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우리말 반야심경 <본문> 가시리 아리랑이 반야심경의 핵심이다.
반야심경에서 마지막 경문의 내용과 <아리랑> <가시리> <각설이> 의 어원과 내용의 의미를 비교해 본다.
불교 진리의 핵심을 묶어 놓은
<반야심경>의 마지막 후렴구(염송)인 진언(眞言)인
'어제 이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이제 모지 사바하'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과
고려가요인 <가시리>의 어원이라는 것을 밝혀 보고자 한다.
물론 저의 논거를 인정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각자의 견해에 맡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불교 역사라고 할 만큼
모든 분야에서 불교의 사상이나 정신이 뿌리 깊게 내제하여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언어나 풍습, 노랫말 속에
불교의 내용이 담기게 되었고,
불교의 대표적인 동체대비 사상은 승속을 떠나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다양한 방편과 형식으로 대중 속에 포교 되었다고 본다.
특히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선각자들이
염불과 염송을 쉬운 말과 가락으로 춤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신분 차별이 심한 당시 양반 귀족들에게 억눌려 있던 서민들이
글을 몰라도 무애 춤을 추며 노래만 따라 불러도
누구나 이 세상의 괴로움과 애환에서 벗어나
신분 차별도 없고 가난과 궁핍도 없는 그런 행복한 이상의 세상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깨달아 부처가 되고
극락 세상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불교가 신분 상승의 엄청난 도전이며 희망이고
즐거움의 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에 춤을 추고 염송하는 가운데
분노와 희망이 함께 어우러져 깨달음을 얻고,
신분을 벗어난 대동의 세상, 대자 유인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신명 나는 일이었겠는가.
너도, 나도 부르는 염불과 염송이
춤과 함께 방방곡곡으로 번져 갔을 것이다.
지방마다 사투리와 억양이 다른 말과 뜻으로 변형되어
다양한 민요가 되고 가요와 타령이 된 것이다.
일종의 민중의식 계몽 운동이며
계급 신분을 타파하는 인권운동이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통일신라 시대 원효대사의
<각설이 타령> 등은 문헌으로 고증되고 있다.
그와 같이 <아리랑> <가시리> 등의 어원도
유사한 맥락으로 선각자들이 불교의 핵심 사상인
반야심경의 마지막 언구을 노랫말로 바꿔
불법을 깨닫게 하는 수행 방편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본다.
아리랑의 어원은 30여 종의 설이 있지만
아직도 그 내용이나 의미의 기원을 적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의 비유적 언어를 구체적으로 추론하지 못한 것이라 본다.
그래서 <아리랑>이나 <가시리>는 남녀의 이별이나 삶의 애환으로
누구를 떠나보내고 간다는 이별의 노래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자신을 구원하는 깨달음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아니라 나의 본성인 무아와
나라고 집착하는 유아와의 관계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을 떠나 행복한 세상을
나도 너도 함께 가자는 내용이 전도된 것이다.
불교를 믿는 목적이 생사 해탈로 현세의 괴로움을 벗어나
행복한 세상인 극락정토에 함께 가자는 내용이듯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을 범어 원음이나 의역으로
뜻을 풀어서 민중들에게 불법을 포교한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두 가지로 나눠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첫째는 경문의 내용이나 문장의 뜻으로 살펴보고
둘째는 있는 그대로 깨어 있는 선행(禪行)과 비교해서 살펴본다.
* 먼저 경문의 내용이나 문장의 뜻으로
<아리랑> 가사를 살펴보면
아리랑을 왜 이별하는 가사로 이해하고 있을까?
이는 우리 글로 해석하려는데 오해가 있다.
우리 글은 대부분 한자음으로 쓰지만
그 뜻을 새겨 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리라 바로 알아서 고개 넘어가자.
나는 이치를 깨닫고 깨달아 바로 깨달아 참 진리의 깨달음에 들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소.'
아(我) 나 우주라는 뜻, 리(理)는 진리인 이치를
랑(朗) 밝다, 깨달음, 앎이다.
'나를 깨닫는 기쁨이여, 나를 깨닫는 기쁨이어서,
나를 깨닫는 기쁨을 얻는다. ' 이런 뜻이 된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라는
나는 깨달음의 완성(고개)을 한다(넘어간다)는 뜻이다.
