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남아있는 선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경상북도 칠곡군 신동입석은 높이가 4.5m, 밑 둘레 2m이다. 묘의 면적은 897㎡이다. 입석은 선돌의 또다른 표현이다. 현재 경북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신동입석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 확실하냐는 물음에 대해 칠곡군청 문화과 또한 대답을 주저했다.
중요한 것은 발굴 시기를 청동기로 본다는 점이다.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할 때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돌도끼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는 고인돌과 함께 고조선의 유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선돌 아랫부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이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선돌(menhir)은 고인돌을 비롯한 돌널무덤, 둘레선돌(stone cirde), 줄선돌(stone alignment)과 함께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한 유형에 속한다. 함북에서 제주까지 전국적인 분포를 하고 있다. 또한 서부 유럽을 비롯해 아프리카 북부, 근동지역, 시베리아, 티베트, 동남아시아지역, 몽골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문식 세종대학교 교수는 “최근까지도 인도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죽은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선돌이 건립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건립 시기로는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상당히 오랫 동안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칠곡 선돌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옥천 안터, 창원 아득이, 제천 황석리, 대구 진천동 선돌 등이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일까?
첫 번째 농업생산의 풍요와 인구생산의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선돌을 쌓을 때 남성의 상징으로 끝을 뾰족하게 치석하거나 여성의 상징으로 끝을 넓고 평평하게 치석하는 경우가 그렇다. 선돌의 대부분 평지와 구릉 야산의 끝자락에 샛강의 물줄기를 따라 세워진 것은 농경문화와 관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수호 의지를 시사한다. 선돌양식은 가부장 및 부계씨족장과 마을 공동체 부계촌장의 강한 힘으로 마을의 안전과 안녕을 수호하고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과 심지어 질병 또는 악귀의 침입까지도 물리치겠다는 벽사 의지가 담겨 있다.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는 선돌을 마을 수호신의 표상으로 생각하여 신앙하거나 제사하는 민속도 발생한 것이다.
세 번째 무덤의 묘표의 의미와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위치가 고인돌이나 무덤 부근에 세워졌을 때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옥천 안터 1호 고인돌과 선돌, 그리고 청원 아득이 고인돌과 선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광개토대왕비’의 경우는 선돌의 기념비적 성격과 묘표의 성격을 종합한 전통을 크게 발전시키고 대형화한 경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구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칠곡군 신동입석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로 5-7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하문식, 경기지역 선돌유적의 성격과 그 성격, 고문화72호, 한국대학박물관협회2008년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 지식산업사2010년
*참고1/중국에서 첫 밤을 보낸 통화(通化) 호텔은 도시 외곽에 있었다. 꽤 큰 호텔인데 우리 일행 외에는 손님이 없었다. 지금은 손님이 없지만, 인삼을 수확할 때가 되면 빈방이 없다고 한다. 홍콩, 대만에서 인삼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통화다. 아침에 호텔 주위를 거닐며 보았더니 호텔 바로 옆이 인삼시장이다. 백두산의약물류중심, 통화백두산인삼시장이라는 간판이 크게 붙었다. 약재료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 제약회사가 많다.
한국의 인삼 재배 기술이 들어와 통화에서는 인삼 재배가 한창이다. 값이 싸고 약효도 좋다고 한다. 이런 삼이 국내에 들어오면 국내 인삼 재배농가가 이겨낼까.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16일 오전 7시30분께 통화를 출발하여 집안(集安)으로 향했다. 압록강변 로령산맥을 따라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유일한 길. ‘고구려길’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집안에 도읍을 둔 고구려가 길을 따라 통화에 오갔다는 것이다. 이 길목에서 고구려인들이 돌을 캐서 수로를 이용하여 집안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장수왕릉의 돌을 이곳에서 캤다고 한다.
가는 동안 임찬경 박사가 고구려 역사를 강의했다. 중국에서 7년간 살면서 역사 현장을 샅샅이 살펴본 경험이 녹아난 해설이라 머리에 속속 들어왔다. 오늘 보기로 한 곳은 집안박물관, 고구려 국내성터,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모두루묘지 등이다.
