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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형님 (tistory.com)
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등산 오르기 / 박정이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의 등이거나
할아버지의 등이다
밖으로 나가 일하시다가 돌아 온 아버지는
언제나 그 등을 내게다 허락 하시고
나는 세상을 나가지 못했지만 그 등을 타면서
세상은 따뜻하고 든든 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방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재떨이에
담뱃대 톡톡 터시고 기침 몇 번 하시고 난 뒤
담뱃대 높이만한 굽은 등을 내게 주셨다
등에서 내려와 본 세상은 사랑방만 하지만
시시각각 끓는 사랑방 온기로 하여
세상은 아침에서 한밤까지
가득가득 끓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등을 오르면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세상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등이
산으로 솟아있고 나는 그 따뜻한 등을 등으로
오른다고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싶을때
산은 억새풀 무더기로 쓸리고 쓸리는 소리
내게다 허락하고
할아버지 기침 소리 듣고 싶을때
산은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 아래로 내려 보내고
내려가다 남는 소리 내게로 허락한다
아,세상은 나날이 가파르고 언덕배기 작은 골에도
숨이 막히는데 숨이 차고 차서 넘칠때
나는 등을 오른다 등에서 세상은 들녘처럼 편안하고
등에서 세상은 제일 낮은 사람의 목소리
대샆을 돌아 겨우 겨우 돌아 나오는 바람소리를 낸다
그 바람소리
눈물이 나는 소리 같지만 내 어머니의 치마
치맛자락에 얼려있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이거나
우리 가문이 키워내는 가풍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등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등 아래 사는 사람들의 눈 높이로 흐르거나
그 높이로 흐르는 굽 낮은 하늘 바라보는 자리,
무언의 자리이리
하늘에 구름이 무리지어 흐르고
무등은 그 자리
한 번도 어디론가 떠나가지 않고
우리집 종손이신 아버지처럼
또 할아지처럼 등으로 말하고 등으로 살고 있다.
[심사평]
무리한 비약없는 차분함에 높은 점수
시 부문-강희근(시인 경상대 명예교수)·이상옥 (시인 창신대교수)
이번 시부문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4사람에 의한 4편이다. ‘양장본 한 사람’ ‘경운기’‘뒤돌아보는 길’‘무등산 오르기’가 그것이다.
‘양장본 한 사람’은 서적의 향방을 쫓고 있는 화자가 서적들이 안겨주는 감각이나 내용을 상상력으로 따라가는 시다. 한 노인을 양장본 같다고 한 대목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그러나 딱 잡아 이것이다 하는 내용이 미미하다는 점이 결점이라 할 수 있다.
‘경운기’는 못쓰고 버려진 경운기를 소재로 끌고 가는 사실적 접근이 눈에 띈다. 그것도 사실감 자체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갖는 속성이나 주변을 형상화하고 있는 솜씨가 볼 만하다.그러나 시 전체가 주는 질량감이 실려 있지 않다.
‘뒤돌아보는 길’은 차분히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능력면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기에 비해 주제 처리가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인다.
‘무등산 오르기’는 앞 3편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시적 기량을 고루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이 시는 무등산 오르는 일을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이나 할아버지의 등을 오르는 것으로 오버랩시키고 있다.이미지를 차분히 끌고 가면서 화자의 성장을 드러내는데 한 군데도 무리한 비약이나 무리한 상상으로 나가지 않는다. 언어를 통제하는 가운데 화자의 의식과 지향을 결합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선자 두 사람은 일찌기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집어 올렸다.
2009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당선작
냄비 속의 여자 / 강성남
1
화기를 가하는 건 늘 내부 쪽이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불은 두꺼운 바닥을 투과하여
이마까지 달군다
속이 비치는 뚜껑
꽃망울처럼 부푼 목젖과
허파 밑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보인다
방울토마토 같은
레몬 같은
타이레놀 같은
둥근 시간들이 그녀 안을 떠다닌다
정작 그녀 자신은
제 속을 볼 수 없어 바닥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많다
2
바닥이 다층인 그녀
확 끓어올랐다 파르르 식어버리는 성깔이 아니다
급작스런 온도 변화에 민감하다
함부로 열을 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날 선 빛 한줄기
옆구리에 박힌다
빛 날에 긁힌 기억 속으로
두레박줄을 풀어 내린다
햇살과 바람으로 파도치던 시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달콤한 시럽약 맛
쓰디쓴 가루약 맛
통증의 맛을 구분하는, 목구멍 씁쓸한 그녀
하얗게 불린 침묵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열에 들뜬 이마 점점 달아오르고
뿌옇게 흐려진 안부, 끓기 시작한다
내장 뜨거운 짐승이 푸른 눈을 뜬다
[심사평]
뛰어난 시적 상상력 돋보여
예심을 거쳐 넘어온 9명의 작품을 놓고 심의한 끝에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아쉬운 점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남용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시 작품 속에 산문적 진술이 과도하게 개입되면 결정적 흠이 된다.
예심을 거쳐 온 작품 중에서 산문적 진술이 덜하고, 시적 상상력이 뛰어난 〈냄비 속의 여자〉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까닭도 시어의 남용이 비교적 적다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근자에 와서 시가 점점 산문화되어가는 추세에 비춰 평범한 일상적 소재를 성공적으로 ‘데포르메’(변형하다, 왜곡하다는 뜻)한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선외작인 〈소고기 국밥〉과 〈쌀 한 알에 담긴 풍경〉은 당선작에 비해 시적 발상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시어 선택과 비유법의 창의적 노력이 더해진다면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009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 심사평 ]
"시의 응축적 결정과 여운 돋보여"
예선 통과의 작품 수는 160여 편이였다. 응모자는 도내 뿐 아니라, 부산·인천·포항·대구·광주에 걸쳐 있었다. 10대로부터 70대의 나이층이었으나 40∼50대가 주였다.
시의 양식도 자유시를 비롯, 시조시·동시도 있었다.
