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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진 시집 / 오이가 예쁘다-
▲시집 [오이가 예쁘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오이가 예쁘다
박만진
노오란 호박꽃 옆에 노오란 오이꽃 예쁘다
호박꽃이 들으면 서운해 할지 모르겠지만
오이꽃 작아 예쁘고 작은 꽃이 솔직히 귀엽다
매미 사납게 운다 감나무 가지에 깃들어
잠을 자던 바람이 자칫 건드려 울려 놓은 게다
귀가 슬픈 것이 아니라 아픈,
목소리가 큰 사람이 말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고 그런 것이다
감나무의 꽃이 감나무의 웃음이라면
덩굴 풀의 꽃이 덩굴 풀의 웃음이겠다
절대로 울지 않는 울지 못하는
노오란 호박꽃 옆에 노오란 오이꽃 예쁘다
제철에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아
호박꽃은 거지반 애호박을 맺지 못하지만
오이꽃은 깜냥대로 애오이를 낳는다
노오란 호박꽃 한 송이 한 송이
황소들의 목에 종으로 달아 주면 좋겠다
노오란 오이꽃 한 송이 한 송이
소녀들의 머리핀 꽃으로 꽂아 주면 좋겠다
애오이 벌써부터 아기 가시가 돋기 시작한다
오이꽃 예쁘니 오이도 예쁘다 소리 듣겠다
장군나무
박만진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 마침 그 세월과 싸우는
용감무쌍한 장수가 있어
한동안 넋 놓고 물끄러미 지켜 볼 참이네
나 비록 갑옷을 입어 본 적은 없으나
저 옷이 얼마나 버거울까 생각해 본 적 있네
마치 승천昇天하는 용의 비늘 같은
검붉은 갑옷을 입은 소나무들이
뫼라는 이름을 텃밭처럼 지키며
초록 바늘잎 수만 개씩을 품고 저마다 푸르네
양 가지가 잘려나간 깊은 상처를 보아
영락없이 투구의 뿔 아닌가
솔방울이 바로 하늘사다리의 열매인 것을
끈적끈적한 송진이야말로
혈흔血痕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네
소나무들이 검붉은 갑옷을 입고
멍군과 싸우는 장군 나무가 되어
오로지 울울창창한 숲의 나라를 펼치다가
천 년에 이로도록 살 수는 없겠지만
무릅쓰고 수백 년을 살 수 있을 것이네
내가 처음으로 찾은 산은
박만진
내가 처음으로 찾은 산은
결코 낯설지가 않았다
주춧돌 바위들이랑
기둥감의 소나무들로 하여금
나름대로 푸른 집을 지어
풍족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숲 속에 텃새들을 놓아기르며
철새들을 손님으로 맞기도 한다
팔색조 한 마리 언뜻 보았고
딱다구리 소리 멀리 들었다
솔새인가 가까이 살폈더니
휘파람새 휘파람 분다
다람쥐, 산토끼, 오소리, 고라니들을
사위四圍에 놓아기르는 산은
언제부터인지 청서로 하여금
머루, 다래, 도토리, 쥐밤 등이
도무지 남아나지 않아
기슭이 으슬으슬 춥고
봉우리가 지근지근 아프기도 하다
결코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찾은 산은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호젓한 산길을 열어놓았고
양지 녘 몇 봉분에
죽은 자들이 잠들어 있다
수양버들
박만진
달밤 달빛이 하 아까워 잠 못 이룬 그 다음날이네 안개 자욱하고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란 마을에 이르니 낯설기도 하면서 마냥 낯설지가 않았네 이승이라고도 하고 저승이라고도 하는데 안개 걷히니 빛나는 날씨였네 시냇물 흐르고 새 노래하고 꽃이 웃는가 하면 바람도 알맞게 불었네 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흥얼거리며 구름에 달 가듯이 길을 가고 있는데 여보게, 길손! 