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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63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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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 권한을 주셨다.”
<치유의 공동체, 교회>
누군가의 소개로 한 냉담자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핵심은 그가 공동체로부터 느낀 소외감이었습니다.
그 소외감의 시초는 지도층에 있는 공동체 내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스쳐지나가는 ‘말 한 마디’였습니다.
그게 아니다, 너무 확대해석했다, 절대로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설득하느라고 백방의 노력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회도 세상의 축소판이다. 다들 부족하고, 죄인이고, 상처를 주고받고,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재차 강조를 해도 상처의 골이 워낙 깊었습니다.
그 형제와 대화를 나누면서 참으로 크게 반성했습니다. 의도가 없다할지라도 은연중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지... 말 한 마디라도 진지하게 해야겠다, 손짓 한 번, 표정 한 번이라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공동체, 사실 다른 무엇에 앞서 치유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심각한 마음의 질병과 죄로 인한 죄책감,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형제들에게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성사를 통해 치유활동을 전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형제들에게조차도 ‘할 수 있다면’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기적을 동반한 치유가 아닐지라도 따뜻한 사랑, 지극한 관심, 정성스런 보살핌만으로도 충분히 병이 나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마음과 육체, 영혼과 육신은 늘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독, 외로움, 우울증, 스트레스, 깊은 마음의 상처는 육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뿐만 아니라 약물중독, 알콜 중독, 정신이상, 자살로 몰고 갑니다.
우리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에게 적극성을 지니고 다가가야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으로 다가갔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억울한 사정, 말 못할 내막을 들어주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가 활발한 치유가 이루어지는 치료 공동체가 되지는 못할망정, 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공동체, 소화불량을 유발시키는 공동체, 짜증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공동체를 찾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기댈 언덕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적어 부끄럽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해봅니다.
우리가 하지 못해도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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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진정으로 사랑하면 더 떠나기 쉽다>
한때 ‘사귈 때는 열정적’으로, ‘헤어질 때는 미련 없이’라는 뜻의 ‘쿨한 이별’이 ‘사랑의 풍속도’처럼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쿨한 이별’은 이제 옛말입니다. 대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결별은 죽음이다”, “이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들 사이에서는 안전하게 헤어질 수 있는 ‘안전 이별’이 화두입니다. 이별 살인의 가해자는 대부분 상대 남성, 피해자는 상대 여성입니다. 가해자 남성들은 상대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소유욕, 일상생활 통제, 병적인 집착 그리고 무조건적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살던 김아무개 씨(32)도 이별 살인의 희생자입니다. 김씨는 2016년 4월19일 아침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기다리고 있던 전 남자친구 한아무개 씨(32)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도구들로 미루어볼 때 범행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씨에게 한씨와의 만남은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듯했지만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면 간다고 꼭 알려줘야 했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지 않으면 화를 냈습니다. 김씨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점점 다툼이 잦아졌고, 급기야 사귄 지 8개월 정도 됐을 때 김씨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한씨는 “함께 죽자”, “죽여버리겠다”며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협박과 잔혹한 스토킹이 시작되고. 쉴 새 없이 문자와 협박전화를 했습니다. 매일 김씨가 사는 아파트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란 듯이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멀리서 지켜봤고, 아파트 맞은편 교회에 올라가 집 안을 수시로 들여다봤습니다. 그러다 결국 살인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씨의 성장 과정을 보면 어릴 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사춘기 시절을 외톨이처럼 보냈습니다. 그는 범행 뒤에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별 살인’의 예방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가해자 스스로 범행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 다닐수록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법원에서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려도 살인으로 이어지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살인으로 이어진 다음에야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 ‘이별살인, 그들은 왜 살인자가 됐나’, 정락인, 시사저널 1562호]
사랑의 원천은 두 군데입니다. 자신과 하느님입니다.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이 맺어주셨다고 믿는 사랑입니다. 내 생각을 믿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 뜻에 맡기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두 다른 사랑의 결말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을 주시며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부어주시며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가 가져야할 유일한 힘은 ‘성령’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을 끄는 유일한 힘은 육체의 욕망입니다. 성령의 힘이 불이라면 육체의 힘은 물입니다. 성령의 불은 육체의 집착에 의해 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 중에 가장 끊기 힘든 것이 인간에 대한 애정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계속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재물에 집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한 가닥 실에 발 하나만 묶여도 새는 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파견 받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만 할 때는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랑할수록 더 쉽게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쉽게 떨어질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참 사랑의 기반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떨어지기 싫어서 죽고 못 산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집착입니다. 사랑의 주체가 하느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기 때문에 떨어지기 싫은 것입니다. 이 육체적 집착으로부터 대부분의 죄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사랑을 분별해서 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만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싫어합니다.