한마디로 작품 수준을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 나름의 시세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어디까지나 선자 나름의 눈으로 작품을 읽고 가릴 수 밖에 없다.
응모작들을 일독한 후, 골라낸 작품은 고제우·신도홍·김삼경·이현주·김금아·김형태·정성수 님들의 것이었다. 각자의 작품들이 지닌 장점도 볼 수 있었다.
동심의 세계(고제우), 생활 속 여심(신도홍), 산뜻한 감성(김삼경), 해학적 기지(이현주), 폭넓은 사유(김금아) 등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온축이나 역량 면에 있어서 김형태와 정성수의 작품들이 위 여러 응모자의 작품에 비하여 뛰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선자로서의 호감이 더 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김형태·정성수는 다같이 시에 대한 그동안의 수련과정도 만만찮다는 것을 각각 10편·5편의 응모작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시어 하나를 골라 쓰는데도 많은 고심을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에도 호감이 갔다. ‘뜸베질’ ‘되창문’ ‘노박이’ ‘고빗사위’ ‘옴나위’ 등의 낱말이 지닌 정감은 오늘날 되챙겨 보고 싶은 우리의 토박이 말이다.
최종 선정에 번갈아 읽으며 들었다 놓았다 적잖이 망설였다. 끝내는 정성수의 ‘배롱나무꽃’을 당선작으로 내어밀기로 하였다. 요설적 산문적인 시행 처리 보다도 응축적인 시의 결정과 그 여운을 사기로 한 것이다.
정성수 시인의 시의 앞날을 빌어 마지 않는다.
[2009 영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선물 /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 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 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얄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묵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
<심사평>
해마다 12월이 되면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한 달은 행복해진다.
문학 분야에서는 축제의 시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문단에 선을 보이는 신인이 누굴까 하는 궁금증으로 새해 첫 날의 신문을 펼치게 된다.
「신춘문예」를 공모하는 신문사는 지방지를 포함해서 30여 개에 이르는데, 그 중 인터넷 신문으로는 뉴스제주가 거의 유일하다.
올해의 영주 신춘문예에 응모된 작품은 그 양적인 측면에서 어떤 신문사에 못지않게 많았다. 그 중에서도 시의 응모 편수는 거의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보면, 응모 편수에 비해 주목할 만한 작품이나 신인다운 패기를 보여주는 작품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현대시의 흐름이 그러한 탓일까? 시의 경향이나 내용들이 지극히 사적이며 감상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한 이유로 작품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약화되고, 결과적으로 주제의식의 약화를 초래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김옥지(경기 평택), 양순진(제주), 윤이산(경북 포항), 이금미(충남), 이기철(서울), 이일옥(경기 안양), 최인숙(서울) 등 7명이었다.
이금미, 이기철, 이일옥, 최인숙의 경우는 상당한 습작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응모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거나, 산문적인 이미지 전개 등으로 산만한 느낌을 주는 등의 아쉬움을 남겨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최종심에 오른 김옥지, 양순진, 윤이산 등 세 명의 작품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똑같이 뛰어나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의미보다는 각 응모자가 고만고만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지의 경우는 전편에 걸쳐 상당한 습작의 이력이 깔려 있고, 시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하지만 응모작품 전편이 다소 서술적인 어투와 산문적인 어법으로 시상을 흐리고 있는 것이 흠이었고, 시의 행과 연에 대한 구분이 다소 억지스러움이 있어, 시 형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양순진의 경우는 시적인 상상력이 뛰어나고, 시상을 이끌어가는 힘이나 초점을 조절하는 능력은 우수하나 작품의 무게가 가볍다는 것이 흠이었다. 다시 말하면, 언어 구사 능력은 돋보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힘은 있으나, 테마 의식이 약한 게 흠이었다. 또한 글쓰기에 있어서 구두점을 찍는 것은 독자의 원활한 독서를 위한 배려인데, 굳이 구두점을 빼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지는 부분까지 구두점을 찍지 않은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산문적이고 서술적인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주었다.
윤이산의 경우는 응모한 다섯 편의 시가 고루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시상을 이끌어가는 힘이나, 시적인 상상력은 탁월한 편이었지만 군데군데 어휘 사용이 다소 어색하다거나, 연 구분이나 행 배열이 들쭉날쭉하여 안정감을 주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대로 여러 차례의 논의와 장고를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윤이산의 「선물」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한 편만을 뽑아야 하는 신춘문예의 특성 때문에 오히려 낙선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리며, 당선자에게는 축하는 물론 더욱 분발의 기회가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정인수>
200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황사/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삶의 체험을 유려한 시적 언어로
-심사평
특별한 작품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은 높았다.현실투쟁적인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도 금년도 응모작들의 한 경향이었으며 추상적 의식을 실험하는 작품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 분의 시편을 읽은 뒤 최종심의 대상을 네 편으로 압축하였다.류성훈의 ‘월면 채굴기’,최호빈의 ‘얼음묘지’,정영효의 ‘저녁의 황사’,정재영의 ‘윤회’ 등이 그것이다.‘월면 채굴기’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각도 독특하고 언어구사도 유려했다.‘얼음묘지’는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했으며 ‘저녁의 황사’는 상상력의 전개가 돋보였다.‘윤회’ 또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유추하는 통찰력이 자연스러웠다.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심사과정에서 우리들이 주목한 것은 체험의 구체성이었다.언어의 유려함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응모작을 검토하였다.
최종적으로 ‘월면 채굴기’와 ‘저녁의 황사’가 검토의 대상이 되었는데 두 편의 시가 만만치 않은 수준을 지니고 있어 상당한 시간 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월면 채굴기’는 ‘병들도 힘 빠질 무렵’과 같은 뛰어난 구절을 구사하는 시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후반부 처리가 조금 약해 보였다.같은 응모자의 ‘하늘은 연직선 쪽으로’도 함께 논의했으나 체험의 구체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저녁의 황사’는 사막으로부터 발 딛고 있는 현실로 상상력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나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자신의 표현 능력을 보여주었다.다른 응모작 ‘마방’이나 ‘바람과의 여행’이 영상물을 통한 간접 체험을 다룬 것이라면 ‘저녁의 황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우리들은 주목하였다.
