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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의 이해에도 성경에 있는 희년법과 이스라엘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 계시록의 일곱 인 개봉과 토지문서, 희년 주기와 다니엘의 70 이레로 본 '7년 대환란'의 주제는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계시록 이해를 위한 선행 자료와 필자의 관점
필자는 계시록의 이해를 다음 두 분의 강해와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
CBS 성서학당, 송태근 목사의 계시록 강의
우선 삼일교회 시무하시는 송태근 목사님의 CBS 성서학당 강의와 삼일교회 수요 예배에서 한 계시록 강해를 듣고 배우는 중에 있다. 이 계시록 강해는 한 번에 50분 정도의 시간 분량으로 55회 걸쳐서 하였던 방대한 내용이다.
송태근 목사님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쓴 이유를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종말에 관한 바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종말론),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위해서(기독론), 셋째 교회를 위해서(교회론) 기록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시록은 어려운 책이 아니고, 쉬운 책이라고 한다. 계시록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 생활에 필요한 현재의 이야기라고 했다.
필자도 배우는 과정이지만 공감하고 있다. 우리가 계시록도 성경인 만큼 이에 대한 기초 지식과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신천지 집단과 같은 이단의 유혹만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합동신학대학원 이승구 교수, 요한계시록의 구조
그다음으로 계시록 전제의 구조에 대해서는 합동신학대학원 이승구 교수의 견해를 참고하고 있다. 이승구 교수는 계시록을 시간적(차서적) 구조로 보는 관점과 병행적 구조로 보는 관점으로 나누고 있다. 시간적 구조는 계시록이 기록한 순서대로 사건이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시간적(차서적) 이해는 특히 계시록 19장의 예수 재림과 20장의 천년왕국이 기록 순서대로 일어나는 일로 보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전천년설은 계시록을 시간적 구조로 보는 관점이다.
이에 대하여 이승구 교수는 계시록의 구조를 7개의 사건의 (주제별로 기록한) 병행적 구조로 보고 있다. 아래 『 』 안의 내용은 이승구 교수의 견해를 원문으로 소개한 것이다.
『... 그러나 이런(시간적, 차서적)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과연 요한계시록 19장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시간적 이해자) 요한계시록 6장 12~17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특히 7장 7~17절에 기록된 구속받은 사람들에 관한 묘사도 21장 3~4절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같은 정황을 여러 번 묘사한 예를 살피면서 병행법적 구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1장 15~18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시사가 있고, 14장 14~20절에서도 시사하고 있다. 또 16장 17~21절, 19장 17~21절, 20장 11~15절, 21장 8절에도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에 대해 해석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다음과 같은 7개 병행법적 구조(seven parallel structure)로 구성돼 있다고 보고 제시한다.
(1) 일곱 촛대 사이의 그리스도(1:3~3:22)
(2) 하늘과 일곱 인(印)에 대한 이상(4:1~7:17)
(3) 일곱 나팔에 대한 이상(8:1~11:19)
(4) 핍박하는 용에 대한 이상(12:1~14:20)
(5)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한 이상(15:1~16:21)
(6)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이상(17:1~19:21)
(7) 극치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이상(20:1~22:21)
즉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7개 병행법적 구조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를 생각하면, 19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묘사된 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20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년 왕국은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림부터 있는 것이 된다. 여기서 소위 무천년설 즉 교회 시대에 천년왕국 사상이 나타난다. 무천년설이란 천년왕국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때부터 이미 천년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병행법적 해석에 근거한 이해이다.』 이상, 해당 자료 원문 : 요한계시록의 구조로 본 종말론의 이해(https://blog.naver.com/conversion-people/222896262636)
계시록의 기존 이해는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필자의 계시록 이해는 송태근 목사의 종말론, 기독론, 교회론에 기초하며, 계시록의 내용 구조는 합동신학대학원 이승구 교수의 병형적 구조를 기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종말이라는 개념도 이해가 필요하다. 신약시대의 종말은 구약시대와 다르다. 구약시대는 메시아가 오면 세상이 끝이라고 보았다(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 그때를 세상 끝으로 봄).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종말이 임하였다는 것이다(행 2:17, 히 1:2, 요일 2:18). 그러나 아직 그 종말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종말은) 이미 왔다, 그러나 아직은(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한다. 이런 종말의 인식은 우리가 성경의 종말, 특히 신약시대인 지금의 종말을 이해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은 무천년설의 입장에 있다. 계시록의 이해는 주로 구약의 다니엘서나 에스겔서를 인용하여 해석하고, 마무리는 영적인 내용과 예수 재림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계시록 이해에 대한 일반적 약점
계시록 이해에 대한 일반적 약점은 송태근 목사와 이승구 교수의 약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분의 계시록 이해를 기준으로 계시록의 이해에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보편적 약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재림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천년, 무천년, 후천년설이 있다. 그런데 세 가지 설이 모두 천년왕국보다는 예수 재림이 언제 있을지가 초점이다. 곧 천년왕국보다 재림의 시간에만 관심을 가진다. 계시록에서 예수 재림에 초점을 맞추면, 천년왕국의 실체나 내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1) 천년왕국에서 있어야 할 희년법의 성취나 완성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두 분의 계시록 강의를 거의 모두 들어보아도 희년에 대한 말이 없다. 아마 한마디도 없는 것 같다. 희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전통적) 시각은 구약시대의 율법이었으며, 구약시대에도 희년은 이상적인 내용을 담아놓아 실현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희년은 미래에 예수 재림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희년이 예수 재림이나 종말에 있을 사건이면, 지금 계시록이 말하는 재림과 종말을 해석할 때는 희년을 언급해야 한다. 그런데 계시록 해석에서 희년은 한마디도 없다. 송태근 목사의 계시록 강의에는 로마 황제의 우상숭배와 권력, 바벨론의 몰락 등을 말하면서 경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경제에 대한 내용은 다른 분들보다 농도가 짙고, 횟수로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55회나 행한 강의에서 경제의 핵심 주제인 성경 희년법을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혹시나 하여 그 분의 레위기 강해설교를 찾아 보아도 제사법만 있고, 희년법은 아예 대상도 아니다. 토지 무르기가 있는 룻기 강해설교도 토지 무르기는 용어 풀이만 하고, 무르기를 가르쳐준 레위기 희년법은 소개마저 없다. 이렇게 희년법에 대한 인식은 전무하다고 할만큼 빈약한 가운데 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앙 공동체는 신앙에 필요한 것만 말하고, 생활 공동체에서 필요한 희년법을 다루지 않는다는 필자의 평소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희년법과 계시록에 대한 이런 시각과 우리의 보편적 인식은 성경 이해의 자기모순과 약점을 드러낸다.
