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천문현상
백제 동성대왕을 등재한 서기 서명기에 이상한 천문현상과 천재지변이 다른 천황 때와는 유달리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동성대왕의 활약을 은유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윤영식/232p>에 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6년 8월조; 장성(長星)이 남방에서 보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혜성이라고 하였다.
7년 3월조; 혜성이 돌아서 동쪽에 보였다.
9년 2월조; 큰 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갔다. 그때 우레 같은 소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유성의 소리다" 혹은 "지뢰(地雷)다"라고 했다. 이에 승 민승(旻僧)이 "유성이 아니다. 이는 천구(天狗)라 하는 것이고, 그 짖는 소리가 우레를 닮았다"라고 했다.
11년 정월조; 장성이 서북에서 보였다. 이때 민사(旻師)가 말하기를 "혜성인데 이것이 보이면 기근이 든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꼬리별(혜성)을 관측한 사실 기록은 분명히 아닌 것이고
이를 뇌, 지뢰 등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우레처럼 대단히 위력적인 것을 말한 것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天狗, 기근 등으로도 평하여 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닌 점으로 보아 '무열기'와 공통성이 있다.
하여튼 이 장성이 나타난 방향을 보자면 이 '일본서기'를 쓴 곳이 지금 나라[奈良]일 것이므로 그곳을 중심으로 하고서 볼 때
처음 장성이 보인 남방은 지금 구주남부 지역과 사국쪽으로서 동성왕의 출신지인 축자와도 방향이 같다.
그 다음은 동쪽이라 하였는데 이는 축자에서 세또內海를 거쳐 이세만 쪽으로 동정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다음은 서쪽으로 흘러갔는데 그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생각컨대 왜지가 평정되자 한반도에 진입하여 백제왕에 오른 것을 '서쪽'과 '우레'로 상징하였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기·기 집필자는 이 '우레소리'를 '하늘의 개'가 짖는 소리라 하여 가히 좋게 평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백제 물부가의 왕통이 아닌 이질적인 혈통의 왕이기 때문에 좋지 않게 본 데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보인 방향이 서북방인데 이는 백제의 북방지역인 것이다. 이곳은 진사왕 이래 수차 고구려에게 잠식을 당한 한수 이북으로서 이때 동성왕에 의하여 백제의 북방영토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동성왕 5년조를 보면 왕이 한산성(지금 북한산성)에 이르러 군민을 위문하고 협순(十日)이나 머물러 있었다고 하였으며, 동 17年 8월조에는 고구려가 치양성(지금 황해도 재령)을 포위 공격하자 신라병과 함께 고구려를 물리쳤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에 이룩한 백제강역을 동성왕대에 다시 다 찾았음은 물론 그보다 더욱 광대한 영토를 장만하였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성왕 10년조를 보면 위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의 싸움이 중국사서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영명 6년(A.D. 488, 동성왕 十年)에 위가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한 바 되었다 하였으며, 이로부터 2년 뒤에도 위가 거듭 백제를 공격한 기록이 보이는데 '남제서/동남이전' 백제조에 의하면 영명 8년(A.D. 490)에 위의 기병 수십만이 백제를 공격하였다가 또 크게 패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大破之」
위의 영명 8년 기사는 동성왕 12년에 해당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튼 위가 기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해로에 의해서가 아니고 육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황해 바다 건너 중국대륙 쪽에 백제영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자강을 넘지 못하던 위가 돌연 기병 수십만에 선박을 마련하여 태우고 그 넓은 황해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중국측 사서를 다시 보면 晉時(A.D. 317∼420)에 유성(요녕성흥현)과 북평(북경) 사이에 백제군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와 있다.
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백제전
晋世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治百濟郡.......梁書/백제전
晋世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治百濟郡...........南史/백제전
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通典/백제전
이와 같이 요서 지방에 백제군이 설치되어 백제의 영토가 그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晋世라 하였을 뿐, 시점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일본측 사서를 통하여 본 바와 같이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가 백제 건국이래 비로소 대단한 국력을 신장시켜 가라지역을 병합하고 이어 왜지에 진출, 지금 동경이 있는 관동평야에까지 원정을 한 걸로 보면 이 때에 넘치는 국력으로 요서에 영토를 마련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晋世에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에 의하여 백제군이 요서지역에 설치된 것만은 분명히 엿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 백제군이 동성왕대에까지 계속 경영 유지되었을까 하는 것이다...(중략)...이렇다는 단적인 증명이 동성왕대에 위의 기병 수십만이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중국측 문헌인 것이다』라고 나온다.
분식된 천문현상
위의 천문현상을 좀더 상세히 분석해 보면 몇 가지 정황을 더 알 수 있다.