2009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관계 1/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한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심사평
독창적 구조 갖춘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한영서
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착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2009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증명사진 /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현대인의 고민 취업 예리한 관찰로 포착
[심사평]
시에 기운이 없다. 살가운 서정의 만지작거림도 없고, 이 더러운 세상을 후려치는 거대담론의 포효도 없고, 형식의 실험을 위한 대담한 모험심도 없다. 시가 죽어 가는가? 기력은 시들시들하고, 목소리는 다 고만고만하다. 가족·밥·가난·고향과 같은 비슷비슷한 소재가 넘치고, 대부분 평서형 종결어미로 만족하고 거기에 그냥 머무른다.
사소한 이야기를 그저 사소하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 그렇다. 심사를 하는 내내 당선작을 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더 유심히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정한 수준에 근접했다고 판단해서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정길호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고래’는 온돌방의 고래와 바다의 고래를 말놀이 기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못해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허했다.
이성임의 ‘클립 속의 여자’는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해 단단한 언어 구성능력을 보여주지만 멋이 지나치고 소품에 그치고 있다.
오승근의 ‘소리를 줍다’는 시적 묘사에 공을 들인 시인데, 말투가 시를 앞서나간다. 시어와 일상어의 차이, 혹은 그 둘 사이의 절제를 좀 더 공부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함께 끝까지 겨룬 이혜경의 ‘가벼운 집’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고 시가 생기는 지점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적 대상을 너무 안이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그 핵심을 집어내는 데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재준의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시인으로 성공하기 바란다.
-이문재, 안도현
200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글에서 온 풍경 /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떼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람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이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날들은 불안한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알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싸
그 옛날 그 땅에 고엽제를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의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기어 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힘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 시부문 심사평 / 김윤배·홍신선
"죽음통해 생명 영속력 표현… 리얼리티+상상력 조화로워"
대체로 평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이번의 응모작들은 소재주의가 눈에 띄었다. 시대적 소외의식의 반작용이라고 보여지는 가족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이런 시편들은 자연스럽게 회고지향의 색깔을 띄게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지나치게 신춘문예를 의식하고 씌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이 경우 시편들은 결핍된 의식을 드러내거나 현란한 수사와 함께 허위의식으로 시문이 채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응모자의 기본정조에 따라 지향성을 이루면서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 상당한 수준의 어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어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 '정글에서 온 풍경', '김밥에도 천국은 있다', '그녀가 내 마음의 틈에'를 최종심에 올리고 토론을 거쳐 김순자의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과 유병만의 '정글에서 온 풍경'으로 수상작을 압축했다.
'잘 못 배달된 편지처럼'은 현관문 오른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네 개의 명패를 우표로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화자의 집은 편지봉투이고 집으로 귀가하는 화자는 한통의 편지인 것이다. 편지의 끝에는 의례히 타인의 말인 추신이 따르고 "어디로든 반환되어야 할 떠돌이 우편물이"라고 스스로를 말한다. 삶의 정처 없음과 부박함을 드러내는 '가볍디 가벼운 지구의 검불'이라는 인식은 새롭지는 않으나 성찰의 소산이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서사가 있는 이 시편의 주인공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퇴역의 군인이며 농사를 짓는 노인이다. 노인에게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으며 "지난 날은 불안한 가계였"다. 이제 며느리의 순산으로 "잠시 주춤했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며느리가 태양을 혼수감으로 가져온 때문이라고 안도하는 것이다.
김순자가 경쾌한 상상력의 시세계를 보인다면 유병만은 삶의 곡진한 무게를 드러낸다. '정글에서 온 풍경'은 월남참전의 역사적 부채의식과 다문화가정으로 대변되는 인류애를 드러내면서 손자로 상징되는 생명과 노인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의미를 통해서 영속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시는 기본적으로 리얼리티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만으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상력이라는 창조적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유병만의 작품은 이와 같은 시의 준거를 모두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정글에서 온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아깝게 기회를 놓친 김순자의 시도 머지않아 우화등선의 기쁨을 누릴 것으로 믿으며 당선자 유병만의 시세계가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한다.
2009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압 / 이병승
한여름 땡볕에 달궈진 옥상 바닥
시원한 물을 뿌려주려고
잠가 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거침없이 몸을 흔드는 고무호스
긴 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시뻘건 각혈과 마른기침이 노래로 변하고
늘어졌던 마음의 통로에 생수의 강이 콸콸 흐른다
사방에 뿌려대는 열정의 땀방울들
더 이상 짓눌린 눈물이 아니다
무지개를 띄워라 거침없이 신나는 춤사위
꼼짝 말라고 두 발로 밟아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딴딴해지는 오기의 몸짓
그 정도 힘으론 날 못 누르지
흐물흐물 늘어진 생은 끝났다는 저 팽창의 힘
자기를 채워 흘러넘치는 나눔의 통로
채워라, 터질 듯이 채워라
내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외려 솟구쳐
신명나게 춤추는 고무호스
건너 집 옥상 화단, 벽에 매달린 넝쿨까지 살리고
스스로 뜨거워 목마른 해도 적신다.
표현 구성 완성도 높아
-심사평
본선에는 총 6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모두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난한 것들로 예년에 비해 열정과 패기가 돋보여 우리 심사위원들은 안심하였다. 작품 명은 ‘내압’, ‘흰 자전거’, ‘나무 배꼽’, ‘솟대’, ‘내밀한 풍경’, ‘포도넝쿨이 덮은 집’ 등이다. 당선작 선정 기준은 당대적 삶에 대한 인식과 시를 통한 가치 실현의 의지, 그리고 이를 얼마만큼 형상적으로 완성해 내는가의 문학적 완성도에 두었다.
