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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지파(8) - 잇사갈 지파 / 창 49:14-15
추석명절 잘 보냈습니까? 추석(秋夕) 또는 한가위는 수확을 앞두고 풍년을 기원하는 날로 한민족의 명절이자 1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을 맞이하는 달입니다. 외극의 감사절은 수확 후에 감사를 드리지만, 우리의 추석은 가을 추수라는 큰 일을 앞두고, 날씨도 적절하니 성묘도 하고, 놀면서 즐기는 명절입니다. 존조경종(尊祖敬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조상을 높이고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국가기관의 장을 지낸 고곱공무원 출신인 70대가, 최근에 자기 친구에게 “조상 산소를 다 파서 화장해서 강물에 뿌려 버려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 하니깐 “해마다 묘사 등이 부담이 되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역사 교사를 하다가 대도시의 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분인데 “제사 때문에 귀찮아서 못 살겠다”라고 짜증을 냈습니다. 위의 두 사람은 최고의 식자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조상에 대한 생각이 이러니, 일반 사람들은 어떠할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여느 나라에 못지않게, 족보를 잘 정리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족보가 위조가 있는 등, 약간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혈통과 출신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자기의 역사인 동시에 한 집안의 역사입니다. 타향에서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몇 마디만 나누어 보면, 어느 할아버지의 자손이고, 어디서 갈라져 나왔으며, 자기와 몇 촌 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고, 문화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던 중국 사람들도, 우리만큼 족보를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촌수(寸數)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삼촌, 사촌 하면 중국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촌수에 대해서 역사를 전공하는 중국 교수에게 설명해 주었더니, 아주 훌륭하고 편리한 호칭법이라고 찬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5대 이상만 올라가면 잘 모릅니다. 중국의 교수들 가운데 자기 조상을 모르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고 합니다.
1981년 겨울,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보르노 박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돌아가기 직전에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우리나라 기자가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하면 잘 되겠습니까?”라고 하자, 보르노 박사는 “한국은 다른 것은 할 것 없고, 지금껏 해온 것처럼, 한국인의 족보를 잘 지켜나가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한국 기자들은 전혀 예상 밖의 답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별로 중시하지 않거나, 또는 낡은 제도로 여기는 족보를, 서양의 세계적인 학자가 왜 그렇게 칭찬을 했을까요? 서양학자가 보기에 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질서를 잡아주고, 개인을 도덕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족보의 기능을 매우 높게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자기의 조상을 생각하고, 자기의 후손을 생각합니다. “내가 이런 언행을 하면 조상들에게 욕이 되지 않을까? 먼 훗날 나의 후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말 한 마디, 발 한 걸음 옮길 때도 신중히 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런 관념이 없습니다. 오늘날 범죄자가 증가하고 사회가 혼란한 것은, 가정에서의 교육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지만, 학교가 교육하고 책임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기본은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보통 남을 욕할 때, “누구 자식인지, 참 못됐다? 누구 집 자식인지, 본데없다”라고 하지, “어느 선생 제자인지 참 못됐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족보를 만들어 자기가 누구의 후손이고, 누구의 자식인지 그 사람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면, 사람이 함부로 처신하지 못합니다. 또 옛날에는 대부분 동족 마을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동네 안에서 문 밖에 나가도 모두가 할아버지, 아저씨, 형님, 동생, 조카 관계이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하면서 살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조상이 있으면 그 행적을 새긴 비석을 새기고, 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난 조상은, 후손들이 유림들과 협력하여 서원을 지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히 조상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조상을 교육의 자료로 활용하여, 후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조상을 다 버리고 도시에 나와서, 문 밖에만 나가면 어디 출신이고, 누구 집 자식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쉽게 범죄행위를 할 수 있고, 언행을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조상을 존경하고 높이는 좋은 전통이, 너무 빨리 무너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좋은 전통마저 다 버리는 것이, 발전이고 개혁이라면 큰 착각입니다.
레아와 라헬은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미있습니다. 열하면 치열할수록 흥미진진합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엎치락뒤치락 하면 손에 땀을 쥐며 지켜봅니다. 레아와 라헬의 경쟁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초반 경쟁에서는 레아가 다소 앞서 갔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연달아 낳았습니다. 반면 라헬은 출산은커녕 임신 소식조차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라헬은 레아보다 야곱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라헬은 레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야곱과 보냈습니다. 그런데 레아가 아들을 먼저 낳았습니다. 혹시 첫날밤에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첫 애는 그럴 수 있습니다. 레아는 둘째 셋째 넷째를 연달아 낳는데, 라헬에겐 태기조차 없습니다. 첫째에서 넷째까지면 연년생으로 낳았다고 해도 4년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두 살 터울로 낳았다고 계산하면 무려 8년입니다. 네 아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들을 보기 위해 레아를 찾아갑니다.