“광개토대왕비나, 모두루묘에는 조상이 북부여에서 왔다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대목. 당시 부여가 대국이었고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이 그 대국 출신으로 부여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부여가 망한 뒤 백제에서는 “성왕 16년 무오 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백제 또한 부여의 정통을 이은 국가라는 의미로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이다.
부여가 어떠한 나라였는가. 임 박사는 후한 때 사람 왕충(王充, 25~220)의 ‘논형(論衡)’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후에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도 전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漢)나라 때 부여는 매우 강한 나라였습니다. 부여 왕이 죽으면 한나라에서 보내준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습니다. 옥갑은 한의 황제들이 사용하던 것이죠. 그런데 한나라는 이 옥갑을 미리 만들어 현도군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부여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장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나중에 요동의 공손 씨를 칠 때 공손연(公孫淵)이 주살된 뒤 현도군의 창고를 보니 옥갑 1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돌아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에 이 기록을 찾아 읽었다. 옥갑은 값이 많이 나가기도 하지만, 만들려면 시일이 많이 걸린다. 왕이 죽은 뒤에 만들면 늦다. 미리 만들어 놓고 부여에 가까운 곳에 보관하여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옥갑을 가지고 간다. 한나라가 부여에 이렇게까지 성의를 다한 것은 부여가 한나라와 대등하였거나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국가라는 증거가 아닐까.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은 내용ㅡ우리 역사를 소홀히 배운 게 드러난다. 고구려를 알려면 부여(夫餘)를 알아야 하리라.
집안시는 동남쪽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데 그 길이가 203.5킬로미터이다. 중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어 압록강유람선부두를 운영한다.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변을 구경한다. 국경지대라지만 평화롭고 한가롭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 기념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집안박물관으로 향했다.
1958년 9월 15일 문을 연 집안박물관은 소장 유물이 11,000여건, 전국중점박물관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길림성의 애국주의 교육 기지이고 집안고구려 유물을 전시하는 국가 AAAA(4A)급 경구(景區), 길림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2009년 새로 지은 집안박물관은 오로지 고구려 역사 문물만 전시한다. ‘고구려박물관’으로 새로 개장한 집안박물관은 면적이 13,120제곱미터, 건축면적 6,459제곱미터 그중 전시면적이 2,954제곱미터에 달한다. 중국의 저명한 건축가 제강(齊康) 중국공정원 원사가 설계했다. 외관이 팔각연화(八角蓮花)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 사상과 고구려가 좋아하는 연꽃과 상석(尙石)을 반영한 것이다. 박물관에는 고구려 유물 1,027건을 6개 부분, 17개 단원으로 나누어 고구려가 집안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의 건축 특색, 생산활동, 군사수준, 문화예술, 종교신앙 등 역사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유물로써 보여주는 박물관. 중국이 고구려를 어떻게 보고 있나,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 들어가면서부터 긴장된다. 사진 촬영이 안 되고 공안이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한다.
1층에 고구려의 역사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고구려는 주몽이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고구려현에 서기전 37년에 정권을 수립했다고 적었다. 고구려에는 국가를 세웠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중국 자료를 찾아봤더니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니까 국가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 중국이라는 국가 내의 일부인 지방정권이니까 국가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래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란으로 본다. 복속(服屬)과 배반(背叛)을 거듭해온 고구려라고 한다.
박물관 1 전시실의 주제가 ‘한당고국(漢唐古國)’.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옛 국가. 고구려가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의 중국이라는 의미. 진나라 한나라 유민이 요동으로 이주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주제이다. “고구려는 중원 역대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멸망한 후에는 유민이 한족과 기타 민족으로 융합됐다.” 박물관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책봉(冊封)ㅡ중국 황제의 봉작을 받았으니 지방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듯하다. “고구려는 북위 등 중원왕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고 중원왕조는 현토군을 통해 고구려에 조복의책(朝服衣幘)을 내렸다. 고구려 왕과 귀족은 한나라의 관복과 의장을 사용했고 수나라 당나라 때는 책봉을 받고 인수(印綬)를 받았다”고 복속 관계를 보여주는 듯한 자료만을 뽑아 늘어놓았다.