먼저 ‘포도넝쿨이 덮은 집’은 우선 감성이 풍부하고 동시대인의 심리적 고뇌를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으나, 생의 고뇌와 포도넝쿨이 덮은 집의 연관성이 부족하고, 일정 부분 상상력에서의 비약 부분이 어색한 구조로 짜여져 있음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내밀한 풍경’은 어머니를 시적 제재로 하여 실존적 생의 의미를 형상적으로 탐색한 것이 돋보인 작품이었으나, 너무 수사적 표현에 치중한 점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일부 설명적 진술이 눈에 거슬린 대목으로 평가되었다. ‘솟대’는 상상력의 자유로움과 시적 형상성이 뛰어난 점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너무 표현의 수사에 치우쳐 의미 형성이 모호하고 당대적 삶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무 배꼽’은 복숭아 나무와 할머니의 추억이 연관돼 아주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적 풍부성과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평가되었으나, 그 시적 내용의 전개가 너무 개인적인 차원으로 흐른 점, 표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한 수사가 오히려 시적 의미 형성을 방해한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었다.
남은 ‘흰 자전거’와 ‘내압’이 최종 두 작품으로 남아 심사위원들의 결정을 어렵게 했다. 두 작품 모두 만만치 않은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당대적 삶에 대한 인식과 시를 통한 생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지가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상당한 논의 끝에 우리는 ‘내압’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흰 자전거’가 감성적이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현실적 삶의 고난도 잘 반영하고 있지만 시적 전개에서 아직까지 형상적 포착보다 설명적 어조가 눈에 띄는 것이 흠결로 작용했다. 이에 비해 ‘내압’은 우선 생의 의미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또 당시대적 삶의 의미로 환기되도록 하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적 표현과 구성 면에서 상당한 수련을 느끼게 하는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점이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게 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시인이 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신달자·김경복
[200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시 심사평
"평범한 삶의 풍경 따스한 표현"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이른 서른 분의 작품을 차례로 읽는 동안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 편수가 장르 불문하고 두 배로 늘었다는 담당 기자의 전언이 있었거니와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이 상당한 것이었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숙독하는 과정에서 선자의 초점은 새로움이었다. 삶과 언어를 대하는 관점이 새로우면서도 이미지의 전개 속에 시인이 꿈꾸는 따뜻한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김재준, 최인숙, 정영희, 이명순, 일곱 분의 작품들이 최종심에 남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씨의 응모작품들은 자유롭고 열린 시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상을 거칠게 몰아가는 힘이 느껴졌고 상상력의 분출 또한 보기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시편들이 인간의 삶을 보다 따뜻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세계를 끌어안기에 이 진술들은 개인적인 사유 쪽에 더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재준, 최인숙 씨의 작품들은 전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적인 소재와 언어 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의 주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아함이 새로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신의 깊이를 지녀야 할 것이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정영희 씨의 '봄, 감전되다' 와 이명순 씨의 '기와 이야기'였다. 정영희 씨의 작품들은 언어가 지닌 풋풋한 상상력의 꿈이 최대의 아름다움이었다. 한 무리의 냉이꽃이 하얗게 잔물결 진다/ 마당 가득 돋아난 저릿한 음표를 밟고/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와 같은 서정의 전개는 요즘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명순의 '기와 이야기'는 우리 일상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따스한 힘이 핏줄로 스며드는 우직한 느낌이 있다. 두 분의 작품 중 어느 분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지 선자에게 몹시 난해한 일이었다. 숙고 끝에 '기와 이야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면서도 자꾸만 정영희 씨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된다. 우직하게 다가오는 따뜻한 삶의 꿈을 선자가 새로움으로 해석한 결과이지만 정영희 씨의 미래에도 함께 박수를 보낸다.
(시인ㆍ순천대 교수)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촘촘한 얼개, 지난한 삶 극복의 따뜻한 주제의식
-심사평
전북 거주의 응모자가 많았음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작품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음을 읽었다. 응모작들의 문법은 거의 정확했다. 구조의 탄탄함도 믿음직했다. 시대나 사회적인 문제의식보다는 시 본연의 감각과 감수성을 기조로 한 시들이 만만치 않았다. 다만 장광설 또는 단순 처리로 아쉬움을 준 시, 명쾌해야 할 전달력이 불투명하게 처리된 시도 없지 않았다.
걸러내고 걸러내다 보니 최종심에 오른 시는 강영식의 '삼거리 외눈부처'와 '물수제비', 이연아의 '대팻밥을 담으며', 안성덕의 '구두병원'과 '입춘' 등이었다. '삼거리 외눈부처'는 개성미와 형상성이 괜찮았으나 울림이 부족했고, '물수제비'는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좋았으나 단순 처리된 것이 흠이었다. '대팻밥을 담으며'는 수준급에 달했으나 부분적으로 산문형태의 상투성이 눈에 거슬렸다. '대패질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의 돌출로 말미암아 아차, 하는 사이에 당선권에서 밀려났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구두병원'은 어둡고 구석진 삶의 단면을 걷어내고 윤끼 반짝이는 건강성을 보이고 있으나 끝 연의 처리가 안이하게 풀어져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당선작 '입춘'은 구조의 일관된 응집력과 나무랄 데 없는 언어표상, 그리고 선명한 주제와 함께 시의 내면을 가득 채운 따뜻한 훈김이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역동성으로 작용하여 당선작 선택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읽을수록 깊이 깨물려 단물이 고였다. 참신한 이미지의 거듭됨이 안정된 어조로 짜여 있다. 더할 수 없이 살기 힘든 현실의 가난과 외로움을 따뜻이 끌어안고 삶의 밑바닥을 뒤지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웃의 아름다움이 측은지심을 넘어 감동을 이끌어낸 수작이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처럼 생명감이 넘치는 노래다. 재활용품 수집이 생계수단인 할머니와 어린 손주, 이들 가족사의 진정성을 뒷받침해줄 끝 부분의 희망의 불씨 또한 시의 완성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심사위원 : 이운룡(시인·문학평론가) 정양(시인·문학평론가)
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메시지 분명하고 시적 논리 합당˝
-심사평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어온 스무 분의 30여 편의 시들 중 선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당선을 겨룬 작품은 다음 세 편이었다.
