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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 자 자 서 전
끝없는 도전 정신
인생 3막에도 이어진다
이신자가 이야기하고
오수정이 받아 적다
만화
소녀가장이 된 중고교 시절
입주과외로 가족 생활비 벌어
그림1 : 제목
그림2 : 국민학교(당시에는 지금의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5학년까지 우리집은 유복했다. 새 아버지는 농림부 공무원이었다.
그림3 : 엄마가 남한에서 재가를 해 낳은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그림4 : 새 아버지가 공무원생활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시다 실패를 하면서 우리집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림5 :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화여자중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정 형편으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힘들었다.
그림6: 중학교만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땐 중고등학생이 할만한 아르바이트도 없었다.
그림7 : 경찰병원 간호학교에 가려고 원서를 구입했다. 양재학원에도 갈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림8: 고등학교 과정인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국민학교 교사로 진출할 수 있어 서울사범학교에도 원서를 냈다.
그림9 : 사범학교 시험보러 가는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아침 일찍 깨워주지 않았다.
그림10: 중학교 담임선생님도 내가 사범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화여고에 입학했다.
그림 11: 그 무렵 우리 가정의 형편이 더 어려워져 새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2명은 아버지 고향이 시골로 내려가고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림12 : 나를 아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학교 말고도 한 가정의 학생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을 맡아 지도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입주과외'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중학교 3학년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론 상상도 목할 일이지만 그때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림13: 입주과외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학생과 생활리듬을 맞춰야 했고
그림14 : 가시적인 성적향상이 없으면 입주과외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림15 :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머리는 좋은데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성적이 나빴다.
그림16 :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틈날 때마다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게 했다
그림17 : 처음에는 성과가 좋지 않았지만 학생이 잘 따라오고 나도 열심히 가르쳐 차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고
그림18 : 마침내 원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년 동안의 입주과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림19 :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다. 다음 입주과외를 한 곳은 주류회사 사장님 댁이었는데 부잣집이었다.
그림20 : 서울 도심에 집이 있었는데 수영장도 있고 차고도 여럿이었다. 고용된 운전기사, 정원사, 가정부가 여럿 있었다.
그림21 : 그곳에서 1년을 보낸 후 군 대령집에서 입주과외를 했다.
그림22 : 집안 형편상 일반대학을 가지 못하고 서울교대에 입학한 후에도 입주과외는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3년 교대 2년 생활을 입주과외를 했다
그림23 : 입주과외 하려면 저녁 7시에는 집에 들어가야 했다. 저녁 먹고 12시까지 가르쳐야 했다. 개인생활은 사치였다.
그림24 : 그래도 월 1500원을 받아 500원은 교통비로 쓰고 1000원을 시골집에 보내 생활비에 보탰다.
그림25 : 내가 입주과외를 한 집은 대부분 착한 분들이었다.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 나를 격려해 주셨다. 주류회사 사장님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시면서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물론 우리집보다 잘 사는 집들이었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내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26 : 입주과외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27 : 이런 경험은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억척같은 어머니, 나를 남한으로 데려와
일제시대 무역회사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함경도 흥남에서 무역회사를 하셨다. 회사에서 큰돈을 벌어 대궐 같은 집에 일하는 사람 여럿을 둔 부자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생이셨던 분을 새 할머니로 들이셨다.
어머니는 17살에 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왔다. 그 해에 귀한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백일도 안 된 아기가 계속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새 할머니는 이를 낫게 하기 위해 정성스레 인삼을 다려 먹였다. 그러나 그것이 갓난아기에게 맞지 않았던지 아기는 즉사했다고 한다. 그 일로 새 할머니는 집에서 쫓겨났다.
나는 1942년 1월 11일 말띠 해에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병(도라홈: 전염성이 강한 눈병으로 핏발이 서고 눈곱이 끼며 심해지면 시력을 잃을 수 있음)을 앓았다. 부모님은 나를 업고 여기저기 용하다는 한의원과 병원을 돌다 큰 도립병원에서 눈병을 고쳐주셨다.
나는 무한한 사랑을 받는 귀한 딸이자 손녀였다. 그런데 모유를 먹던 갓난아기 때 엄마는 젖유종을 앓아 너무 고생스럽고 힘들었다고 하셨다. 엄마가 안고 어르고 달래도 하도 울어서 엄마는 나를 이불 속에 넣고 엉엉 울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오셔서 이불 속에 있던 나를 구해 주셨다.
