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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꼬바지
이 홍사
아!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서두에 70년대를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나오면 신세대들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노인네로 취급할 게다. 그렇더라도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그 시절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중반부터 당꼬바지란 게 유행의 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그 때는 그냥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당꼬바지라고 친구들 사이에 통용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탱고바지, 즉 탱고를 출 때 입는 바지가 아닌가 싶다. 그 탱고 바지의 유행이 일본으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해협을 건너오면서 땅꼬바지로 이름만 살짝 변질된 것 같다. 탱고바지! 아무래도 이렇게 부르는 건 어감이 이상하여 우리들의 아련한 추억을 낚아채기 어렵다. 당꼬바지라고 칭해야만 그 바지의 모양과 형태가 금방 떠오른다. 일본말로 하자면 바지가 ‘스봉’이니까 ‘당꼬스봉’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우리는 그냥 당꼬바지라고 부르며 유행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당꼬바지 이전에는 나팔바지가 유행의 물살을 타고 지나갔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워낙 시골이고 어린 나이라 그런 유행을 몰랐는데 중학에 들어가서야 눈을 뜨고 보니 나팔바지가 유행이었다. 고학년들 중에서 좀 논다는 선배들은 교복 하의를 거의가 나팔바지로 만들어 입고 다녔다. 그 나팔바지의 치수를 인치로 말하곤 했다. 어떤 선배는 25인치. 누구는 24인치 반. 그런 경쟁을 하다가 학생부장 선생님께 교무실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에는 왜 그런 것조차 단속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나팔바지를 입어보지 못했다. 머리가 굵기 전에 나팔바지의 유행은 서서히 식었다. 선배들의 나팔바지를 보며 저렇게 가랑이가 넓으면 자전거로 등하교할 적에 굉장히 불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꼭 저렇게 노는 티를 내야하나 싶었다. 유행이라도 선배들 전부 다 나팔바지를 고집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 일학년 들어가면서 교복을 장만하면 거의가 삼 년을 입었다. 일학년 때는 교복이 좀 풍덩하고 이학년에 올라가면 옷이 몸에 맞고 삼학년이 되면 교복이 좀 작은 듯했다. 거의가 동복 한 벌과 하복 한 벌로 삼 년을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좀 잘나가는 선배들은 윗도리는 그대로 입는데 하의는 유행에 따라 나팔바지로 다시 맞추어 입고 다녔다. 모두가 다시 맞춘 것이 아니라 면밀히 관찰한 바에 의하면 가랑이가 좁은 바지에 천을 덧붙여 나팔바지로 수선해서 입고 다니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 나이에 유행이란 전염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배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회의 고등학교에 가고 나도 가깝고 만만한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나팔바지를 입는 사람은 오히려 촌놈 취급을 받았다. 유행이 지난 것을 고집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촌티가 줄줄 흐르는 것은 없다. 나팔바지 유행의 끝을 물고 정반대의 당꼬바지가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가랑이가 나팔 대신에 너무 좁아 바지를 입으려면 발목을 끼우기가 버거울 정도로 좁은 바지였다. 나팔바지는 버리거나 그 당시에 흔한 맞춤집이나 수선집에서 모두 가랑이를 잘라내고 고쳐 입었다. 수선 집에서 고친다고 당꼬바지가 되는 건 아니다. 나팔바지는 허벅지가 꽉 조이는 데 반해 당꼬바지는 허벅지가 풍덩 하다못해 허벅지가 두 개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넓다. 그러니 나팔바지 가랑이를 줄인다고 당꼬바지가 되는 게 아니다. 나팔바지는 그 반대로 허벅지의 알통이 드러날 정도로 좁은 게 특징이니 나팔바지의 가랑이를 줄이면 당시 유행의 족보에 없는 쫄바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팔바지가 아니라 당꼬바지의 세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 적에는 선도부들이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단속했다. 당꼬바지도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당꼬바지를 입은 상급생 선도부원이 당꼬바지를 입은 하급생을 단속하여 교문 안에 ‘엎드려뻗쳐’ 를 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행이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양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아버지께서 허리가 작아서 못 입는 아버지의 청년시절에 입던 바지 중에서 하나를 사복으로 골라 입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 청년 시절에 유행하던 당꼬바지였다. 지나간 세월을 계산하니 거의 삼십 년 차이를 두고 그 유행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당꼬바지는 내 고등학교 시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유행했던 것이 다시 유행의 물살을 타고 찾아온 것이다. 세계 명작 중에서 고전 영화를 보면 당꼬바지에 중절모를 쓴 신사가 등장하는 흑백 영화가 가끔 우리들 눈에 비치기도 한다. 그건 육십 년 전의 내용이다. 그러니 유행의 주기를 삼십 년으로 잡으면 얼추 맞아 떨어진다.