하고 불러 세우는 이가 있어 뒤돌아보니 수양버들이 왕골로 짠 방석을 내주며 세상 얘기나 잠깐 나누자고 하네 처음부터 대뜸 자네라고 말을 놓으며 혹시 조선 시대 수양 어르신을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오네 티브이 드라마에서 몇 차례 보긴 했어도 수양대군이 세조라는 것뿐 깊이 아는 바가 없다고 얼버무려 대답하니 손가락 빗질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참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고 껄껄 웃어젖히고 나서는 밥벌이가 아니라 취미로 관상을 좀 볼 줄 안다고 떠벌리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 참 많이 했겠다고 덥석 손을 잡으며 다짜고짜로 수양아들이 되어 함께 살자고 하네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인 줄 알고 새파란 녀석이 수양아버지노릇을 하겠다고 하느냐 라고 냉큼 똥침을 놓듯이 핀잔을 주니, 그렇다면 자기를 수양아들로 삼아 함께 살면 되지 않느냐고 굳이 조르는 것이네
개울과 강과 바다
박만진
기를 쓰고 피는 꽃 못 보았고
억지로 흐르는 물 보지 못했다
개울물이 흘러 강에 이르고
강물은 마침내 바다가 된다
개울과 강과 바다는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며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다
강이 개울물을 받아들이니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니
제가 저한테로 흘러가는 것이다
여왕꽃
박만진
저것 봐! 땅 위를 기어가는
덩굴 덩굴손 보아,
덩굴에 호박꽃 피네
종소리, 종소리, 금빛
오로지 꽃잎 꽃잎들만이
하늘하늘 알아들을 수가 있네
호박꽃이 꽃종이지
호박꽃이 금종이지
호박꽃이 금꽃이지
신라 선덕여왕께서도
금관을 증표로
27대 왕위를 물려받으셨네
그제 작달비 내리니
무성한 잎사귀들
호박꽃이 우산이더니
오늘 뙤약볕 내리니
검푸른 잎사귀들
호박꽃의 양산이 되네
호박꽃은 금꽃이지
금꽃은 여왕꽃이지
여왕꽃은 호박꽃이지
귀뚜라미 시학詩學
박만진
사람들 가운데 시인이 존재하듯이
애오라지 곤충 가운데 시를 짓고
시를 읊는 시 곤충을 일컫는다면
가을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겠네
작은 연못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소금쟁이일 리가 없네
쇠똥 굴려 쇠똥 공을 굴리는 쇠똥구리일 리가 없네
반딧불이도 아니고
장수하늘소일 리도 없네
오동나무 느티나무에
죽자 살자 매달려 울음바다를 펼치는
울음의 왕이라는 매미도 아니네
귀뚜라미 종종 내 시의 풀숲을 헤치고 찾아오는데
시인인 내가 시 곤충인 귀뚜라미를
까맣게 모르고 알아보지 못한다면
귀뚜라미가 얼마나 서운해 할 것인가
반짝이는 밤하늘은 하느님의 시집이네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우러르며
어둡고 춥고 쓸쓸한 귀뚜라미들
또렷 또렷이 자작시를 읊네
시인인 나는 귀뚜라미 가슴 한 번 적시지 못하는데
귀뚜라미가 즈음 내 심금을 절절이 뜯고 있네
책책 책 쌓다
박만진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더니
눈 씻고 찾아도 길은 보이지 않고
무 씨앗 같기도 하고
배추 씨앗 같기도 한 글씨와
하얀 어둠만이 자욱하다
지금 이 작은 도시마저 길을 접어
계단을 만든 아파트가 숲이다
들썽거리는 거개의 사람들이
책을 펴자마자 하품이 나고
졸음이 몰려온다는 까닭 알겠다
하얀 어둠을 먹고 사는
글씨가 곧, 글의 씨앗이고
책 속에 해우소解憂所 있어
몸 문을 열고 뒤를 보는 일은
오줌이 마침표인 것이다
방언과 표준어의 뜻을 밝히는
불빛 그림자에 책 책책 쌓아놓고
책을 보다, 책과 씨름하다, 라는 말은
몸의 눈이 글을 읽고
마음의 눈이 글을 먹는 일이거늘
우리 어찌 풋감을,
설익은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생선 좌판
박만진
1
서산 동부시장 저자마당 생선 좌판에
한 손씩 짝을 이룬 자반고등어,
가자미들은 가자미눈을 흘겨 뜨고
조기 오른쪽으로 즐번하게 누워 있고
서대기 왼쪽으로 즐비하게 누워 있다
2
― 이놈들은 한 손에 육천 원이구,
이놈들은 세 마리에 만 원이구,
이놈들은 열 마리에 오천 원이구,
이놈들은 다섯 마리에 만 원이구,
― 할매! 그럼, 저년들은 얼마유?