6년 8월조에 『장성이 남쪽에 보였다. 사람들이 혜성이라 하였다』
7년 3월조에 『혜성이 돌아서 동쪽에 보였다. 7월 서련(瑞蓮)이 검지(劍池)에 자라났다. 한 줄기에 두 송이 꽃이 피었다』
8년 정월조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5월 장마에 홍수가 났다. 크게 가물어 천하가 굶주렸다』
9년 2월조에 『큰 별이 동에서 서로 흘러갔다. 천둥소리와 비슷한 큰 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유성의 소리다"라고 했다. 또는 "지뢰다"라고 했다. 승(僧) 민승(旻僧)이 "유성이 아니다. 이는 천구(天狗)다. 그 짖는 소리가 천둥과 비슷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3월 일식(日蝕)이 있었다』
10년 7월조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집을 부셨다. 9월 장마가 지고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1년 정월조에 『구름 없이 번개가 쳤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장성이 서북에서 보였다. 이때 민사(旻師)가 "혜성이다. 보이면 기근이 든다"라고 했다』
12년 2월조에 『별이 달에 들어갔다(흉사로 여겼다)』
6년 8월에 「장성이 남쪽에서 보였다」라는 것이 "동성대왕이 처음으로 구주에서 병을 일으키는 것"을 은유한 기사로 보인다. 위의 인용 내용과 같다. 이것이 무열전기에 「(태자가) 이날 밤 대반금촌련의 집으로 달려가 군사를 모으는 계책을 세웠다」라는 내용과 대응되는 것이고 예진별명의 집이란 구주를 말한다. 가야계의 기반이 가장 확고한 곳이다. 「사람들이 혜성이라 하였다」라는 것은 동성대왕의 전격적인 군사전략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7년 3월에 「혜성이 돌아서 동쪽에 보였다」라는 것이 위의 인용문처럼 "구주로부터 동쪽에 있는 나라[奈良]로 진출한 것"을 말하고 무열전기의 「대반련은 수천 명의 군사로써 길을 막고」라는 내용에 대응되고, 서련의 검지란 서(瑞)가 왕권을 상징하는 홀(笏)의 뜻이 있고 '칼 劍'자와 같이 보면 왕권을 사이에 둔 전투가 있었다는 암시다. 한줄기 두 송이 꽃이란 두 세력의 정면대결인 것이다.
8년 정월조에 「일식(日蝕)이 있었다」라는 것이 바로 열도왕권장악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해가 왕을 상징하므로 해를 가리는 일식은 왕권이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시작부터 해서 약 1년 반정도 소요된 듯하다.
9년 2월에 「큰 별이 동에서 서로 흘러갔다」라는 것이 "동성대왕의 백제진출"을 말하고 무내계와 경쟁하여 한 달 만인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라고 하여 백제왕권장악을 은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역시 백제왕권 장악에 대한 기사를 가장 나쁘게 「이는 천구(天狗)다. 그 짖는 소리가 천둥과 비슷할 뿐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백제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한 것이다. 열도 장악 후 다시 1년 정도 준비하여 반도로 진입한 후 한 달만에 왕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11년 정월에 「장성이 서북에서 보였다」라는 것은 위의 인용문과는 달리 동성대왕 10년, 12년에 "위나라 대군을 격파한 사실"을 은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햇수가 11년으로 실사상의 동성대왕 10년과 12년 두 햇수의 평균치로 나온다. 이런 것까지도 계산을 하고 기술한 것처럼 보인다.