첫째, 평소에는 희년법이 재림 또는 종말에나 있을 사건으로 미루어놓고, 그 재림과 종말을 말하는 때가 와도 희년법은 일절, 언급하지는 않는다. 희년이 미래에 실현될 문제라고 미루면, 그 미래를 논의할 때는 미루어놓은 주제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계시록 내용을 끝까지 다루어도 희년이라는 주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광야의 여행자가 물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 물은 목적지에 가서 마실 것이라고 목마름을 참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목적지(마지막)에 도달하면 물이 많아서 가져간 물은 버리는 것과 같다.
둘째, 이런 인식은 희년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는 것과 같다. 계시록 21:1이 말하는 세계는 처음 땅이 사라진다. 그러면 땅을 다스리는 희년법의 준행이나 실현은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대교도, 기독교도 지킬 필요가 없었고, 재림과 종말의 때에도 필요가 없는 희년법을 왜 제정하셨을까? 모든 율법과 복음은 반드시 성취되고, 완성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왜 희년법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외로 두었을까?
셋째, 계시록 이해에서 이런 관점은 천국(지상천국과 천상천국)에 대한 무료 입장을 바라거나 현실 도피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사야 55:1에서 “목마른 자들도 ... 돈 없는 자도 오라 ...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천국은 무료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는 말이다. 영생은 선물로 받는 것이지, 돈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희년은 사람이 값을 치르거나 기간이 도래해야 맞을 수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죄는 무료로 사하여 주신다. 그러나 사람이 진 빚과 잡혀먹은 땅은 값을 치러서 사하라고 하신다(눅 11:4).
(2) 우리의 일반적 이해는 천년왕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지상왕국(3차원)인지, 하늘에서 이루어질 천상천국(4차원)의 세상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전천년설은 예수 재림이 먼저 있고, 천년왕국이 온다고 한다. 그리고 전천년설의 입장은 대부분이 천년왕국에서 죽은 성도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부활하고, 수명도 왕국이 끝이 날 때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런 부활 상태에서는 자연계도 크게 변모한 4차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차원의 세계는 천년왕국 다음에 있을 세계이다. 계시록 21장에 가서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은 4차원의 세계다.
전천년설 입장처럼 천년왕국 직전에 4차원의 세계가 임한다면, 세상은 이미 심판이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 천년왕국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에 있게 되는 곡의 전투(계 20:8)와 백보좌 심판(20:11,12)은 그 명분이 약하다.
그다음,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 또는 마지막 때에 예수 재림과 부활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전천년설의 천년왕국은 지금의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점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무천설과 후천설의 입장은 이런 세계를 구분하여 다루지 않는다. 예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언제 있을 것인지, 시간 차이만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3) 계시록이 말하는 거듭되는 재앙이 개별적 심판인가, 사회 전체가 함께 당해야 할 사회적 심판인가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계시록 20:8 이후에 있을 곡의 전투와 백보좌 심판은 개별적 심판에 속한다.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되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모두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2~15). 예수님이 알려주신 양과 염소의 비유도 개별적인 심판인 것 같다(마 25:31~46). 천년왕국 이후 인류가 마지막에 당할 재앙은 죄와 죽음, 부활과 영생을 구분하는 개별적인 재앙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임하기 전에 있을 재앙은 개별적 심판이나 재앙으로 보기 어렵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전의 재앙도 성도들은 공중 들림을 받아서 피한다고 본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휴거(携擧, rapture)”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계시록의 재앙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당해야 할 재앙일 것 같다. 6.25 전쟁의 고통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함께 겪어야 했다. 지진의 피해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를 두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것이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와 나라가 대적할 것이며, 도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라고 하신다(마 24:6,7).
이와 같이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재앙은 그 사회 구성원이 함께 당할 사회적 재앙이다. 곧 개개인의 믿음과 불신을 가려서 내리는 재앙이 아니고, 사회 집단 전체가 당하는 계명의 불순종에 따른 심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재앙의 지역 범위는 알 수가 없으므로, 특정지역에 한정된 재앙일 수도 있고, 지구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이 재앙은 요셉의 때에 당한 기근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요셉의 때에 닥친 기근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던 족장들도 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이스라엘의 패망과 바벨론 포로의 고통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들도 함께 당해야 했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의 때가 아닌데도 임하게 될 각종의 재앙들은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당해야 할 고통이다.
요셉의 때에 기근을 이겨내는 방법은 하나님이 지으신 땅과 경제의 원리를 알아서 그 기근을 미리 대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평소에 토지가 내는 양식을 기근에 대비하여 비축하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족장들이라도 양을 치는 목축업으로는 장기로 계속될 기근을 해결할 수가 없다.
흉년과 풍년의 결정은 하나님과 땅이 하는 것이지, 사람의 믿음이나 행동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먹을 것을 내고 있는 땅과 그 땅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주는 희년법 이해가 필수적이다(레 25:4~7,19). 땅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양식을 토지 자신의 생산물로 주고 있기 때문에 비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말하는 재앙이 하나님에 대한 사회적 불순종으로 당하는 집단적 재앙이라면, 그 재앙이 오기 전에 우리가 이 사회적 재앙을 대비하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요셉이 기근을 사전에 예측하고, 양곡을 비축하는 것과 같은 대비를 말한다.
(4) 계시록의 종말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계시록의 이해에 이스라엘이 빠져 있다. 기독인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해한다고 해도 종교적 편견을 가진다. 만약에 지금 세상 끝날이 와서 백보좌 심판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 중에 구원받을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상태의 세상으로 종말을 맞게 하실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알려주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천년설이나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도 비슷하다.
이 주제를 다루려면 먼저 명확하게 해 둘 것이 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롬 10:12,13).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예외는 없다.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종말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가족 중에 믿지 않은 형제를 걱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 종말에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영적 상태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이 가진 선민사상은 남에게 자기 종교를 전도하지 않으며, 또 남의 종교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큰 문제다.