<멀리 보는 잠언>은 요즈음 유행하는 시들의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감각은 신선했고 형상화 방식 또한 개성적이었다. 특히 “석양 무렵 던져진 새들에게서 붉은 사과향이 난다”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그는 느낌을 형상화하는 데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시상의 전체적인 전개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가 불분명했다. 시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의 한 양식인 한 추상적 전언의 약점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이른바 메시지가 분명한 사실주의적 기율의 시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의 ‘재현’에 충실한 나머지 그 현실적 모사를 한 단계 뛰어넘는, 이른바 시적 비약의 순간을 자기 작품에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을 범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들이 피랍선원들과 아홉시 뉴스, 조간 속 활자들을 거쳐 지난 암흑의 시절 “외삼촌이 허물던 야심한 밤들”에까지 육박하고 있으나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구현하려는 데까진 미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현실의 모사 속에 갑갑하게 갇히고 말았다. 네루다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지만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라는 말을 이 시인은 명심하기 바란다.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2009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래된 잠/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언어로 잘 그려낸 아버지의 폐가 풍경
심사평
응모작품은 2백여 명이 보내온 8백여 편이었다. 2008년 1백 50여명 6백여편에 견주면 응모자만도 50여 명이나 늘어났다. 응모자들을 살펴보자면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서 10대에서 80대까지 고루 응모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응모한 시 작품들은 풍족하게 많은데도 평년 수준을 밑도는 이상한 현상을 보였다. 당선작을 고르는 데 그래서 진땀이 났다.
우선 10편, 강병철의 '허수아비', 장유정의 '빈집', 권혁찬의 '노트북', 이민화의 '오래된 잠', 김웅철의 '11월 대정 골', 한규현의 '밥', 엄계옥의 '매미 집', 정현의 '곶감', 권삼현의 '까치밥', 임창선의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을 뽑았다. 여기서 5편을 뽑았다. '허수아비''빈집' '노트북' '오래된 잠' '11월 대정 골'이 그것들이다. 모두 만만찮은 시 쓰기의 경지에 있다. 그런데도 모두 조금씩 부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구두점 쓰기 등에 좀더 마음 썼으면 한다. 여기서 '부족감'이라고 지적하는 바는 읽고난 뒤에 받는 시 읽기의 감동이다. 시 읽기는 혼의 울림을 깨닫는 자리가 아닌가. '11월의 대정 골'은 제주어로 시를 쓰고 그 시를 표준어로 다시 쓰고 있다. 아무리 인간의 혼이 언어라 하더라도 그 혼의 노래를 두루 알려져 있지 않는 토박이어로 쓴다는 것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마침내 우리는 최종심에서 '빈집'을 떨어뜨리고 당선작으로 '오래된 잠'을 뽑기로 했다. 시의 구조가 견고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아기자기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감정을 언어로 수채화 그리듯이 잘 그려내었다. 시간 구조도 과거를 현재로 잘 풀어냈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이 폐가인 데도 '낡은 집'이 아니고 '늙은 집'으로 의인화시키는 놀라운 표현을 간단히 해내고 있다. 정진하시라!
<문충성 시인>
2009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童話) /정원
봄은 아이들 시린 손끝에서 왔다
골목 안은,
어김없이 가위질 소리로 짤랑거리고
덩달아 온 세상 흰 밥풀꽃 가득한 뻥튀기 소리
와아, 골목 안 가득 풀려나오면
햇살처럼 환하게 웃음이 되는 아이들
달그락달그락 알사탕 같은 꿈들은 호주머니 속 숨겨둔
꽃망울처럼
시린 바람 끝에서도 붉었다
햇살에 투영되는 꽃무늬, 유리알 속엔
알록달록 봄을 틔우는 화원(花園)이 열리고
동네 골목골목 안은 그 화음에
구슬 같은 아이들의 눈빛으로 가득 채워지곤 했다
냄비, 헌 세숫대야, 그렇게 찌글찌글한 “찌글이” 아저씨는
아이들 입에서 동실동실 허연 엿가루의 봄날을 띄우고
봄바람에 갈라 터진 손등, 닳아빠진 소매 깃엔
이따금 춘삼월을 어루는 흰 조팝꽃 같은
이른 봄빛이 마구 피어오르곤 했다
골목 길,
아이들 하나 둘 길 위에 비워지고
전등불 스윽 노란 개나리꽃 한 다발 피워낼 즈음
봄날은 그렇게 장난기 많은 얼굴로
아이들의 긴 그림자 꼬리를 물고 서 있곤 했었다.
