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점검66: 용아의 막야검, 암두의 큰웃음
덕산스님에게 용아스님이 물었다.
“학인이 막야검으로 스님의 목을 베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덕산이 목을 빼고는 앞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화아!”
용아스님이 말했다.
“목이 떨어졌습니다.”
덕산스님이 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또는 덕산스님은 곧장 방장실로 돌아갔다.)
용아스님이 나중에 동산에 이르러 앞의 일을 말하였다.
동산스님이 말했다.
“덕산스님이 무슨 말을 했는가?”
“덕산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자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이 노승에게 가져와보라.”
용아스님은 곧 살피고는 곧바로 참회하며 사죄하였다.
어떤 스님이 이것을 덕산스님에게 그대로 말하였다.
덕산스님이 말했다.
“동산 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 이 자가 죽은지가 언제인데, 살려 무엇을 하려는가?”
德山因龍牙問。學人仗鏌耶劍。擬取師頭時如何。山引頸近前曰[囗@力]。牙曰頭落也。山呵呵大笑。牙後到洞山舉前話。洞曰德山道什麼。牙曰德山無語。洞曰。莫道無語。且將德山落底頭呈似老僧看。牙方省。便懺謝。有僧舉似德山。山曰。洞山老人不識好惡。者漢死來多少時。救得有甚麼用處。
오늘날 선(禪)을 살피는 자들은 선사를 찾아오는 선객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며 거론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입을 열기만 하면 곧 허물이 산을 이루고 강을 이루어서 차마 눈뜨고 보기조차도 민망할 뿐이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저 용아스님이 일체의 차별과 번뇌 망념을 차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묘검(妙劒)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찌 저 용아스님이 일체의 차별을 끊고 번뇌망념을 차단하지 못했다면 감히 저 막야검을 얻었다고 자부했으리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일체의 번뇌가 끊어지고 조적(照寂)이 환하게 드러난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어찌 제방의 안목을 결단하기 위해 감히 길을 떠날 용기를 냈을 것인가?
그러나 그가 가진 검을 다시 살필 필요는 있다. 그는 정말 막야검을 얻었을까? 아니면 그저 스스로 그렇게 임의로 이름붙인 것일 뿐인가? 그것은 저 참으로 저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리라.
그는 이미 취미화상, 임제선사 등을 뵙고 법거량을 한 이후였다. 어찌 나무칼을 들고서 가늠하는 자와 견줄 일이겠는가?
용아스님은 용의 발톱을 드러내며 덕산스님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저 덕산스님은 천연스럽게 목을 내주고 몸을 내주었다.
어찌 저 옛 사람은 이처럼 천연할 수 있었을까?
저 덕산스님은 도대체 어떠한 안목을 갖추었기에 이럴 수 있었을까?
살피려면 먼저 이것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저 말로만 법신 운운하면서 저 덕산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는 그저 거칠고 엉성한 이해를 면치 못할 뿐이겠다.
저 용아스님은 말했다.
“목이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자는 말하기를, ‘오히려 저 용아스님의 목이 떨어졌다’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만약 참으로 스스로 칼을 휘둘려서 스스로의 목을 쳐냈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찌 그러기가 쉬울 것인가? 상대를 베기는 쉬워도 스스로를 베기는 어려운 것이다. 저 뱃사공 노릇을 하는 암두스님이 노파가 아이를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는데, 어찌 노파가 스스로를 강물에 던지는 것만 하리오.
덕산스님이 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또는 덕산스님은 곧장 방장실로 돌아갔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師微笑(덕산이 미소하였다)’라고 하였고, 『선림승보전(禪林僧寶傳)』에서는 ‘鑒便休去(덕산이 곧 그만두었다)라고 하였는데, 『지월록』, 『오등전서』, 『교외별전』 등에서는 모두 ‘師呵呵大笑(덕산이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벽암록』에서는 ‘山便歸方丈(덕산이 곧 방장실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벽암록』의 기록이 마음에 든다.
나중에 이 말을 들은 동산선사는 말했다.
“아무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자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이 노승에게 가져와보라.”
이 말을 문득 알아들었기에 용아스님은 저 덕산에서 얻지 못한 것을 동산에서 얻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용아스님은 동산선사의 법을 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덕산선사는 말했다.
“동산 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 이 자가 죽은지가 언제인데, 살려 무엇을 하려는가?”
여기에 ‘이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덕산인가? 용아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덕산선사의 이러한 말은 오히려 신령스러운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격이라고 하겠다.