고개, 언덕은 바라밀(波羅蜜)로
‘저 언덕으로 건너다.’ ‘완전한 것을 이루다’의 뜻이고
완전한 상태 · 구극(究極)의 상태 · 최고의 상태로
현실의 괴로움에서 열반의 행복한 도피안(度彼岸)으로 해석한다.
즉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은
'나는 참 진리를 깨닫고 깨달아
현실의 괴로움에서 완전한 열반의 행복함을 이룬다.'라는 뜻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도
내가 누구인가? 를 바로 보라는 뜻이다.
동지섣달에는 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꽃을 본듯하냐? 는
나는 본래 5온이 공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임을 바로 알아차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가 지방마다 다른 사투리와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내용의 아리랑이 나왔다고 본다.
* 다음은 <가시리>의 내용이다.
<가시리>는 반야심경 후렴의 원음과 거의 흡사하다.
범어로는 '가테 가테 바라 가테 바라 승 가테 보디 스바하'이다.
우리 말로 소리 나는 그대로 쓰면
'가세 가세 빨리 가세 빨리 승으로 가세'로 들린다.
가고 오는 것은 앞에서 여래하고 했다.
여래는 연기 작용성으로 모든 존재가 부처의 씨앗이라는 말이다.
어디로 가는가 열반의 세상 피안의 세상으로 간다는 말이다.
승으로 가세라는 것은 승은 깨달은 사람의 상징이다.
즉 내가 열반의 부처가 되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말의 뜻으로 풀어보면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언덕을 넘어서 가자‘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아상인 나를 버리고 가야 한다.
애지중지 집착하는 나를 버릴 때
즉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면 참 진리에 간다.
내가 깨달아 가는 내용으로 가사를 이해하면
모두가 풀려간다.
잡사와 두어리만 선하면 아니 올 세라는
나라는 아상에 집착하면 무아의 본래 성품에 갈 수 없다.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도셔 오셔서
집착하는 아상을 떨쳐버리면 서운할 것 같지만
본래 자성을 깨닫게 되면 그놈이 본래 그놈이니
본래 있는 그대로 가고 오는 것이
공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 무슨 애절한
남녀의 이별로 들리는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나투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떤 비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어휘나 염송의 소리가
노랫말처럼 가락으로 흥을 돋운 것이다.
* 다음은 <각설이> 타령을 살펴보자.
'얼씨구 시구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의 각(覺)은 '깨달을 각(覺)'자이고,
설(說)은 '말씀설(說)' 이며, 이(理)는 '이치리(理)' 이다.
이를 풀이하면 "깨달음을 전하는 말로서 이치를 알려 준다."라는 뜻이며,
한마디로 무명의 중생들에게 세상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본래 마음 즉 내가 누구인지? 를 알아차린다는 말로
참 진리의 본성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참 진리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 있기에
영원하여 죽지도 않고 돌고 돌아온다는 뜻이다.
각설이 타령의 가사를 살펴보면 ‘얼씨구’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얼씨구는 얼의 씨를 구한다는 의미라 하고
얼(알, 공)은 순우리말로 영혼을 뜻하지만
얼의 씨는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의 본래 성품인 불성 즉 공성의 마음자리를 말한다.
얼씨구 시구 들어간다~ 절씨구 시구 들어간다~" 이는
본래의 성품인 공으로 들어가자는 뜻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와 같이
우리의 본래 성품을 알아차리고 내가 깨달아 가니 얼마나 좋은가!
"작년에 왔던 각설(본성)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가는 듯 오는 듯 깨달음은 본래 있는 그대로네 ~"
법의 본성은 인과 연에 의한 연기작용으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즉 참 진리는 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기에
영원하여 죽지도 않고 돌고 돈다는 뜻이다.
우리가 바른 깨달음을 얻으면 생사 해탈을 한다.
그래서 죽지도 않고 다시 태어난다.
그렇기에 내가 깨달아서 늘 이웃을 배려하고 베풀며 덕(德)을 쌓는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라! 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 다음은 있는 그대로 진언과 선행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 진언인 문장의 뜻이나 내용이 아닌 소리의 뜻만으로 살펴본다.
글자의 뜻에 의미를 두지 말고 소리에 의미를 두고 살펴보자.