그걸 지켜보는 라헬의 마음은 안달이 납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려고 하는 자신을 겨우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 라헬을 지켜보는 야곱의 마음도 편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더 살뜰하게 챙기고 보살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보고 싶어도, 라헬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라헬도 힘들지만, 야곱도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라헬의 인내도 서서히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다짜고짜 야곱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나한테 아들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리겠다.” 이 말도 안되는 말을 들은 야곱은 열받아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야곱도 할만큼 했습니다. 어떻게든 라헬이 낳아준 아들을 얻기 위해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안 생기니, 야곱인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라헬이 야곱의 가슴을 후벼 파는, 독한 소리로 투정을 부렸습니다. 야곱은 그만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아이를 주지 않는데, 난들 어쩌란 말이냐?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냐?” 사실 두 사람 다 할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서로에게 아무 유익이 없고, 감정만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화를 내긴 했지만, 자기보다 더 아픈 라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라헬도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라헬은 그동안 고민해왔던 것을 야곱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자기 종 빌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달라는 것입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적잖이 고민이 됩니다. 주위에 이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아예 아들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겐 아들이 이미 네 명이나 있습니다. 밖에서 낳은 아들도 아니고, 정식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아들을 절실하게 원하는, 라헬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야곱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또 후에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열어주어, 라헬이 아들을 낳게 되면 문제가 될 소지도 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오래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재촉했습니다. 야곱은 그 상황에서, 빌하에게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단을 낳고, 납달리를 낳게 되었습니다. 라헬은 종인 빌하가 낳은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았습니다. 라헬은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레아와의 경쟁에서 4:0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어렵게 4:2를 만들었으니, 라헬 입장에서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정당한 경쟁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소 편법을 동원한 불공정한 경쟁이었지만, 라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쫓기는 쪽은 레아였습니다. 4:0일 때까지만 해도 느긋했습니다. 비록 남편 사랑을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자기에게는 든든한 네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편법을 동원하여 4:2를 만들었습니다. 아직 4:2로 여유가 있었지만, 추격을 당하는 레아 입장은 초조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레아도 편법을 동원했습니다. 라헬이 썼던 방법을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레아는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며 아들을 더 얻고자 했습니다. 이제 야곱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습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야곱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라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으니, 그와 똑같은 레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라헬이 제안을 할 때의 상황과, 레아가 제안을 할 때의 상황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그걸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도, 둘 중 한 사람은 불공평하다고 느낄 게 뻔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야곱은, 레아의 제안도 수용하고 맙니다. 그래서 갓을 낳고, 아셀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이제 겨우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라헬과의 경쟁에서, 여유 있게 우위를 점하게 돼서였습니다.
1. 잇사갈 지파의 기원
창 30:14절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라헬과 레아가 여종을 통한 대리전 양상의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장자 르우벤은 십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일꾼들을 따라 들에 나가, 일손을 도울 정도로 자랐습니다. 밀 거둘 무렵의, 어느 날 들에 나갔을 때, 합환채를 얻게 되었습니다.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필요가 있습니다. 라이프 성경사전에 의하면, 합환채는 지중해 연안에 널리 자생하는 다년생 식물입니다. 가지만한 크기의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며, 오렌지색을 띠고 있습니다. 땅속으로는 인삼처럼 갈라진 뿌리가 있습니다. 단맛을 띠고, 또 일종의 마취 성분을 지닌 열매는 식용은 물론 약용으로도 쓰입니다. 특히 고대인들은 이것을 성욕을 촉진시키고, 불임 여성들의 수태력을 증진하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것으로 믿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합환채가 중근동 사람들에게, 사랑의 묘약으로 통한다고 합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르우벤이, 합환채가 어떤 효능이 있는지, 뭘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마 어른들이 몸에 좋은 거라며, “야 네 엄마한테 갖다줘라, 그럼 아주 좋아하실 거다”고 했을 거고, 르우벤은 엄마한테 달려갔습니다. 합환채를 들고 기분 좋게 달려가는 르우벤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뒤에서 낄낄대며 웃어댔습니다. 