내가 네 살 때인 1945년 8.15 해방이 되었다. 무역회사로 부자가 된 우리 집은 그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았으나 해방 이후 자본가, 부르주아라고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모아둔 모든 재산이 국유화 되고 집은 북한 관청으로 쓰이게 되면서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났다. 가진 것 한 푼 없이 쫓겨난 우리는 외할머니 댁으로 가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1918년생인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40년부터 행패절에서 공부하시다가 내가 세 살 때인 1944년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모든 재산을 뺏겨 갑자기 생활이 궁핍해지자 어머니는 남한에 살 길이 있을까 싶어 나를 두고 먼저 월남을 하셨다. 북한에서 금붙이 몇 개를 허리에 차고 임진강을 건너 남한으로 내려온 때는 미군정 시기 혹독하게 추운 겨울. 꽁꽁 언 강물의 얼음을 깨며 강을 건너다 늑막염에 걸려 온 몸이 붓고 살이 얼어 엄마는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그런 엄마를 같이 강을 건넌 일행이 종로의 한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면서 엄마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병원에서 엄마를 치료해 준 의사는 할아버지가 주신 장학금으로 공부해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의 친구 분이셨던 것이다. 이 아버지 친구 의사 분의 정성스런 치료로 엄마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홀로 남하했던 어머니, 극적으로 목숨 구해
건강을 회복한 후 서울 구경을 처음으로 하기 위해 나선 곳이 남산 공원이었다. 남산 공원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 앞에서 엄마는 너무나 우연히 작은 외삼촌을 만나게 된다. 그 후 엄마는 거처를 작은 외삼촌 댁으로 정하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정시대가 지나고 북한은 김일성이,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삼팔선을 경계로 왕래가 막혀버렸다. 엄마는 계속 북한에 있는 나를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결국 북한에 남한 물건을 보내고 중국에서 오는 비단을 사서 남한에 파는 장사꾼이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다고 해서 돈을 주고 부탁해 나를 남한으로 내려오게 해주셨다.
당시 나는 북한의 큰 외삼촌 댁에서 외할머니, 동갑내기 외사촌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신자야, 엄마가 너를 데리고 오라고 심부름 보내서 왔다. 엄마한테 안 갈래?”라며 다가왔다. 나는 ‘엄마’라는 말만 듣고 무조건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 엄마를 찾아 나선 그 길은 험난했다. 나는 삼팔선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에게 총을 맞을까 무서워 입을 솜뭉치로 막고 풀잎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레 장사꾼을 따라왔다. 임진강을 건널 땐 장사꾼 등짐 보따리 위에 앉고 장사꾼은 긴 막대로 물살을 가르며 강물을 따라 남한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한글도 모르는 무학이지만 늘 현명하셨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사신 분이다. 만일 그때 사람을 보내 나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북한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면서 어머님께 무수히 감사함을 전하곤 한다.
나를 끔찍이 아껴주신 새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5학년이 됐을 때 새아버지를 만나 재혼해 따로 사셨고 나는 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새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다. 새아버지는 원래 농림부 공무원으로 집에 들어오는 조그만 뇌물도 받지 못하게 하실 정도로 청렴결백한 분이셨다. 그러나 친구의 권유로 농림부를 퇴직하고 친구 분이 하시는 한일면업회사의 전무이사로 가 일을 하시다가 회사가 파산하게 됐다. 이로 인해 집이 어려워지고 빚이 많아 집의 가구와 가전제품까지 모두 빚쟁이들이 가져갔다. 서대문 기와집에 살던 우리는 말죽거리 마부 집에 방 하나를 세 얻어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살기 어려워져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됐다. 당시 새아버지와 어머니가 낳은 남동생이 5살, 여동생은 1살이었다. 시골에서 새아버지는 엘리트로 통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아빠에게 선거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많이 했다. 이로 인해 아빠는 선거 활동을 하시다가 중풍으로 쓰러지시면서 반신불수가 되셨다.
갑작스레 드러눕게 된 아빠는 이후 14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머니가 메우게 됐다. 어머니는 동생들의 학비를 대며 생활을 책임져야 해 온갖 장사를 하며 병든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셨다. 너무나 어렵게 생활하신 어머니는 한 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살하겠다”고 하는 이상한 광증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래도 힘을 내 버티실 수 있었던 건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내가 입주 과외를 하며 보내드리는 약간의 돈과 가족을 생각하며 정성스레 써서 보낸 손 편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새 아버지는 남동생이 고3이던 1973년 돌아가셨다. 나를 끔찍이 아끼셨고 밥상머리 교육에도 신경 써 주신 지식인이셨다. “여자도 서예를 배워야 한다”며 백화점에서 벼루도 사주시고 늘 격려해 주셨던 새 아버지는 나를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시켜준 고마운 은인이셨다.
새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동생들과 함께 서울 우리 집에 와 생활하며 손주 삼남매를 키워주셨다. 어머니는 현재 98세로 건강을 잘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동생 부부는 맞벌이 공무원으로 자매를 잘 키워 결혼시켰다. 남동생은 일본 주재원으로 가서 일어를 독학으로 공부 해 일본에서 하는 경연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퇴직 후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일본 사람과 교류도 하고 있다.