일단 이별을 통보받으면 자신이 죽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틀렸다는 것을 죽기보다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이 소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할 때도 하느님 뜻에 우선권을 둡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으로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려면 사랑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해야 합니다. 가끔은 이런 사랑이 냉정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도 떠나보낼 때는 과감히 떠나보내십니다. 그래서 지옥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자녀가 누구와 사랑하고 있다면 그 대상이 사랑의 힘을 자기 자신에 두는지, 하느님의 뜻에 두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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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1-6 :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즉 악한 영들과 질병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러한 권한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이러한 권능으로 사도들은 사람들을 신앙과 의화에로 초대하여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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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 두면 커서도 그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벼룩도 유리로 덮어 놓아 더 높이 뛰지 못하게 하면 유리를 벗겨도 그 정도밖에 못 뛴다고 합니다. 새도 발에 실 하나만 묶어 두고 지내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도 그 정도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참조) 그런데도 아직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법칙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참복음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가 먼저 복음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지배받으면서 하늘의 법칙을 선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재물보다 버리기 힘든 것이 ‘애착’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애정에도 묶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셨던,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셨습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떠나시고, 당신을 찾는 이들을 물리치시고 다른 고을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애착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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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는 목자의 심정이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일을 잘하고 무사히 돌아올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게 될 고초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이고, 그들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자녀가 먼 길을 떠날 때,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심정입니다. 예수님의 심정도 그런 부모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제자들을 염려하셨고 걱정하셨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더 많이 챙겨 주는 것이 당연한 일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1)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수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고, 그 힘을 제대로 받으려면 예수님과 온전히 함께하는, 즉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이 약속은 승천 후에만 효력이 있는 약속이 아니라, 처음부터 효력이 있었던 약속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제자들 쪽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물질적인 것들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면, 또는 가지고 있는 돈이 많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는 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온전히 함께 있으려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세속의 돈에 의지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 17,15-18)라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세상을 성화시키는 일, 즉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이 바로 그들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면 제자들 자신들이 먼저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들로는, 또는 세속의 돈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해지는 일은 믿음과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강인함’은 ‘거룩함’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사랑에서 생깁니다. (세속의 돈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믿음 없는 ‘허약한 사람’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강인함’을 갖춘 사람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와 유혹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해서 허약한 사람은 그런 일을 겪으면 금방 꺾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돈의 힘’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복음 선포는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것은 이론일 뿐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박 자체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돈의 힘’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돈의 힘’으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교회는 돈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돈의 힘으로 복음을 선포하지 말고 믿음의 힘으로만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돈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하면, 돈이 떨어질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5)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복음에서 오는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마음속에 기쁨은 없고, 돈 걱정만 가득하다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지는 못하고, ‘걱정스러운 소식’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교활동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 활동입니다. (실제로 본당신부가 ‘기쁨 없이’ 늘 돈 걱정만 하는 모습만 보이면, 그 성당은 선교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돈 걱정만 하는 성당을 누가 다니고 싶어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러 갈 때에는 복음에서 얻은 기쁨만 가지고 가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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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알베르토 신부님]
<필요한 것>
냉담하는 분들과 만나게 되면 생활이 나아지고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다시 나가겠다고 하는 말들을 듣곤 합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지만 되돌아보면 제 자신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에도 사람들이 좀 더 있으면, 예산이 더 있으면, 그리고 무언가가 있으면 사목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것은 복음인데, 오직 재물과 외형적인 것에만 얽매여서 예수님의 뜻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셨기에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헤아려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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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봉술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복음과 제자>
저는 요즈음 교우들과 천막 아래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참 힘든 시간입니다. 그래도 웃습니다. 기쁜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웃는 사제, 웃음을 주는 사제, 웃음을 받는 사제로 금년 한 해를 살겠다고 약속을 한 지 벌써 7개월째, 나는 웃음을 간직한 사람인가 스스로 되묻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수단 입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합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제의 입을 때,
“구원의 예복을 입겠나이다.”