● 심사평
선명한 생동감 넘쳐
본심에 올라온 시들은 대체로 수준이 높았다. 이미 많이 공부하고 많은 문학수련을 거쳤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어떤 시는 너무 잘 쓰려고 공연히 어렵게 쓰고 있는 시도 있었다. 아주 개성적인 시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관적 심성에 매몰되어 있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고통이 고통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산문시의 지나친 산문성이 시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지의 비약 적절하지 않은 비유가 도리어 시상을 흐트러뜨리는 경우도 발견됐다. 그중에서 ‘고구려로’는 남성적, 대륙적인 시풍이 돋보였다. 시원하게 탁 트인 넓은 시야와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끌고 가는 긴 호흡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은 이 시에 못 미쳤다. 어떤 시는 지나치게 ‘~의 은유(of metaphor)’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흠이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시 ‘Vicent Van Gogh’ 연작도 좋은 시였다. 당선작으로 결정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시였다. 탄탄한 사유와 치열한 예술정신을 금방 느낄 수 있게 하는 시였다. 산문시이면서도 꽉 찬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예술가의 삶을 그릴 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새롭게 발견한 걸 보여주어야 한다. 같이 투고한 다른 작품에서 드러나는 육화되지 않은 개념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여러 번을 망설인 끝에 ‘골목 안으로 열리는 봄날의 동화’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다섯 편 모두 안정돼 있었다. 이미지가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게 장점이었다. 과장과 현란한 수식 없이도 충분히 다 말하고 있는 시였다. 한 행도 함부로 쓰지 않는 섬세함과 문장 하나도 팽팽한 긴장으로 끌고 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끌고 간 문장의 끝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서술어를 배치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복고적 서정에 머물고 있는 점, 작품마다 ‘그렇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이 걸리기는 했으나 작품마다 연륜의 무게가 느껴져서 당선작으로 밀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삶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한 사람만을 선정해야 하기 때문에 선정하지 못한 ‘Vicent Van Gogh’를 쓴 시인 역시 어디서든 상을 받을 만한 시인이라고 생각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도종환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특별함 끄집어내는 시적 상상력 보여
시인 문정희·황지우
우리 두 심사위원은 각기, 김다연씨의 '얼음왕국'과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 범위 안에 든 작품으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이들의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하여 두 차례 더 읽어보았다. 민구씨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를 당선작으로 꼽는 것으로 합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민씨의 작품들은 시가 일상언어 사용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서 시 아닌 것들과 스스로를 변별케 하는, 고유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층위란 산문의 평지에서 좀 떠 있는 부력, 흔히들 말하는 시적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영역을 지칭하는 것인데, 민씨에게는 그러한 발견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새들은 (…)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라든가, 그의 다른 시 〈배가 산으로 간다〉에서의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같은 대목은 범상치 않은 발견이다. 그것이 있을 때 시가 스스로 뜬다. 이런 좋은 부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민씨에게도 있다. 다분히 서술적인 말투라든가, 시라고 하는 대단히 인색한 지면에서 동어반복하면서 낱말들을 낭비하는 것, 시적 상념이 더 깊은 데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등등이다. 이런 악습은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 더 해당된다 하겠다. 특히 근래 판타지에의 경향성 속에서 스스로도 감당 못할, 실패한 은유들의 범람은 참 견디기 힘들다.
김다연씨의 '얼음왕국' 외 2편도 고루 시를 스스로 유지시키는 역량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 안에 반짝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발견의 신선함이 약하다 할까. 상념이 동화적이라고 해야 할지, 유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심사자들에게 앞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시인의 이름을 부여하기에는 아직 실감이 덜 왔다. 양서연씨의 '붉은 귀', 한창의씨의 '어떤 행방'을 최종심에서 우리가 논의했다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의미한다. 이 땅의 싱싱한 시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모두의 정진을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성 포착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눈길을 끈 이들은 ‘술빵 냄새의 시간’ 등을 투고한 김은주와 ‘꽃 피는 일’ 등을 보내온 류화, 두 사람이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과 돌파력이란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새벽녘 시장에서 돼지 잡는 장면을 다룬 ‘꽃피는 일’은 동물의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처참한 장면을 복사꽃이 피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는 것과 중첩시킴으로써 기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탐미적 시선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조형 능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질서를 투시하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깊이를 내장하고 있었다.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이 있는 대신 단조롭게 여겨지는데 비해, 김은주의 작품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듯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 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로는 ‘바람 부는 날의 모과’의 박은지, ‘흰 개와 바다’의 이현미, ‘구불구불거리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의 진유경 등이 있다.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맆 피시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맆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시 부문 심사평- 개성있는 언어 활달하게 구사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다섯 분의 작품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수연씨의 ‘숙련공’이었다. 시를 쓰고 있는 자기 세대의 어법을 개성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행과 행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고, ‘숙련공’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감각적인 표현에 구체적인 사유를 담지 못한 허약한 표현이 많았다. 시에서 강한 정신력과 숙련된 언어는 함께 이루어진다. ‘도원역’과 ‘아주 조금만 남은 것들’을 쓴 김우찬씨는 언어를 정제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갈고 닦은 언어는 새롭다기보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언어나 세계를 향한 모험이 보이지 않는다. 시에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웅선씨의 ‘창밖으로 오분’은 창을 내다보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개성적인 어조로 붙잡아내는 그 착상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해 환상으로 잇대어진 연결 부분은 실감이 부족했다. 감탄어미와 ‘치명’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시의 끝을 맺고 있는 것도 안일한 수법이다.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맆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이 세계로 실어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의 당선을 계기로 세계 속으로 자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도 함께 얻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황지우·최정례>
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담쟁이 넝쿨 /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심사평
격조 높은 사랑 고백 그윽한 울림
따로 예심을 거치지 않고 심사위원 세 사람이 응모 작품 전체를 나누어 읽었다. 생각과 말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거나, 유행을 추수하고 있거나, 겉멋에 치우쳐 있거나,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작품들을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서른 명 남짓을 추렸다. 이를 다섯 명으로 줄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서진 씨의 '물의 씨앗'은 어조가 활달하고 상상력의 전개가 볼 만했으나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 미흡했다. 이와 반대로 이규 씨의 '해바라기 노란 열쇠'는 시가 대상의 구체적 형상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해서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최정아 씨의 '그의 우화(羽化)'는 재기 넘치는 상상력과 감각으로 일상을 성찰하는 시인데, 그 상상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아 아쉬웠다.
김승원 씨의 '다시, 봉천고개'와 조원 씨의 '담쟁이 넝쿨'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능숙하게 끌고 가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적절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다만 김 씨의 작품은 일부 상투적인 표현을 노출하고 있어 아깝지만 뒤로 제쳐두기로 했다.
당선작 '담쟁이 넝쿨'은 담쟁이 넝쿨이라는 시적 대상에다 건강하고 격조 높은 사랑의 고백을 매우 탁월한 기법을 이용해 얹어놓았다. 이 시가 발산하는 그윽한 울림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시루 속 콩나물'의 대담한 상상력도 이 시인을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감종해 강은교 안도현 (시인)
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
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
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
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명왕성은 남편의 별
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
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
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
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
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
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
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
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
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
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
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
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
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
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
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
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
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2009년 신춘문예] 시 심사평
긴 시를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 돋보여
경향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보내온 많은 시들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시의 형식과 더욱 다양한 주제들 앞에서 심사위원은 고심하면서 오랫동안 시를 읽었습니다.
