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두 성인 관음 정취 조신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굴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때문에 이곳을 낙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낙산은 아마도 서역의 보타락가산으로 여기서는 소백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이 뜻을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의상이 7일간 재계하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에 물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 안으로 인도해 들어갔다. 굴속에서 하늘에 예를 올리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므로 의상이 그것을 받아 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재계한 지 7일 만에 바로 진신의 모습을 친견하자,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앉은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을 것인즉 마땅히 그곳에 불전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 했다.
의상이 이 말을 듣고 굴을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났다. 바로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원만한 얼굴과 수려한 모습이 엄연하여 마치 하늘에서 만들어 낸 듯하였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고 나서야 이곳이 바로 관음의 진신이 머무르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낙산사라 했다. 의상법사는 받은 두 가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그후에 원효법사가 의상의 뒤를 이어 와서 예를 올리고자 하였다. 처음 남쪽 교외에 왔을 때는 논 가운데에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농담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답했다. 다시 다리 밑에 왔더니 어떤 여인이 월경 수건을 세탁하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하자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그에게 바쳤다.
법사가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선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하기를 “휴제호 화상” 하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도착했더니 관음보살 자리 밑에 또 앞에서 본 신 한 짝이 있었다. 그제야 전에 만났던 여인이 성녀 즉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법사가 그 신성한 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신 모습을 보려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그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갔더니 왼쪽 귀가 떨어진 어떤 나이 어린 승려가 여러 승려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굴산조사에게 말하기를 “저 역시 신라 사람으로 집은 명주 지역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저의 집을 지어주소서”라 했다.
이러고 나서 조사는 큰 설법하는 곳을 두루 유람하다가 염관에게 불법을 받고 회창 7년 정묘(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창건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15일 밤 꿈에 전일에 보았던 어린 승려가 창 아래에 와서 말하기를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스님과 약속하여 이미 승낙까지 받았는데 어찌 그리 지체하십니까?”라 했다. 조사가 놀라 꿈에서 깨어나 수십명을 데리고 익령 지역에 도착하여 그의 거처를 찾았다. 낙산 아래의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을 물었더니 덕기라고 하였다. 그 여자에게는 겨우 여덟 살 된 아들 하나가 있어쓴데 항상 마을 남쪽의 돌다리 주변에 나가 놀았다. 그의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하고 같이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를 조사에게 알리자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던 다리 밑에까지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꺼냈다.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나이 어린 승려와 같았다. 이것이 바로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이에 간자를 만들어 절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나왔다. 이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그 후 1백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 이 산까지 번져왔으나 오직 두 성인을 모신 전각만이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버렸다. 몽고의 침략 이후 계축(1253), 갑인(1254) 연간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매우 급히 침공해와서 성이 함락되려 하자 주지인 선사 아행(옛 이름은 희현이다)이 은으로 된 합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치려하자 이름이 걸승인 절의 종이 이것을 빼앗아 땅 속 깊이 묻고 발원하기를 “내가 만일 병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것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라 했다.
갑인년(1254) 10월22일에 성이 함락되자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살게되었다. 적병이 물러가자 두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 이녹수가 감창사로서 이것을 받아 감창고 안에 간직하고 교대할 때마다 물려받았다.
무오년(1258) 11월이 되어 불교의 장로인 기림사의 주지 대선사 각유가 임금께 말씀드리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나라의 신성한 보물로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 관아의 창고에 있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킬 수 없으니 마땅히 대궐로 옮겨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했다.
임금이 허락하여 야별초 10인을 보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찾아 대궐 안에 안치했다. 그 당시 심부름하던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 한 근과 쌀 다섯 섬을 주었다.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지금의 흥교사이다) 농장의 막사가 명주 날리군(지리지를 살펴보면 명주에는 날리군이 없고 오직 날성군만 있다. 이곳도 본래는 날생군인데 지금의 영월이다. 또 우수주 영현에 날령군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이며 지금의 강주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이다. 여기서 말한 날리군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승려 조신을 보내어 농장을 관리하도록 했다.
조신이 장원에 올라왔는데 태수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어 깊이 미혹되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으로 나아가 그녀을 얻을 수 있도록 남몰래 빌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 여인에게 그만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정에 지쳐서 잠시 졸았다.
갑자기 꿈에 김흔공의 딸이 기쁜 얼굴로 문으로 들어와서 환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는 언젠가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만, 이제 부부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 했다. 이에 조신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년을 같이 살며 자식 다섯을 두었으나 집은 단지 네벽뿐이며 명이주 국이나 콩잎도 넉넉지 못하였다. 마침내 완전히 망하게 되어 서로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니 갈가리 찢어진 옷은 몸뚱이조차 가리지 못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열 다섯 된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니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우곡현에 도착하여 길가에 움집을 엮어 살았다. 그들 부부는 늙고 병들고 굶주려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10살 난 계집아이는 돌아다니며 구걸하다가 마을의 사나운 개에게 물려 아프다고 울부짖으며 부모의 앞에 와 쓰러지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닦고 갑자기 말하기를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옷차림도 깨끗하였습니다. 한가지 맛난 음식도 당신과 나누어서 먹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도 당신과 함께 입어가며 집을 나온지 50년 동안에 맺어진 정은 끊을 수 없고 은혜와 사랑은 한없이 깊어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년에 와서 쇠약하여 병은 해마다 더하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심해지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나 하찮은 음식도 사람들이 주지 않아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전마다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고,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도와줄 겨를이 없는 터에 어찌 한가하게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에 예쁘던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초와 난초 같던 꽃다운 약속도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솜과 같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 누가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 옛날의 기쁨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참으로 우환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굶주리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고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추우면 버리고 따뜻하면 따르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고 멈추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정해져 있으니 청컨대 여기서 헤어집시다”라 했다.
조신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각각 아이 둘씩을 나누어 헤어지려 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오”라고 했다.
바야흐로 작별하고 떠나려 하는데 꿈을 깼다. 타다 남은 등불은 가물거리고 밤도 새려하였다. 아침이 되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었다. 정신이 멍하니 인간 세상에 뜻이 없어지고 이미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싫어졌다. 마치 한평생의 괴로움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이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관음보살상을 바라보며 참회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돌아와 해현에 묻었던 아이 무덤을 파보니 바로 석미륵이었다. 물로 깨끗이 씻어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책임을 그만두고 사재를 털어 정토사를 짓고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 전기를 읽은 후 책을 덮고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어찌 반드시 조신의 꿈만 그렇다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들이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알아 기뻐하면서 애를 쓰지만 특별히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글을 지어 경계한다.
잠깐의 즐거움으로 마음이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어느덧 늙어버렸네/ 좁쌀밥이 다 익기도 전에/ 바야흐로 괴로운 인생이 일순간의 꿈임을 깨달았네/ 수행이 잘 되고 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렸거늘/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창고를 꿈꾸는 것과 같도다/ 어찌해야 가을이 와 청량한 밤 꿈꾸나/ 때때로 눈감아 청량에 이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