여동생도 맞벌이 부부로 자매를 연구원, 변호사로 잘 키워 결혼시켰다. 여동생은 40년간의 교사생활을 마치고 취미로 그림 그리기를 즐기다 화실을 마련해 전문적으로 그리기에 열중해 화가가 되었다. 이후 뉴욕, 워싱턴, 이탈리아 등지에서 개인전을 여는 유명 화가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 당시 누구나 겪었던 힘든 어린시절
그래도 새로운 것 보면 신기한 마음만은
남한에 엄마가 먼저 월남하시고 7살이던 1948년 엄마가 북한으로 보낸 장사치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청계천 판자촌 가게에서 엄마를 만나게 됐다. 엄마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나는 처음엔 엄마를 보고도 잘 알지 못했지만 엄마가 “신자야, 엄마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엄마인 줄 알았다.
학교 들어가기 전 엄마는 서울 뚝섬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일 하러 나가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동네 친구들과 뚝섬 강 옆 토마토 밭에서 놀며 배가 고프면 토마토로 허기를 채우고 모래 장난도 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그 때 먹은 토마토 덕인지 지금까지 잔병치레를 덜 하는 편이다. 면역력이 길러졌나 보다.
남대문국민학교 2학년 올라가던 1950년 6.25가 발발했다. 군인 탱크가 남대문으로 오는데 국군인 줄 알고 만세를 부르며 동네 아이들과 좋아하며 따라다녔다. 어른들은 모두 낙심하여 우리를 집에 빨리 가라고 쫓았다. 6.25 혼란 속에 인민군들이 수시로 총칼을 들고 집으로 들이닥쳐 천정도 쑤시고 남한에서 일한 남자를 찾곤 했다. 비행기가 뜨면 숨어서 지냈다. 저녁에는 부역을 나갔는데 엄마 치마끈에 내 옷을 매고 어디를 가든 함께 갔다. 어느 날 부역 갔을 때 주먹밥 한 덩어리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졌다. 부역 나온 사람 수 만큼 주먹밥을 주었는데 내가 엄마를 따라 다니며 한 덩어리를 먹었으니 누군가 한 사람은 못 먹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 소금 주먹밥 한 덩어리 때문에 주먹밥을 나눠주던 사람이 다시 세고 다시 세고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못 먹었을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곤란했을까 싶기도 하다.
북으로 끌려간 외삼촌
온갖 고생을 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던 와중에 작은 외삼촌이 보안서원에 끌려가게 됐다. 외삼촌 댁에 세들어 살던 사람이 갑자기 “형님, 제가 냉면 한 그릇 사드릴테니 내일 시장에 나오세요”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다음 날 시장에 가 만날 장소에 앉아 기다리는데 보안서원이 와서 잡아간 것이다. 경찰서에 끌려간 외삼촌을 엄마가 가서 눈물로 읍소해 천만다행으로 경찰이 풀어주었다.
그런데 외삼촌이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잡혀가게 만든 세든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다시 잡혀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매일 형무소에 갔으나 만나게 해주지 않아 외할머니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9.28 수복이 됐을 때 외삼촌은 인민군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가 영영 가족들과 이별을 하게 됐다.
이후 외할머니와 가족은 눈물로 밤을 지샜고, 외숙모는 한참 뒤 다른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됐으며 나보다 세 살 어린 외삼촌의 딸 경순이는 금란여중에 다닌다는 소식까지 들었고 이후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종종 외삼촌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이 머릿속에 맴돈다.
눈물로 지새우며 세월을 보내던 우리는 1.4 후퇴 때 대구로 가게 됐다. 추운 겨울 기차 짐칸 꼭대기에서 눈을 맞으며 홑이불을 찢어 천막을 치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5일 만에 대구에 도착했다. 이후 부산의 영도섬 산꼭대기로 가 피난살이를 했다. 물이 나오지 않아 주전자로 샘물을 떠오면 콩나물을 씻고 그 물로 세수하고 세수한 물을 버리지 않고 걸레질도 하며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하고 어렵게 살았다.
그래도 어린 나에겐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부산의 영도다리가 10시가 되면 큰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리의 반쪽이 들어올려졌는데 그것이 너무나 신기해 아이들과 함께 그 시간만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또 영도다리 밑에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누워 있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했다. 무엇인지 물어보니 ‘고래’라고 했다. 고래를 생전 처음 본 우리는 고래의 크기에 놀랐고 그 자리에서 고래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입주과외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다니던 남대문국민학교는 개교를 하지 않아 남산국민학교에 다니면서 매일 깡통차기, 집짓기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냈다.
한번은 깡통차기를 하고 숨다가 친구가 동네 화장실 뚜껑을 잘못 밟아 발이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 일로 엄마는 똥물이 묻은 친구 발을 씻기느라 애를 먹었었다. 남대문국민학교가 다시 개교하여 1953년 3학년 때 그 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에선 사진반에 들었는데 사진을 찍고 필름을 인화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신기했다.