3
― 흥정은 붙이구 싸움은 말리래유
― 아지메 떡두 싸야 사지유
― 생선을 보구 떡 얘기는 왜 혀?
4
할머니 막걸리 한 잔 자신 듯
노을빛처럼 곱다, 아직 곱다
아들 하나는 변호사이고
아들 또 하나는 의사이고
딸 셋도 출가하여 잘 살고 있다
그만 장사를 접으셔도 되지 않느냐고
은근슬쩍 물으니
저자마당 생선 좌판으로
자식들 다섯을 입히고 먹이고
줄줄이 대학까지 가르쳐 결혼까지 시켰는데
녀석들은 아직까지
당신 입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며
웃으시는 모습이 곱다, 참 곱다
하늘의 알
박만진
해를 본지가 오래다
꾸물거리는 장마,
방금 먹구름이
마치 암탉의 똥구멍이듯
살짝
알을 비치고 있다
다리가 예쁜 여자를 보면
박만진
다리가 예쁜 여자를 보면
반드시 알맞게 익은 엉덩이를
알맞게 올려놓고 있네
쉬잇, 배암!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꽃대님 같다던 배암!*
계절의 속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뱀이라는 이름에 질겁하지만
숲 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들은
마음의 혀를 날름거리며
딴청 휘파람을 불기도 하네
오호라! 오늘이 토요일!
씻은 무 같다든가**
느낌표 같다든가
풀이 죽어 골목을 돌다가
내 눈의 불꽃, 불꽃 본능이
다리가 예쁜 여자를 만났네
따라오세요, 어서 따라오세요,
헤브리어 엉덩이 글씨를 쓰는
개미허리의 꽁무니바람을 좇으며
게걸스런 성욕을 뽐내는
거미 한 마리 묶어 놓고
그녀의 망사 스타킹 한 켤레 짜려 하니
어느새 하루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에 발간
머플러를 떨구며 땅거미 지네
* 서정주 시 <화사>에서 인용
**홍윤숙 시 <장식론>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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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몸의 옷,
마음의 옷을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럽다.
38 철조망의 동티인 양
허리가 아픈,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을
찾지 못했다
곤충들의 소리 뜻이며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말이며
짐승들의 말귀에 밝아
번역을 하고
통역을 하는,
그런 일로
밥벌이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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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진 詩集 [오이가 예쁘다]
[ 작품해설 ] -
자연의 시학
권경아
(문학평론가 ∙ 한양대 강사 ∙『시현실』『리토피아』편집위원)
1.
