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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3-17)
13 Jesus went back again to the shore of Lake Galilee. A crowd came to him, and he started teaching them. 14 As he walked along, he saw a tax collector, Levi son of Alphaeus, sitting in his office. Jesus said to him, “Follow me.” Levi got up and followed him.
15 Later on Jesus was having a meal in Levi's house.[a] A large number of tax collectors and other outcasts was following Jesus, and many of them joined him and his disciples at the table. 16 Some teachers of the Law, who were Pharisees, saw that Jesus was eating with these outcasts and tax collectors, so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such people?”
17 Jesus heard them and answered, “People who are well do not need a doctor, but only those who are sick. I have not come to call respectable people, but outcasts.”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2)
요한 복음은 이렇게 2,000년 전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분은 초라하게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나서 말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렇게 낮고 천한 사람을 소개할 때 태초의 하나님을 언급해야만 했습니다.
그 분이 시공을 초월하신 전능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분이 30세 되셨던 어느 하루 일어난 일을 이릅니다.
그 분이 시공의 제한 안에 있는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셨습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다. 무리가 모두 예수께로 나아오니, 그가 그들을 가르치셨다.
13 Jesus went back again to the shore of Lake Galilee. A crowd came to him, and he started teaching them.
예수님과 사람들이 갈릴리 해변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조자와 그 피조물
영원하신 분과 해 뜨자 사라지는 이슬 같은 존재
그 분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무력함
그 분의 전지하심과 인간의 무지함
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그 분이 가버나움 회당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귀신이 지레 겁을 먹더니 예수님 말씀 한마디에 쫓겨 갔습니다.
그동안 똑같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수없이 들어왔는데도 그런 경험은 예수님을 통해서 처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 가르침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씀하는 것이구나 했습니다.
27.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막1:27)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그 장모의 병을 고치시니 그 녀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시중들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우하고 예수님께 몰려갔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다. 이제는 귀신에게 해방되었다. 질병에서도 해방이다!”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마을을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피하셨으니 제자들은 깊은 산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찾아나서야 했습니다.
제자들 생각에 그들은 예수님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어서 주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습니다. 어서 가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7)
제자들조차 주님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곁에서 덤벙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떠나셨던 그 분이 다시 마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들것에 한 환자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햄머를 들고 한 사람은 곡괭이를 챙겨 들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들것에 누인 다음 담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서슴없이 남의 집 지붕을 뚫어 병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친구의 병 낫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의 죄를 용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5)
병자는 그대로 누워있었으니 죽을 고생을 한 네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죄 용서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데.......
내 친구는 그대로 누워있는데.......’
당시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죄용서의 선언을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죄 용서란 사람이 선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옳은 주장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은 그들을 더 황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막2:10)
그러면 이 청년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말씀은 그들이 들을수록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분 앞에서 에덴 동쪽의 신학은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에덴 동쪽에서의 경건은 이 청년의 말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부인하지도 못했던 것은 그가 베푸는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도
한 명의 양식으로 5,000이 먹은 것도
또 나으라는 한마디 말씀에 거뜬하게 건강을 회복하는 일들도.......
그 분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습니다.
내 신학을 바꾸고!
그러자니 너무 겁나는 일이었습니다.
내 영혼을 다 비우고 이해되지 않은 그 분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다니!
내 존재를 그 앞에 무장해제 하다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분의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 날 주님은 그 가르침의 장소를 바닷가로 정하셨습니다.
거기는 파도 소리가 들리고 갈매기가 날아다녔습니다.
엄마 따라온 아이는 모래 위를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주님은 목사 가운을 싫어하신 것이 분명하십니다.
녹색의 후드를 걸치시는 것도.......
톱밥 묻은 작업복을 걸쳐입고.......
바닷가에서 주어진 오늘의 주제는 “과연 누가 복음의 대상인가?”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문제를 이미 다루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노상 사람들의 허를 찔렀는데 그 때도 그랬습니다.