그때는 공부 시간에 하나라도 놓칠까봐 정말 열심히 듣고 집중했다. 선생님이 하라고 시키는 것은 다 해야 하는 줄 알고 뭐든 열심히 했다. 심지어 5학년 때 선생님께서 국어 교과서 1권을 다 외우라고 하셔서 나는 밤새도록 그것을 외웠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니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유명해 지기도 했지만 하라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다 하는 융통성 없는 아이였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도 공부 시간에 열심히 듣는 습관이 자연스레 몸에 뱄다. 육상도 재미있었고 높이 뛰기, 넓이 뛰기, 달리기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열심히 했다.
저녁 늦게 엄마가 장사를 끝내고 집에 오시면 공책에 그날 장사하면서 외상 준 것을 쓰라고 부르시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메모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것을 다 외우는 것을 보면 엄마는 참 머리가 좋으셨던 것 같다.
5학년 때까지는 새아버지와 함께 어렵지 않게 살았다. 새아버지는 농림부 공무원이셨다가 친구가 하는 한일면업회사 전무이사로 옮기신 후 회사가 파산하면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부모님과 5살인 남동생, 1살인 여동생은 시골집으로 이사했고 나는 학교에 다녀야 해 외할머니 집에서 살게 됐다.
그러다 중학교 때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학교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교무부장께서 뒷문으로 빠져나가라고 연락을 주시고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다니기도 하는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의 사장, 고위 공무원, 고위 군인 장교 댁 등 세 집에 입주 과외교사로 일하면서 중2, 중3 후배들을 가르쳤다. 한 기업의 사장 댁은 동화면세점 자리에 수영장도 있고 잔디도 있는 부잣집이었고 운전기사, 정원사, 가정부 등도 있어 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입주한 가정에서 그들의 넉넉한 마음과 부지런한 생활, 모범적인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진로 사장님은 새벽에 꼭 산책을 하셨고 1분의 시간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번 돈의 거의 대부분을 시골집에 보내고 어렵게 생활했다. 그래서 중학교만 마치고 직장을 구하려고 ‘라사라 양재학원’ 원서와 ‘경찰병원 간호학교’, ‘서울사범학교’ 원서를 사서 접수했다. 서울사범학교가 특차였으므로 일반 고등학교 보다 일찍 시험을 봐서 수험표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노량진에서 뚝섬(서울사범학교)까지는 전차를 타고 기동차로 갈아타고 가려면 집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다. 새아버지와 엄마가 사범학교에 가보시고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아셔서 일부러 깨우지 않으셨다고 했다.
교사의 길, 첫 발을 떼다
중3 담임선생님이었던 김성희 선생님이 “시험 잘 봤니?”하시는데 시간이 늦어 못 봤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래 잘됐다. 나는 네가 사범학교 가는 것은 반대야”라고 하시며 이화여고 진학을 추천하셨다. 그 선생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려운 학생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는 정말 고마운 분이시다.
이화여고 시험 보는 날에는 운 좋게 내가 공부한 것에서 많이 나와 5% 이내 학생이 받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고교 3년 장학금을 받고 입주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과외비 300원 받을 때 나는 1,500원을 받았으니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다. 500원은 교통비로 쓰고 시골집에 1,000원씩 보내면서 생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갈 등록금이 없어 선생님께 취직하겠다고 했다. 취직자리는 ‘한국조폐공사’로 가게 되어 있었다. 당시 전국 국가고시였는데 경기여고와 한참 입시경쟁을 벌이던 때로 한 명이라도 더 응시해 좋은 실적을 올려야 했다. 대학은 선지원을 해야 해 독어를 했으므로 서울대 가정과로 써서 교무실로 갔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중학교 선생님께서 ‘서울교육대학’을 추천해 주셨다. 그 해 새로 생긴 이 학교는 학비는 국비이고 매달 월급도 준다고 하시며 4년제 대학에 가서 고생하느니 2년제 다니고 졸업해 취직한 후 야간에 대학 다니면 된다고 알려주셔서 그 자리에서 서울교대로 쓰고 도장을 찍고 교무실을 나왔다.
그러나 정작 대학 시험을 볼 때는 너무나 눈물이 나왔다. 다른 친구들은 원하는 대학을 가는데 왜 나는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는지…. 원래 나는 그 옛날 황 판사(여성)처럼 법학을 공부해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어려운 사람이 없이 고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며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뜻을 못 이룬다는 생각에 더욱 눈물이 앞섰다.
지금의 역사박물관 자리에 있던 서울고등학교에서 전국 교육대학 시험이 있었다. 시험시간에 영어 시험지에 이름을 안 쓰고 제출해 점수가 아주 나빴다. 그래도 운동을 즐겨 했던 까닭에 체력장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 합격했다. 합격은 했지만 등록금 5,000원이 없어 대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이미 취직이 된 부산의 ‘조폐공사’를 다니기로 맘을 먹었는데 엄마가 동네에서 빚을 냈는지 마감시간이 다 되어 우편환을 보내주셨다. 우편환을 들고 왕십리 우체국에 가서 돈을 찾아 기동차를 타고 서울교육대학교로 달려가 접수 창구에 돈을 내밀었다. 그 때 사무실 사람들 속에서 ‘아’ 하는 탄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깜짝 놀라 창구로 들여다보니 교복 입은 학생과 학부모가 시계를 보다가 5시인 것을 확인하고 차점으로 입학하려다 내가 내민 돈을 보고 낸 소리였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입학해 2년을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게 됐다. 입주 아르바이트도 끝나고 발령 받을 때까지 거주할 집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중학교 때 고등학교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셨던 김성희 선생님께서 당신 집에 머물라고 하셨다. 남의 식구를 그렇게 집에 있게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고맙고도 고마운 분이다.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시다.