2 전시실은 웅거요동(雄據遼東). 고구려가 요동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리왕 때 국내성, 지금의 집안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발전상이다. 국내성 평면도, 유적, 연화문와당, 철부, 석저, 철추 등을 볼 수 있다. 3 전시실은 산지민풍(山地民風)이라 하여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4 전시실은 금과철마(金戈鐵馬), 각종 무기, 마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이 철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알 수 있다. 금장식품을 통해서는 물산이 풍부한 고구려의 모습이 겹쳐진다. 5 전시실은 상장유풍(喪葬遺風),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와 유물을 소개한다. 고구려 묘지군이 집안에만 80개 정도 있고 묘지가 현존 8,0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오회분 5호 벽화를 재현하였다. 마지막으로 6 전시실은 광개토대왕비와 관련된 유물로 호태왕비(好太王碑). 비석 탁본과 사진, 비문을 연구한 책까지 두루 갖추었다. 광개토대왕 비석 전시에 공을 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박물관 안내 자료에 그 속내가 보인다. "탁본에는 아름다운 광개토대왕 비문 전체가 한자(漢字)자로 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에는 고유의 문자를 없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또한 고구려가 중원에 신속(臣屬) 관계에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속(臣屬), 신하로서 복속 관계에 있었다. 즉 고구려와 중원국가는 군신(君臣) 관계이 있었다는 증거를 광개토대왕비의 한문에서 찾는 것이다.
출구를 통해 1층에 내려오니 집안 고구려비가 맞이한다. 2012년 7월 29일 중국 길림성 집안시 마선향(麻線鄕) 마선촌에서 발견된 고구려 비석. 팔각 유리관을 씌워두고 다가가서 볼 수 없어 비석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광개토대왕비도 저런 모습일 게다.
박물관을 신축하기 전 집안 박물관의 전시 내용은 어떠했을까? 그 주제를 보면 농경어렵(農耕漁獵), 석성도와(石城陶瓦), 적석위봉(積石位封), 호태왕비석편, 철마병과, 연향가무(宴享歌舞), 문화예술, 의책금화(衣幘金花)로 되어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중국색이 덜하다. 동북공정에 따라 고구려의 유물이 다르게 평가받는 현장이 바로 집안박물관이다.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했고 강할 때는 배반하고 약할 때는 복속하는 중국의 일부 지방정권ㅡ집안박물관은 이 논리에 충실한 자료만을 진열하여 고구려의 전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길림성 애국주의 교육의 기지ㅡ집안박물관은 중국의 지방정권 고구려의 문물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애국주의를 심는 교육을 하는 기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데다 공안이 계속 따라오니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힘들었다. 전시 내용을 옮겨 적으면서도 뒤에서 보는 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물관 관람을 이렇게 긴장 속에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고2/고구려와 동북공정
1. 집안, 고구려의 400년을 책임지다.
집안(集安)시는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소규모 도시입니다. 압록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과 바로 인접해있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000여 년 전, 집안시는 고구려 두 번째 수도로 그 당시에는 국내성이라는 이름을 갖고 고구려를 대표하는 도시였습니다.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668년에 멸망할 때까지의 705년 역사 중 2대왕인 유리왕부터 20대왕 장수왕까지 국내성은 약 420년동안 고구려의 수도였죠. 생각보다 꽤 오랫동안 수도였죠?
고구려 수도의 변천(네이버출처)
2.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대표적 유적지
약 4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안. 그곳에는 국사 시간에 이미 배워 알듯이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적지가 위치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광개토대왕릉비로 알려진 호태왕비, 그리고 장수왕의 능으로 알려진 장군총입니다. 그럼 먼저 호태왕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호태왕비(好太王碑)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릉비란 이름으로 친숙합니다.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 호태왕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 왕. 예전엔 광개토대왕이라고 많이 불러졌으나 요즘엔 TV드라마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광개토태왕이라고 점차 불리는 추세입니다.