에스겔서나 요엘서에서 약속된 성령의 강림은 실제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다(행 2:1,2). 그곳은 예루살렘이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 중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령 강림으로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어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복음 전수가 스스로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도 바울을 회심하게 하여 사도로 삼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도 사도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실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앞으로 하나님이 내릴 각종 재앙과 구원의 계획에는 이스라엘을 위한 특단의 조치도 들어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특단의 조치가 바로 시한부로 두는 각종 사회적 재앙과 재앙 후 있을 천년왕국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가 계시록의 재앙이나 종말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태도가 과연 성경적일까? 하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셨다(창 12:3).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름과 택함 안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진 빚이 크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복음까지 전수받은 사실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종말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말하지 않는 것은(관심이 없는 것은), 또 하나의 문제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이라는 우월감으로 인하여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구주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적 우월감이나 유대교에 대한 배타적 감정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고 있다면,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초림 예수는 기독교가 먼저 수용했지만, 재림 예수의 영접은 이스라엘 민족이 먼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롬 11:25,26).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주제에도 관심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종말에 대한 논의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면 그게 문제라는 뜻이다. 기독교가 영적인 이스라엘로 대체가 되었다면(대체신학), 그것으로 자만하지 말고, 육적 이스라엘의 구원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5) 기존의 종말론은 종말에 대비하는 우리의 생활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예수 재림은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말을 준비하는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에 초첨을 두기보다 먼저 종말을 대비한 나의 삶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도 요한이 본 계시록의 최후 심판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종말관으로 이 세상을 섬기고 살아가려는 안목이 더 필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종말의 가르침과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열 처녀의 비유처럼 항상 깨어서 기름을 준비해야 하고, 달란트의 비유처럼 받은 은사나 능력은 생활에서 열매를 내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열매와 가진 것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가 보여주는 염소처럼 살지 말고, 양들처럼 이웃을 찾아보아야 한다. 큰 자, 높은 자에 대한 통상적인 공양(供養, 디아코니아)이 필요는 하지만(마 25:45), 먼저 작은 자, 낮은 자를 를 찾아야 하고, 하기 싫거나 힘이 드는 공궤(供饋, 트레포)부터 하면서 살아야 한다(마 25:40).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청지기의 삶이다.
계시록에 들어있는 희년법과 경제적 내용
서두에 드리는 말씀
필자는 성경에 있는 희년법과 경제생활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희년과 경제는 유별나게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거나, 무시하여 왔다. 그래서 생활에서 보석 같은 희년법을 두고도, 이 혜택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당하지 않아도 될 경제적 고통을 당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에서 경제적 요소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확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성경 이해에서 아직 덮여있는 부분이나 난해한 부분을 만나면 희년법과 경제를 넣어서 살펴보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혈액형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채취한 피에 시약을 넣어보는 것과 같다. 겉보기로는 그냥 같은 피로 보이지만, 시약을 넣어보면 혈액형이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제가 보는 성경 이해가 그러하다. 이것은 성경 이해에 다른 잡다한 것을 넣으려는 것이 아니고, 원래 들어있는 것을 사람들이 빼버려서 다시 복원시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도 풀리지 않거나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희년과 경제생활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보고 있다. 물론 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묵시적 내용을 상징적 언어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 쉽게 풀리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필자가 계시록에서도 희년법과 경제가 들어있다고 보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1) 24 장로와 네 생물의 역할(계 4:4, 4:6)
(2) 일곱 인봉과 토지문서(5:1~5, 6:1~8:1)
(3) 에스겔 12 지파의 토지분배와 계시록 12 지파의 인침(겔 47:13,14, 계 7:4~8)
(4) 희년 주기로 찾아보는 전삼년 반, 후삼년 반(11:2,3, 12:6,14, 13:5)
(5) 짐승의 표와 경제문제(계 13:17, 14:11, 15:2, 16:2, 19:20, 20:4)
(6) 바벨론과 상인들의 몰락(18:3,11,15,23)
(7) 사탄의 결박과 물질 탐욕(계 20:1,2,3)
1. 24 장로와 네 생물의 역할
24 장로의 역할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4)
계시록에서는 천상에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고, 그 앞에 24 장로가 있다(계 4:3,4). 24 장로는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사도)로 신·구약교회의 대표들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이스라엘 장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출애굽기 3:16에 있다. 그 후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직한 70인 장로가 있다(출 24:1). 장로는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을 겸비한 자로 백성들의 우두머리(두목)로 세웠다. 장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민족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모세를 도와서 사법과 행정을 맡았다.
지역에서 뽑힌 장로들은 성읍 주민의 생활에 관련된 송사를 맡았다(신 19:12, 21:2). 패역한 아들은 장로를 불러 징계하였다(신 21:19,20). 장로의 역할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토지의 상속권이 걸려있는 계대결혼(신 25:5,8,9)과 토지거래, 무르기 등에서 증인으로 서는 역할이다. 룻이 토지 무르기를 할 때 장로들은 성문에서 증인의 역할을 담당했다(룻 4:2,9,11).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자이므로(룻 2:1) 지역 장로로 보기도 한다.
예레미야가 사촌 하나멜의 기업을 무를 때에 증인을 세웠다(렘 32:12). 이때 토지 무르기를 하면서 증인들 앞에서 작성한 매매증서가 인봉한 것과 인봉하지 않는 증서가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장로들은 백성들이 희년법을 지키거나 어기는 사례를 생활현장에서 직접 관여하고 보아온 역사적 증인들이다.
장로는 크게 보면 한 나라의 사법과 행정을 맡았고, 지역 성읍에서는 생활에 관련된 송사를 해결하였다. 특히 장로는 토지의 상속과 거래 등에서 증인을 서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이 장로의 두드러진 역할이다. 계시록에서 24 장로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행정과 경제생활 업무의 전반을 지도하거나 토지 거래에 증인이 되는 대표적 사역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로의 신분과 역할은 제사장 직분과 다르고, 왕과도 다르다. 제사장들은 제사와 종교업무를 전담하는 사역자들이다. 왕은 통치 조직에서 행정과 경제생활 전반을 관장할 책임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들은 바알 신과 제도를 먼저 도입하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희년법을 어겼다. 그래서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 앞에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이다. 그 대신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24 장로들은 선지자의 역할이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계시록의 기자 사도 요한도 장로이자(요이 1:1, 요이 1:1), 선자자이었다(계 22:9).
그리고 모세가 조직한 70인 장로 제도는 예수님 당시는 제사장들도 들어간 산헤드린 공회(마 26:59)로 바뀌었다. 이 공회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와 정치를 관장하는 최고기관이었다. 그러나 성전까지 상인들을 끌어들여 부패하였고, 로마 총독부와 결탁하여 예수를 모함하여 십자가형을 받게 한 장본인들이다.
네 생물의 정체와 역할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계 4:6)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4)
요한계시록에서 네 생물은 늘 24 장로와 함께 등장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도 24 장로와 위치가 같다. 네 생물은 이사야서의 스랍, 에스겔서의 그룹과 연결시켜 그 역할을 찾아보아야 한다. 네 생물은 신분이 천사이거나 네 천사와도 관계될 것 같지만(계 7:1,2), 확실하지 않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실체가 확실하지도 않은 “생물”의 이름을 보좌 주위에 두고, 일을 하시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네 생물은 모양이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다. 사자는 권위와 전능자의 의미를 가지고, 송아지는 희생과 섬기는 종, 사람 같은 모양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지혜를 상징한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비상의 기질을 가져서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하고 있다. 구약시대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이었다(히 13:11).
