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인간극장’ 사유
아침 여유가 있는 날 ‘인간극장’을 즐겨 본다. 거기에는 지독히 편집되지 않는 삶들이 켜켜이 흐르고 있다. 민낯이 펄떡펄떡 뛰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을 성찰해보는 시간이 아리고 슬프지만 좋다.
오늘도 ‘인간극장’을 보았다. 여든네 살의 할아버지를 따라가다가 멈칫했다. 시골집 방문이 열리자마자 병상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가 확 다가왔다. 분명 거동을 못할 테고, 야윈 모습을 보니 오래 투병을 했을 테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말도 자유스럽게 하지 못할 테고, 할아버지가 다리를 주무르는 것을 보니 할아버지가 간병을 하는 것일 테고, 그리고... 울컥 부모님 모습이 겹쳐왔다. 판박이였다.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내게는 없는 차를 몰고 읍내로 나가 밤을 부치고 팔고, 일 년 농사지은 돈으로 할머니 스카프를 사갖고 돌아온다. 스카프를 목에 두른 할머니는 얼굴 가득 주름을 잡으며 웃는다. 이번에는 내 불효가 겹쳐왔다. 엄마에게 미소 가득한 선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도시에 사는 딸이 찾아와 할머니가 좋아한다는 팥죽을 쑤고, 전어를 구워 식사를 공양한다. 뜨겁다며 딱딱하다며 간혹 드시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말끔히 그릇을 비워내게 한 딸은 슬픈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이번에는 더 따갑게 내 불효가 겹쳐왔다. 일 년에 한두 번 연어 입에 넣어드린 것 외에는 저리 살갑게 식사를 도와드린 적이 없었다.
환자가 있는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법이라는데 갑자기 다른 가족들이 오고 제사상이 차려진다. 할아버지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할머니 방으로 가 무너지려는 마음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둘째아들 제사란다. 꼭 밤 12시 넘어 제사를 지냈던 우리 집 풍습이 너무 싫어서 엄마 누워 계신 이후로 제사를 안 지내는 게 그렇게 좋았다. 그런데 저 제사 풍경이 왠지 삶을 사는 사람들의 도리 같았다. 추석에도 설에도 차례를 지내지 않았던 부모님의 집에서 풍겨 나오는 냉기에 나도 크게 일조를 한 것 같아 가슴이 탁탁 막혀왔다.
엄마는 금년 2월에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꿈에 나타나지 않다가 석 달 뒤인가부터 함께 살던 집에 나타났다. 마지막 꿈은 엄마가 안방에서 어떤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웃지 못했다. 살아생전 따듯하게 품어주지 못한 내 불효가 너무 기가 막혀 그 모습이 무얼 보여주려고 했던 건지 가늠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삶에 대한 시적이고도 철학적인 사유는 잠시 뒷전으로 밀어 넣는다. 삶은 매일 불어오는 바람처럼 매일 보는 풍경처럼 매일 먹어대는 밥처럼 매일 자야 하는 수면처럼 본능으로만 흐른다. 거기에 덧붙여지는 지성(知性)은 그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치졸한 수사에 불과하다. 삶은 불효고 그 불효를 이겨내려는 완강한 수작일 뿐이다. 이 무시무시한 삶은.
그래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엄마 1주기 때 엄마 좋아했던 걸로 제사상 가득 차려드리자. 그 속내는 음험한 그림자가 꿈틀거리지만 말이다. 그게 삶일 것이다. 아, 이 어렵고도 슬픈 삶은. 진짜 극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