그의 말씀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엉뚱한 사람이 죄 용서의 대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눅2:5)
한 명의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주님께 온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햄머를 들고 다른 사람은 곡괭이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더니 그 네 명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더니 엉뚱하게 자리에 드러누운 사람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그 병자가 죄 용서의 대상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최소한 그 병든 자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병 치료하시고 또 정말 죽도록 수고한 네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컸습니까?
그 네 사람에게는 죄 용서를 선언함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 네 명이 수고한 공은 어디로 간 거야!
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하지만 이런 이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믿는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미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등쳐 엎으시고 지붕 위로 올라가셔서 지붕에 구멍을 뚫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수고를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수고하신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등에 엎힌 채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일한 사람이 그 수고의 댓가를 누려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딴 사람이 그 결실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딴 사람이 우리였습니다.
37. 그러므로 '한 사람은 뿌리고, 한 사람은 거둔다' 한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려고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요4:37,38)
그 기이한 일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14.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14 As he walked along, he saw a tax collector, Levi son of Alphaeus, sitting in his office. Jesus said to him, “Follow me.” Levi got up and followed him.
* 레위
예수님을 멈춰 계시기를 바라는 곳을 속절없이 떠나셨고 예수님께서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실 곳을 주저 없이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엉뚱한 대상을 상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왕따 당하는 일을 싫어합니다.
겁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왕따당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 사람 레위와 관계했다가는 예수께서도 여지없이 왕따당하는데.......
이 사회에서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왕따당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할 것입니다.
아니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가용을 굴리며 경제적 혜택을 다 누리며 또 일본놈에게 정치적 보장까지 다 받고 있었습니다.
그랬으니 그 마을에서 그런 세리를 두고 왕따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몰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줏대 있는 신앙인들은 이런 사람을 더 심하게 배척했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당연히 죄인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세리들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민족을 배신하는 댓가로 잘 챙겨 먹고 세상 보장받는 것이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날도 많은 무리에 섞여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총이 매서웠습니다.
그 무리에 섞일 경우 열심 당원에게 단도에 찔리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 혜택을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종교적으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닙니까!
그가 그 권력을 가지고 강간과 살인이라는 파렴치한 범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일로 그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갈 때 그는 시므이라는 사람에게 이런 모독을 당했습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 마을에서 나왔는데, 그는 사울 집안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로서, 이름은 시므이였다. 그는 거기에서 나오면서, 줄곧 저주를 퍼부었다.
6. 다윗 왕의 모든 부하와 모든 용사가 좌우에 서서 왕을 호위하고 가는데도, 그는 다윗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계속하여 돌을 던졌다.
7.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여 말하였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8.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삼하16:5-8)
시므이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윗을 종교적으로 저주했는데 그는 그런 소리를 들을만 했습니다.
당시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도 한 손에 돌멩이를 들고 시므이처럼 행동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다윗은 왕따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때에도 다르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고민하고 있는 다윗의 왕궁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무 범죄자나 옳거니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된다고 말하면 오산입니다.
예수님의 대상은 바로 이런 범죄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며 저거 확 죽이고 오겠다는 같이 있던 장군들과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는 시므이의 말을 철저히 하나님을 전제하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의 저주를 욕지거리나 폭력으로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10. 왕은 대답하였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11. 그런 다음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에게 말하였다. "생각하여 보시오. 나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도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하물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주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혹시 주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삼하16:10-12)
다윗은 욕해 놓고 기억에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판검사와 바이든이 날리면으로 들린다고 아부 떠는 간신배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바이 바이 날리 날리 방송을 들으면서 실실 웃는 그 패거리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따로 불려 갈 것입니다.
그는 누구인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아직도 저 사슴이 사슴으로 보여? 죽고 싶어? 그래 이제 말로 보이지!”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그는 “맞아요. 저 사슴이 히히힝 말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어요”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레위는 그 날도 예수님께 몰려가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 때 시므이 한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향해 퉤 하고 침을 뱉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세관의 문을 열고 예수께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 방문
말과 행위를 일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악하게 돌아가는 죄인 세상에 하나님 나라 생각을 일치시키신 것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 예수님은 꼭 모난 행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세리를 향해 침을 뱉을 필요까지야 없으시겠지만 이 세관 앞을 그냥 지나가시면 될 일이었습니다.
