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외삼촌과 함께 삼치 낚으러 다닐 때였다. 삼치는 수심 20~50미터 사이에서 낚아 올린다. 배를 몰면서 낚싯바늘을(은박지로 만든 가짜 미끼를 단다. 일종의 루어이다) 그 깊이까지 가라앉히려면 무거운 납을 잔뜩 매달아야 한다. 그 무거운 것을 손에 쥐고 종일 바다를 싸돌아다니며 하는 일이라 경비도 적잖이 들고 고생도 심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이었는데 우리 둘은 며칠째 똥깡구(한 마리도 못 잡는 것을 이르는 섬의 말)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오늘도 공칠 것 같으니 차라리 나가지 말까. 우리는 잔뜩 의기소침해 있었다. 풀 죽은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던 할머니는 감자기 마당으로 걸어 나가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일갈을 내질렀다 “귀신은 읎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아들하구 손자하구 자기 제사 지낼라고 쌔빠지게 고생을 하는디, 귀신이 있다면 이릴 수는 읎다. 귀신이 읎는 것이 분명하니께 올해부터는 제사 안 지낼란다. 인자 제사 지내지 말자." 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때 사이판 바다에서 미국 폭격기에 돌아가셨다. 추석 전전날이 제사였다. 그리니까 아들과 손자 어장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하는 경고요 협박이었던 것이다. 삼촌은 그러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기가 차다는 듯 허허, 웃었다. 아무래도 노망이 제대로 나버리고 만 것 같다고 살짝 귓속말도 했다. 할머니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부엌일을 시작했고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바다로 나갔다. 채비 넣자마자 4킬로그램 넘는 삼치가 연달아 물어댔다. 방어도 쉬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삼치 어장 나간 열댓 척 배 가운데 우리만 낚았다. 다른 배는 고시 한 마리 구경도 못 했다. 고시는 어린 삼치를 이르는 말이다. 낌새를 챈 배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녔으나 그들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수협 어판장에 간 배는 우리가 유일했다. 우연일까?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부리나케 삼치 떼를 몰아주었을까? 다음 날도 마을 배들이 우리만 따라다녀 난감했지만 덕분에 제사는 해마다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제사 때만 되면 마누라한테 한소리 들은 할아버지가 바닷속에서 낑낑대며 삼치 몰아주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나는 죄송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쉽고 단정한 문장이다. 글을 마무리 하는 마지막 문장까지 그렇다. "제사 때만 되면 마누라한테 한소리 들은 할아버지가 바닷속에서 낑낑대며 삼치 몰아주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나는 죄송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쉬워 보이는 것은 대체로 대단한 것이다.
<붕장어 중에서> 충청도 서해안에서 살 때였다. 옆방에 현이네가 살았다. 현이 엄마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시내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 뒤돌아보았다. 현이 아빠는 그렇지 못했다. 트럭 운전을 하던 그는 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현이 엄마가 둘째를 낳자 먼 경상도 땅에서 친정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셨다. 당시 현이 아빠는 일을 쉬고 있었다. 쉰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일자리를 잃은 듯했다. 문제는 단칸방이라는 것. 작은 방 하나에서 셰 식구 더하기 갓난아이, 더하기 할머니. 이렇게 다섯이 지내야 했다. 장모가 오는 날부터 현이 아빠는 밤낚시를 다녔다. 사위 보는 눈빛이 편치 않다는 것은 첫날부터 짐작한 수 있었다. 결혼을 반대당하자 무작정 이이부터 가졌다는 말은 그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현이 아빠가 저녁을 먹고 나가면 모녀의 신정진이 시작되었다. "이기 뭐꼬. 이기 사는 기라고 니 이렇게 살고 있나." "앞으로 잘 살기다." “지금은 와 잘못 사노 응? 이리 사는 데 둘째는 또 와 가졌노.” "그기 맘대로 되나." 모녀는 주위 눈치를 살피며 눈시울을 찍어냈다. 어머니의 눈물이 더 진하고 오래갔다. 그녀는 한습을 길게 내쉬며 기어이 한마디 더 했다. “니, 지금 가도 더 잘 갈 수 있다.” “어떻게 시집을 또 가노." 아침에 현이 아빠가 잡아오는 것은 붕장어였다. 서해안은 붕장어 낚시터가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녀석들이 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낚아온 것이라 양도 적잖았다. 그는 묵묵히 장어를 손질하고 소금과 양념을 발라 구웠다. 고기반찬의 아침 밥상인데 아무도 말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현이 엄마가 입을 열었다. “싱싱해서 더 맛있네. 엄마 좀 무봐라. 애써서 잡아왔다 아이가.” 어머니는 대답을 안 했다. 산후조리 기간은 짧지 않다. 현이 아빠 는 날마다 낚시를 다녔고 날마다 장어를 구웠다. 날마다 딸이 권했고 날마다 어머니는 안 먹었다. 대신 내가 얻어먹곤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갔다. 끈질기게 낚고 끈질기게 권하니 한두 점 안 먹을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비로소 한마디 나왔다. “맛있기는 하네.” 현이 아빠가 스페어 기사로 사흘간 타지를 다녀왔다. 그가 온 날 현이 엄마가 말했다. “당신 장어 낚으러 안 가나고 엄마가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