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현학이 난무해서 그렇지 그 맥을 짚게 되면 그렇게 골치 아픈 장르가 아니다. 우리 삶과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철학>, 조금만 사고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는데도, 현학과 용어가 만나면 거대한 해무를 일으키며 본질은 꼬리를 감춰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원전은 읽지 마세요, 라고 권한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말고 해설집을 읽어라는 것이다. 메타 철학서도 보지 마세요. 뭐가 뭔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마치 저마다 영점이 잘못 맞춰진 총구처럼 오해와 굴절을 야기하기가 더 쉽다.
구조주의의 원류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이렇게 3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로 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 인간을 만든다 보았고, 프로이트는 인간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가운데 무의식(억압의 메커니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주 드물게 보고받고 있>는 것이라 했다. 두 현자는 깊은 심연에서 교통하고 있어보인다.
니체는 인간사회가 짐승의 무리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갈파했다. 왜냐하면, 짐승의 무리는 전원이 일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비판이나 회의 없이 전원이 눈사태를 피해 달려가듯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는데, 인간이 형성한 대중사회도 이와 비슷하다. <동일하게 되는 것 자체>에서 <행복>이나 <보람>을 찾고 있는 우리 현재의 모습을 보면 니체의 말은 정확했다.
소쉬르의 차연이 다시 등장한다. 소쉬르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자기가 속한 언어 공동체의 가치관을 승인하고 강화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었다.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지 않아도, 또는 프로이트가 예를 든 것처럼 신경증을 앓지 않아도, 그저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사는 것만으로 우리가 이미 어떤 가치 체계 속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자신 있게 말하는 '나의 지론'도 실은 ‘타인의 지론’에서 찾아진다. 확신을 갖고 내 의견을 타인에게 진술하는 경우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들은 것’을 되풀이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택시 운전사 가운데 사회 문제에 대해 단호히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라디오를 듣고배웠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크다. 여론을 채집하고 내 것으로 만든 결과다.
푸코의 <국가는 신체를 조작한다>는 주장도 재미있다.
고통은 만인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회 모든 시대에 동일한 강도나 동일한 형태, 동일한 고통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역치에는 개인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신체적 고통과 같은 물리적 생리적 경험조차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조건에 의해 전혀 달라진다. 무엇을 고통이라고 느끼고 무엇을 고통이라 느끼지 않는가라는 ‘고통의 역치‘는 그 사람이 어떤 문화적 관계망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에 따라 변한다. 이 말은 신체를 문화적인 통제 정치적인 기술에 의해 새로 조형할 수 있고 변용하고 길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107
나는 푸코를 읽으며 스타킹을 떠올렸다. 스타킹에 출연하는 예의 소시민들은 왜 차력사가 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여러분도 봤겠지만, 특출나지 않은 우리 이웃이 방송에 출연해서 신통방통한 묘기를 보일 때가 종종 있다(물론 기립해서 박수를 칠 만큼 놀라운 기량을 보이는 기예가도 있다). '뭔가 보여주'러 나왔는데, 도리어 출연한 패널이 더 잘 할 때도 있는 걸 보면 대국민 폭소도 가끔 터지기도 한다. 한데 마냥 '초짜'라 부르지 못할 초능력을 발휘할 때도 있는데, 이 지점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국가가 조작하는 신체>로 소급이 되는 예로 풀이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 최면과 단련으로 단시일만에 기예가나 초능력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폴포츠는 몇 명인가를 한번 물어볼까? 제작진은 시청률만 보장되면 한국의 전 국민을 폴포츠로 만들 준비가 돼 있어보인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증여‘에 있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포틀래치’를 예로 들었는데, <이 증여 의식에서 주인은 초대한 손님을 심리적으로 압도하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파괴적으로 탕진>하는데, <이 증여의 응수는 음식물이나 증여물을 충분히 준다는 정도를 초월해서 생활필수품인 보트를 파괴하거나 집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는 노예를 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고.
증여받은 자는 답례를 통해 일단 불균형을 해소하지만 답례를 받은 사람은 다시 거기서 부담을 느끼게 되고 그 부담감을 답례에 대한 답례를 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최초의 증여가 행해진 다음은 논리적으로 증여와 답례의 반복이 무한히 계속된다. 효과는 증여와 답례의 반복 덕에 사회는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마르크스의 전언과 일맥한다. 그것은 사회관계는 시계의 추가 흔들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되고 인간이 만든 사회 시스템은 그것이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177
프로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올해의 강팀이 내년, 내후년에도 강팀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다시 말하면, 약팀이 얼마든지 강팀이 될지도 모른다는 순환의 고리다. 이게 성립하면 밀물과 썰물은 어떤가. 한국의 품앗이는 어떻고, 한국 직장인들의 식 문화, 술 문화, 월드컵 우승국, 전쟁과 평화, 계절의 순환도 비슷한 예로 소급이 되지 않겠는가.
바르트와 라캉의 전언들은 내 관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특히 라캉은 너무 어려워 후대 철학자마다 다의적인 해석과 논란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