네 생물은 생물이라는 이름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 곧 천지 만물과 그 생명체를 상징하거나 대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생명체를 먼저 창조하셨고, 사람은 그 관리자로 지음을 받았다(창 1:26,28). 세상 죄악을 심판한 노아의 홍수에도 생물들은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다(창 7:14~16).
희년법에서 안식년에는 생산물을 거두지 않고, 야생으로 두고 들짐승들이 먹게 해야 한다(레 25:5~7). 일하는 가축은 안식일에 쉬게 하고(출 23:12), 짐을 싣고 엎드러진 나귀는 등짐을 풀어주어야 한다(출 23:5). 사도 바울은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 받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다(롬 8:18~21).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크고 넓고, 장엄하지만, 그 우주에는 어디든지 생명체가 살아야 그 존재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생명체가 가진 생명력(에너지)은 우주와 물리학적 속성을 가진 여러 개체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특수한 개체다. 우주와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물리적 에너지는 모두 생명 에너지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은 피조 세계와 피조물 중에서도 생명을 가진 자연 생태계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진다. 기독인은 자칫하면 사람 또는 사람의 영혼만이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하나님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생명체라도 그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며, 주인이시다(시 24:1).
네 생물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올릴 때 24 장로들도 함께 경배하며 만물을 지으심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계 4:11, 5:14). 네 생물은 일곱 인봉을 떼는 첫 단계에 등장하여 인봉을 모두 떼기까지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계 6:1,19:4).
2. 일곱 인봉과 토지문서
인봉한 토지문서와 일곱 인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1)
계시록의 재앙은 일곱 인을 떼면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일곱 인에서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는 대체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에스겔서 2:9,10에의 말씀을 따라 재앙을 기록한 것으로 보며, 다른 하나는 통상적으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지칭한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봉인된 두루마리를 토지문서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곱 인에서 "인(印, seal)"은 소유권을 증명하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두루마리가 소유권을 표시한 문서라면, 그 두루마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토지 소유권에 관련된 문서로 보아야 한다. 『희년과 복음』의 저자 장진광 목사는 계시록 5:1에 말하는 두루마리를 토지문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봉을 떼는 절차는 사람이 희년법을 따라 하게 되는 토지 무르기를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직접 하는 절차로 보고 있다.
계시록의 구조를 시간적 구조로 보지 않고 병행적 구조로 보면, 일곱 인을 떼는 일곱 절차의 재앙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이 반복되는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토지문서를 개봉하는 일곱 인의 재앙은 계시록의 전체 내용에 중심(본론)을 이룬다. 그만큼 계시록은 토지문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일곱 인과 토지문서, 관련 자료>
1) (송병천 - 2) 일곱 인에 대... : 카카오스토리 (kakao.com)
2) 천년왕국 이야기 (7) / 하나님의 안식과 통..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3) 두루마리를 취하신 어린 양_요한계시록 5:1-..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4) 우리의 구속자 고엘이 되어 오신 하나님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일곱 인봉과 예레미아의 토지문서
일곱 인으로 인봉한 두루마리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사촌 하나멜의 토지를 무르기 하는 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다. 예레미아의 토지 무르기는 예레미야서 3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32장 전체가 모두 토지 무르기와 관련된 내용이다.
예레미아는 토지 무르기에서 증인을 세우고, 두 통의 매매증서를 작성한다. 하나는 인봉한 매매증서이고, 다른 하는 인봉하지 않은 증서다. 인봉하지 않은 증서는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여 거래의 증표로 삼고, 인봉한 매매증서는 토기에 담아서 오랫동안 보존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 인봉한 매매증서는 법과 규례대로 한 것이었다(렘 32:11).
예레미야가 토지 무르기를 한 때는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가는 시대다. 그 당시 나라는 바벨론에게 빼앗긴 상태이므로 무르기를 해도 그 토지를 경작할 수가 없던 시기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이 토지 무르기를 하게 한 것은 미래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법을 어겨서 포로로 잡혀갔으므로(대하 36:1), 회복의 때는 그 희년법까지 회복될 나라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렘 25:12, 29:10).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토지 무르기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을 소식을 알려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밭을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포로를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렘 32:44).
토지문서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개봉한 매매증서는 토지 매입자의 권리를 보증한다. 이 권리는 사용자의 권리를 보증하는 것이므로, 사용권은 매매를 통하여 권리자가 임의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인봉한 매매증서는 토지 소유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토지를 분배받거나 상속받은 자는, 그 토지를 영원히 팔지 말고(레 25:23), 자손대대로 상속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 토지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때까지 그 상속권을 보유해야 한다. 그래서 인봉한 토지문서는 영구로 보존하는 것이다.
일곱 인봉의 개봉과 미래
장진광 목사는 계시록에서 일곱 인을 떼는 작업은 예레미야의 토지 무르기와 같이 인봉한 토지문서를 떼는 절차로 본다. 영적으로 보면 토지문서는 땅이 사람의 죄로 인하여 마귀에게 잡혀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값을 치른 희생이 있었다. 십자가상에서 운명 직전 “다 이루었다(요 19:31)”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마귀에 잡혀있는 값이 모두 지불되어서 토지 소유권은 무효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계시록 6장부터 봉인을 떼는 작업은 이미 무효화 된 소유권을 개봉하여 증인이 보는 앞에서 소각하는 절차라고 한다.
요한은 이 인봉된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가 없어서 크게 울었다. 그러자 장로가 그 인봉을 뗄 자가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계 5:5, 창 49:9)라고 했다. 이 일은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선 어린 양만이 할 수가 있다(계 5:6). 그런데 인을 떼는 일을 주관하는 네 생물 중에는 첫째 생물의 특징이 사자(獅子)로 묘사되고 있다.
누가복음 족보를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혈통을 따른다(눅 3:23). 누가복음 족보는 왕의 족보인 마태복음 족보와는 달리 다윗 왕 이후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눅 3:23~31). 그 이유는 다윗의 손자, 나단 계보가 레위기 희년법과 민수기 토지 상속법(민 36:9)을 따라서 베들레헴 기업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에스겔의 환상에서도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는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 예언되어 있다(겔 37:24,25). 보통 선지자가 다윗이 왕이 된다는 예언은 초림 예수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에스겔의 예언은 다윗이 통일이 된 후의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초림보다는 초림 이후에 있을 시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에스겔 환상의 토지분배도 초림 이후에 있을 일이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이 예언은 아직 성취된 바가 없으므로, 계시록 5:5의 일곱 인봉을 떼는 것은 다윗 왕통의 후계자가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때에 성취될 것이다.