영대 걸칠 때,
“불사(영원한 생명)의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당건물 안전진단 결과가 철거명령으로 나왔습니다. 갑자기 마음도 몸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성전에서 주일미사를 주님께 봉헌하는 날, 함께 눈물 흘리고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파견하신 우리도 웃음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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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신앙인의 목적>
목적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강조하시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파견된 목적에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채비를 한정시킵니다.
그리고 파견된 후에 역시 파견된 목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하므로 더 좋은 숙식을 얻기 위하여 이집 저집 옮겨다니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에 반해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결별을 선언하여 파견된 목적에 충실하게 머물도록 합니다.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은 부수적인 수단에 불과하므로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목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목적하는 것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항상 목적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설정한 삶의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나아가는 방향을 목적에 맞게 계속 수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삶은 세속적인 것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신앙에 부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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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과 파견 받은 이의 삶>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부르심과 파견 받은 이의 삶>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주어 세상에 보내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이들에게 다시금 믿음을 불러일으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생명 사랑 정의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파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신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어
마침내 다가올 마지막 날 완성될 나라입니다.
현재를 보듬지만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병자는 아픈 사람입니다.
육신이 그리고 마음이 아픈 사람입니다.
나약한 자신 때문에
더불어 살지 않는 다른 사람 때문에
죽음 같은 경쟁이 넘쳐나는 세상 때문에
어제가 아닌 오늘
내일이 아닌 오늘
바로 지금 이 시간 아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입니다.
바로 지금 아픔으로부터 구해줄 손길을
미어지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두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포함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궁극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병자의 치유는
현실 안에서의 고통의 극복, 해방, 자유를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 그리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이들이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사명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 땅의 삶에 드러내는 예수 운동,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세상 속으로의 투신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다른 사회운동과 다릅니다.
철저히 현실에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현실 개혁과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로 어우러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산 듯 죽은 듯 그 자리에 숨죽인 이들이 아니라
이 땅의 하느님 나라를 꽃피우기 위해
기쁜 소식 온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척박한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예언자적 운동가이자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바꾸는 복음적 혁명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운동가이자 혁명가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 가지의 자세를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물질적 기반에서
힘을 얻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의 힘은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능력, 물질적 기반에 의지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수행하는 운동은 퇴색하고 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복음을
떠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꺼이 빈손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주어진 것에 충실합니다.
옛 사람이나 지나간 일에 머뭇거리거나
희미한 미래를 상상하며
오늘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지금여기의 구체적 현실에 머물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예수님의 부르심과 파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무엇과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함께 할 수 없는 무엇과도
어떤 이유로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세력들과
적당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단호한 갈라섬이 있을 뿐입니다.
현실 안에 살아가면서도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결단이
그리스도인에게 쉼 없이 요구되는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사제로서
복음을 무기로 삼아
지금 주어진 사명에 철저히
복음을 거스르는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으며
믿음의 길을 쉼 없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거룩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이 길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든든한 믿음의 벗님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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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얼마일까요?>
교회에서 내려온 이야기 중에,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의 언덕을 향해서 오르실 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시고, 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시면서 가실 때, 그 얼굴의 땀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을 때, 조롱과 모욕에 찬 얼굴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들 가운데서 뛰쳐나와 자기 손수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마에 핏방울을 씻어주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하혈하다가 예수님의 겉 옷자락을 만져서 치유를 받았던 그 여인…. 성녀 베로니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예수님의 이마에 땀방울과 핏방울을 씻어주었던 그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운님들도 이 여인, 성녀 베로니카처럼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무덤덤한 마음이 아니라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지시고 모십시오.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왔던 모든 사람은 다 은총을 입었습니다. 지금 영적일기를 준비하는 이 순간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치유가 이루어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보내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영과 육을 살찌우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달리다가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달리기를 시작조차 못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주님의 말씀에 매달리라.”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 중에 매달리게 되면, 눈에 역경, 불행, 불의가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은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의 햇살과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며 하느님을 내가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 고운 님의 나이가 30입니다. 그러면 70%는 자기 것이고, 하느님 것은 30%입니다. 70%만 내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 지금 고운님의 나이가 60입니다. 그러면 40%는 자기 것이고, 60%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40%만 내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지금 나이가 80입니다. 그러면 20%는 자기 것이고, 80%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20%만 자기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욕심을 내는 것은 흉이 아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욕심을 부리면 흉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본당 사목할 때 가끔 우스갯소리로 어르신들에게 이런 말을합니다.
