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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의 경주
지난해 5월부터 지금까지 1년 8개월 동안 경주의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역사기행을 이어왔다. 이번호에서 최근의 경주, 100년 전후 경주의 모습을 찾아보며 ‘역사기행 경주’의 연재를 마친다.
경주는 신라시대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신라가 천년 동안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면서 수도로 삼았던 도시로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경주의 도시 위상이 나라의 수도에서 지방도시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역사문화를 남겼다.
근현대사로 이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주는 많은 문화유적이 훼손되었지만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역사문화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신라 천년의 전통문화예술작품들이 일제시대에 크게 훼손되기도 했지만 그들이 발굴작업에 나서면서 세계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대과학으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석굴암이 일제의 손에 훼손된 현장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한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건축기술로 완벽한 조형미와 자연 제습기능을 갖추었던 석굴암은 지금 강제적인 제습과 유리관으로 차단해 보호하고 있다.
지금의 중앙시장과 경주역 앞으로 조성되었던 100년 전 경주 시가지의 모습은 오늘날 생활양식과 판이하게 다른 실상을 접하게 한다. 국보인 첨성대를 비롯한 문화재들이 생활현장에 밀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는 커녕 홀대받고 있는 장면이 100년 전의 사진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00년 전, 1910년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통해 문화재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새롭게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문화재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시기다. 일제강점기를 맞아 일인들이 불국사와 석굴암, 금관총과 서봉총 등의 문화유적들을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주의 고분들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리고 석탑 속의 금동불상과 금붙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에 의해 석탑이 파괴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문화융성시대를 맞아 복원된 문화유산과 카메라 앵글을 통해 남아있는 100년 전의 모습들을 보면서 마지막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문화재의 가치를 몰랐던 경주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경주군의 1922년 인구수는 2만8천899가구에 15만5천927명이 살았던 것으로 집계된다. 이중 일본인들이 510가구에 1천970명으로 약 1.3%에 해당한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던 100년 전의 경주사람들은 문화재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몰랐다. 국보 첨성대 바로 옆으로 도로를 내고, 고분 위로 오르내리며 아이들이 놀이터로 삼았다. 금관이 출토되고 유물들이 쏟아진 고분이 아이들의 놀이터요 정원이었다. 금관총과 호우총, 서봉총 등의 대규모 고분 옆에 초가집이나 움막을 짓고 거주지처럼 자연스럽게 생활한 모습들이 남아있다. 일제시대 고분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면서 역사문화유적에 대한 인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경주의 문화재들은 국보 제20호 불국사 다보탑에서 31호 첨성대까지 12점의 국보 문화재가 1962년 12월20일에 일제히 국보 1호 남대문과 같은 날에 지정됐다. 황복사지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 나원리오층석탑,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 등 5기의 석탑도 같은 해 같은 날에 국보로 지정됐다. 우리나라 사적 제1호 포석정을 비롯한 사적지와 경주의 보물 61호 불국사 사리탑 등은 1963년 1월21일 최초 지정됐다. 이 또한 보물 1호 흥인지문(동대문)과 같은 날에 지정됐다. 1960년 이전에는 국보급 문화재도 문화재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첨성대, 불국사도 돌덩이요, 왕의 무덤 능과 고분도 일개 무덤으로 치부됐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이토록 늦게 이루어진 것은 먹고 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왕조로 이어진 역사 속에서 양반은 양반대로 평민과 천민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웠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침략을 통해 문화재의 조사, 발굴, 유출, 훼손으로 이어지는 일들을 자행했다. 일인들의 고분조사에 이어 절터와 불상, 석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불과 희귀한 문화재들이 높은 금전적 가치로 평가되면서 석탑과 불교문화유적들이 수난을 겪게 됐다. 고분의 도굴에 이어 심지어 석탑을 폭파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장항리사지 동서오층석탑도 유물을 탐낸 일당들의 폭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통째 일본으로 옮겨가려는 것을 인근지역 주민들이 결사반대해 그 자리에서 보수하는 정도에 그쳤다. 일본인들의 욕심과 부족한 기술 때문에 석굴암의 자연 제습기능이 파손되었고, 지금은 현대기술로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훼손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비로소 문화재에 대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라고분과 유적 발굴
100년 전의 경주는 일본인들에 의해 신라시대 고분이 철저하게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조사와 개발사업 등의 명분으로 경주지역의 고분이 서울과 백제의 땅 등과 함께 무작위로 발굴되기 시작했던 시기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역사문화유적을 본격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동경제국대학 야기 쇼자부로가 처음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동경제국대 세키노 다다시는 1902년 경주를 중심으로 해인사까지 고적과 고건축물에 대한 조사를 했다. 경주읍성, 월성, 분황사, 오릉, 불국사, 백률사 등의 유적과 봉덕사범종 등이었다. 이어 일본인들은 1906년 미추왕릉, 내물왕릉 등의 고분과 경성 개성을 답사했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통감부가 건축, 고분, 성터 등에 대해 세밀하게 조사했다. 당시 경주 서악동의 고분 양식과 진평왕릉 등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1913년 야쓰이 세이이치는 경주에서 명활산성터와 남산성터를 답사하고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발견했다. 경주에서는 이때 경주고적보존회가 발족되었고 황남리 검총이 발굴됐다. 보문리의 부부총과 금환총, 완총, 동촌리의 와총, 서악리의 석침총 등의 고분들도 다수 발굴돼 적석목곽분, 횡혈식석실분 등의 무덤 양식이 드러났다.