세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실 줄이야!
하지만 주님은 종교적으로 소외된 마태를 위해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안
주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신 것입니다.
레위에게 회개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놈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다니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뒤 상황을 보면서 여기까지라는 경계를 정합니다.
자선을 베풀더라도 내 먹을 것을 챙겨두고 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세상 죄인 현실에다가 하나님 나라 현실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경계를 훨씬 뛰어넘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식이셨으니 주님께 죽음은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하필 그 사람을 제자로 삼아 항상 데리고 다니시겠다는 것입니다.
*수용
세리는 주님이 자신의 직장 문을 열고 자신을 찾아오시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다가서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곡괭이와 햄머로 남의 지붕을 뚫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세리라는 무거운 짐을 들것에 눕히고 예수님께 접근하는 일은 생명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스스로 그 일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냥 세관에 출근해서 돈이나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예수님께서 그 분의 생명을 거시고 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이 되신 셈입니다.
그 분이 세리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상상도 못 할 제안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일체 설명이 없으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 때 세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세리는 돈뭉치를 쌓아 두고 돈 세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 한 마디의 주의 말씀에 그는 그 돈뭉치를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 둔 채 예수님을 따라 세관을 나왔던 것입니다.
더러운 돈!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Jesus said to him, “Follow me.” Levi got up and followed him.
15.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5 Later on Jesus was having a meal in Levi's house.[a] A large number of tax collectors and other outcasts was following Jesus, and many of them joined him and his disciples at the table.
* 공개 식사
사람은 정말 섬세합니다.
영적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정확히 눈치채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하심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죄인들이 한 자리에 다 모인 것입니다.
공개적인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12 제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은
예수님과 바로 이웃집 사람이어서
아니면 예수님과 초등학교 동창이어서
아니면 친인척이라서
한 번 큰 도움을 주어서.......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신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그 파티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공개적인 적이 되신 것입니다.
*소신
주님이 하셨던 일은 당시의 사람들 눈에 증오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소수 의견이라고 하는데 그는 죄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소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시에 오직 예수님 한 분 외에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소신 행위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독재자에게 동생 부인을 빼앗는 일은 잘못이라고 말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무도 이 일에 입도 뻥끗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불 보듯 뻔 했으니까.......
그 일을 요한이 한 것입니다.
그 일로 그의 목이 잘려 접시 위에 놓인 것입니다.
가만있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적인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6 Some teachers of the Law, who were Pharisees, saw that Jesus was eating with these outcasts and tax collectors, so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such people?”
*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대해서 안 되는 대상을 상대하신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세리나 죄인들이 이 일을 두고 예수님께 따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을 두고 죄인과 세리와 함께 하느냐고 그 소리를 했겠습니까?
자신의 일인데.......
그 사람이 바리새인 율법학자에 속했느냐 세리와 죄인에 속했느냐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그 소속에 의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른 행동을 하는 법입니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을 평가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들은 이런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놈 밑에서 그 비굴한 생활을 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머니 병원비 마련해야 하고 아이들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다가 말 안 해서 그렇지 너희에게 세리가 되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것을 거부할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5급 공무원 되는 일이 쉽냐?
이렇게 빠른 시간에 경제적인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세리 말고 또 어디에 있나!
여러 가지 사회적 보장까지 받는다!
바리새인 중에 네가 세리라고 욕을 듣기는 해도 그만한 직장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며 부러워한 사람도 있었다.
너희에게 세리의 일이 주어졌다면 나보다 더 잔인하게 행동했을걸.......”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합니다.
미국에 살았더라면 자연스럽게 영어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땅에 살았으니 한국문화에 익숙한 것입니다.
세리가 되면 세리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2 Do not conform yourselves to the standard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wardly by a complete change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know the will of God—what is good and is pleasing to him and is perfect.