교사 생활과 결혼
온 마음, 정성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다
서울교육대학을 졸업한 1964년, 숭례초등학교에 발령받아 두렵고 설레는 맘으로 처음 교단에 섰다. 어린 눈망울을 보니 어렸을 때 생각이 나 친절하고 공정하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자 애썼다. 어렸을 때 선생님들의 편견과 차별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내 아이들에게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신나는 교사 생활, 맺어진 인연
교사 생활은 정말 재밌고 신났다. 오히려 법학을 해 판사가 된 것보다 아이들의 변화를 보는 것이 더 보람차고 나에게 잘 맞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 학교에 남아 풍금 연습도 하고 다음 가르칠 교재도 미리 보면서 모든 것들을 열심히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연구 수업을 한 해에 한 번도 안하려 했지만 나는 3~4번을 해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교대에서 배운 교육 철학과 나의 경험을 접목시키며 직접 아동들과 대화하고 새로움을 발견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꼈다.
그러던 중 한 남자 선생님이 미술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새로운 미술기법으로 1~2시간씩 수업을 해주면 아이들의 작품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부탁을 했고 나는 그 요청을 다 받아서 수업을 해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돼 방학 때 친구 5명과 그 남자 선생님의 고향인 강릉에 놀러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갑작스레 다른 친구들이 모두 못 가게 되고 나만 가게 되었다. 당시 나는 밀양의 시골집에 있었다. 친구들은 각자의 사정에 의해 강릉에 가지 못하게 됐지만 이 소식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집에 전화도 없고 핸드폰은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라 밀양에 있는 나에게 친구들은 함께 못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이다. 새아버지께서 약속을 했으면 아무리 멀어도 가야 하지 않겠냐며 말씀해 주셔서 나는 밀양에서 영주로, 영주에서 강릉으로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갔다. 그리고 강릉에 도착해서야 친구들은 아무도 못 오고 나 혼자 강릉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그는 내가 혼자서 불편해 할까봐 여 조카 2~3명을 데리고 나와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그의 집에 가서 점심도 먹고 저녁에는 시내 여관에서 자게 되었는데 자물쇠를 잠그고 안전하게 잘 수 있도록 살피고 가는 등 세심함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때 생긴 믿음이 훗날 결혼까지 이어져 부부로 연을 맺게 됐다. 교사인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도 김성희 선생님께서 교사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는 조언을 해주신 게 큰 도움이 됐다.
티격태격 쉽지 않은 결혼 생활
결혼 생활은 1965년 명륜동 산꼭대기 셋방 전세살이로 시작됐다. 연탄이 타고난 재를 모아 머리에 이고 산 아랫길 쓰레기 수거차에 버려야 했다. 겨울에는 손이 꽁꽁 얼고 산을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이후 삼선교에 방 2개에 마루가 있는 독채 전셋집으로 옮겼다. 그 집에 큰 집 조카까지 함께 살게 되었고 첫 아이를 임신해 배가 부른 상황에서 미아리에 있는 숭례국민학교에 다니느라 매우 힘들었다.
결혼 생활은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결혼식을 하면서 너무 정신이 없어 찾아놓았던 수표를 잃어버렸다. 남편은 당장 수표를 찾아 놓으라고 야단이고 나는 울고불고 학교도 못가고 온 집안 구석구석, 책갈피 하나하나를 다 뒤졌으나 찾지 못해 포기했다. 신문광고에도 내고 여러 과정을 거쳐 겨우 3분의 2 정도의 돈만 찾을 수 있었다.
거기다 결혼할 때 받은 예물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온 집안을 뒤지고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또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조심성 없고 꼼꼼하지 못한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런데 삼선교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사람이 목걸이 한 것을 보고 갑자기 감춰 놓았던 목걸이가 생각났다며 목걸이를 꺼내주었다. 그렇게 목걸이를 찾느라 애간장을 태우며 힘들었을 때는 빨리 찾아 놓으라고 으름장만 놓으며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장난스런 맘으로 살피더니 1년이 지나 내주는 그 지독한 마음에 정이 뚝 떨어졌다. 내가 물건을 잘 챙기지 못한다고 생각해 버릇을 고쳐주려 했던 것이려니 하고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편은 4남1녀 중 3남으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형수 밑에서 학교도 다니고 농촌에서 서울로 와 누나네 집에 살면서 서울사범 연수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자라다 보니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나이도 나보다 7, 8년 위이고 어린 시절을 같이 어렵게 자란 사람이니 이해심이 클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세대차도 났다.