당꼬바지에 길이 들면 다른 바지는 입지 못한다. 허리띠를 배꼽 위에 매고 다니다가 골반바지를 입으면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지금 입는 바지도 당꼬바지는 아니지만 기장을 긴 것만 사서 허리띠를 배꼽 위에 매고 다닌다. 그 때 길이 든 습관이 평생을 가는 모양이다. 당꼬바지가 유행하던 시절에 나는 허리를 29인치 입었었다. 그 때는 뭘 입던 입으면 잘 어울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배가 나오고 허리를 36인치 입는다. 어떻게 입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어려운 게 아랫배다. 아내는 내가 옷을 갈아입을 적에 아랫배를 검지로 쿠욱 쑤시며 ‘똥배’라고 장난을 건다. 당꼬바지 허리 30인치 입던 시절에 아내를 만났다. 그 동안 6인치가 늘었다. 그게 삼십오 년이다. 순전히 아내 덕이다. 아내를 만날 때도 당꼬바지를 입고 있었다. 군에 가기 전이었으니 한창 유행에 민감할 나이였다. 아내와 사귀다가 군에 갔다. 군복은 당꼬바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 그게 불만이었다. 군복바지에 길이 들고 만기전역을 하고 오니 당꼬바지가 유행에서 밀려 났다. 당꼬바지 입기가 거북해서 모든 바지를 수선해야만 했다. 바지 기장은 그대로 두고 허벅지와 가랑이를 수선해서 입었다. 그게 길이 들어 지금까지 배꼽 위에 허리띠를 매는 그 바지를 고집한다. 배가 조금 나오고 나서부터 더 심히다. 요즘 유행하는 골반바지를 입어 보니 자꾸만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고 바지 속에 넣어둔 와이셔츠가 자꾸 삐져나오는 게 불편해서 바지를 사러 가면 사타구니부터 허리띠까지의 길이부터 살핀다.
어쩌다 당꼬바지를 떠올리게 되었는가?
생각하니 제주로 가는 비행기 바로 대각선 뒷좌석에 앉은 여학생 때문이다. 여학생 때문이 아니라 여학생이 입은 짧은 교복치마 사이로 보이는 흰색 팬티 때문이다. 언제부터 교복치마가 앉으면 팬티가 보일정도로 짧아졌는지 모르겠다. 우리 학창시절 여학생 치마는 무릎까지 내려왔지 싶다. 치마 길이도 유행을 타는가 싶어 의아해하다가 당꼬바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는 자세를 고쳐 앉았나 싶어 돌아보니 옆에 앉은 여학생을 트레이닝 윗도리로 무릎을 덮고 있는데 반해 그 여학생을 그대로 팬티를 내놓고 앉아 떠들고 있다. 힐끔 돌아보고는 참 불편한 자리가 되겠다 싶어 앞 쪽의 빈 좌석으로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그대로 의자에 등을 묻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니 지금 여학생의 교복 치마가 거의 미니스커트 수준이다. 분명 유행이다. 유행의 물살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유행의 물살이라.......
대구 공항에서 티켓을 끊고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데 교복을 입은 남녀 고등학생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대충 백 오십 명 정도는 될 것 같았다. 한산하던 공항 대합실을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담배를 피우러 건물 밖 흡연실로 나가며 한 남학생을 잡고 물었다.
-수학여행 가는 거냐?
-예! 제주도로 가요.
-요즘 수학여행 가는데 교복을 입느냐?
우리 때는 사복을 입고 설악산으로 간 기억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세월호 사고가 터지고부터는 그래요. 우리 수학여행 못 갈 뻔 했어요.
-아하! 그렇구나.
-수학여행을 부보님들 차반 투표해서 간다니깐요.