레아가 보니, 저 멀리서 르우벤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직 집에 올 시간이 아닌데, 어 무슨 일이지’ 하고, 르우벤을 바라보는데, 그의 손에 뭔가 들려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합환채였습니다. 르우벤이 준 합환채를 받아든 레아는, 잠시 행복한 생각에 잠겨봤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지켜봤는지, 그들 앞에 라헬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런 요구를 해왔습니다.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그런데 레아의 반응을 보니, 라헬이 그냥 장난삼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루한 경쟁으로 인해, 두 사람은 작은 일에도 날선 반응을 보였습니다. 라헬이 그렇게 나왔을 때, 레아가 먼저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레아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15절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레아는 라헬에게 자기 남편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아가 먼저 야곱과 결혼했고, 라헬은 일주일 후에 야곱과 결혼했습니다. 그럼 굳이 시간적인 순서를 따지자면, 레아의 말이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라헬이 들어가야 할 신방에, 아버지와 짜고 레아가 대신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보면, 레아가 라헬의 남편을 빼앗은 것이 됩니다. 그럼 레아의 말이 그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헬은 레아의 말에 사실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레아의 손에 들려 있는 합환채를, 어떻게든 자기 손에 넣기 위해서였습니다. 라헬은 황급히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레아가 합환채를 자기한테 넘겨주는 대신, 자기는 남편을 레아한테 넘겨주겠다는 제안입니다. 합환채와 남편을 맞바꾸는, 희대의 거래를 시도한 것입니다. 합환채 값에 팔려가는 불쌍한 야곱입니다. 두 아내와 함께 사는 야곱의 비극입니다. 합환채와 남편을 맞바꾸는 거래는, 즉석에서 성사됐습니다. 16절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야곱이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올 때면, 일반적으로 라헬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레아가 영접하였습니다. ‘어 웬일이지? 오늘 무슨 날인가?’ 하고 생각하던 차에,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었습니다.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야곱은 쓴웃음을 지으며 레아에게 들어갔습니다. 모처럼 레아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었는데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참 자기 남편과 동침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레아의 처지가 짠하긴 합니다. 17-18절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잇사갈입니다. 레아는 유다를 낳고 출산이 멈추었는데, 그래서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서 종인 실바를 통해서 아들을 얻기까지 했는데, 이번에 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잇사갈은 레아가 낳은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잇사갈의 뜻은 ‘값’입니다. 값을 지불하고 무엇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잇사갈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출생 이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우벤이 합환채를 발견한 작은 사건이, 잇사갈의 출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건 물론입니다.
2. 잇사갈에 대한 야곱의 축복
창 49:14-15절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야곱은 죽기 전 아들들에게 축복했습니다.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에 비유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축복에 몇몇 동물이 등장했습니다. 유다는 사자에 비유했고, 단은 뱀에 비유했으며, 납달리는 암사슴에 비유했습니다. 사자와 뱀은 강렬한 상징인데 비해, 암사슴은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나귀는 또 다른 상징입니다. 나귀하면 떠오르는 게, 일, 노동 같은 것입니다. 잇사갈 지파가 노동의 복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잇사갈 지파는 건장한 나귀처럼, 튼튼하고 힘이 셀 거라고 했습니다. 우직하고 단순하여, 주로 농사일 같은 노동에 전념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지파에 비해, 상부 지배계층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주로 육체노동을 맡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잇사갈 지파가 저주를 받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몸을 쓰는 육체노동은 천하고, 머리를 쓰는 정신노동은 귀하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존재합니다. 유교의 잔재이고, 조선시대의 유물입니다. 자칫 노동을 인간이 범죄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인간의 범죄가 나오는데, 그 전에 노동이 나옵니다. 창 2: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 “경작”이란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범죄와 타락 이전에 노동이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육체노동일수도 있고, 또는 정신노동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노동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통로로, 노동을 주셨습니다. 노동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노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얻은 이익을, 불로소득(不勞所得)이라고 합니다. 주로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나, 상속, 증여, 복권 당첨 같은 것이 불로소득에 해당합니다. 불로소득도 복이 아닌 건 아닙니다. 하지만 불로소득의 복은, 내가 가져야 할 복, 내가 쌓아두어야 할 복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건 섬기고 나눠야 할 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여, 노동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바랍니다. 혹시 불로소득의 복을 받게 되면, 자기를 위해 쌓기보다는, 섬기고 나누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노동만 축복이 아닙니다. 노동 후의 안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아무리 나귀가 건장하고 우직하다고 해도, 쉼이 필요합니다. 잘 쉴 수 있어야 하고, 잘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일해야 할 때 열심히 일하고, 쉬어야 할 때 푹 쉬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일하고 어중간하게 쉬면, 보는 사람들까지 힘들게 됩니다.
