하거나 공격의 날을 세우는 것도 이런 성정에서 나온다. 상처 입지 못하는 우리 대통령이야말로 손써 볼 수 없게 깊이 병들었다고 해야 한다.(2023년 8월 23일. https://cafe.daum.net/ihun/jsj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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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아는 일의 기쁨을 얘기한다. 공자의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를 그 대표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습(習)’은 나는 연습을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https://cafe.daum.net/ihun/jsjy/67 보세요). 날지 못하는 새끼에게 하늘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먹이를 문 어미가 저쪽 바위나 나무 위에 있으면 그걸 먹고 살려면 날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연습해야 한다. 그 결과가 비상이고 초월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목숨을 걸고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인공 지능이 나와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런 걸 많이 모아 잘 안다고 해도 내 삶에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진짜 앎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기존의 관습이나 편견을 아무 의심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그런 틀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점을 통렬하게 깨닫고 부끄럽게 여기고 분노하며 이걸 바꿀 방법을 생각하며 내 마음과 이 세상을 바라봐야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무지가 나를 지배하는데 상처 하나도 안 받고 가만히 있다면 많이 안다는 게 무슨 뜻이 있겠는가?
어제 밤늦게, 남도 지방의 눈 오고 바람 몹시 부는 섬에서 추워 덜덜 떨면서 걷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역 승강장 안전문 유리창에 써 놓은 시를 봤다.
진달래꽃 / 이정록
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 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절벽에 새겨진, 웃는 돌부처 머리에 진달래꽃이 피었다. 저렇게 되려면 어디 망치 소리만 들었겠는가. 셀 수 없이 정도 맞아 살 조각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에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고 부처님처럼 넉넉하게 자비의 웃음을 지으려면 상처를 견디고 이겨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평상심의 다른 말이 ‘그럭저럭’이나 ‘그냥저냥’일 테다. 깨달음과 아름다움은 상처 위에서만 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제, 바람도 잔잔하고 춥지 않았다면 걸은 일이 소중하게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다. 고통을 자처하며 높은 산에 오르고 먼 길을 걷는 이유도 이 언저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