계시록의 내용을 병행적 구조로 보면, 일곱 인의 재앙은 그 인을 떼는 절차 안에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과 천년왕국도 일곱 인봉을 떼는 절차 안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토지문서를 개봉하는 일곱 인의 재앙은 계시록의 전체 내용에서 중심 주제를 이룬다. 그만큼 계시록은 처음 일곱 인, 곧 토지문서의 개봉이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일곱 인봉을 떼는 네 생물과 24 장로의 역할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계 6:1)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일곱 인은 떼는 작업에는 네 생물이 등장하여 그 일을 주도하고 있다. 일곱 인을 떼는 작업에 왜 네 생물이 말을 하고 있을까? 물론, 네 생물은 상징적인 표현이라서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한다.
앞에서 네 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과 그 피조물에서 존재하는 생명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계시록에서 네 생물, 네 천사라는 말에서 ‘넷’이라는 수는 사면을 가진 땅을 상징한다. 창조 세계에서 하늘은 7, 땅은 4를 의미한다. 그리고 666에서 6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4의 수를 가진 네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이라는 말로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맡고 있다. 생물은 사람과 같이 땅과 하늘을 처소로 삼고, 자기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권 표시로 인봉한 두루마리를 떼면서 생물을 대표로 세워서 그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에서 땅과 생물을 짓고, 사람에게 땅과 생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땅과 생물을 다스리는 방법도 땅의 안식법과 희년법을 주어서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땅을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고, 팔고 사기를 반복한다. 안식년이 와도 땅은 쉬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맡겨준 생물을 돌아보아야 할 사람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며, 생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탄식하며, 아들들이 나타나서 해방시켜 주길 바라고 있다(롬 8:19~22). 피조물의 탄식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봉된 토지문서를 개봉하여 무효화시키고, 땅을 속량하려고 하신다. 생물은 땅과 자연을 자기가 필요한 만큼, 그것도 사용만 한다. 그러나 사람은 땅과 자연을 소유하고 싶어하고, 이를 팔고 사서 이익을 남기며, 훼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토지문서의 개봉은 "생물"이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내세워서 그 사역을 주도하게 하신다.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24 장로들은 어린 양 앞에 엎드려 성도들의 기도를 담은 대접을 가졌다(계 5:8). 이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을 말한다(계 6:10, 8:3,4). 24 장로는 구약시대부터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관장하는 행정을 맡은 자들이었고, 지역에서는 토지 무르기와 같은 재산권 거래에서 증인으로 현장에 입회하였던 지도자들이다.
3. 에스겔 12 지파의 토지분배와 계시록 12 지파의 인침 받음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경계선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몫이니라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겔 47:13,14)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3,4)
봉인된 여섯째 인을 뗀 후에 하나님의 종들에게 다른 인을 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록 7:2의 인 맞은 자에서 인은 6장의 일곱 인과 용어의 뜻이 같다. 같은 소유권을 보증하거나 표시하는 증서라는 뜻이다. 이번에는 사람의 이마에 인을 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인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표시한 것이다. 이 인침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144,000명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44,000명은 이스라엘 12 지파와 12 제자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수라고 하였다. 그래서 144,000명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인 맞을 사람의 수, 아니면 천년왕국에서 특별한 사역을 맡아야 할 자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일곱 인봉을 떼는 것은 토지문서를 개봉하여 소각하는 절차라고 보았다. 물론 이 말은 실제로 토지문서를 소각하는 절차를 밟는다는 뜻이 아니다. 희년법과 상반된 지주제도를 표방하는 토지의 소유권을 소멸시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계시록 5:1 이하에서 일곱 봉인을 떼는 절차 안에서 12 지파에게 인을 치는 것은, 에스겔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 12 자파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에스겔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12 지파에게 토지를 분배하라고 하였다(겔 47:13,14). 분배받은 토지는 왕도 희년법을 지켜서 백성들이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겔 46:17,18).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이 있다. 묵시로 보여주는 환상은 하나님이 그 장면을 보여주기만 하고, 백성들에게 무엇을 지시하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다니엘의 환상, 에스겔의 성전 환상, 그리고 지금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계시록 환상이 그러하다.
그런데 에스겔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지켜야 할 규례와 율법을 주면서,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그치고, 율법을 지키라고 했다(겔 44:4~31,45:13~25). 그리고 토지를 분배하고(겔 47:13~48:29),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겔 45:9~12), 희년을 지켜서 다시는 백성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겔 4716~18). 그렇게 된 에스겔 성전의 성읍을 “여호와 삼마(여호와가 거기 계신다의 뜻)”라고 하신다.
필자는 에스겔서에서 회복한 이스라엘의 희년왕국과 계시록의 일곱 인봉의 개봉은 희년의 성취를, 그리고 12 지파가 받을 인침과 토지분배 등은 교회시대에 결실을 보게 될 천년왕국과 직접 연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에스겔 환상의 토지분배와 요한의 환상에서 보여주는 일곱 인봉의 개봉과 12 지파가 이마에 받을 인침을 서로 연결시키면 아래와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 강림이 모두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였으므로, 천년왕국도 이스라엘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추정이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계 5:6) ⇨ 일곱 인봉(토지문서)의 개봉(계 6:1~17) ⇨ 12 지파의 인침(계 7:1~8) ⇨
⇨ 에스겔 12 지파의 토지분배(겔 47:13~48:35) ⇨ 희년법의 완성과 천년왕국의 도래(계 20:1~7)
물론, 계시록의 예언은 환상과 묵시이므로, 이런 환상을 현실의 실제 상황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에스겔이 보여주는 토지분배와 왕도 지켜야 하는 희년왕국은 우리가 순종만 한다면, 사탄이 결박되는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도 실제로 실현이 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4. 희년 주기로 찾아보는 전삼년 반, 후삼년 반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7).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5)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성경에서 계시록이 말하는 삼년 반의 기간은 다니엘서를 포함하여 7회가 나온다(단 9:27,12:7, 계 11:2,3, 12:6,14, 13:5). 42달, 1,260일, 한 때 두 때 반 때, 한 이레의 절반 등이다. 여기서 한 이레의 절반이라는 표현을 제외하면, 모두 삼년 반의 기간을 뜻한다.