불교서 말하는 주문이나 다라니는
오직 소리 그 자체에 의존하는 알아차림이다.
글자의 뜻을 음미하거나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읽힌 소리 그 자체로 100%가 되면 한순간에 본성을 깨닫게 된다.
앞에서 말했지만, 주문은 문자나 글을 세우지 않는
불입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견성성불하는 선불교의 핵심적인 수행 방법이다.
간화선인 화두 말후일구(末後一句)의 알아차림이다.
즉 소리 그 자체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오직 할 뿐!
다시 말해 온전히 깨어서 할 뿐일 때,
홀연히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부처의 삶은 늘 지금 깨어 있는 행복이고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소리 하니 귀가 듣고
마음이 앎을 알아차리니
소리하는 자, 듣는 자, 아는 자, 모두가
분별없는 하나 된 놈, 그놈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글들이 뜻을 알려 하지 말고 그냥 외워라 하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데 지역이 다르고, 방언이 다르고,
소리하는 성별이 다르고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게 흘러오다 보니 다양한 형태로 변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가태 가태 바라 가태가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한술 더 떠서 순우리말의 뜻으로 변형되어
얼씨구 시구로 들어가는디,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와서
산천초목 우주 만상이 모두가 아리요 얼이요 각설이다.
그럴 때 시공간이 무너지고 오직 연기 작용성만 남으니
그것이 무아인 얼이요, 알이요, 공살이다.
본래 뜻이 없으니 시작고 끝도 모두가
이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이것이다.
있는 그대로 공한 모습이고
쓰는 그대로 부처다.
서서 걷는 그대, 춤추는 그대가 나이고
소리치는 아재도 아리랑도 가시리도 각설이도 나이다.
더 무엇을 생각하고 뜻을 좇으려 하는가?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라는 뜻을 묻지 말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로 크게 외워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고'
'가테 가테 바라가테 바라 승 가테 보디 스바하'
'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날 버리고 가시리 잇고' 각각 소리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얼씨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죽지도 않고 또 오는 연기작용의 진수(부처 되는 길)를 설파하고 있다.
그냥 오롯이 소리로 살아있는 그것이 공한 반야의 진리다.
이것이 진언인 칭념염송이고 향가요 민요가 된 것이다.
어려운 글자를 몰라도 그 뜻을 몰라도 그냥 소리 흉내 내며 춤추고 노래하며
한바탕 걸판지게 노는 가운데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참 살이로 살면
죽지도 않고 다시 또 오기에
늘 이웃과 함께 나누며 덕(德)을 쌓는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라! 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노는 입에 염불하고
심념(心念) 공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공은 있는 그대로 공염불인데….
그래도 공도리가 턱 한마음에 앉지 못한다면
벌떡 일어나 한바탕 각설이 타령으로 무에 춤을 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 춤으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공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지 않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공이다.
그리고 그 공도리를 바르게 알고 씀이 중도인
아뇩다랴삼약삼붓다(무상, 정 등, 정각)인 무주상 보시이다.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마지막 핵심인 중도실용의 깨달음을 확인한다.
이상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민요로 불리는
<아리랑> <가시리> <각설이> 등은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수행 방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는 시작부터가 신분을 타파한 인류구제 운동이듯
다양한 형태로 대중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언어나 풍습, 노랫말로 전승되고
다양한 방편과 수단으로 깊이 뿌리 내려온 것이지만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내용이 많이 왜곡되었고 변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이라 본다.
이제라도 확실한 근거와 고증을 통해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아이랑>이나 <가시리>가
남녀의 이별 노랫말이 아닌
자신을 깨닫는 구도의 진리이며 법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이상으로 <우리말 반야심경>의 해설을 마친다.
그동안 1년간 50여 회를 통해 반야심경의 내용을 살펴봤다.
시작은 전문적인 용어나 의미를 쉬운 우리말로 해설을 하고
선불교의 실체 체험을 통한 반야의 진리를 알아차림 하는 경험을 의도했다.
하지만 소승의 견해가 부족하고 밝지 못해
자꾸 어려운 용어나 해석의 덧말로 사족을 달았다.
좀 더 명쾌하고 선명한 내용을 엮어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송구하게 생각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반야심경이다.
시작이면서 끝이고 끝이면서 시작이다.
반야심경이 무엇입니까?
허공에
○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