박만진의 시세계는 인간과 인간의 삶이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인식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자연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physis’를 번역한 라틴어 ‘natura’에서 유래된 것으로 의시겡 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즉 객관적인 자연이라는 근대의 자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자연 개념에서는 자연이 인간과 인간 사회와 대립하는 개념이라면 박만진의 자연(自然,nature)은 자연과 인간은 생명적 자연의 일부이며 동질적으로 조화로운 내재적 관계라는 그리스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 및 사물의 고유한 성질, 즉 본성, 본질을 의미하며 인간을 포함한 하늘과 땅, 우주 만물, 원래부터 그대로 있었던 것, 또는 우주의 순리를 뜻하는 것이다. 박만진의 시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삶은 생명적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며 자연에 녹아들어 그 자체로 자연이 되는 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박만진은 첫 시집『빈 시간에』서부터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자연의 관계에 천착하는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시적 인식은 이후『슬픔 그 껍질을 벗기면』『물에 빠진 섬』『마을은 고요하고』를 지나며 심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나다 『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에서 시적 인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인간과 인간의 삶에 시인으로서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적 인식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 시詩는 시라야 한다.”(『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시인의 말’중에서)는 것은 산과 물이 저마다의 본질을 드러내듯 시 또한 고유한 본질이 있다는 시적 인식에서 비롯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여도 항상 “목숨의 불을 켜고 목숨의 불을 태우”는 시, 혹은 삶이 마음에 남아 있다. “바다와 가까이 있음에도 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라는 진술 속에는 끓어오르는 시에 대한 욕망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시에 대한 욕망을 박만진은 ‘자연’으로 인식하고 끌어안는다. “늘 부족한 서정과 늘 부족한 바다를 채우고자 나는 계속하여 시를 쓸 작정이다.”라는 시인의 말은 시를 쓰는 시인의 삶이 곧 자연의 순리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만진의 새 시집 『오이가 예쁘다』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삶이 곧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이 확대,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시가 곧 자연이라는 인식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넘어 자연의 근원에 심층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보는 시, 시를 통해 시인 스스로 자연이 되는 시, 이것이 박만진의 ‘자연의 시학’이다.
2.
기를 쓰고 피는 꽃 못 보았고
억지로 흐르는 물 보지 못했다
개울물이 흘러 강에 이르고
강물은 마침내 바다가 된다
개울과 강과 바다는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며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다
강이 개울물을 받아들이니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니
제가 저한테로 흘러가는 것이다
-「개울과 강과 바다」전문
자연은 인간 및 사물의 고유한 성질, 즉 본성, 본질이라는 박만진의 자연 인식이 잘 드러난 시가 「개울과 강과 바다」이다. 이 시는 개울이 강이 되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기를 쓰고 피는 꽃” 보지 못했으며 “억지로 흐르는 물”또한 보지 못했다. 꽃이 피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개울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과정은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시인은 그것을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강이 개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제가 저한테로 흘러가는 것”이다. 개울이 강이고 강이 바다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개울은 강의 윗도리”이며 “바다는 강의 아랫도리”이다. 개울과 강과 바다는 자연이라는 한 몸이기에 흐르고 흘러 하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 곧 우주의 순리가 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본성, 본질인 것이다.
우리 집 마당은 하늘이 넓어
천수만을 찾는 겨울 철새들이
ㅅ 자로 날아간다
무심코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ㅅ 자를 슬그머니
사람人 자로 고쳐 읽는다
오로지 창조주가 주인인 겨울 철새.
간월호에서
부남호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는 장관을 보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지 마라
뜨는 해 마중하는 동사東寺가
지는 해 배웅하는 부석사浮石寺가
저기 섬인 듯한, 저 산에 있다
날고 싶어 하는 바람이야
어찌 붓날리는 사람뿐이랴
날고자 하는 숲이
날고자 하는 돌이
저기 산인 듯한, 저 섬에 있다
-「도비산 1」전문
시인의 자연관 또한 「도비산 1」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인의 마당 하늘에 천수만을 찾는 겨울 철새들이 날아간다. ㅅ 자로 대열을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며 시인은 “ ㅅ 자를 슬그머니 사람人 자”로 읽어본다. 철새와 인간은 그저 우주의 생명일 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지” 말라고 시인은 말한다. 오로지 자연의 순리, 우주의 순리에 따라 가고 또 올 뿐이다.