남편은 결혼하고 살면서 단국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성실히 노력하는 스타일이며 관찰력이 좋고 매사 꼼꼼하고 정직하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호인’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관계가 좋다. 받은 만큼은 갚아야 한다는 사명감도 투철하다. 다만 융통성이 부족하다 할까. 나에게만은 너그럽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 초에는 무척 맞추기 어려웠다.
가계부를 쓰면서 다투기도 많이 했다. 결혼 후 처음에는 잘 썼으나 아이가 셋이 되고 활동 범위가 커지니 매일 가계부를 적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돈과 가계부의 금액이 맞지 않아 언쟁도 많이 벌였다.
부부란 서로 믿고 잘못이 있거나 성에 차지 않더라도 조금씩 맞춰가며 사는 것이란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 일일이 다투지 말고 다른 방법을 서로 찾아 봤다면 아픈 상처가 덜하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요즘은 각자 돈을 쓰니 다툴 일이 없다. 큰돈은 의논해서 쓰고 작은 지출은 서로 믿고 맡기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다
교사하며 방송대 다니고 대학원까지
1966년에 성북구 하월곡동에 방 3개짜리 30평대 집을 샀다. 방에 캐비닛 하나 들여 놓고 다른 살림이라고는 없으니 집이 대궐 같았고 집 안에 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해가 갈수록 가족도 늘고 집의 살림도 채워지는 등 새로운 가족의 역사가 쓰여졌다.
자식 키우긴 너무 어려워
이사한 그 해 큰 아들을 낳았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젖유종을 두 달 이상 앓게 되었다. 너무 아파 안방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기어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정말 우울했다. 수술이 두려워 한약과 침으로 버텨보려 했더니 젖은 퉁퉁 부어 고름이 가득 찼다. 친정어머니가 시골에서 오셔서 나를 돌보며 부어오른 젖을 누르니 고름이 천정까지 치솟았다.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온 방안에 튄 고름을 닦느라 다 써야 했다. 결국 수술을 했다. 처음부터 수술을 했다면 고생을 덜 했을텐데 수술이 두려워 미루다 하니 더 큰 수술이 되었다.
큰 아이가 어릴 때 가정부를 구하기 힘들어 시댁 시골에서 할머니 한 분이 오셨는데 글을 읽을 줄 몰라 우유 병 눈금도 제대로 못 맞추셨다. 그래서 매일 퇴근시간이면 설사를 하는 아이를 업고 병원에 가기 일쑤였다. 큰 아들은 병치레도 잦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백일이 되면서 잠을 좀 길게 잤다. 돌이 되어 시골의 형님과 동서가 기차에 떡과 생선을 잔뜩 실어다 주셔서 크게 잔치를 치르었다. 시댁 식구들의 따뜻한 맘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살 때는 창경원에서도 아이를 잃어버려 정신없이 찾아 헤매다 결국 찾기도 했다. 세 살이 됐을 때 하루는 시장에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다. 나중에 보니 큰 아들이 혼자 하월곡 산꼭대기까지 갔는데 다행히 평소 전화번호를 외우게 교육을 했더니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집에 전화를 하고 찾아왔다.
70년 3월 10일엔 첫 딸을 낳았다. 딸은 이마가 넓어 율브린너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루는 친정어머니가 구해준 가정부가 아이를 재워 놓고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옆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우리집 가정부를 자기 친정집의 병든 노모를 돌보게 하기 위해 데리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친정집 노모는 낮에는 가정부를 다락에 숨어있게 하고 외출도 못하게 하면서 1년간 일을 시켰던 것이다. 다행히 친정 어머니가 발견하여 가정부를 다시 데려왔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잘 알던 산지기의 딸을 우리집 가정부로 일하게 해주었고 그 일이 끝나면 책임지고 다시 부모님에게 보내주려 했는데 영 찾을 수 없을 줄 알고 걱정이 많으셨다고 한다.
1972년 10월 1일에는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막내는 아주 순하고 착했으나 가정부를 두고 세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어 친정어머니가 여동생과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셔서 하월곡동 집 작은 방에 함께 살게 됐다.
1975년, 34살 때에는 수유리 이층집으로 이사하게 됐다. 결혼하고 10여 년을 옷도, 구두도 안사고 오직 아이 키우는 비용 외에는 거의 대부분 저축을 했고 남편이 결혼 전에 모아둔 돈도 좀 있었다. 그리고 처음 산 집이 10년이 지나니 제법 올라 그간 모은 돈을 합쳐 이사를 한 것이다. 이 집은 방이 6개나 되는 이층집이었다.