위의 경우에 혜성도 나오고 일식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둘 다 천문현상이 아니다. 이런 기술기법 때문에 당연하게도 일본서기의 천문기록은 정확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민승과 민사는 동일인으로 침류왕을 등재한 서기 효덕기 백치 4년 5월, 6월조에서 침류왕이 몰한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는 기사에 등장하는 민법사(旻法師)로서 여기서는 백제계 대변인처럼 가야계인 동성대왕을 폄하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3년 12월 조에서 시호를 동성왕으로 하였다고 하면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남제 건원 2년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드리니 조서를 내리기를, '보명이 오직 새로워 은택이 먼 지역까지 덮였다. 모도는 동방에서 번국이 되어 먼 외지까지 직분을 지키므로 곧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제수함이 옳다.' 하였고, 또 영명(永明) 8년에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리므로 알자복야 손부(孫副)를 보내어 대(모대)를 책명하며 망조부(亡祖父) 모도(牟都)를 세습하여 백제 왕으로 삼고 말하기를, "아!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충건을 이어받아 정성이 먼 곳에 나타났다. 바닷길이 조용하고 조공도 끊임없기를 바라며 이에 이전[彛典:상도(常道)]에 천명을 이을수록 공경하라. 아름다운 대업을 공경히 받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 왕을 삼는다." 하였으나 <<삼한고기(三韓古記)
>>에는 모도가 왕이 된 일이 또 살펴 보면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 곤지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그 조부가 모도라는 말이 없으니 <<제서(齊徐)>>에 실린 것을 의문치 않을 수 없다]
(冊府元龜云(책부원귀운) : [<책부원귀>에 말하기를
南齊建元二年(남제건원이년) : '남제 건원 2년에
百濟王牟都遣使貢獻(백제왕모도견사공헌) :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파견하여 공헌하므로
詔曰(조왈) : 조서로 말하기를
寶命惟新(보명유신) : '천명이 새롭고
澤被絶域(택피절역) : 은택이 먼 곳까지 미쳐
牟都世蕃東表(모도세번동표) : 모도는 세대로 동번이 되어 글을 올리고
守職遐外(수직하외) : 멀리서 직책을 다하므로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가즉수사지절도독백제) : 곧 가즉수사지절도독백제
諸軍事鎭東大將軍(제군사진동대장군) : 제군사진동대장군의 칭호를 주었다.'고 하였고
又永明八年(우영명팔년) : 또 영명 8년에
百濟王牟大遣使上表(백제왕모대견사상표) : 백제왕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올리므로
遣謁者僕射孫副(견알자복사손부) : 알자복사손부를 파견하여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曰(책명대습망조부모도위백제왕왈) : 왕으로 책명하고 망조부의 벼슬을 세습케 하여 모도를 백제왕으로 삼고 말하기를
於戲(어희) : '아
惟爾世襲忠勤(유이세습충근) : 그대들 대대로 충성을 다하니
誠著遐表(성저하표) : 성심이 먼 곳에서 나타났다
海路肅澄(해로숙징) : 바닷길이 험난하나
要貢無替(요공무체) : 조공이 변함이 없었고
式循彝典(식순이전) : 떳떳한 법에 따라
用纂顯命(용찬현명) : 왕위를 잇게 하니
往敬哉(왕경재) : 삼가라
其敬膺休業(기경응휴업) : 그 아름다운 왕법을 이어받았으니
可不愼歟(가불신여) : 가히 삼가지 않으리오.'하고
行都督百濟諸將軍鎭東大將軍百濟王(행도독백제제장군진동대장군백제왕) : '행도독백제제장군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而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이삼한고기무모도위왕지사) : 그러나 <삼한고기>에는 모도를 왕으로 삼은 사실이 없고
又按牟大盖鹵王之孫(우안모대개로왕지손) : 또한 모대를 개로왕의 손자로 생각하나
盖鹵第二子昆支之子(개로제이자곤지지자) : 그는 개로왕의 제2자인 곤지의 아들인데
不言其祖牟都(불언기조모도) : 모도의 근본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則齊書所載不可不疑(칙제서소재불가불의) : ) <제서>에 실린 바 사실을 가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이 무령왕의 앞엣왕이었기 때문에 무령왕의 아버지로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배 다른 동생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백제 무령왕 앞엣왕이 동성왕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이 극악무도하여 백가에게 살해당하고 ...
엄청 잔인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니 저쨌니 하면서...예를 들자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이지요.
암튼 백가에게 암살당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나 다시 왜열도로 가 무열천황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이 계십니다.(1)
무열천황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부레쯔 천황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지나칠 정도입니다. 마치 악정을 하는 폭군과 관계되는 모든 표현을 모아둔 듯합니다. 그런데 유라쿠 천황의 왕통은 이 부레쯔 천황에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령왕의 쿠데타에 밀려나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왜열도로 건너가 다시 무열천황으로 잠깐 재위하게 됩니다. 그때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 일본의 스타하치망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 국보 ?호 스다하치망 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이라는 구리거울 입니다. 거기에 새겨진 명문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저는 남제왕을 '여대왕'으로 읽어 동성왕이라고 봅니다.(2) 이 구리거울이야말로 동성왕이 다시 왜열도로 돌아가 천황이 되었음을 말해 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요.
그럼, 동경에 새겨진 48자의 글을 살펴 보겠습니다.
‘계미년 팔월일십 대왕년’(癸未年 八月日十 大王年)
맨처음에 나오는 계미년은 서력으로 치자면 언제에 해당할까요?
무령왕의 재위기간은 501년부터 523년입니다. 그 재위기간 중에서 ‘계미년’이라면 503년 이외에는 없습니다. 곧 무령왕 3년입니다. 즉위하자 곧 왜왕에게 국서를 겸한 하사품을 보낸 셈이 되겠습니다.
문제의 '남제왕'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남제왕 재의시사가궁시’(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