그렇게 거르고 걸러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신원희), '꽃게와 발레리나'(박세랑), '장롱을 열어놓고'(박종인),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도미솔) 등 4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또한 오랜 토론이 있었습니다.
'꽃들이 타오르는 이유'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좋은 시였는데 함께 보낸 다른 작품과 편차가 심해, '꽃게와 발레리나'는 발랄하고 감성적이어서 좋은 시였는데 그래서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로 넘겼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장롱을 열어두고'와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두고 두 분 다 표제작은 물론 함께 보내온 탄탄한 구성의 시들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롱을 열어두고'는 맑은 서정과 부드러움이 빛나는 시였고,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는 시가 갖는 힘과 긴 시를 흔들리지 않고 장중하게 끌고 가는 저력이 돋보이는 시였습니다.
심사위원은 '장롱을 열어두고'가 가지고 있는 반복적 구성이 결점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된 것과 우리 사회의 구조조정이란 문제를 서정적인 문체로 제시하며 '희망'이란 메시지를 선물하고 있는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당선작과 같이 보낸 시들의 어떤 작품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어 그런 신뢰가 당선자의 앞으로 활동에 큰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당선자 도미솔 씨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다음에도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말을 전합니다.
본심 심사위원 천양희 정일근 문태준(시인)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 최정아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2009 신춘문예] 시 심사평
▲ 박재열(시인·경북대 교수)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예심을 거친 21명의 작품을 읽으면서 대체적으로 신선한 감각에 호감이 갔다. 그러나 거개의 작품이 산문적인 발상이거나 묘사에 그쳐 있어서, 패기 있는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느낌은 주지 못했다.
시가 삶이나 자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이라면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인식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런 뜻에서 최정아의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이정희의 「광흥창문 두드리는 것들」, 류화의 「그녀의 검은 봉지」, 김승훈의 「곤달걀의 비명」, 김지훈의 「바다 복사실」, 이담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정학명의 「구름정원의 기억」 등은 사물을 보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해서 시의 기초가 튼튼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봉지」는 이야기체를 못 벗어나는 한계를 보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가상의 공간을 제시하는 만큼 리얼리티가 부족한 것 같았고, 「곤달걀의 비명」은 곯아버린 병아리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돋보였으나 강한 인상을 줄 만한 이미지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광흥창문 두드리는 것들」은 베란다의 식물을 극화한 것은 신선했으나 역시 식물들의 구체화가 아쉬웠다. 「바다 복사실」, 「구름정원의 기억」,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는 현실과 상상, 외계와 내면을 무리 없이 넘나드는 만만찮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바다 복사실」은 재깍거리는 복사실의 이미지를 바다 이미지와 멋지게 오버래핑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효과를 내는 데는 미숙해 보였다. 「구름정원의 기억」은 터프한 호흡이 매력적이었지만, 사물을 형상화하는 능력에서는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만 못했다. 최정아의 이 작품은 활달한 상상력에서 터져 나오는 내면세계가 제의적(祭儀的)으로 살을 채워나가면서도 상당한 예술적인 즐거움과 깊이를 주어,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 없었다
2009 영남일보 문학상
나무의 공양 / 이경례
졸참나무가 제 몸통을 의탁해왔네
지난 태풍에 겨우 건진 살림살이지만
기와 불사를 생각하며 제 몸 선뜻 내 놓았다네
오래도록 산문의 입구를 지켜 온 졸참나무와
딱따구리, 한참을 골몰한 붉고 노란 머릴 조아리며
하피첩서霞帖書를 떠올리다, 마침내
졸참나무, 거친 한 생의 피륙에다
제가 살아온 산야의 사적비를 짜기로 했네
구족口足 화가가
붓을 입에 물고 넝쿨처럼 뻗어 오르는
푸른 영혼을 펼쳐내듯
한 땀 한 땀이 딱따구리 혼신의 필사
졸참나무 나이테에 누가 바늘을 올렸나
아득한 시간의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여든 아홉 암자의 일천성인 득도의 날들과
어느 날 산사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졸참나무의 한 생이 받드는 허공 속으로
무거운 산 울대 오래 공명하는 딱따구리의 필력
노을치마인 듯 소슬히
산야가 제 온 몸 펼쳐 품안에 보듬는 저녁이라네
[심사평] "투명하고 맑은 서정의 힘 돋보여"
예심을 거쳐온 20여분의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선자(選者)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줄글체의 중언부언들은 다소 걸러진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선고(選考)의 대상이 된 작품들은 '무릎' '유리주의' '흔적' '나무의 공양' 등이었다.
'무릎'은 신체의 일부분을 일상의 틀 속에서 음미하면서 자성(自省)으로 이끌고 가는 노련함이 읽혔다. 시어의 경제를 실천하면서도 환상을 끌어안는 견고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또 다른 응모작 '둘레'도 이 응모자의 습작의 강도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리주의'는 대상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삶의 음영을 겹쳐놓는 시적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상상력의 결을 좀더 활달하게 풀어헤쳐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만든다. 한 작품을 지탱해 줄여타의 시편이 없다는 것도 이 응모자의 한계라고 판단했다.