남동생은 주민센터에 취직이 됐고 숭의여고를 졸업한 여동생은 서울교대에 입학하게 됐다. 친정식구와 함께 사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동안 재산도 늘리고 저축도 많이 했으나 남편과는 작은 금전거래도 믿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많이 다투었고 속이 상한 나는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밤새 종점까지 왔다갔다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아이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도움이 꼭 필요했고 내 입장만 생각하면 친정 식구들을 모두 보내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점점 남편과의 다툼이 심해져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퇴근 시간이 조금만 늦으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 대한 애정이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새로 시작한 공부
1986년 2월 방송통신대학을 가게 되면서 초등교육전공 학사 자격을 얻게 됐다. 교사를 하면서, 아이 셋을 키우면서, 방통대 공부를 하는 등 1인 다역을 어렵게 해내는 동안 가정부까지 맹장수술을 하게 됐다. 매일 국을 끓여 국통을 들고 병원에 전달하고 통신대 강의를 들으면서 시험을 치러내면서 정말 어렵게 3년을 이수했다.
학교에서는 여교사 회장직을 9년 이상 맡다 보니 1990년에는 전체 125개 초등 북부여교사 회장직을 맡게 됐다. 미아리 신세계 백화점을 빌려 바자회도 하고 학예발표회도 하면서 표창도 받았다.
50세 되던 91년에는 큰 딸이 대학원 진학을 주선해 주어 성신여대 교육학과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하게 됐다. 고3인 막내와 함께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다. 그 동안 깊이 있는 독서가 부족해 책 한 장 넘기면 잊어버리고 다시 돌아와 읽고 책장을 넘기면 또 잊어 버려 밤을 새는 날이 다반사였다.
또 주 3회씩 5시부터 밤 11시까지 공부하고 집에 오면 파죽음이 됐다. 그 늦은 밤 지쳐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저녁을 차리라고 했다. 정말 화가 났지만 참고 참았다. 성신여대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너무 많은 것을 해달라 하고 심지어 발까지 씻겨 달라고 하니 나를 종 취급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존심도 상하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야전삽을 들고 산위로 올라가 무덤을 파고 ‘이 속에 들어가면 나도 이 세상에 없고 고통도 없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왜 없어져야 하지? 남편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들인 남편도 제대로 못 다루는데 새 사람은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죽겠다는 결심도 했는데 앞으로 무엇을 못 하겠어’ 하는 맘으로 다시 산을 내려왔다. 이후로 남편의 요구 중 정당한 것만 받아주고 거절할 것은 거절하면서 나의 연구에 몰두해 오늘을 이루었다”라고 하셨다. 이 말을 가슴에 품고 나도 적당히 참고 가족들도 점점 적응을 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다.
마지막 논문을 쓸 때는 여러 날 밤을 샜다.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난 컴퓨터 이용이 서툴렀다. 그래서 컴퓨터를 잘 하는 학생에게 내가 쓴 것을 주면 그 학생이 쳐서 주고 난 그것을 받아 수정하고 하면서 여러 밤을 새웠다. 논문은 처음 써보는 것이어서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밤낮으로 한 가지 주제에 몰두해 스스로 써봄으로써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학위를 받던 날에는 가족들이 모두 와 축하해 주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에는 35회 서울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국어, 한문분과 2등급을 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 바로 현장연구를 시작해 94년 11월 21일에는 38회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에서 1등급을 하여 푸른기장증을 받았다. 저학년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 아이들을 집중시키고 발표력을 신장시키면서 독서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이를 매일 현장에서 적용해본 활동을 정리해 발표한 것이었다. 푸른기장증을 받았을 때 남편은 아이 셋을 모아 놓고 “나는 평생 전국 2등급이 최고였는데 너희 엄마는 이렇게 큰 상을 탔다”고 하면서 아이들 앞에서 나를 추켜 세워주기도 했다.
95년 11월 20일 제26회 전국교육자료전에서도 푸른기장증을 또 받았다. 이것은 아이들이 이야기를 보고 다양한 생각을 발표하며 다음 이야기를 연상해 발표해 상상력도 함께 키울 수 있는 교육자료였다. 동화 10편, 전래동화 10편, 명작 10편을 녹음자료, OHP 자료로 만들어 평가지까지 인쇄한 교육 자료를 주름가방에 넣어 보관을 편리하도록 여러 모로 신경 썼다.
2001년 교감이 되어서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1년 35회 교육자료전에 출품해 특상을 받았다. 교감이 되어 매일 아침 훈화를 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교육자료로 만들었다. 훈화를 할 때 적절한 이야기 제목을 가지고 아동들을 5분 이내 집중시킬 자료를 찾아 집중시켰다. 다른 교감님들이 훈화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훈화 얘기가 재미있었다고 일기에 쓰기도 한다고 학부모가 전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것을 ‘애니메이션’ 10편으로 만들어 CD로 제작했다. 그것이 알려져 전국의 각급 학교에 파급되기도 했다.