일본인들은 1916년 정확히 100년 전에 조선총독부 주제로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제정하고 우리나라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고구려와 삼한, 가야, 백제, 신라, 옥저, 발해, 여진 등의 유적들을 지역별로 조사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으로 경주에서 하라다 요시히토 등은 보문리 고분군을 발굴했다. 1919년은 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총독부의 고적조사는 거의 중단됐다.
그러다 1921년 경주 술집의 뒷마당에서 증축공사 중에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이곳에서 금관이 출토되면서 세계의 이목이 경주로 집중되고 일본인들의 고분 발굴작업이 다시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26년은 스웨덴 황태자를 불러들여 서봉총에서 금관을 들어올리게 했다.
금관총 발굴과 함께 경주 월성,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황룡사지, 창림사지 등의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도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1923년에는 고이즈미 아키오 등이 경주 남산의 불적을 조사했다. 1924년 금령총이 발굴되고, 봉황대 옆 2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일본인들은 1926년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울산, 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가설하면서 경주역의 기관고 성토작업에 필요한 흙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봉분이 컸던 서봉총을 발굴했다.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당시 경주역사가 건설되어 왕릉 사이에 철로가 놓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 주관으로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일인들은 경주역과 고분군까지 1㎞에 이르는 거리에 궤도열차를 설치해 고분의 봉분을 마구 허물었다.
고이즈미는 “올해(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에 걸쳐 발굴 조사한 고분은 50여기에 달한다”며 서봉총을 발굴하면서 “고분에 여러 개의 말뚝을 박고, 곡괭이로 흙을 파서 무개차 위로 무너져 내리게 했는데 부장유물이 흙더미 속에 파묻혀 함께 흘러내렸지만 손도 쓸 틈도 없이 흩어진 토기편과 부장품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며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비용도 인부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흙 가운데서 유물을 채집하는 것과 토양의 단면에 잔존하는 석곽의 잔해를 서둘러 스케치하거나 촬영하는 것이 겨우 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입회한 경찰관도 우리들의 조사와 유물 채집을 공사의 방해자로 취급하는 공사 측과의 분쟁을 저지하는 것에 급급한 형편이었다”고 술회해 당시 고분이 무작위로 훼손됐다는 것을 입증한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경주 노서리와 노동리, 황남리, 황오리, 충효리까지 광범위하게 고적을 조사하고 발굴했다. 이어 현재 경주문화원 건물에 박물관분소를 설치해 유적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고적 발굴 작업은 경주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경주 남산에서 신라시대 불적과 함께 석기시대의 적갈색 토기편과 마제석부, 고배형토기, 컵모양토기 등을 발견해 경주에 신라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밝혔다.
◆문화유적의 변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전역이 같은 상황이었지만 특히 경주지역의 역사문화유적은 큰 전환기를 맞았다. 많은 문화유적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유물들이 수리되기도 했지만 일본으로 유출되거나 훼손되었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향사를 올리고 있는 분황사는 100년 전의 경주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분황사모전석탑은 당시 9층탑으로 불렸지만 일본인 학자들은 9층탑이 아니라 5층 또는 3층탑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기도 했다. 벽돌모양의 작은 석재를 사용해 중국의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도 보지만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어서 신라인들의 창작물로 추정한다. 지금 모습의 분황사 석탑은 무너져 내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는 법흥왕(514~540년) 때 처음 세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경덕왕 10년(751년)에 재상 김대성이 대규모 가람으로 구축했다는 기록이다. 불국사 대웅전과 연접해 숙종과 인현왕후의 원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었지만 일제시대에 허물어졌다. 일제강점기 초에 촬영된 사진에는 원당이 나타난다. 또 불국사 극락전의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사이에 일왕의 만복을 기원하는 위패를 두고 불국사를 일왕의 수호사찰로 운영했던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일본인들의 문화유적 발굴과 문화재 유출에 우리나라 일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문화재를 훼손해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사례가 흔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일들로 지금도 일본인들과 일본의 기관에서 우리나라 문화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관되거나 공공연히 전시되고 있다.
첫댓글 천년 이천년............
오래된 역사를 품고 있는 경주
100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까마득한 옛일로 잊혀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