녀석은 맹랑하게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세월호 사고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학여행이 줄줄이 취소가 되고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수입이 줄어 울상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칠 개월이 넘은 오늘도 기차로 대구까지 내려오면서 보니까 역 계단 난간에 노란 리본을 달아놓았고, 지금도 야당 국회의원들은 노란 리본을 훈장처럼 달고 당파 싸움을 하고 있다. 어제도 뉴스를 보다가 그게 눈에 거슬려 나도 모르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미친 새끼들! 제 애비가 뒈져도 삼베조각을 지금까지 안 달고 있지 싶다. 훈장이구먼 훈장!
무고한 사상자를 낸 사고가 정치권의 쟁점이 되어 있는 것이 못마땅해 불쑥 뱉은 욕지거리인데 같이 뉴스를 보던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은 뉴스를 볼 자격이 없어요.
-왜?
-정치권 누스를 보면서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해요.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칠 개월이 넘었다구. 저건 희생자를 기리는 게 아니라 이용하고 있는 거라구. 이용이 아니라 악용하고 있는 거지. 악용! 사고가 안 났으면 어쩔 뻔 했나 몰라.
-왜 그렇게 핏대를 세워요?
-몰라! 짜증이 나네. 꼴을 보니.
아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침 속에 하고 싶은 말도 한 마디 삼켰다는 걸 안다. 그 말은 바로 ‘못 말리는 수구 꼴통’이라는 말일 게다. 말을 하다 보니 화가 더 치밀어 채널을 돌릴까 하다가 아내와 말다툼이 싫어 방으로 들어가 제주도로 갈 옷가지를 챙기고 가방을 꾸렸다. 비행기는 예약된 게 아니었다. 꼭 제주도로 가야할 이유도 분명하지 않았다. 대구공항에 가보고 비행기가 여의치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확실하게 제주도에 간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침을 느긋하게 먹고 인터넷으로 비행 스케줄을 검색하니 오후 한 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었다. 그 비행기를 이용하면 되겠다 싶어 열한 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에 내려 택시로 공항까지 가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느긋하게 마일리지로 티켓을 끊고 큰 가방을 탁송시키니 비로소 확실하게 제주도에 간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제주도에 땅을 산 건 삼 년 전이다.
성산 일출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밀감 밭을 샀다. 동아리 후배 경표 녀석이 전국을 유랑삼아 다니다 그곳에 터전을 잡고 특수작물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녀석이 어느 날 불쑥 전화가 와서 사서 손해 볼 일 아니니 여유가 있으면 사라고 해서 두 말 않고 샀다. 녀석의 집과는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둔 동네 가운데 땅이었다. 사고 보니 지목이 밭이 아니라 삼백 평 전체가 대지로 되어 있었다. 밀감나무는 마흔 주 쯤 되는데 밭 가운데 집이 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허술하고 농막이라고 하기에는 집이란 표현이 합당할 정도다. 작은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시멘트 블록에 함석지붕이다. 등기부 상에는 기재되지 않은 무허가 주택이다. 그 땅을 매수를 기화로 제주 출입이 잦아졌다. 가면 경표네 집에서 기거하지 않고 누추하지만 우리 집에서 밥을 끓여먹고 쉬다가 올라오곤 했다. 헌데 올 봄에 그 촌 동네에도 오수관이 들어온다고 정화조 없이 수세식 화장실을 지을 수 있다고 경표에게 전화가 와서 재래식 화장실을 없애고 수세식 화장실을 지으라고 요구하는 돈을 보냈다. 녀석은 열흘 쯤 후 화장실이 완공된 사진을 메시지에 첨부해서 보내왔다. 빨간 지붕에 참 예쁘게 지어진 독립화장실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가 휴가를 받은 딸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내려갔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낡은 전기 배선과 전등을 모두 바꾼다고 전화가 왔고 어느 날 전화를 하니 도배 기술자를 불러 도배를 한다고 했고 결국 손을 대다보니 고가의 전기 패널을 깔고 장판을 새로 바꾸고 부엌을 반으로 잘라 샤워부스를 만들고 부엌 전체에 타일을 붙이고....... 손을 대기 시작하니 일은 끝이 없었다. 대대적인 공사였다. 싱크대에 냉장고까지 넣고 가스레인지 설치하고, 그릇도 이불과 그릇까지도 갖추어서 누가 내려가도 옷가지만 가져가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완벽하게 집으로 만들어 놓고 근 보름이 지나서야 올라왔다. 아내는 폰으로 찍은 공사전과 공사후의 사진을 보여주며 헛돈 쓰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래! 마이너스 긁어서 별장을 만들어 놓았구먼.