이른바 전삼년 반, 후삼년 반, 7년 대환란에 대한 이해는 여러 설이 많고, 예민한 부분이라서 언급하기가 쉽지 않다. 전처년설의 입장은 7년 대환란이 있다고 본다. 무천년설 입장은 환란이 신약시대 전 기간에 걸쳐 반복될 사건이지 7년이라는 기간의 환란기는 없다고 본다. 계시록에서 전삼년 반, 후삼년 반, 7년 대환란의 이해는 다니엘의 70 이레 중 마지막 1 이레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 전체에서 3년 반의 기간은 먼저 엘리야의 때에 기근이 있었던 시기다(왕상 17:1,18:1, 약 5:17,18). 그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한 기간이 약 3년 6개월 정도로 추정된다(계 12:5, 마 2:13~15). 계시록 12:4~14에서 해산한 아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가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서 양육받을 기간이 1,260일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선지자 임무를 이어받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이 사역을 이어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이 약 3년 반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다니엘의 70 이레는 490년으로 희년 주기 10회 기간과 7년 격차로 연계되어 있다. 10회 희년 주기는 70 안식년 주기와 맞물려 있고, 70년 포로 생활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다. 희년 주기 시작연도는 모세가 희년법을 반포한 주전 1445년 7월 10일 처음 발효되었다(레 25:8,9).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때(눅 4:19)는 30회 희년 주기 1,470년이 지난 주후 26년 7월 10일이다.
주후 26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여 희년을 선포한 해이며, 다니엘 70 이레 중 69 이레가 정확하게 성취된 기간이다. 그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십자가에 희생되기까지 또는 부활하여 승천하시기까지의 기간이 약 3년 반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70 이레 중 마지막 1 이레는 3.5년이 이미 성취되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희년 주기와 70 이레의 기간
희년 주기 (단 9:24) | 주전 465 ~ 주후 26년 | 7년의 성취 및 이연 | |||
희년 주기 = 10회 희년 = 70 안식년 = 490년 | 선포와 이연 | ||||
70 이레 (단 9:25~27 | 7년 | 주전 458 ~ 주후 26년(69 이레) | 7년(3.5⇝3.5) | ||
3.5 | 3.5 | ||||
70 이레 = 70 안식년 = 490년 => 희년 주기 1 이레 이연 ⇨ | |||||
7년 | ①7 이레 | ②62 이레 | ③1 이레 |
①7 이레 : 에스라의 귀환 ~ 선지자 활동 종료, ②62 이레 : 중간기 + 예수의 희년 선포일, ③1 이레 : 공생애 기간~무기한 지속될 끝날까지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록된 3.5년은 이미 성취된 3.5년과 앞으로 남은 3.5년에 대한 중복된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계시록을 사건 기록의 시간적 구조로 보지 않고, 사건의 병행적 기록으로 보면, 11장과 12장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고, 시간의 반복적 사건을 앞장과 뒷장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계시록 12장에서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의 양육 기간 1,260일은 11장이 말하는 성전을 짓밟는 기간보다 앞에 있는, 곧 초림의 때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계시록 10:11에서 예언을 다시 한다고 한다. 이 말은 11장까지 사건을 뒤에서 다시 반복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12장은 일곱 인과 나팔에 대한 시간적 사건이 아니고, 앞의 사건을 부연 또는 반복하는 것이 된다.
다니엘 70 이래 중 남은 1 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에서 초림으로 성취된 기간과 미래에 성취될 기간이 연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 ‘연계’를 어려운 용어지만 ‘이연(移延, deferred)’이라고 하고 있다. ‘이연’이란 법률적, 경제적 용어로 시작된 효력의 유효 기간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 희생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효력은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기간이 끊어지지 않고 무기한 계속되는 것과 같다.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희년과 선포, 그리고 종말의 진행은 모두 그 효력이 시간에서 "이연"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니엘의 70 이레에서 남은 1 이레는 초림기 3.5년은 공생애로 성취되었고, 미래에 재림 시에 있을 3.5년은 기간적 이연으로 그 기한이 무기한 계속되고 있는 중에 있다. 그리고 이 기간은 희년 주기 30회 희년과 맞물려서 구약시대의 반복적 희년과 신약시대의 영구적 희년과도 직접 연계(이연)되어 있다.
구약시대 30회 희년의 성취 ~ 신약시대 영구 희년의 무기한 이연(지속)
다니엘 1 이레 3.5년의 성취 ~ 다니엘 1 이레 중 나머지 3.5년 무기한 이연(지속)
그래서 필자가 본 희년 주기 490년과 다니엘 70 이레의 490년은 기계의 톱니바뀌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그 기간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희년 주기로 다시 시간을 되돌려 보면, 출애굽에서 약속의 땅을 진입했어야 할 연도인 주전 1445년과 30회 희년 주기로 맞물려 있다. 더 뒤로 가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는 기간 약속을 한 횃불언약(창 15:13~17)과는 43회 희년 주기 2,107년과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7의 서수(序數) 주기로 변질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구속사의 시간에서 7의 주기는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와 크로노스(자연 시간)가 일치하는 시간이다.
주) 우리는 지금까지 희년 주기를 50년으로 잘못 알고 있다. 희년 주기는 50년이 아니고 49년이다. 그 근거는 레위기 25:8,9에서 7 안식년 다음 해가 희년이다. 이 기간은 기수로는 50년이고, 서수(주기)로는 49년이다. 오순절이 기수로는 50일이지만, 서수로는 49일(칠칠절)인 것과 원리가 같다. 희년을 50년으로 잡으면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과 주기가 맞지 않아서 사회적 혼란이 오게 된다. 아니면 안식년 7년 주기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다만, 다니엘의 1 이레 중 성취되었다고 보는 3.5년은 그 기간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이 2.5년인지, 3.5년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유월절과 초막절이 정확하게 6개월이므로 0.5년은 확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유월절이 3회만 기록되어 있어서 연수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니엘서 9:27에서 말하는 “절반”은 ‘중간’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반드시 3.5년이라고 볼 필요는 없지만, 계시록에서는 3.5년을 5회나 반복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계시록은 상징적 언어로 되어있으므로 3.5년도 정확한 연수라기보다 의미상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복음서에서 3.5년의 시간도 확실하지 않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계시록이 말하는 미래의 마지막 대환란의 기간은 7년이 아니고, 3.5년으로 보고 있다. 물론 3.5년의 추정은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단언할 수는 없다. 계시록은 7의 수로 되어 있으므로 대환란의 기간도 요셉의 때에 7년 기근처럼 7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희년 주기는 7의 서수이므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고, 영구 희년으로 이연되어 성취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희년 주기와 다니엘의 70 이레에 관한 전체 내용은 방대한 분량이므로 여기서 깊이 있게 논의할 수가 없다. 상세한 것은 필자의 다른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희년 주기와 다니엘의 70 이레에 대한 종합 정리 - Daum 카페
5. 짐승의 표와 관련된 경제문제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6)
** 짐승의 표에 대한 내용은 앞글에 설명한 내용을 다소 보충하여 그대로 반복합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의 표에 대한 기록이 여섯 번 나온다(계 13:17, 14:11, 15:2, 16:2, 19:20, 20:4). 표는 원래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아시아 도시국가에서 경제활동을 관장하던 제후나 관원(행 19:31)을 상징하는 이름과 수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로마는 11대 도미티안 황제(주후 81~96년)가 통치했다. 그 당시 아시아 도시국가에서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역 제후들이 있었고, 그 휘하에 "길드(guild)"라는 상인조합(또는 노동조합)이 있었다. 상인들은 황제를 숭배하는 상인조합(길드)에 가입해야 경제활동을 쉽게 할 수가 있었다. 짐승의 표는 "길드"라는 상인조합의 가입을 증명하는 권리 또는 표식으로 추정된다. 곧 짐승의 표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경제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이 표를 받은 자는 천년왕국에서 사역자가 될 수 없으며, 심판의 대상이다. 이 표를 상징하는 숫자는 666이다(계 13:18). 그래서 666의 상징수를 네로 황제를 지칭한다고 하기도 했고, 특정 종교 단체의 수장을 지목하기도 했다. 컴퓨터가 나온 이후는 바코드나 베리칩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표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고, 그 우상을 섬기는 권력자 집단과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는 단체나 무리를 뜻한다.