이러한 시인의 자연관은 도비산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섬이 날아와서 산이 되었다는 전설을 지닌 도비산은 섬이며 또한 산이다. “저기 섬인 듯한, 저 산”, “저기 산인 듯한, 저 섬” 섬이며 산인 도비산은 우주 만물이 생명적 자연의 일부라는 시인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섬이 날아와 산이 되었다는 전설을 지닌 도비산을 보며 시인은 “날고 싶어 하는”인간을 생각한다. 비상의 꿈을 단지 인간만이 지니겠는가. “날고자 하는 숲”. “날고자 하는 돌”을 모두 도비산이 품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비상의 꿈을 통해 우주의 만물이 하나로 화합되고 있는 것이다.
달밤 달빛이 하 아까워 잠 못 이룬 그 다음 날이네 안 개 자욱하고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란 마을에 이르니 낯설기도 하면서 마냥 낯설지가 않았네 이승이라고도 하고 저승이라고도 하는데 안 개 걷히닌 빛나는 날씨였네 시냇물 흐르고 새 노래하고 꽃이 웃는가 하면 바람도 알맞게 불었네 목월 시인의「나그네」를 흥얼거리며 구름에 달 가듯이 길을 가고 있는데 여보게, 길손!하고 불러 세우는 이가 있어 뒤돌아보니 수양버들이 왕골로 짠 방석을 내주며 세상 얘기나 잠깐 나누자고 하네 처음부터 대뜸 자네라고 말을 놓으며 혹시 조선 시대 수양 어르신을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 오네 티브이 드라마에서 몇 차례 보긴 했어도 수양대군이 세조라는 것뿐 깊이 아는 바가 없다고 얼버무려 대답하니 손가락 빗질로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참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고 껄껄 웃어 젖히고 나서는 밥벌이가 아니라 취미로 관상을 좀 볼 줄 안다고 떠벌리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고생 참 많이 했겠다고 덥석 손을 잡으며 다짜고짜 수양아들이 되어 함께 살자고 하네 도대체 내 나이가 몇인 줄 알고 새파란 녀석이 수양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하느냐라고 냉큼 똥침을 놓듯이 핀잔을 주니, 그렇다면 자기를 수양아들로 삼아 함께 살면 되지 않느냐고 굳이 조르는 것이네
-「수양버들」전문
「개울과 강과 바다」가 자연, 사물의 본성,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면 「도비산․1」과 「수양버들」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무화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나그네가 되어 길을 가는 시인을 수양버들이 불러 세운다. 취미로 관상을 본다는 수양버들은 쉽지 않았던 시인의 삶을 읽어 내고 손을 내민다. “다짜고짜로 수양아들이 되어 함께 살자”하는 수양버들의 말에 시인은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고 핀잔을 주지만 “그렇다면 자기를 수양아들 삼아 함께 살면 되지 않느냐” 조르는 것이다. 이 시에서 수양버들과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시인은 수양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자연인 수양버들과 인간인 시인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수양버들과 시인은 둘이면서 하나라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됨으로써 자연과 인간은 동질적으로 조화로운 내재적 관계가 되고 생명적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게 된다.
3.