동산선사는 말했다.
“아무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자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이 노승에게 가져와보라.”
어찌 저 신령스러운 거북이 꼬리를 끄는 자취를 보지 못했다면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인가.
용아스님은 여기에서 곧 살피고는 곧바로 참회하며 사죄하였다.
참회하고 사죄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허물을 알았을 때, 진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미 저 용아스님은 그러하였기에 그와 같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스스로를 제대로 살피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저 스님이 칼을 휘두르자마자 스스로의 목이 먼저 떨어졌다’고 했는데, 저 저울눈금을 전혀 잘못 읽었다고 하겠다. 당시에 덕산에게 칼을 내리쳤어도 전혀 용아 스님은 목이 떨어지지 못했다.
죽음이란 그렇게 간단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작은 죽음을 천개 합하더라도 어찌 큰 죽음을 감당하리오. 참으로 큰 죽음이라면 대선지식과 마주하는 인연 아래에서 고개를 돌릴 줄 알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살펴야 하는 것은 저 덕산의 깨달음, 동산의 깨달음, 용아스님의 경계를 분명하게 살피고서 꿰뚫는 것에 있다. 만약 이 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어찌 다음의 암두선사를 살피는 것이 쉬울 것인가? 그렇지만 얼핏 보면 매우 살피기 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쉽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니면 이미 투철한 안목을 갖추는 경우일 것이다.
암두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서경에서 옵니다.”
“황소가 지나간 후에 칼을 주웠는가?”
“주웠습니다.”
암두가 목을 빼고 다가가며 말했다.
“화아!”
“스님의 목이 떨어졌습니다.”
암두가 하하! 하며 크게 웃었다.
그 스님이 나중에 설봉에 이르렀는데, 설봉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암두에서 왔습니다.”
“암두가 무슨 말을 하던가?”
이 스님이 앞의 일을 그대로 말하였다.
설봉이 곧바로 30대를 후려쳐서 쫓아냈다.
巖頭問僧甚處來。曰西京來。
巖曰黃巢過後還收得劍麼。曰收得。巖引頸近前曰[囗@力]。曰師頭落也。
巖呵呵大笑。僧後到雪峰。峰問甚處來。曰巖頭。
峰曰巖頭有何言句。僧舉前話。峰便打三十棒趁出。
암두스님은 저 스승인 덕산선사의 역량과 같은 일면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암두가 목을 빼고 다가가며 말했다.
“화아!”
‘화아!’ 라고 한 것은 한자 ‘口’ 안에 ‘力’을 넣은 의성어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곧 입에서 힘을 쓰는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왜 소리를 냈는가? 저 스님으로 하여금 어서 빨리 칼로 베도록 몸소 거들은 것이다.
그러자 이 스님은 마치 그것을 신호로 하듯 곧장 칼을 내리쳤다.
왜 이 스님은 칼을 들고 다니면서 칼을 휘두르는 것일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법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이유를 밝힐 수 있다면 저 스님을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어찌 문을 지나지 않고 마당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인가? 반드시 저 스님을 살필 수 있어야 비로소 암두스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암두스님에게 다가가려면 두 겹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그저 삼가촌(三家村)의 맹팔랑(孟八郞)이라면 어찌 암두를 볼 것인가?
이에 암두스님은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이 웃음은 크게 다르다. 특별하고 특별하다. 만약 동산선사가 말한 “아무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마라. 자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이 노승에게 가져와보라.”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명쾌하고도 분명하게 저 웃음 또한 알 것이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암두의 몸(법신)을 어찌 벨 수 있을 것인가? 사실은 설봉의 처소에서 자신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저 스님은 끝내 자신의 머리를 쳐내지 못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저 설봉스님은 사형인 암두스님의 뜻을 알았기에 이 스님을 후려쳐서 쫒아내었다. 그렇지만 그저 30대의 방망이에 그친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참으로 저 스님을 위한다면 더 후려쳤어야 했다.
끝으로 한 자 적는다.
누가 알았을까?
덕산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이미 죽은 자를 베는 것은
공연한 헛수고일 뿐이다.
하하! 큰 소리로 웃음에
문득 하늘이 어두워지고 노래 소리 끊기었다.
누가 말했는가?
서천오랑캐가 지(知)했어도 회(會)하지 못했다고.
고림선원 취산 합장
첫댓글 ㅡㅡㅡ합장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