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길과 버스안에서
목욕하러 가는 날이다.
깊은 겨울이면 오대천 물사정이 매우 안좋아져서, 때로는 밥 해먹을 물 조차 충분하지 않다.
한 달 쯤 목욕 안해도 설마 죽기야 하겠냐만.. ^^
단기출가학교를 진행하시는 사중의 입장에서는, 행자들의 위생과 건강도 돌보아야 하겠기에
그나마 월정사에서 가까운 근처 호텔(지금은, 켄싱턴플로라)로 단체 목욕하러 간다.
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한 걸음 내려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대산 호텔 가는 길이 꿈꾸는 듯 하였다.
싯구 속에, 그림 속에 들어간 듯.
그렇게 좋구나 한다.
혼자라면 아마 외로웠을 것을
많은 도반들이 있어
그 풍경이 정겹고 따듯하다.
사람은, 인연 때문에 아파하고
또 인연을 그리워하고...
무소의 뿔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나도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까?
(2005.1.13. 수행일기에서..)
바윗돌 사이사이를 지나
꽁꽁 언 오대천 위에 미끄럼도 지쳐보고
모처럼의 바깥 바람에, 소풍나온 유치원 동무들^^ 처럼..
그렇게 꿈길을 따라 한 줄로 걸어간다.
목욕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개운한 맘으로 다시 월정사로 향했다.
조그만 버스에 70여명이 탔으니 복작복작...
대행행자님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창밖을 빼꼼히 내다보며 한 마디 던진다.
"걸어오니까 좋든데.. 돌아가는 길두 걸어가자구요 !!"
조용... 누구도 반응이 없다.
묵언에 철저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말썽쟁이^^ 대행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나던 무렵인지라..
마침 옆에 섰던 나는, 한 마디 거들어 본다.
"행자님, 담에 저랑 또 걸어요. 오늘은 공양 시간도 늦었고 하니까, 버스 타고 얼릉 올라가자구요."
발그레한 미소를 살짝 보여주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대행...
버스는 어느덧 월정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금강교 앞에 내려서 (청량한 오대산 겨울 공기를 마음껏 느껴보다가)
이내 우리는 대열을 다듬고, 안행으로 줄지어 간다.
일불은, 결혼 후 나에게 말했었다.
그 때, 그 따듯하던 목소리가 누군지 참 궁금했다고.
(좋은 마음으로) 스치듯 건낸 다정한 말 한 마디..
이제와서 돌아보니, 과연 우리 부부의 인연의 끈이 되었는가 ? ^^
성 안내는 그 얼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오늘은 율이의 세 돌 맞이 생일입니다. ^^
아름다운 인연 만들어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또한 넉넉히 사랑해 주시는
오대산 월정사의 모든 불보살님들께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
3. 탁발 그리고 덧버선
수행 기간이라 뉴스를 듣지 못하여 전혀 몰랐지만.. 동남아시아에 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극심하다 한다.
오늘은, 그 분들의 어려움을 위로하기 위해 (수행 일정을 조금 변경하여) 시내를 돌며 모금에 나서는 탁발이 있다.
강릉 월정사 포교당에서, 주지스님 등을 모시고 "동남아 지진/해일 피해를 위한 자비 탁발" 입재식을 가졌다.
건장한 청년(?)이라는 이유로, 바람이 몹시 부는 한겨울 날, 플래카드를 들고 일행을 뒤따라가는 소임을 맡았다.
강릉 시내 한복판의 재래시장을 지나간다.
족발과 순대 등등..
음식 냄새가 바람결에 요란하지만, 수행의 이력이 조금^^ 붙어서인지,
살생의 내음(?).. 우리 중생의 먹을 거리로 가득한 시장 좌판의 냄새가 약간은 낯설기도 하고 편치만은 않다.
두어시간 탁발을 다니다보니, 그럴싸한 점포의 주인들은 조금 인색하시지만..
거리에 물건을 벌려놓고 (추위에 옷을 감싸입고) 노점 장사하시는 아주머니들은 오히려 인정이 푸근하기도 하다.
아차...
내가 탁발 발우를 들었더라면,
그 행자님에게 양말 하나 사드릴 수도 있었겠구나 !
어찌하랴. 플래카드를 들고 뒤따라가니, 돈은 만져 볼 수도 없다.
앞에 가시던 행자님에게 (몇 번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묻는다.
"저.. 꼭 필요한 게 있어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천원만 꺼내 쓰면 안될까요?"
흥성님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네. 그렇게 하세요~"
흔쾌히 대답해 주시는 행자님이 참 고마웠다. ()
그 행자님의 발우에 얹혀있던 이천원을 꺼내어, 시장 구석의 양말가게에 살짝 들어갔다.
양말 하나로는 남은 십여일을 지내기에 부족할꺼 같다.
마침 덧버선 두툼한 게 보인다.
"얼마에요?" "이천원이요."
자비 탁발을 마치고 월정사에 돌아와 저녁 공양 시간이다.
공양을 마치고 내 그릇 설겆이를 하고 있는데, 저 짝 너머 그 여행자님이 계신다.
얼릉 설겆이 마치고 공양간 문 앞에서 잠깐 기다린다. 행자복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덧버선을 내밀었다.
"이거 신으세요~"
"네?"
"제가 어떻게, 어떻게 구한거니까, 따듯하게 양말에 덧대어 신으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며칠이 지난후 새벽예불 마치고 법륜전 참선 시간.
저 건너편에 앉아있는 그 행자님의 발에는 어느덧 그 덧버선이다.
마음이 좋다. ^^
부처님 고마워요. 나중에 꼬옥~ 갚을게요. ()
(지금도 추운 겨울이면 꺼내어 신는, 일불의 그 덧버선^^)
*단기출가학교 동문의 <인연 이야기> 하편으로 계속됩니다.
0. 출가
1. 자자회
2. 꿈길과 버스안에서
3. 탁발 그리고 덧버선
4. 채공
5. 자원봉사, 수광전 보살님
6. 프로방스의 스파게티
7. 강릉 아산병원 응급실
8. 크리스마스 출산
9. 함께하는 수행의 길
월정사 출가학교 3기 선일 올림 ()
첫댓글 율이 생일이 크리스마스였군요. 벌써 세돌! 늦게나마 축하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빕니다.^^*
19기도 작년 겨울가뭄으로 머리 감는것도 금기시 되어서 목욕가는날은 목욕탕이 빨래터가 되었더랍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