"입은 닫고 지갑을 열고 살아야 한답니다."
그렇다면 고운님들에게는 자기 것은 얼마이고, 하느님의 것은 얼마일까요?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 마음 안에 하느님의 햇살이, 하느님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성령 충만함으로 치유 받으시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다른 이들을 돕는 치유의 은총도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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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65)
♧♧ 시편 51편 6절….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다윗의 죄는 밧 세바 간음죄와 우리야 살인죄로써 이것은 분명히 일차적으로는 밧 세바와 우리야에 대한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주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 것은 밧 세바와 우리야에 대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다윗의 범죄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범죄에서 기인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일찍이 요셉도 포티파르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할 때, 그 같은 행위는 일차적으로 포티파르에 대한 범죄 행위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큰 잘못을 저질러 죄가 되는 것으로 여겨 유혹을 뿌리쳤습니다.(창세기 39장 9절. 참조) 또 이 같은 구절은...다윗이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음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이 구절을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시리까?’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다윗이 하느님의 어떠한 결정도 불평하지 않고 의로운 결정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의지 표명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의 정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은 데서 나온 다윗의 겸손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무엘 하권 12장을 보면... 범죄로 인해 다윗에게 선고된 하느님의 형벌은 다음과 같이 3가지였습니다.
첫째, 칼리 다윗의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선고입니다(사무엘 하권 12장 10절). 실제로 이러한 선고대로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여러 차례에 걸친 궁중 반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사무엘 하권 15-18장. 참조), 세바의 반란(사무엘 하권 20장. 참조), 아도니야의 임금 행세(열왕기 상권 1장. 참조), 예로보암의 반란(열왕기 상권 11장 26-40절. 참조) 등이 그것입니다.
둘째, 다윗의 아내들이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웃과 동침하리라는 선고입니다.(사무엘 하권 12장 11절. 참조) 이 선고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였을 때 궁전 지붕 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사무엘 하권 16장 22절. 참조).
셋째, 다윗이 밧 세바와 범죄 함으로 낳은 아들이 죽으리라는 선고입니다.(사무엘하권 12장 14절. 참조) 이 선고대로 밧 세바가 낳은 첫 아이는 7일 만에 죽었습니다.(사무엘 하권 12장 18절. 참조) 성경 기록을 살펴보면, 다윗은 이 모든 형벌에 대하여 하느님이 자신에게 내리신 것으로 인정하고 달게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무엘 하권 12장 18–23절, 16장 10절. 참조)
*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결백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는 ‘당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의 판단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렇게도 번역합니다.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 번 만 번 옳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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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터넷에서 기린이 새끼를 출산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었는데, 제목이 특이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출산’이었습니다. 궁금증에 영상을 보니 정말로 위험해 보였습니다. 기린은 지구상에서 가장 키가 큰 육지 포유류입니다. 이렇게 큰 키를 가지고 있는 기린은 새끼를 서서 낳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끼 기린은 그 높은 곳에서 곧바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얼마나 아프고 정신없을까요? 기린의 새끼 출산에 대한 다른 정보를 찾다 보니 이것이 끝이 아니더군요. 엄마 기린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정신없는 새끼 기린을 긴 다리로 계속해서 걷어찹니다. 새끼 기린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계속 걷어차인다는 것을 깨닫고 기우뚱거리며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엉덩이를 걷어찹니다. 그러면 새끼 기린은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발길질 당할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제야 엄마 기린이 달려와 새끼 기린을 어루만져주며 핥아 줍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낳은 새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 뛰지 못하면 사자나 하이에나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엄마 기린의 사랑법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해줘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픔과 상처로 다가오는 것들도 사랑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생각해봅니다.