그동안 박만진의 시에 대해 논의된 것 중의 하나는 그의 시가 주로 꽃, 나무, 풀, 산, 바다와 같은 자연과 농촌의 삶을 노래하고 있으며 이는 그의 생활 근거지가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단지 꽃과 나무, 산과 바다와 같은 소재적 차원의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만진의 시에서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대상으로서의 자연물을 주로 노래하는 것은 그의 삶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농촌과 도시의 삶을 대립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시에서 문명의 도시적 삶과 농촌의 삶은 서로 다른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3량과 4량 문 열렸다 닫히고
승객들도 듬성긋하고
지금 참 한가로운 시간대에
전동차 안을 둘러보니
어림잡아 7할이
풀을 바른 편지 봉투이듯
눈을 붙이고 있다
마치 꿈나라 집배원인 양
진짜 장님 하나
조그만 하모니카 불며
빈 바구니 들고 지나가고
3할의 승객들조차
신문을 보거나
옆 사람의 신문을 넘겨다보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궁굴리며
애써 외면하여 태연하다
언제나 북적북적한
특별시 서울에서는
지금 이 한가로운 전동차 안이
어느 아득한 찻집보다도
한층 더 편안한 것을,
혹시 나 말고 또 누구
느슨하게 즐기는 이 있을까
-「혹시 또 누구」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서울의 전동차에 몸을 싣고 있다. 전동차 안을 둘러보니 7할은 눈을 붙이고 있고 3할의 승객은 신문을 보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 하모니카를 불며 빈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는 걸인의 모습까지, 시인은 전동차 안의 풍경을 세심하게 담아내며 지금 이곳이 편안하다고 말하고 있다. 북적대고 복잡한 서울에서 “지금 이 한가로운 전동차 안이 어느 아늑한 찻집보다도 한층 더 편안”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서울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복잡한 서울에서 잠시의 한가로운 풍경, 그것은 지친 일상의 잔해일 수도 있으며 익명의 사람들 속에서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서 또 다른 평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자연관에 의하면 이러한 낯선 도시의 풍경마저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며 인간의 모습이다. 이 시는 박만진이 노래하는 자연이 농촌과 도시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내게 어둠이듯
뿌리를 내리고 있고
언제나 궁금중에
?란 자물쇠가 있어
!의 열쇠를 찾아
반드시 열어야 할
지나온 생의 마디마디가
대나무 마디 같기는 하지만
대나무처럼 곧다거나
푸르다는 것이 아니고
궁금증을 말하라 하면
?를 그려 놓고 콧노래를
내가 세상에 강물이듯
뿌리를 내리고 있고
언제나 호기심에
?란 자물쇠가 있어
-「!열쇠를 찾아」전문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듯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일부다. 그러나 “세상이 내게 어둠이듯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내가 세상에 강물이듯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상과 시인은 서로에게 뿌리를 내린 관계, 곧 한 몸과 같다. 그러나 시인 앞에 펼쳐지는 인간의 삶은 선명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시는 삶에 대면하는 인간이 갖게 되는 온갖 삶의 의문을 ‘?, !’라는 문장부호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삶의 의문은 물음표(?)로 떠오른다. 그 의문을 풀 열쇠는 무엇인가. 시인은 느낌표(!)라 말하고 있다. ‘?’와 ‘!’는 자물쇠와 열쇠라는 겉모양을 닮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삶의 의문을 풀 열쇠를 ‘!’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겉모양이 닮았다는 것과 함께 삶의 의문을 ‘느낌’으로 풀 수 있다는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삶에 대면하여 인간이 느끼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느낌’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인위적인 가감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느낌’은 시인에게 삶이 되고 그러한 삶의 느낌은 또 시인의 시가 되고 있다. 시인 박만진이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로 박만진의 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맞춰
시계 처음 초침은 째깍거렸으리라
풀숲 이슬에 젖은 새벽 귀뚜라미,
-뭐 그리 바쁜 것인가?
-무엇에 놀란 것인가?
-무엇에 쫓기는 것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을 알리는 것인가?