3. 잇사갈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신 33:18-19절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모세도 죽기 전에 열두 지파를 축복했습니다. 이번에 모세는 잇사갈 지파와 스불론 지파를 묶어서 축복했습니다. 잇사갈과 스불론은 어떤 관계입니까? 친형제지간입니다. 스불론이 잇사갈의 동생입니다. 나중에 땅을 분배받을 때도 인접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세가 묶어서 축복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불론 지파의 성향은 외향적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 지파의 성향은 내성적입니다.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실제로 스불론 지파는 해변까지 영역을 넓혀서, 해로를 개척했습니다. 잇사갈 지파는 조용한 농경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밖으로 나갈 때, 능력이 발휘되고 기쁨을 얻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안에 있을 때, 능력이 발휘되고 즐거움을 얻습니다. 남편이 외향적이면, 아내는 내성적이거나 그 반대여야 가정이 돌아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활동적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단기선교한다고 사회봉사한다고, 다 나가면 안 됩니다. 조용히 중보기도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시간으로 봉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물질로 봉사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마리아처럼 봉사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마르다처럼 봉사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영적 필요도 채워줘야 하지만,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건 균형과 조화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다양한 은사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은사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서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 사람에게는 나에게 없는 부분이 있다, 저 사람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는 잇사갈을, 밖으로 보내면 힘들어 할 게 뻔한데, 왜 그게 힘드냐고 하면 안 됩니다.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는 스불론을, 장막에 있게 하면 답답해할 게 뻔한데, 왜 그게 답답하냐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파가 스불론처럼 되라고, 잇사갈처럼 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스불론 지파는 스불론 지파로, 잇사갈 지파는 잇사갈 지파로 살기를 원하셔서,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땅을 받게 하셨습니다.
4. 잇사갈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9:17-23절 ‘넷째로 잇사갈 곧 잇사갈 자손을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지역은 이스르엘과 그술롯과 수넴과, 하바라임과 시온과 아나하랏과, 랍빗과 기시온과 에베스와, 레멧과 엔 간님과 엔핫다와 벧 바세스이며, 그 경계는 다볼과 사하수마와 벧 세메스에 이르고, 그 끝은 요단이니, 모두 열여섯 성읍과 그 마을들이라. 잇사갈 자손 지파가 그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 이 성읍들과 그 마을들이었더라.’
잇사갈 지파는 지중해에서 멀지 않은 내륙에 위치했습니다. 위로는 납달리 지파, 옆으로는 친동생 스불론 지파, 남쪽으로는 므낫세 지파와 함께 이스르엘 평원를 소유했습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최고의 토질을 가진 곳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도 멀지 않았습니다. 잇사갈 지파의 영토에는 멋진 다볼산 경계가 가까이 있고, 요단 강까지도 차지했으니, 산과 강을 얻은 최고의 지파였습니다. 다볼산은 신약에서 변화산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잇사갈 지파에 속한 곳 중에 유명한 곳이 수넴입니다. 수넴은 이스르엘 평원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수넴에는 선지자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했던, 이름 없는 여인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말해서, 집에 엘리사가 편히 쉴 수 있는 다락을 준비해 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게스트룸을 만들어서, 엘리사가 언제 오든지 편히 쉬었다 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너무 감동을 받은 엘리사는, 그 집에 아이가 없다는 것을 게하시에게 전해 듣고는, 축복하여 아들이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잘 자라던 아들이, 어느 날 추수하는 밭에서 심한 두통을 호소하더니, 집에 돌아와 엄마 품에서 돌연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수넴여인이 엘리사를 찾아갔고, 함께 온 엘리사가 그 죽은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수넴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경험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5. 잇사갈 지파의 상징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잇사갈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첫째줄 두 번째 위치에 있는 황옥입니다. 황옥은 히브리어로 ‘타르쉬쉬’인데, 오늘날 스페인의 한 도시로 추정되는 ‘다시스’를 가리킵니다. 곧 다시스에서 생산되는 보석인데, 누른 빛깔을 띤다 하여 ‘황옥’으로 불렸습니다. 황옥을 일반적으로는 토파즈(topaz)라고 부릅니다. 토파즈란 이름은 ‘찾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 보석을 찾는 게 힘들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토파즈라는 보석을 찾기 위해서는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는 잇사갈이란 이름의 뜻과 일치합니다. 잇사갈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레아가 라헬한테 합환채란 값을 지불하고, 남편과 동침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잇사갈이란 이름을 지었는데 그 뜻이 값입니다. 레아는 잇사갈을 볼 때마다, ‘내가 너를 값주고 샀다’는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샀다고 합니다. 고전 6: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7: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예수 피 값으로 사셨습니까?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사셨습니다. 누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행 20: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게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세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는 행한 것 없이 주시는 은혜,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믿음과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행한 대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면 우리를 교훈하시려고, 징계와 고난을 내리십니다. 셋째는 행한 것 이상으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세 가지 은혜를 누리고, 더 풍성히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레아의 아들인 잇사갈에 대한 축복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모두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잇사갈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평범한 레아의 아들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와 같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예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어 천국의 소유자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기쁨을 이 세상 살아가면서, 널리 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인,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열심을 다해 보살피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