-그래요. 별장이에요. 완벽한 별장
별장이란 호칭은 그 때 처음 등장했다. 그 말을 기화로 농막이 별장으로 둔갑했다.
그 후로 아들 녀석이 곧 군대 가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사박 오일 놀다 오고 대학에 다니는 조카가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놀다 오고. 제주도에 별장이 있다고 소문을 내자 아내의 친구 딸까지 동아리 여행이라며 가서 묵고 왔다. 아내의 입이 소문의 근원지였다. 제주도에 별장이 있다는 소문. 농막이 별장으로 미화 되어 소문이 나자 아내의 지인들은 제주도에 가면 메인켐프로 이용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갔다 온 사람들 모두가 조용하고 깨끗해서 좋았다고 잘 이용했다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들락거렸지만 정작 주인인 나는 집수리 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언제 가보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에 경표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요지는 동네의 한라봉 영농조합에서 운영하던 대지 육백 평의 창고 두 동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걸 공동으로 사자는 것이다. 그걸 마이너스를 긁더라도 잔금을 치루면 저리의 영농자금을 농협으로부터 왕창 대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모로 따지더라도 영농자금 이자가 땅값 오르는 것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도로에 접해 있어서 지가 상승 전망이 밝고 창고 마당에 서면 성산 일출봉과 바다가 보여 향후에 어떤 용도로 쓰더라도 괜찮은 위치라면서 시간이 되는대로 내려와 땅을 밟아보고 궁리를 하자고 했다. 녀석은 전화 말미에 ‘형! 간 큰 놈이 널 장사하는 법이래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유 자금이야 별로 없지만 은근히 구미가 당겼다. 그 동네는 지가가 비교적 많이 오르는 지역이다. 내가 산 별장(?)만 하더라도 삼 년 만에 서너 배 오른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
녀석은 지금이 파종기라 엄청 바쁘다며 시간이 되면 내려와 땅에 관한 궁리도 해보고 일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작년에도 그랬듯이 농사용 트럭을 운전해주는 일 밖에 없다. 평생 농사를 모르고 살았으니 도울 수 있는 일은 국한 된다. 어느 창고에 가서 박스를 싣고 오라면 실어다 주고 어느 식당에 가서 주문한 점심을 가져오라면 가져다주고 이 밭의 작업을 마치면 인부로 나온 동네 할머니들을 가르쳐 준 다른 밭으로 태워다 주는 일이 고작인데 녀석은 그게 한 사람 몫의 일이라면서 저녁이면 품삯 대신에 소주 파티를 연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에겐 같이 술을 먹어주는 것도 일이라는 걸 녀석은 모른다.
편안하게 쉬면서 가지고 간 노트북으로 글이나 쓰고 싶은데 녀석이 그런 짬을 주지 않는다. 아마 모르긴 해도 파종 시기라 엄청 바쁘다고 했으니 내일부터 그런 허드레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싶다.
비행기가 기류에 의해 잠시 흔들렸다.
뒷좌석에 앉아 재잘거리던 학생들이 그 기류를 타는 동안 우우 하는 함성을 지르며 들뜬 기분을 즐기고 있었고 기류에 의해 비행기가 흔들리니 안전띠를 매라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아마도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 중에는 비행기를 처음 타는 학생도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는 건 나도 그곳에 별장을 사고는 처음이다. 옛날에 계모임에서 제주도 여행을 갈 적에 비행기를 이용하고 참 오랜만에 제주행 비행기를 탄다. 늘 배편을 이용했다. 늘 차를 가져갔기 때문에 비행기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빠른 배편이 있는지 모르고 완도까지 가서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갔다. 가는 데만 하루 종일이 걸렸다.