결코 어둡지 않은 내 귀가
이렇듯 쓸모가 없을 줄이야
혹시 다음 이 세상을 살게 된다면
시를 짓는 일과 더불어
곤충들의 소리 뜻이며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말이며
짐승들의 말귀에 밝아
번역을 하고
통역을 하는
그런 일로 밥벌이를 하고 싶구나
일찍이 저 세상에 계신 울 엄니
그래, 돌아가셨으니 돌아오리라
-「새벽 귀뚜라미」전문
새벽 귀뚜라미는 끊임없이 노래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시인은 그들의 소리가 궁금하다. 시인은 “곤충들의 소리”와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말”과 “짐승들의 말귀”에 밝아 그들의 소리를 “번역을 하고 통역을 하는 그런 일로 밥벌이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곤충들의 소리와 새들의 노래와 짐승들의 말을 번역하고 통역하여 표현한다면, 물론 그것은 시가 될 것이다. 시인이 이 시의 일부를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 놓고 있는 것은 그러한 “밥벌이”가 시를 짓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소통을 통해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서의 존재인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이러한 존재 인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시를 통해 자연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됨으로써 스스로 자연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박만진의 ‘자연의 시학’은 전통적인 서정의 양식으로 표출된다. 시적 주체의 열정적 감정을 어떠한 인위적 가공 없이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는 양식으로서 시인이 선택한 것이 서정이다. 서정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애정은 시작 초기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며 이번 시집에서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심화, 확대되어 나타난 것과 같이 서정에 대한 인식 또한 심화되어 나타난다.
나 꼬맹이 시절 읍내 저자마당 약장수는
울타리 나무처럼 몰려든 구경꾼들 중에서
아이들은 가라, 어서 빨리 집에 가서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듬뿍 넣고
빨갛게 비벼 먹어라, 라고 내쫓곤 했다
지금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좋은 시가 고파서 하는 말이지만
아날로그시, 디지털시, 디카시 하며
누구랄 것도 없이 파릇파릇 앞서 나가는 마당에
시의 고향은 서정이다, 라는 외고집으로
갖가지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곤
참 살갑고 참 정겹게 비벼 먹을 수 있는
전주비빔밥 같은 비빔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비빔시를 쓰고 싶다」부분
시문학에서 서정은 18세기까지 장르라기보다는 다양한, 그리고 운율적으로 규정된 형식들의 느슨한 집합체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서정시는 “열정적 감정의 직접적 표현”이라 정의한 헤르더의 개념에서 시작되어 헤겔과 피셔를 지나는 동안 주관성 이론으로 정의되었고 람핑에 의해 현대적으로 체계화된다. 박만진의 서정시는 인간과 인간의 삶은 생명적 자연의 일부라는 그리스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감정 ․감성, 혹은 열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아날로그시, 디지털시, 디카시 하며 누구랄 것도 없이 파릇파릇 앞서 나가는” 현실에서 시인은 “시의 고향은 서정이다”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갖가지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곤 참 살갑고 참 정겹게 비벼 먹을 수 있는 전주비빔밥 같은 비빔시”에 대한 시인의 감성과 열정은 인간과 인간의 삶, 그리고 시가 곧 자연이라는 시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박만진의 ‘자연의 시’는 자연을 노래하며 스스로 자연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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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박만진의 시는 근본적인 면에서 자연 탐구의 시이고 인생 탐구의 시에 해당한다. 그의 시에는 산과 들,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연현상이 펼쳐지고 있으며 삶과 생명에 대한 관조와 응시, 그리고 깨달음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색과 명상의 시이고, 발견과 깨달음의 시를 지향한다는 뜻이 되겠다.
그의 시집에는 산과 들을 지키는 나무와 숲, 풀꽃과 곤충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 친화와 교감(correspondence)의 시학을 형성한다. 그러기에 그의 시편들에는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고 조응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산과 길과 집, 숲과 나무와 풀꽃, 그리고 바위와 구름, 새들이 함께 어울려 자연의 교향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향을 지키는 정신의 파수꾸ㄴ, 시혼을 갈고 닦는 민족정신의 한 등불로서 박만진의 시는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향기로운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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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진 시인∥
∙ 1947년 충남 서산 출생.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을 수료하였다.
∙ 1987년 1월 《심상》신인상으로 등단.
∙ 시집 :『빈 시간에』『슬픔 그 껍질을 벗기면』『물에 빠진 섬』『마을은 고요하고』『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접목을 생각하며』등이 있다.
∙ 충남문학 대상, 충청남도문화상(문학부문) 수상.
∙ 계간『시향』편집자문위원, 한국시낭송가협회 자문위원,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