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우디야나[Uddiyana/오장국(烏場國)]
12월 초에 우디야나[Uddiyana/오장국(烏場國)]으로 들어갔다. 북으로는 총령에 접하고 남으로는 천축에 닿아 있다. 땅의 기운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사방 수 천 리였다. 백성들과 물자가 풍부해서 임치(臨淄)의 신주(神州)에 비길 만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함양이 상등 토지와 같았다. 비라(鞞羅/須大拏太子)보살이 아이를 시주한 곳이고 마하살타(摩訶薩埵)보살이 팔을 던진 곳이 있는 나라 비록 오래된 옛 이야기지만 토속적 풍속이 잘 남아 있다. 국왕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오랜 기간 채식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예불을 드리는데, 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 비파, 공후, 생황, 피리 등을 같이 연주하였다.
매일 정오 이후에야 비로소 국사를 처리하였는데, 죽을죄를 지어도 사형에 처하지 않고 다만 사람이 살지 않는 산으로 보내 혼자 힘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사건이 의심스러우면 약을 먹여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일의 경중에 따라 바로 처리하였다. 땅은 비옥하고 인구도 많고 물자가 풍부하였고 곡식도 풍년이고 여러 가지 과실도 무성하였다.
밤에 울리는 종소리는 천지에 가득 퍼졌다. 땅에는 기이한 꽃들이 겨울에서 여름에서 연이어 많이 피어 승려들과 일반인 모두 그것을 따서 여래 앞에 공양하였다. 국왕은 위나라 사신으로 왔다는 송운의 말을 듣고서 땅에 무릎을 꿇고 절하며 조서를 받았다. 태후가 불법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곧 동쪽으로 얼굴을 향하여 합장하고 멀리 성심을 다하여 정례하였다. 위나라 말에 능통한 사람을 보내어 송운에게 물었다.
“경은 해가 뜨는 동쪽에서 온 사람인가?”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어 해가 그 안에서 솟으니 실로 여래의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도 성인이 나왔는가?”
왕이 묻자, 송운은 주공, 공자, 장자, 노자의 덕을 모두 설명하고 다음에는 신선과 성인들이 살고 있는 봉래산(蓬萊山) 위의 은궐과 금당을 차례대로 이야기하였다. 또 관로(管輅)는 점을 잘 치고 화타(華陀)는 병을 치료하며 좌자(左慈)가 방술에 뛰어난 것 등에 대해서 구별 지어 말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경 말대로 라면 그곳이야말로 곧 불국토이니 내가 죽게 되면 당신네 나라에서 환생하기를 원합니다.”
<Mingora 시가지>
<샤홀리 마애불>
<shankardar 스투파>
송운은 혜생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붓다의 자취를 찾았다. 용천(龍泉)의 동쪽에 여래가 옷을 말렸던 곳이 있었다. 처음 여래가 오장국에서 가르침을 펼 때 용왕이 진노하여 사나운 비바람을 일으켜 붓다의 법의(法衣)의 겉과 속을 모두 적셨다. 비가 그치자 붓다는 바위 아래 동쪽을 향해 앉아 가사(袈裟)를 말렸다. 바위에 남은 가사 자국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빛이 나 새것과 같았는데 꿰맨 자리가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가는 실의 올 자국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언뜻 가서 보면 선명하지 않은데, 털어내면 그 무늬가 더욱 분명해졌다. 붓다가 앉았던 곳과 옷을 말리던 곳에 모두 탑을 세워 기념하였다.
용천 서쪽에는 용왕이 사는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는 50여 명의 승려들이 사는 절이 있었다. 용왕이 이상스런 재난을 일으킬 때마다 국왕이 기도를 올려 간청하면서 금옥 등의 진귀한 보석을 연못 속에 던졌는데 용왕이 나중에 이것들을 떠오르게 해서 승려들에게 가져가게 하였다. 이 절의 의식은 이렇게 용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용왕사(龍王寺)라고 불렀다.
왕성 80리에는 여래가 돌을 밟았던 자취가 있어 탑을 세워 보존하였다. 돌을 밟은 곳은 진흙탕을 밟은 것 같아서 재어 보면 혹은 길고 혹은 짧아 일정하지 않았다. 지금 세운 절에는 승려들이 70여 명 정도 있다. 탑에서 남쪽으로 20보 떨어진 곳에는 천석(泉石)이 있다. 여래가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양치(楊枝)를 씹다가 땅에 심었더니 바로 자라나 지금의 큰 나무가 되었다. 그곳 말로 파루(婆樓)라고 불렀다.