세상 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눈 앞에 보여주셔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세리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세리들 눈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but let God transform you inwardly by a complete change of your mind.
하나님의 손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즉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바리새인은 바리새인의 의 율법학자는 율밥학자의 의를 말할 뿐입니다.
세리는 또 세리의 의를 말할 것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말을 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너는 보아도 못 보고 들어도 못 들어 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성령을 통해서 세상의 문화라는 색안경이 벗겨지지 않은 한 제대로 된 나무 색깔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녁노을도!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반항했다기 보다 거듭나지 못해서 자기 집단의 의를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편에서는 의였는데 그것이 예수님 적대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깡패의 의리는 이 사회에 엄청난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깡패들끼리나 통하는 일일 뿐입니다.
장세동의 전두환과 의리는 엄청난 학살로 드러난 것입니다.
* 판검사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죄인과 먹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태껏 그래왔습니다.
세리들이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사람들은 침을 뱉으며 그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것이 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판검사들의 의와는 반대였습니다.
다른 세리에게도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삭게오가 올라가 있던 뽕나무 아래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삭게오를 향해 거기에서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그 시간이 통틀어서 한 시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30분?
나무 위에서 내려오는 시간 또 예수님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는 시간.......
주님이 하신 일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그의 이름을 웃으면서 부르시고 집에까지 한 번 가준 것 뿐이었습니다.
그 한 시간 만에 삭게오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눅19:8)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전입니다.
주님이 그의 집을 방문하시자 그들이 쑥덕거렸습니다.
7.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하였다.(눅19:7)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을 그가 현재 세리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한 시간 후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시간 후의 세리장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 한 시간 후에 그 세리장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말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세관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리들은 판검사의 눈으로 세리 마태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 Jesus heard them and answered, “People who are well do not need a doctor, but only those who are sick. I have not come to call respectable people, but outcasts.”
* 의사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판검사가 아닌 의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판검사와 의사가 서로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판검사는 병든자를 감옥에 집어넣고 건강한 자들과만 어울려서 골프 치러 다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병자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차이는 그 상대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판검사들은 매질해야 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잔치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의사와 판검사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 사람을 보는 시각입니다.
판검사는 죄인을 감옥에 넣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죽게 된 환자를 수술대에 눕히는 것입니다.
의사는 철저히 변화의 가능성을 두고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건강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그의 의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철저히 의사의 입장입니다.
사람을 변화의 가능성에 언제나 열어두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 내리는 판검사의 입장에 서는 자들은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했던 그런 방식으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 판단이 틀려서가 아닙니다.
정확히 그 죄에 대해 판정을 내려도 마찬가지입니다.
4.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
5. 그런 사람은 완고한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터뜨려 의로운 심판을 하실 그 날을 앞에 두고,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롬2:4,5)
판검사의 입장에 선 사람은 변화를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죄인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입니다.
범죄 행위를 한 자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변화를 부인하는 자가 죄인입니다.
즉 의사의 입장에 서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도록 그 변화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결혼식장에 포도주를 마련하지 못 한 것을 두고 죄라고 고발하시지 않습니다.
물로 포도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손발 씻는 물을 길러와 항아리를 채우라고하실 때
또 그 물을 들고 연회장에 가라고 하실 때
물 길러 와서 뭐 하느냐고 대드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물이 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변화로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로 열려있습니다.
그렇게 죄인이 천국 백성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또 세리만이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모조리 병자이니 모두 예수님께 갈 이유가 있습니다.
9.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에게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3:9-12)
모조리 의사이신 주님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한 변화가 없이는 천국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있어서는 병이란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병뿐입니다.
무슨 이유를 대든지 스스로 의인이 채 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인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은 불치병에 걸린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죄로 단정 지으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변화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마겟돈 전쟁을 언급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인간 상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인류 공멸의 길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최선을 모은들 거기에 멸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사람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뜻대로 돌아갈 때 비로소 생명의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