'흔적'은 당선을 두고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이다. 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깊이 있는 시어들은 주제를 끌고나가는 끈질긴 사유의 힘과 어울려 상당한 설득력과 무게를 차지해 보인다. 그럼에도 당선작의 뒷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딘가 익숙한 수사로 가로질러 오는 언술들이 잦았던 탓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낯선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무의 공양'은 오래 묵힌 소재를 활달하고 투명한 상상력으로 맑은 샘물처럼 산뜻하게 변주한 작품이다. 대상을 새롭게 부조하여 오롯이 완결된 한편의 서정으로 빚어내고 있어서 이 응모자의 숙련된 공력을 느끼게 한다. 시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얼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깨우친 결과이리라. 당선에는 다른 시편의 수준들도 함께 평가된 것임을 부언해둔다.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 심사위원 이하석(시인), 김명인(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9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무럭무럭 구덩이/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심사평] 희귀한 감각과 상상력… 신인다운 신선함 돋보여
시 부문 응모작은 양과 질이 모두 풍성하여 선자들을 즐겁게 했다. 응모작의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신춘문예나 문예지 응모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하고 전위적인 실험시를 흉내 내는 시들이 많았다.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응모작들에서는 이런 흐름이 크게 줄어든 반면 삶의 현실을 체감하거나 강하게 끌어당겨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늘었다. 이것은 기존의 역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적 경향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이우성의 '무럭무럭 구덩이'와 장예은의 '만월'이다.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
장예은의 시는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섬세함과 발랄함을 갖고 있다. 밝고 싱그러운 서정적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완성도 높은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없이 손이 갈 만한 작품이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우성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함께 응모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편차 없이 고르게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어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장예은의 다른 작품들은 기복이 있어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오윤희의 '뫼비우스의 띠'와 박은지의 '열쇠 도적'도 만만치않은 역량을 보여주었다. 앞의 시는 시사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재치 있게 드러냈으나 거친 것이 흠이며, 뒤의 작품은 안정적이고 참신한 목소리를 지녔으나 산만하여, 각각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도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 심사위원신경림(시인)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교수) 김기택(시인)
200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즐거운 장례식/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죽음에 대한 생각 뒤집는 역설의 묘미 탁월
최종심까지 올라온 8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남은 작품은 이강해씨의 ‘집들이’, 강지희씨의 ‘즐거운 장례식’ 2편이었다.
‘집들이’는 탄탄한 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점이 먼저 단점으로 지적됐다.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살아보기 전에 무덤이다’ 등의 표현 또한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멋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져 자연히 ‘즐거운 장례식’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됐다.
‘즐거운 장례식’ 또한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관을 들어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작은아버지는 ‘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릴’ 정도로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이 반어적 발상을 통한 시적 구현은 이 시인의 앞날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준다. 앞으로 한국시단을 빛내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2009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게 세 줍니다 / 유 금 옥
나뭇가지에 빈 가게 하나 있었어요. 참새 두 마리가 날아와 화원을 차렸죠. (햇살 꽃방) 정말 그날부터 햇빛들이 자전거 페달을 쌩쌩 밟았다니까요.
가게에 봄이 한창일 때는 산들바람도 아르바이트를 했죠. 사랑에 빠진 벌 나비가 주 고객 이였는데요 창업에 성공한 사례였어요.
참새들은 날개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요. 가위로 꽃대를 자르다 서로 눈이 부딪치면 재재거리며 웃었어요. 앗! 그때 여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갔어요.
가을이 이삿짐 트럭을 타고 지나간 다음 날 나는 보았죠. 양은냄비 브래지어 구두 숟가락들이 낙엽이 되다니 아스팔트 바닥에 나 뒹굴다니
비 내리던 가을 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꽃방은 다시 문을 닫았어요. 가랑잎 한 장만한 쪽지를 붙여 놓았지만 겨울 내내 가게는 나가질 않았어요. 가게 세 줍니다.
일상 속 깨달음 발견한 시적통찰 탁월
투고된 작품들을 몇 차례씩 숙독하여 마지막 까지 남은 작품은 ‘가게 세 줍니다’, ‘자작나무의 행로’, ‘정씨 목공예방’, ‘신발 속에서 걸어나오다’, ‘딱다구리 경전’, ‘꽃들의 언어’, ‘호수의 법문’, ‘안부’ 등이었다. 이 중에서 ‘가게 세 줍니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최후까지 겨룬 ‘자작나무의 행로’도 당선작으로 별반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미학적 완결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도전해 보시기 바란다.
‘가게 세 줍니다’는 스케일이 크거나 문제성을 지닌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 속에서 진리를,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한 시적 통찰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미학적 차원에서 신선하게 형상화시킬 수 있는 언어적 감수성도 탁월하였다. 자연과 하나 된 인생의 참 모습이 나무의 사계절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훌륭한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을 주는 법이다. 굳이 어렵게 쓸 필요가 없다. 당선작은 이 같은 시의 원리를 잘 터득한 듯 하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시론에서 논의되고 있는 시의 보편적 원리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시창작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정석이다. 첫째 이미지의 등가적 반복이다. 1, 2연은 봄의 이야기를, 3연은 여름의 이야기를, 4연은 가을의 이야기를, 5연은 겨울의 이야기를 빌어 같은 자연의 의미를 네 번 굴절시키면서도 각각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둘째 상상력의 이원적 대립이다. 시인은 자연과 문명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한가지로 일원화시킨다. 셋째 이미지들의 병렬적 기법이다. 1연에서 ‘자전거 페달’을 이야기한 것은 3연에서 ‘오토바이 질주’에 2연 ‘산들 바람’은 3연에서 ‘이삿짐 트럭’에 대응된다.
‘자작 나무의 행방’은 사유가 깊고 복선적이다. 그런 점에서 당선작보다 무게가 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상상력의 논리가 부족하며 그런 까닭에 다소 산만하다. 주제 의식보다도 형상화의 완결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나머지 시들도 모두 상당한 수준에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 창작의 도움이 될까하여 여기서는 약점만을 지적해 보도록 하겠다. ‘호수의 법문’은 긴장감이 부족했으며, ‘안부’는 설명적이었으며, ‘꽃들의 언어’는 작위적이었으며, ‘딱따구리 경전’은 다른 시인들의 이미지와 유사한 점이 있었으며, ‘신발 속에서 걸어나오다’는 상상력의 비약이 지나쳐 보였으며, ‘정씨 목공예방’은 사실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