성 북쪽의 타라사(陀羅寺)에는 불사가 매우 많았다. 탑이 아주 크고 승방이 서로 이어지며 주위에는 금불상이 6천구나 있었다. 왕이 해마다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나라 안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송운과 혜생은 이 비구들이 계율에 따라 정진하고 고행하는 것을 보며, 그 자태에 감동하여 더욱 공경하게 되었고 노비 두 명을 희사하여 승려들을 모시도록 하였다.
왕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행하여 8일을 가면 여래가 고행할 때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를 먹였던 곳이 있었다. 가파른 높은 산과 위태로운 산봉우리가 구름 속에 묻혀 있고 아름다운 나무와 영지가 무성하게 자랐다. 수풀과 샘이 아름답고 꽃의 화려한 색은 눈부셨다. 송운과 혜생은 여비를 덜어내어 산꼭대기에 탑을 하나 세우고 예서로 위나라의 공덕을 새겼다. 산에는 승려들이 3백여 명 있는 수골사(收骨寺)가 있었다.
왕성 남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여래가 옛날에 마휴국(摩休國)에 있으면서 피부를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부러뜨려 붓으로 삼은 곳이 있었다. 아소카 대왕이 높이 10장의 탑을 만들어 그것을 보존하였다. 뼈를 부러뜨린 곳에는 골수가 돌 위에 흐른 자국이 있었다. 그 빛깔이 윤기 있게 반들거려 방금 흐른 것 같았다.
왕성 남쪽으로 5백 리쯤 되는 곳에 선특산(善特山)이 있었다. 이곳의 맛 좋은 샘물과 과일들은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산골짜기는 온화하고 따뜻하여 풀과 나무들이 겨울에도 푸르렀다. 당시는 따뜻한 기운이 불어오는 초봄으로 봄 나무 사이에서 새가 지저귀며 꽃밭사이에서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송운은 머나먼 이국에서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홀로 슬퍼하여 마음에 병이 났다. 결국 지병이 재발하여 한 달을 끌었으나 바라문 주술을 쓴 이후에 완전히 나았다.
산꼭대기 동남쪽에 태자석실이 있는데 하나의 문에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태자석실 앞 10보쯤에는 크고 네모난 바위가 있는데 태자가 항상 그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하여 아소카(Ashoka:阿育王.?~ BC238)대왕이 탑을 세워 기념하였다. 탑 남쪽 1리 되는 곳은 태자가 초가를 지었던 곳이었다. 탑과 1리 떨어져 동북쪽으로 50보를 내려가면 태자의 아이들이 나무를 에워싸고 떠나지 않자 바라문이 몽둥이로 그들을 때려 피를 뿌렸던 곳이 있었다. 그 나무는 아직도 살아 있고, 피를 뿌린 땅은 지금은 샘이 되었다. 석실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곳은 제석천이 사자로 변하여 길에 웅크려 앉아 태자비 만저(嫚姐)를 막았던 곳인데, 돌 위의 털과 꼬리, 발톱 자국이 당시까지도 모두 선명했다.
아주타굴(阿周陀窟)과 눈먼 소년이 눈먼 부모를 공양하던 곳에 모두 탑을 세워 기념하였다. 산에는 옛날 오백 나한의 평상이 있는데 남북 두 열로 서로를 향하여 앉았던 곳으로 순서대로 마주하였다. 그곳에 승려들이 3백 명이 사는 큰 절이 있다. 태자가 먹던 샘의 북쪽에도 절이 있어 항상 몇 마리의 당나귀가 모는 사람이 없어도 산 위로 식량을 운반하며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새벽에 출발해 정오 점심을 먹을 때쯤 도착했다. 탑을 보호하는 신인 시바신[Shiva:濕婆仙]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옛날에 이 절의 어떤 사미가 항상 회칠을 하고 선정에 들었는데 유나가 그를 붙잡자 모르는 사이에 피부에 붙어있던 뼈가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시바신이 사미를 대신하여 회칠하던 곳에 국왕이 시바신을 위해 사당을 세워주고 그 형상을 그려서 금박을 입혔다.
산 고개를 사이에 두고 야치(夜叉)가 만든 파간사(婆奸寺)가 있는데 승려 80여 명이 있었다. 나한과 야차가 항상 와서 공양하고 청소하며 땔나무를 해 놓는다고 하였다. 범속한 비구는 이 절에서 살 수 없었다. 위나라의 사문 도영(道榮)도 이곳에 이르러 예배를 한 후 머물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첫댓글 간다라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맞습니다. 아직도 간다라의 보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