그럼 왜 명칭이 자꾸 바뀌는 것일까요?
광개토태왕의 본래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이 뜻을 풀이하자면 ①국강상(國岡上)은 광개토태왕이 묻힌 곳을 뜻하며 ②광개토경(廣開土境)은 영토를 넓혔다는 뜻, ③평안(平安)은 나라를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④호태왕(好太王)에서 태왕은 왕중의 왕이라는 표현으로 호태왕은 그의 호칭을 높인 의미입니다.
최근, 위의 명칭에 근거하여 광개토태왕을 대왕(大王)이 아닌 태왕(太王)으로 불러야한다는 의견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대왕보다 더 높은 의미인 태왕이 원래 명칭인데 그 명칭을 낮춰 대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죠. 이곳 집안에서는 광개토태왕릉비를 본 명칭에 살려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릅니다. 왕비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대왕에 관한 비석으로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414년(장수왕 3년)에 만들게 됩니다. 호태왕비는 높이 6.39m로 한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비석입니다. 총 4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으로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부: 고구려 시조 주몽왕의 건국설화와 선대왕들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2부: 광개토태왕의 영토 확장과 그의 업적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비문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부: 내용은 이 비석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호태왕비가 갖는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과 같은 사실들은 그 당시에 써진 1차적 사료라는 점입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1142년에 편찬된 것 뿐 아니라 당시대를 기록한 사서가 아닌 앞선 시대인 삼국시대를 서술했기 때문에 정확성에서는 조금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태왕비는 당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군총(將軍塚)
현재 장군총은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호태왕비에서는 걸어서 20분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로 7층을 쌓아 피라미드 형식으로 능을 만들었습니다. 높이는 약 13m이며 각 단면에 호분석이라고 큰 돌이 3개씩 놓아져있는데 이것은 능의 형태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가 분실되어 총 11개만 있습니다.
흔히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정도로 그 규모가 크며 정교함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3. 집안으로 가는 길
일단 중경에서 길림성의 성도인 장춘으로, 장춘에서 집안으로 가는 방법은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는데요. 매일 아침 7시 45분, 오후 5시 30분 이렇게 두 대가 있습니다. 요금은 110元(약 19,000원)이며 소요시간은 6시간 반 정도입니다.
☺장춘시외버스터미널(长春客运中心站)
장춘역(기차역)을 등을 지고 앞쪽인 인민대가(人民大街)로 잠시 가면 왼편에 위치해있습니다.
이곳에는 장춘에서 남쪽지방으로 가는 버스들이 있습니다.(심양, 통화, 북경 등이 있습니다)
1층, 2층에 표를 사는 곳이 있는데 주요 표들은 2층에서 판매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안으로 가는 버스표 역시 2층에서 판매합니다. 버스표는 출발일 5일전부터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침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 6시에 문을 열자마자 2층으로 달려가서 줄을 섰습니다. 곧 제 차례가 왔고 전 今天早上7点左右的。(오늘 아침 7시쯤 걸로 하나)라고 했는데 아뿔싸. 표가 없답니다. 이날이 일요일이여서 그런지 이미 다 팔려있었습니다. 오후 5시 반 표는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걸 타자니 12시간을 더 기다려야 해야 되고...... 순간 정신줄을 잠시 놓았었죠. 잠시 뒤로 빠져나와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전날 집안 관련 여행책에서 읽은 내용이 기억났습니다. 거기엔 장춘에서 집안으로 가는 버스가 별로 없으니 통화(通化)로 가서 집안을 가는 방법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매표소로 가서 통화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다행히 아침 7시20분에 있다고 했고 그것을 샀습니다. 가격은 94원(보험비 1원 포함)으로 약 17,000원이었습니다. 통화에 가면 집안으로 갈 버스가 많을 기대를 품고 출발했습니다.