바벨론시대는 용을 섬기는 바벨론이, 로마시대는 로마의 제우스나 아폴로 신과 그 신들을 섬기는 권력자들이 주는 표(도는 권한)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짐승의 표이고, 666이다.
그러므로 이 표를 경제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정당한 소유권을 부정하거나 반역하는 가증한 소유권의 낙인이나 표식(標識, mark)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과 짐승들이 인정하는 표식인 셈이다. 계시록에서 직시한 짐승은 옛 뱀이나 용을 말한다(계 20:2, 12:9). 그러므로 오늘날 이 표에 해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소유권을 부정하거나 정당한 시장거래를 거부, 방해, 반역하는 실체일 것으로 보인다.
계시록에서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하거나 표의 거래를 묵인하는 주체(지도층과 상류층)들은, 땅의 음녀들(계 17:5), 땅의 왕들과 상인들(계, 18:3)로 추정하고 있다.
주) 소유권이나 권리를 나타내는 표(標)와 유사한 용어로, 권리를 사물(종이, 표면, 물체)에 나타내는 것이 표(表, 表示)이며, 이를 투표용지처럼 작은 쪽지로 나타내면 표(票, 投票), 문자나 형상과 같이 상징으로 나타내면 표(標, 商標)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용어는 문서, 증서, 증표(證票), 증권(證券) 등이 있다.
우상과 짐승의 표를 닮은 각종의 금융상품들이 있다.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가증하다고 해야할 각종 금융상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토지문서, 주식, 선물, 실물결제용 아닌 외환, 가상화폐 등이다. 이런 거래물에는 영원히 실물은 없고 가격만 있다. 실물(재화나 서비스)이 영원히 없는 거래이므로 허수 거래이며, 가짜 가격물이다. 이런 허수 거래, 가짜 가격물을 무분별하게 팔고 사는 행위는 그 자체가 가증스러운 매매 행위다. 그 대표적 허구물이 최근에 나온 가상화폐다.
주) 실물 없는 가격(허수 거래) : 토지는 100%, 주식과 가상화폐는 실물투자와 순이익의 재투자(적립) 없이 커진 가격, 선물은 현물 수수 없는 거래, 외환은 무역, 해외 실물투자, 해외 생활(해외 거주, 여행, 유학 등)과 같이 실제 경제활동과 관련 없이 매매차익만을 추구하는 상품성 화폐(외환) 거래 전액을 말한다.
이것들(허구 가격물)은 경제활동에서 가격과 거래만 있고, 그 안(거래차익)에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실물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거래는 생산 없는 부가 영원히 수평으로 이전될 뿐이다. 그래서 사회는 빈부격차와 물가상승, 금융위기와 불황, 심하면 경제 공황을 일으키며, 연속적으로 경제를 흔들거나 혼돈에 빠트리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질서에서 생산 없이 부(富, 실물, 가치)가 발생하는 세상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하지 못하는 가치의 사용이 가능한 세상도 만드시지 않으셨다. 곧 ㄱ. 생산 없이 값이 커지는 것과 ㄴ. 소비되지 않는 물질의 원금이나 가격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샛빨간 거짓말이다. 경제활동에서 생산 없이 커진 수나 가격이 소비라는 물리적 현상 없이 사용이 가능한 세상은 창조질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가격은 경제적 허수다. 여기서 허수란 인플레이션처럼 숫자와 가격은 있으나, 그 숫자를 채울 실물이 없다는 뜻이다. 땅값 매매차익 전액과 실물 재투자(적립금, 이익의 배당 유보액) 없이 커진 주식 매매차익, 가상화폐 매매차익 등이 모두 이 허수에 해당한다.
에덴동산의 뱀은 보이는 실과로 사람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했지만, 가짜 가격물들은 영원히 보이지도 않고, 실과도 아닌 것을 먹을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건전한 영성과 이성이 이를 식별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청년들까지 여기에 뛰어들어 빚끌이, 영끌이, 가짜 투자로 혼까지 빼앗긴다. 청년의 미래와 꿈이 담긴 종잣돈과 투자금을 하루아침에 다 날려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게 한다.
거룩한 생활법을 말하고 있는 레위기는 금지한 고기를 먹어도 가증한 짓이라고 한다(레 11:10,41,43). 레위기가 금지한 고기를 먹는 것이 가증하다면, 희년법을 하나님 정면에서 어기며, 이런 무분별한 금융상품들까지 거래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만 할까? 아마도 머리가 일곱 개에 열 뿔 달린 짐승(계 13:1,17:3)보다 더 간교하고, 가증스러운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짐승의 표가 곧 허구 가격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 가격물은 그 우상과 짐승의 속성이 가진 가증한 물건과 더러운 것들(계 13:4)을 빼닮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재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섬기는 맘몬을 경고한 바가 있다(마 6:24). 야고보는 말세에 쌓은 재물을 경고한다(약 5:3). 신약시대에 말세는 초림에서 재림까지 전 기간을 뜻하지만(히 1:2, 요일 2:18), 야고보는 세상의 마지막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계시록 18장에서 말세에는 사람의 영혼까지 팔고 사다가(계 18:13), 그 부가 하루 만에 몰락하는 것들이 있다(계 18:8,10,17,19). 필자는 계시록 18장이 말하는 경제적 종말 상태가 이 실물 없는 허수 거래와 가증스러운 경제 행위들이 직접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로만 보면, 아주 더럽고 교활하여 가증한 것(가짜 금융상품)이 거룩한 것(실물 상품) 위에 서있는 모양세다. 이 가격물이 시장에 들어서기 시작한 지 벌써 300년이 넘어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강도의 소굴"을 청소한 이후는 2,000년이 거의 다 되었다. 희년법 위반부터 치면 3,500년의 세월이다.
