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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현(丁若鉉) 묘 다산유적지에 가면 정약용에 대한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실학박물관 까지 생겨나서 이제는 제대로 보려면 한나절을 꼬박 그곳에서 보내야 한다. 답사 일정이 빠듯한 상태에서 이곳을 방문하면 난처해지기 때문에 아예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들르길 자주 한다. 그러다 보니 인근에 있는 정약용 큰 형님이신 정약현 묘를 지척에 두고도 오르질 못했다. 언젠가는 여름에 방문 하려다가 너무 숲이 우거져 그냥 포기했다. 지금은 겨울 끝자락, 봄 시작이라 아직 나뭇잎도 안나고 무엇보다 뱀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라 마음 놓고 찾았다. 그런데 산의 나무를 다 베어서 아주 쉽게 오를 수 있었는데... 정약현 묘소는 관리가 안되어서 아주 험하게 변해 있었다. 상석 마져 없었다면 묘를 실전 하기 십상이다. 묘역은 주변 사격이 전혀 없어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특히 한강에서 부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데 묘역에 사성을 쌓아서 이를 방비 해 줘야 한다. 어느정도 정리가 되면 다시 한번 찾아볼 생각이다. |
큰형님 진사공 정약현 묘지명 공의 이름은 약현(若鉉)이고, 자는 태현(太玄)이다. 우리 정씨(丁氏)의 본관은 압해(押海)이니, 지금은 나주(羅州)에 속해 있다. 고려 때에 무관(武官)이 연이어 나와 9대에 걸쳐 끊어지지 않았다. 시조 정윤종(丁允宗)은 종3품 대장군이니 당시의 부장(副將)이다. 본조로 들어와서는 문직(文職)이 9대에 연이어 끊이지 않았다. 그 중간에 은사(隱士) 정연(丁衍)이 있었는데,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께서 나라를 세우던 초기에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았지만 위로 고려의 조상을 이어 아래로 후손을 열어 주어 우리 정씨의 복록을 든든히 하셨다. 이분 이후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낸 정자급(丁子伋),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정수강(丁壽崗), 병조 판서를 지낸 정옥형(丁玉亨),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丁應斗),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丁胤福),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丁好善),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丁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정시윤(丁時潤), 우부승지를 지낸 정도복(丁道復)이 모두 옥당(玉堂)에 오름으로써 9대를 전한 것이다. 승지공(정도복)의 맏형으로 정도태(丁道泰)라는 분이 있는데, 음보(蔭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정항신(丁恒愼)으로 진사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정지해(丁志諧)이니 음보로 통덕랑을 지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정재원(丁載遠)이다. 영조 임오년(1762, 영조 38) 과거에 합격한 진사로서 연석(筵席)에 올라가 제의(祭義)를 강론하고는 특지(特旨)로 관직을 임명받았다. 벼슬살이를 오래하는 동안에 치적(治績)이 있었으며, 진주 목사에 이르러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처사(處士) 남하덕(南夏德)의 따님이며 개국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후예이다. 영조 신미년(1751, 영조 27) 5월 6일에 광주(廣州)의 마현(馬峴) 집에서 공을 낳았다. 그 이듬해 10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모(乳母)를 따라 외가에서 자란 기간이 여러 해였다. 점차 자라면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배웠고 약관(弱冠, 20세)에 감시(監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다. 계묘년(1783, 정조 7, 33세) 봄에 감시의 양장(兩場)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을묘년(1795, 정조 19, 45세) 봄에 이르러서 진사시(進士試)에 3등 제34인으로 합격하였으니, 그때 나이 45세였다. 아, 늦었도다! 공은 담박하고 조용하였으며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읽기를 좋아하였는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약용이 어렸을 때였다. 공이 한창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와 〈제물론(齊物論)〉을 읽고 있었는데, 약용은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여 책상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돌아가 내 책을 읽는 것조차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우리 선비(先妣) 윤 숙인(尹淑人)께서는 공을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보살피셨고 공도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잘 섬겼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약용이 어렸을 때였다. 연천현(漣川縣)의 관아에서 지낼 때 윤 숙인께서 공과 형수 이씨(李氏)를 불러 앞에 앉히고 쌍륙(雙陸) 놀이를 하게 했는데 그 즐거움이 화기애애하였다. 신유년(1801, 순조 1, 51세)의 화란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모두 혹독한 화란에 걸려들어 한 사람은 죽고 두 사람은 귀양 갔다. 그러나 공은 조용히 여론의 구설수에 말려들지 않아 우리 가문을 보전하고 집안의 제사를 이어 갔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러나 일명(一命)의 벼슬에도 이르지 못하고 끝내 쓸쓸히 돌아가셨다. 