2002년 6월 21일에는 교장 자격연수 53기로 서울대 사범대 부설 교육행정연수원장 학업성적우수상과 연수생 자치회 부회장으로 공로상 표창을 받았다. 연수는 교육정책, 이론과 현장체험실습 등으로 다양했다.
교장으로 마친 교직 생활
2003년 세검정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됐다. 교사들은 좋았는데 전임교장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다.
학교에 도서실도 새로 꾸미고 급식실 개선이며 담벼락 길 등 많은 것을 세심히 살피고 계획해 잘해 보려고 애썼다. 교감선생님도 좋은 분들이라 화합도 잘 되고 즐거운 생활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예쁘고 순수한 아이들에게 교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고 늘 다듬어서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의사는 의술로 사람들 다스리지만 교사는 말로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니 진실 되고 성실성이 담긴 한마디, 그리고 행동이 따르고 실천이 따르는 한마디가 어린이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한 학생이 어머니가 생선장사 하는 게 창피하다고 하는 말에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하며 어머니의 훌륭함과 장점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린이들의 무궁무진한 속 생각을 하나하나 찾아내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교육자인 것이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때에 이화여고 동창 1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들을 아껴주셨던 옛날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선생님 이야기와 달라진 학교 모습, 어렸을 때 겪은 힘든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세검정초등학교는 교생실습을 하는 학교여서 실습생 지도도 해야 했고 영어 연구학교로 발표도 했으며 각종 전시회도 하면서 늘 활기찬 학교생활을 했다. 퇴임할 때는 100여 명이나 되는 전 선생님께 식사대접을 하며 나의 육순 잔치도 함께 했다. 어린이부채춤 교사들의 합창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퇴임식을 마쳤다. 또한 교사에게 주어지는 최고훈장인 ‘황조근조훈장’까지 받았다. 퇴임식에서 구청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뇌리에 남아있다.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도 남은 시간을 유용하게 잘 쓰려고 애쓴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막내 아들이 결혼 후 첫 아이가 출생해 막 돌이 지날 때였다. 아들은 “엄마 퇴임하시면 우리 아기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물었다. 남편은 그때 바로 “너희 엄마가 평생을 일했는데 손주까지 보는 건 안 된다. 너희 자녀는 부모가 스스로 책임지는 거야. 우리도 그랬다.”고 대답했다. 차마 나는 맘이 약해서 안 된다고 대답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이 한마디가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다. 꼿꼿했던 남편 말이 우리 자식에게는 무게감 있게 들렸을 것이다.
처음엔 서운했겠지만 지금까지 손주들은 잘 크고 있고 나도 내 생활을 즐겁고 건강하게 하면서 짐을 지우지 않으니 서로 행복한 것이다. 사람은 매 순간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뀜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홀로 사는 내 친구는 매우 활동적이었는데 아들 결혼시키고 손주 봐주느라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집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3여년 만에 치매가 와서 지금도 요양원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순간순간 앞을 내다보며 여유를 가지고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작은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된다.
퇴임 후 얻은 제2의 인생
사교댄스, 유치원원장 자격증, 또래상담사…
1999년 나보다 7년 먼저 퇴임한 남편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모임과 활동을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사교댄스였다. 복지관에서 댄스를 배우며 내가 퇴임을 하면 같이 하길 기다렸다.
2006년 나도 퇴임하면서 처음에는 온전히 휴식을 즐겼다. 그러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권유해 사교댄스를 배우러 갔다. 그러나 매우 어려웠다. 동작이 제대로 익혀지지도 않고 몸의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웠다.
이미 7년 간 댄스를 배워 능숙하게 파트너를 리드하며 춤은 추는 남편에게 댄스반의 다른 여성 분들이 함께 춤을 추자고 청했다. 나는 그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낯이 뜨거웠다. 그래서 댄스교실에 더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남편은 그럼 집에서 가르쳐주겠다면 동작 하나하나를 가르쳐주었다. 동작이 몸에 익숙해지니 재미있었다. 건강도 좋아지는 것 같고, 살도 많이 빠졌으며 생활에 활력을 주었다.
2008년에는 댄스교실을 운영하던 약수복지관의 담당자에게 ‘부부 댄스반’을 만들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댄스반 활동은 너무나 즐겁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나 모르는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건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주어 이런 부작용을 없앤 댄스교실을 열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한 다섯 부부가 이 댄스교실에 함께 했다.
2014년에는 내가 만든 부부댄스반이 제23회 문체부장관배 생활체조 경연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선전을 펼쳤다. 이 부부들과 우리는 가족 이상으로 친하게 지낸다. 2019년에는 함께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외에도 2013년엔 약수동 주민자치위원으로 참여했고 유치원 원장 자격을 획득하기도 했다. 또한 2019년엔 또래상담사 양성교육 과정을 수강하면서 새로운 적성을 찾고 새로운 일을 경험하고 있다.
공부와 도전은 나에게 활력을 주며 나의 나이를 잊게 한다. 나의 공부와 새로운 도전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첫댓글 잘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