4시간 정도 달려 통화시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로 바로 달려가 집안가는 표를 문의했습니다. 당시 시간이 오전 11시 반이었는데 다행히 오후 1시에 집안행 버스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표를 26元에 바로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가 되어 드디어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통화-집안 구간의 버스내부인데요. 이번 차는 비교적 좌석간 거리가 좁았습니다. 제일 뒤에 앉았는데 많이 불편했었죠. 그리고 버스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하고 한 번에 집안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춰 승객들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사진과 같이 중간에 간이의자를 놓고 앉아가는 모습이 꽤 놀랐습니다. 불법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렇게 장춘에서 7시 20분 통화행 버스를 탄 후 8시간 만인 오후 3시 반쯤 집안에 도착했습니다. 집안에 도착하니 뭔가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빨리 고구려 유적지들을 향해 가고 싶었으나 이미 유적지들이 폐관할 시간이라 다음날을 기약해야만 했습니다.
4. 호태왕비, 장군총 만나러 갑니다.
둘째 날 아침이 밝자말자 얼른 씻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큰길가로 나서서 시외버스터미널 반대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버스정류소가 나오는데 호태왕비로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그것을 타고 종점에 내리면 바로 호태왕비입니다.
집안에는 집안시에서 관리하며 입장료는 받는 곳이 크게 4군데가 있습니다. 호태왕비, 장군총, 환도산성, 우산귀족묘지 이렇게 있는데요. 각각의 입장료는 30元(약 5,000원)입니다. 통합입장권이라고 이 4곳의 입장료를 한꺼번에 사면 100元(약 17,000원)으로 약간의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겉에 건물로 보호받고 있는 호태왕비. 안타깝게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라서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혼자 왔기 때문에 이곳의 중국 관리인에게 호태왕비에 대한 간략적인 설명을 들었습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설명 속에는 역사논란이 있는 부분을 설명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생각보다 꽤 보존이 잘 되어있었습니다. 육안으로도 몇몇 한자가 보일 정도로 말이죠.
호태왕비 뒤편에는 소규모의 전시관과 호태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셨으면 호태왕비만 보시지 마시고 뒤쪽으로도 한번 꼭 가보세요.
광개토태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호태왕비. 이미 손상이 많이 된 상태입니다.
호태왕비, 장군총의 예전 모습을 볼 수 있고 호태왕비 비석내용을 판독해놓았습니다.
그렇게 호태왕비를 관람하고 장군총을 향해 떠났습니다. 호태왕비의 관리인에게 장군총 가는 방법을 물으니 살 걸어가면 20~30분 정도 걸릴거라고 했습니다. 과연 중국인 관리인 말대로 20분정도 걸으니 장군총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호태왕비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이곳은 너무나 썰렁했습니다.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여행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 같네요. 입구를 지나 5분정도 걸으니 장군총이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아까 봤던 호태왕비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아주 조금 실망한감이 있었는데 이 장군총은 보자말자 정말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장군총을 보고 놀랐던 점은 규모도 규모지만 관리가 참 잘되어 있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장군총과 함께 있었던 매점. 이곳 역시 친절히(?) 한글말로 판매품들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왔을 때 저 혼자 밖에 없었는데 저기 매점에 앉아있던 중국인이 "설명해줄까?"라고 해서 그렇게 간단히 설명을 듣고 혼자서 장군총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분석이 외관상으로는 미관을 해칠 수 도 있지만 관리의 측면에서 볼 때는 참으로 좋은 방안인 것 같습니다. 만약 호분석이 없었더라면 대부분 그 모습들이 흐트러졌을 것 같습니다.
뒤편에 있었던 임시계단입니다. 올라가도록 되어있었는데 표시판엔 출입금지라고 되어있었습니다. 관리인도 없고, 다른 관광객들도 안보여 혼자 올라가볼까 생각했으나 출입금지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그냥 올라가보지 않았습니다. 장군총을 한 바퀴 돌아보고 아까 장군총을 설명해준 관리인한테 물어보니 문화재 보호를 위해 3년 전부터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장군총 뒤편에 또 다른 능이 있다고 하기에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고인돌 같은 모습의 능이었는데 아까 중국인 관리인 말에 따르면 장수왕의 장모?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만합니다.