이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장시키고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는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때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어,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면서 파견하시지요. 그런데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철저히 알몸으로 만드십니다. 중요한 사명을 주고 세상에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것을 챙겨주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보니 철저히 주님께 의지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단순히 불평불만의 이유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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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세 가지 기적}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둘째,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교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셋째,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그렇지 않습니까? 매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우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열심히 전교한다면, 그때 주님께 대한 사랑한다는 고백은 진실한 우리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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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하는 취미 활동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둑, 장기, 당구, 스키, 스킨 스쿠버, 테니스, 골프’가 있습니다. 시작한 지 오래된 것이 있고, 시작한 지 몇 년 안 된 것도 있습니다. 바둑, 장기는 어려서 아버님께 배웠습니다. 더 깊이 배우지 않아서 그저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당구는 학생 때 배웠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서 실력이 들쑥날쑥합니다. 스키는 처음 갔던 본당의 신부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한동안 동창들과 스키장을 다녔는데 지금은 타지 않고 있습니다. 스킨 스쿠버는 동창 신부들과 시작했고, 한동안 주문진과 제주도의 바다를 다녔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요즘은 못 하고 있습니다. 테니스는 신학생 때 배웠는데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만두었습니다. 골프도 시작은 했지만 거의 연습하지 않아서 늘 그 자리입니다. 몇 년 전부터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 있습니다. 매일 2만 보를 걷는 겁니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은 걸어야 합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강의를 들으니 참 좋습니다. 이 운동은 오래 할 겁니다. 운동한 햇수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그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지만 얼마나 신앙인답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구교 집안’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230년이 넘는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5대 이상 천주교를 믿는 집안이라면 구교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세대가 30년이라면 적어도 150년 이상 같은 신앙이 전해진 집안이라고 하겠습니다. 구교 집안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늬만 구교 집안입니다. 고상은 있지만, 고상을 앞에 두고 기도하지 않는 구교입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구교입니다. 유아세례는 받았지만, 첫영성체를 못 하는 구교입니다. 자랑스러운 신앙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신앙인의 의무와 책임은 회피하는 구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신앙인답게 사는 구교입니다. 가족의 중심에 말씀이 있습니다. 큰 축일과 가족의 기일에는 모두 모여 성당으로 가는 구교입니다. 자녀의 혼인 문제에 있어서 기준이 재물, 능력, 학력이 아니라 신앙이 기준이 되는 구교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당연히 성당에서 하는 구교입니다. 성당의 일과 세상의 일이 겹치면 당연히 성당의 일이 먼저인 구교입니다. 이런 구교는 장미꽃다발의 종이가 장미 향이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가 은은하게 나는 구교입니다. 눈은 살아있지만, 행동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에즈라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고, 정든 고향을 떠나 유배지로 갔지만,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련과 박해가 있었기에 신앙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즈라와 신앙 공동체의 뜨거운 신앙을 보시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유배지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했던 이스라엘의 구교 집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하면서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과가 없다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서 선포했는지, 아픈 사람들을 먼저 배려했는지, 또 그 일을 하면서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패와 실수에 움츠러들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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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답게 삽시다>
-친교, 가난, 복음선포-
가난한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 부자라니 참 모순적이고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가난해도 부유하게 또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핑계대거나 변명할 것 없이 정말 이렇게 가난해도 부유하게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행복기도’중 떠오른 대목입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기쁨/평화/감사/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멀리 밖에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어제도 여러 고마운 분들에게 메시지와 더불어 아름다운 사진을 선물했습니다. 사제관 옆 언덕 뜨락 예수님상을 배경한 은은하고 청초한 하얀 가을 야생화 구절초꽃들이 흡사 하늘에 흰 별 무리처럼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흡사 땅이 흰 별들 수놓은 하늘처럼 보입니다.
또 파란 하늘 배경한 성모님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역시 고마운 분들과 나눴습니다. 저는 누구든 막론하고 서두에 형제든 자매든 ‘사랑하는---’이란 말마디를 꼭 꼭붙이며 사랑을 다짐하며 확인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예수님 위로인사 받으시고 힘내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성모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전송했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소통이요 사랑의 대화요 사랑의 친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제가 늘 마음에 새기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의 사랑이, 배움에 대한 사랑이 끝없는 사랑을 샘솟게 합니다. 참 중요하고 절실한 말마디입니다. 무지의 어둠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갈망이 배움에 지치지 않게 합니다.