아, 애석하도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건륭(乾隆) 임자년(1792, 정조 16, 42세) 여름에 공이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과 더불어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듣고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부음(訃音)을 듣고 진주(晉州)로 달려갔다. 충주(忠州)의 선영으로 반장(反葬)하고 돌아와 열수(洌水)의 여막에서 곡하였다. 공이 곡을 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적삼 소매에 불그스름한 것이 보여 살펴보았더니 피눈물이었다. 복(服)을 다 마치고도 여전히 사모하는 정이 간절하여 정자를 짓고서 ‘망하정(望荷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는 하담(荷潭)이 동남쪽에 있어 이 방향으로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선영(先塋)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자(朱子) 《가례(家禮)》에 ‘최장방(最長房)으로 신주(神主)를 옮겨 간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주자(朱子,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초년에 기록한 것이고, 주자의 만년에 이요경(李堯卿)·호백량(胡伯量)·심한(沈僩) 등에게 답한 여러 편지에서는 모두 조거(祧去)하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았다. 성호 선생(星湖先生, 이익(李瀷)) 및 안순암(安順菴, 안정복(安鼎福))도 모두 주자의 만년의 뜻을 따랐다. 그래서 공은 또 종족이 쇠잔해져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중부(仲父) 옥천공(沃川公, 정재운(丁載運)), 계부(季父) 가곡공(稼谷公)과 의논하여 최장방으로 신주를 모셔 가는 예법을 없애고, 마침내 조거(祧去)하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중년에 자호(自號)를 ‘부연(鬴淵)’이라 하였다. 지은 책으로는 시고(詩稿) 3권이 있다. 도광(道光, 청 선종(宣宗)의 연호) 신사년(1821, 순조 21, 71세) 가을에 유행병이 갑자기 퍼져 9월 4일에 옛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1세였다. 첫 번째 부인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아버지는 이부만(李溥萬)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이달(李鐽)인데 호남 병마사(湖南兵馬使)를 지냈으며, 부제학 이정형(李廷馨)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정진흥(丁震興)은 젖먹이 때 요절했다. 큰딸은 황시복(黃時福)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지금 정언(正言)으로 있는 홍영관(洪永觀)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홍재영(洪梓榮)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아버지는 김주의(金柱義)이고 할아버지는 김응렴(金應濂)인데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이다.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은 정학수(丁學樹)로 사람됨이 복되고 착하며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가들고 나서 요절하였다. 다음은 정만수(丁萬壽)로 이를 갈기도 전에 요절하였다. 다음은 정학순(丁學淳)인데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다. 큰딸은 정협(鄭浹)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권진(權袗)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김성추(金性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목인표(睦仁表)에게 시집갔다. 홍영관(洪永觀)은 2남 1녀를 두었고, 나머지도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첫째 부인 이씨(李氏)는 경자년(1780, 정조 4, 30세)에 예천(醴泉)에서 죽으니 묘는 충주의 하담(荷潭) 선고(先考) 진주공(晉州公, 정재원)의 무덤 동쪽에 있다. 공이 죽었을 때에는 하담이 멀어서 그곳에 가서 함께 묻지 못하고, 의논 끝에 집 동산의 기슭에 묏자리로 쓸 만한 혈(穴)이 있으므로 달을 넘겨 장사지내되 간방(艮方, 북동쪽)을 등진 언덕에 무덤을 만드니, 뒷날 김씨(金氏, 두 번째 부인)를 곁에 묻으려는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훼손과 상함이 없은 뒤에야 그분의 온전함을 알겠고 재앙과 피해가 없은 뒤에야 그분의 어짊을 알겠네. 온통 무너졌지만 홀로 서니 그분의 꿋꿋함을 알겠고 모두 잃어버리되 홀로 지키니 그 끊이지 않고 이어짐 알겠네. 여기는 우리 큰형님이 묻히신 곳이니 향당 종족 이곳 지나며 공경하지 않을 이 없으리. <네이버 지식백과 여유당전서(정약용 저) 큰형님 진사공 정약현 묘지명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정약현(丁若鉉) 묘 |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8-4(네비:능내리 97-2) |
관리자(연락처) | 나주정씨 |
▼ 정약현(丁若鉉) 묘 위치
▼ 정약현(丁若鉉) 묘 가는 길...
▼ 정약현(丁若鉉) 묘는 주차 위치에 주차하고 산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
▼ 정약현(丁若鉉) 묘 오르는 길에 바라본 다산 정약용 묘소와 생가...
▼ 정약현(丁若鉉) 묘... 상석에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배위 의성김씨와 합장묘이다.
▼ 정약현(丁若鉉) 묘 전경... 관리가 거의 되고 있지 않다. 현재는 묘역에 잡목을 모두 제거한 상태로 묘역 관리를 하려는 듯 보인다.
▼ 정약현(丁若鉉) 묘 측경... 백호쪽 산이 거의 없다. 골짜기로 바람이 무섭다.
▼ 정약현(丁若鉉) 묘 봉분이 잡목에 가려져 거의 사진으로는 식별이 힘들다.
▼ 정약현(丁若鉉) 묘 청룡쪽... 두물머리쪽 한강이 인접해 있다. 바람이 매서운 곳이다.
▼ 정약현(丁若鉉) 묘 청룡쪽... 한강인데 이날 미세먼지로 시야가 아주 좋지 못하다.
▼ 정약현(丁若鉉) 묘 후경... 묘 봉분이 식별이 안될 정도로 관리가 안되어있다.
▼ 정약현(丁若鉉) 묘 후경... 혈은 후부해야 한다고 되어있는데... 너무 빈약하고 바람에 노출되어 있어서 위험하다.
▼ 정약현(丁若鉉) 묘 봉분과 입수룡..
▼ 정약현(丁若鉉) 묘 입수도두에서 바라본 입수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