호태왕릉과 장군총의 무덤 특징은 시신을 능 가장 내부, 밑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능의 가장 윗부분에 모셔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구려 왕손이 천제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왕들의 시신이 하늘로 향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집안의 대표적 유적지 호태왕비와 장군총을 관람해보았습니다.
☺그밖에 집안에서 해보면 좋은 것들
①자전거 빌려서 집안시내 구경하기
집안시내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는 소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만 있다면 하루 안에 집안시내를 모두 돌아다녀볼 수 있습니다. 또한, 평지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적죠. 집안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옛 국내성 남은 성벽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②압록강에 가서 북한 바라보기
현재 남아있는 국내성 성벽터
전 집안이 압록강변에 바로 인접해있는 도시라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집안시내에서 자전거로 5분정도 강변으로 달리시면 금방 압록강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그 건너편이 바로 북한의 만포시입니다. 북으로 갈수록 북한과 가까워져 북한 민가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 압록강에서 소규모의 유람선도 운행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자전거를 타시던 아주머니
북한 만포시의 모습
5. 중국은 왜?
2004년, 중국이 호태왕비와 장군총을 포함한 고구려 유적지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 일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뒤늦게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고구려 유적지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였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사 연구는 순수한 학문적 성격을 가졌다기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은 경제 개방이후 급속한 성장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 국내에선 여러 문제로 인해 항상 불안요소를 지니고 있는데요. 그 중 중국 지도층 입장에선 소수민족에 관한 사항이 무시할 수 없는 불안요소입니다. 티베트부터 시작해 위구르족, 몽고족 등 소수민족의 독립문제로 만일 소수민족들이 독립하게 되면 영토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풍부한 자원들을 잃게 되면서 중국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 지도자들이 생각해 낸 방안이 ‘현재 중국 땅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중화민족의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라는 인식을 각 소수민족들이 갖게끔 생각토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소수민족들은 역사적으로 본래 중국의 역사 속에 포함되었다는 말이 되게 됨으로써 그들의 독립을 제어할 수 있겠죠.
Baidu에서 검색한 동한(25년~220년)시대의 최대영토
동한의 영토 범위가 현재 중국 영토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정부의 정책에서 조선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옛 만주땅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뿌리로서 보면 옛 조선 사람이죠. 그렇기에 만일 조선족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겠다고 탈 중국화를 외친다면 중국정부에선 역시 큰 골칫거리가 됩니다. 게다가 한국과 북한이 통일이 된다면, 통일된 조선반도의 국가가 만주땅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다면 더더욱 중국입장에선 불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막고자 2,000년 전 존재했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면서 그 땅의 후손인 조선족(이것 역시 비판받을 수 있겠죠)이 역시 본래 중국인이라는 개념이 성립됨과 동시에 만주땅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면서 그들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번 집안 방문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이용하는 중국의 모습에, 역사를 공부하는 저의 입장에서 과연 계속적으로 순수 학문으로만 그들의 논쟁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역사는 그 자체로서 연구 대상이 될 순 없는가.
특히, 호태왕비에서 장군총으로 걷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그리고 지금의 대학교까지. 좋아하던 국사책속에서 가장 저를 흥분시켰던 고구려 유적지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을 드디어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생각. 하지만 그곳들은 이젠 남의 나라 땅이 돼 버린 지 오래. 게다가 역사논란으로 분쟁만 커져가는 현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중경통신원 박정일 글
- 중국 길림성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귀족묘지
- 20여기의 고분 중 오도문 5호묘(무덤 내부벽에 사신도 등 그려짐)만 내부관람 가능
-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등록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유적 - 장군총
-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기단식 돌방돌무지무덤
- 정식 명칭은 우산하 1호분
- 무덤의 피장자를 광개토대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을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 압록강변 - 북한접경지역
- 압록강변 중국쪽 국경도시 집안시에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북한음식 식당 운영 됨
- 압록강변 중국쪽은 유원지로 개발(수상보트)
- 압록강변 북한쪽은 초소, 산들은 거의 민둥산으로 산 전체가 거의 옥수수 밭(중국쪽은 삼림이 우거짐)
강건너 북한 지역(산을 개간하여 옥수수 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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