삶은 평생 배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배움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고 나를 사랑하여 알아갈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유롭고 행복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입니다.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은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의 제자답게 살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고 또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첫째, 친교의 삶입니다. 친교의 관상, 친교의 사랑입니다. 주님과의 친교요 형제들과의 친교입니다. 모든 활동과 활력의 원천이 이런 친교의 사랑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회개와 더불어 감사의 고백을 드리는 친교시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을 친교의 사랑중에 내적으로 충만케 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바로 이것이 주님과 친교의 선물이자 은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의 친교를 통해 영육으로 치유되고 충전되는 우리들입니다. 수도원을 영적 주유소, 영적 충전소라 일컬으며 자주 수도원을 찾는 어는 교구 사제도 생각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화답송 후렴처럼 하느님 찬미의 친교가 우리에겐 치유와 위로가 되고 한없는 축복이 됩니다. 제1독서 에즈라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회개와 더불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주님과 친교의 시간을 갖습니다. 참으로 진정성 가득한 에즈라의 기도 일부를 인용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정녕 저희는 주님의 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회개와 감사가 없는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친교시간에 필히 할 일은 진정한 회개와 감사와 찬양임을 깨닫습니다. 이 때 주님은 당신 친히 축복과 은총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친교 시간의 은총입니다.
둘째, 가난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참으로 친교를 사랑하고 가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친교의 은총이 자발적 가난입니다. 친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하느님이란 살아있는 참 보물을 삶의 중심에 모셨기에 이런 자발적 가난이요 이탈의 삶입니다. 저절로 하느님 섭리의 은총에 맡기며 최소한의 소유에 만족하는 무욕의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원망이나 저주의 가난이 아니라 겸손한 가난일 때 빛나는 가난입니다. 어제 수녀님이 들려준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면형도 무아도 ‘겸손’이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좌우명처럼 주신 덕담도 잊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수녀는 천주님이 귀여워 하시니 겸손해야 한다. 교만해서 안된다.”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 자체가 주님의 빛나는 증언이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수록 겸손한 삶입니다. 문득 제 좋아하는 한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이불치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마디로 백제인의 미학이고 조선왕조의 미학이고 한국인의 미학을 나타내는 말이라 합니다.
바로 주님의 제자로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이 지향하는 바로 이런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미학의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이르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참으로 가난한, 가벼운 몸차림으로 떠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나라 선포라는 본질적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자유로운 존재의 기쁨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빈그릇이 되어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본질적 삶에 충실할 때 단순소박한 가난과 겸손의 삶이요, 부족한 것은 하느님이 다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선포의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 삶입니다. 친교와 가난에 이은 최종 목표지점입니다. 복음선포의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친교의 열매가 선교입니다. 참된 친교는 선교를 낳고 참된 선교는 친교를 갈망합니다. 그러니 친교도 사랑하고 가난도 사랑하고 복음 선포의 선교도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이 복음 선포입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함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 화두이자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건강히 살 수 있는 사람이요 타락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함이 복음 선포입니다. 제자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 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합니다.
바로 제자들 삶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음을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친교의 삶, 가난하고 겸손한 삶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자 복음선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저는 감히 말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내 자신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자고 말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영어 짧은 말마디가 있습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 바로 “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 때 비로소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제자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친교의 삶, 2.가난하고 겸손한 삶, 3.복음선포의 삶입니다. 우리 하나하나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세상은 밝아지고 치유도 뒤따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 살라고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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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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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쫒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업에 열두 제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참여시키십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 즉 구마와 질병 치유의 힘과 권한을 제자들에게도 나눠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2).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는 이들은 이 지상의 삶이 완전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정도야 다르겠지만 크게 부족함 없이 살더라도 질병이나 천재지변, 사고, 죽음 등 인간에게 위협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실존적 불안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동경이 싹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악의 권세를 크게 현실적 불안과 절망, 그리고 물리적 질병이라고 보신 듯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해 새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영혼의 온전함을 되살리고, 질병을 치유해 육신의 온전함을 회복하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당신의 일을 제자들과 나누어 더 많은 이들이 "되살이"를 체험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를 들은 그대로 충실히 이행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적게 지닌 만큼 홀가분하게, 머무를 곳에 머무르고, 떠날 때 떠나는 자유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는 주님의 일을 이어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에즈라의 눈물 어린 기도를 만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에즈7,6)인 에즈라가 페르시아 임금의 허락으로 예루살렘에 다다라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굳"(에즈 7,10)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사제들과 레위인들까지 이방 민족의 역겨운 짓을 따라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혼인하여 섞여 산다는 말을 듣자 넋을 잃고 주저앉게 되지요. 이어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처절한 기도 부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왔습니다."(에즈 9,7)
먼저 에즈라는 민족적 비극의 원인을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긴 자신들에게로 겸손히 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에즈 9,9).