지금의 세상은 이것을 파생금융상품이라고 한다. 사람을 완벽하게 속이는 요물이다. 그래서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 이름과 가격과 수가 점점 더 교활하여지면서, 커지고 있다. 계시록 18장은 이런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 위 내용은 잘못된 사회제도를 말하는 것이지, 땅과 주식을 거래하는 개개인의 행위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6. 바벨론과 상인들의 몰락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계시록 18장 한 장은 바벨론의 몰락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벨론은 우상을 섬기며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 세력들을 상징하고 있다. 바벨론 시대는 바벨론, 로마시대는 로마가 그러했다. 이를 이스라엘 안으로 갖고 들어오면, 바알 신과 제도를 끌어들여 희년법을 무너뜨리고, 이를 악용하여 온갖 치부를 해온 계층들이다.
계시록 18장에서 몰락할 대상들은 땅의 음녀에서 시작하여 땅의 왕들과 상인들이다. 여기서 음녀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인, 왕들은 그 종교인과 결탁한 세상 권력들, 상인들은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한 자들이다. 계시록 18장의 몰락은 특히 경제적 상거래와 관련된 상인들을 집중하여 언급하고 있다. 상인의 몰락을 4회나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하루 동안에(8), 한 시간에(11), 한 시간에(17), 또 한 시간에(19) 무너지게 된다.
필자는 경제에 관심을 두어서 그러한지 몰라도 하루 동안에 몰락하는 상인들은 1929년 세계 대공황이나 2008년 세계의 금융위기를 연상하게 한다. 오늘날의 주식시장과 실물 없는 금융시장이 붕괴할 때 이런 모습을 보인다. 쌀이나 옷, 기계나 자동차 시장, 서비스 시장은 불황은 있지만, 하루 동안에 몰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자가 앞에서 혀가 닳도록 길게 반복하여 알려준 실물 없는 가격물은, 그 가격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계시록 18장의 상인들처럼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가 있다.
지금도 실물 없는 금융물이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면 무한정 커지고 있는데, 이는 허공에 쌓고 있는 바벨탑과 같다. 창세기 11장에서 세운 바벨탑은 땅 위에 세웠지만, 이 실물 없는 금융물은 땅도 없는 허공에 세워놓고, 숫자 키우기만 계속하는 바벨탑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현재물, 미래물, 영구물에 대한 거래 방식의 구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우상과 짐승이 주는 표도 경제활동에서 매매와 관련된 것을 함께 알아야 할 것이다.
7. 사탄의 결박과 물질 탐욕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2,3)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다. 실제는 아담의 탐욕이 먼저이었을 것이다. 뱀이 알려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계 2:6). 이것이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본성을 말한다. 이것이 커지면 경제적 물질 탐욕, 힘을 가지려는 권력욕, 타인에게 인정받고 추앙을 받으려는 명예욕까지 덩달아서 일어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이런 사탄(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여기서도 사탄은 에덴동산의 뱀처럼 물질, 권력, 명예 등을 준다면서 유혹을 했다(눅 4:1~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험을 이기셨다.
유대교는 우상숭배와 계명의 불순종으로 실패하였다. 구체적으로 바알 제도를 택하고 희년법을 버려서 패망했다. 오늘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신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하신다(마 6:24, 눅 16:13). 그런데도 사람들은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을 치르면서 마귀의 올무에 잡힌 우리를 속량시켜 주셨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어 공동체를 만들어주시고, 가진 물질을 내어놓게도 했었다(행 4:32~37). 그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행 5:1~6) 사도 바울을 회심시켜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엡 5:5, 골 3:5)라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인간의 탐욕은 줄어들지 않으며, 우상숭배는 그치지를 않는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으신 땅과 생물을 돌아보게 하시려고 사람을 지었다.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청지기의 권리이고, 의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고, 자기 구원을 받기에만 급급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땅과 생물들을 다스려야 할 청지기 직분의 사명은 관심이 없거나 아예 잊어버렸다. 개개인이 하는 청지기 직은 수행하여도, 창조의 본래 목적이었던 땅을 다스리는 청지기의 직분은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이 청지기 직을 바로 하라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주신 희년법마저 사람들은 눈여겨 보지를 않는다. 오히려 희년법이 금지한 것만 골라가며, 땅과 온갖 가공물(가짜 가격물)을 팔고 사기를 즐겨한다. 생산 아닌 가격물의 “사고 팔기”는 가증한 행위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도 이 가격물의 거래로 부를 취하기에 바쁘다.
필자가 글의 말미에 이렇게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사탄 결박의 필연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님이 친히 죄값을 치러주신 속량에도, 성령을 보내 주셔서 가르쳐 주어도, 타고난 탐욕을 스스로 이겨낼 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흔히 예수 재림에는 믿음 하나로 공중에 들림을 받아서 세상은 사실상 끝이 난다고 보는 시각도, 그 이면에는 공짜 구원을 염원하는 기대감이 들어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홍해를 건너게 하신 분이 약속의 땅도 무혈입성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홍해는 건너게 해 주지만, 약속의 땅은 공자가 아니다. 세상 죄를 사하여 주시기는 하지만, 천국은 진입할 의지가 있어서 들어갈 수가 있다(눅 16:160.
그래서 성경 구속사 전체를 살펴보면, 계시록 20:1,2,3에서 하게 될 사탄의 결박은 세상 구원의 필연적인 절차가 될 것이다. 사단이 결박되기 전에 있게 될 여러 재앙들도 사람의 탐욕이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년 동안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사탄을 결박시켜 놓고, 다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지막 심판의 때에 살아남을 자가 많아지고, 살아남아도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만,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남의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필자 자신이 그러하다.
천년왕국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그 논쟁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 재림이 언제일지? 이에 대한 해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천지를 지으시고, 아브라함을 불러서 택하시고, 마구간 초림으로, 십자가 희생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워 주심으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스스로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천사를 보내어 사탄까지 결박시키고, 사람을 천년 동안 훈련시켜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이런 것이다. 그 계획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오직 전능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속사의 경륜이므로, 그 온전하신 계획과 크신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