그리고 유배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을 전적으로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 자애가 이스라엘 백성을 "되살렸음"을 고백하지요.
"되살림".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곤두박질친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지는 은혜입니다. 유배와 상실과 수치의 고통을 겪어온 이스라엘이, 태초에 생명을 주셨던 하느님께서 다시 생명을 회복시켜 되살려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끝간 데 없는 추락이 밑바닥을 치고 상승의 전기를 맞이한 것과 같을 겁니다. 그 양극단에서 출렁이는 인간 실존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귀 들린 이를 다시 온전하게 되살리고 질병에 시달리던 이를 건강하게 되살리는 일. 삶의 의미와 목표 없이 부유하고 표류하던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 삶의 활력과 원기를 되살리는 일.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하셨던 일이고,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며, 부족한 제자들에게 위임해 참여시키신 일입니다.
복음 선포, 치유의 힘과 권한을 위임받은 교회(우리)는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그 파견 목적에 부응하려면 더 덜어내고 더 내려놓고 더 머무르고 더 용서해야 하지요. 보잘것없는 도구들인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어진다니 놀랍습니다. 실제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지만, 그러나, 그저 한 말씀만 잊지 않고 나아가면 됩니다.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에즈 9,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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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깨어 있는 삶 : ‘홀로 있기’ -「영적 발돋음, 헨리 나웬」
번잡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외로움에서 홀로 있기로 옮겨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한 ‘홀로 있기’는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독거獨居에 의존하지 않는 내면의 기질이나 태도다. 마음으로 홀로 있기에 통달한 사람은 더 이상 주변의 온갖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고, 고요한 내면의 중심에서 세상을 보고 이해한다.
마음으로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외로움에 빠져 있는 것과 스스로 홀로 있는 것의 차이를 배운다. 사무실이나 집이나 텅 빈 응접실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움으로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지만 고요히 홀로 있기를 즐길 수 있다.
-「살며 춤추며」에서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하면 실의와 허망함에 빠집니다. 그러기에 ‘외로움’에서 ‘홀로 있기(고독)’로 전환하는 길이 영성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어설프게 고독하기에 고독이 더 깊어집니다. 키엘 케고르는 “참으로 고독한 자는 고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고독한 독존자獨存者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너와 나의 만남’도 독존과 독존이 만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참된 독존, 즉 참 자아의 독존자로만 대면하게 될 때 인간 실존이 충만히 채워지고 더 이상 고독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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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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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
'길 떠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면서,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고 하신 것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집착하지 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6,30-31)
우리도 길 떠나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곧 세상 것들과 지나가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각자 파견된 삶의 자리에서 복음화 사명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에즈9,6)
나의 허물과 죄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나에게 주어진 복음화 사명, 곧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복음(기쁨)을 전하고, 영적 육적으로 아픈 이들을 찾아가 위로해주고, 그들을 예수님의 힘으로 낫게 해주는 제자들이 됩시다!
"대중 신심에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 순례에 나서는 선교사가 되는 은총이 따릅니다. 함께 성지 순례를 하고 다른 대중 신심 활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자녀와 함께 하거나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그렇게 하는 것도 그 자체가 복음화의 활동입니다."('복음의 기쁨', 12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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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두가지 사명>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로 삼으심은
두가지 사명을 실천하라 부르셨습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이 두가지는 불가분관계로 뗄 수 없으며
하나를 이루면 다른 하나도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이 사명수행에 마음 쓸때 그에게서
예수님 모습을 느끼게 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며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부름받은 제자들이 파견된 곳에서 어울리며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지 않고
흥청대고 나사 풀리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사명수행은 물건너 갑니다.
'제자 삼으신 이유 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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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 3)
주님께
의존해야 할
가난한 우리의
여정입니다.
삶의 안전장치는
이와같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내어 맡김이
핵심입니다.
믿음은 지니고
있는 것에 의해
결코 좌우되지
않습니다.
지니고 있는
물건은 언제나
중간에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믿음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물건과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을 살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간되십시오.
집착과 소유욕이
믿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고
단순한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때그때
우리에게
해 주실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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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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