차를 렌트하지 않고 굳이 가지고 들어가는 이유는 내 밭에서 나는 유기농 밀감과 농작물을 싣고 나오기 위함이었다. 완도로 돌아서 처음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니 경표가 빠른 배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바로 집에서 차로 오 분 거리의 성산항에서 출발해서 장흥 노력도로 가는 쾌속선이 하루 두 차례 운항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 삯이 비싼 것도 아니고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 항로를 이용하여 집에서 다섯 시간 만에 제주도에 도착하는 길을 뚫었다. 한두 번 이용해보니 그 길이 비행기보다 훨씬 수월했고 세 명만 가도 비행기보다는 현저히 싸게 먹히는 길이다. 헌데 올 봄에 경표 녀석이 중고 승용차를 구입했다고 전화가 왔다. 농사용 트럭이 아닌 승용차라고 했으며 이제는 혼자 제주에 올 적에 굳이 차를 가져오지 말고 편하게 비행기를 이용하라고 했다.
-그럼 농작물을 어떻게 가져 나오냐?
그게 차를 구입했다는 말에 대한 내 걱정이자 질문이었다.
-형님도 차암! 그게 걱정이오. 택배로 부치면 아파트 18층까지 올려다 주는데?
승용차 기름도 동네앞 주유소를 이용하여 농사용 면세유로 가득 채워서 마음대로 탈 수가 있다고 했다. 썩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오늘도 가방은 꾸리고 길을 나섰지만 비행기 좌석이 있을까 없을까 생각하며 없으면 제주행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대구공항으로 가니 평일이라 비행기가 한산할 정도로 좌석이 남아돌았다. 수학 여행단을 빼면 고작 열댓 명을 태우고 출발할 뻔 했다.
저가 항공 두세 편이 취항하고 나서는 정기노선의 손님이 줄었다는 말을 티켓팅하는 항공사 여직원으로부터 들었다. 나는 외국 출장이 잦아 이 항공사를 이용하며 모닝캄 우수 회원으로 마일리지가 10만 마일도 넘게 쌓여있다. 급할 때 비즈니스 석을 이용하려고 마일리지를 쓰지 않고 두었는데 제주행에 굳이 돈 내고 갈 필요가 있냐는 생각에 모닝캄 회원 카드를 제시해 만 마일을 뚝 분질러 공제하고 얼마 되지 않는 유류할증료와 공항 이용료마저도 카드로 긁고 일주일 후에 돌아가는 비행기로 왕복 티켓팅을 할 수가 있었다. 일주일이면 넉넉할 것이다. 지난겨울에 갔을 때는 열흘간 머물렀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글쓰기도 답답하고 퇴고도 지겨웠었다. 그냥 조용해서 좋다기보다는 외롭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나오는 티켓을 끊은 것이다.
티켓을 끊고도 탑승 시간이 남았다. 점심을 어쩔까? 열두 시가 넘었는데 제주에 가서 점심을 먹기에는 아무래도 허기가 질 것 같았다. 분식 코너에서 라면으로 간단하게 때울까 하다가 이층 식당가로 올라가 전주비빔밥 하나로 ‘점심 때우기’의 한 공정을 끝냈다.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기는 참으로 따분하고 껄끄럽고 뭔가 허전하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면 늘 하는 생각이지만 ‘런치 캡슐’ 같은 것은 왜 개발이 되지 않나 모르겠다. 알약 하나만 삼키고 물을 마시면 위액과 물에 부풀어 라면 하나 먹은 만큼 포만감이 생기고 영양가도 라면 하나나 밥 한 공기 먹은 만큼 보충되는 그런 캡슐 말이다. 내가 개발을 해서 특허를 내야하나? 그런 캡슐이 개발 되면 주머니에 몇 알 넣어갖고 다니다가 때가 되면 하나 삼키면 아주 간단한 물건인데, 점심 먹을 시간이 없다거나 점심을 뭘 먹어야 하나 고민할 적에 한 알 삼키고 물 한 컵으로 때우면 그만일 터인데, 이렇게 번거롭게 혼자서 점심을 먹는 일이 없을 터인데 아쉽다. 내가 그런 걸 개발해서 특허를 내서 돈을 왕창 벌어야 할 일이다. 그건 제주도에 다녀와서 할 일이고 나는 곧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그 생각을 접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공항로비로 몰려 들어왔다. 한 눈에 보아도 수학여행단임을 알 수가 있었다. 참 좋은 시기다. 저렇게 가슴 떨리는 여행을 하는 게 여행이지 나이가 좀 더 들어 다리가 떨리는 관광은 여행이 아니고 고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웃에 사는 군대 동기가 한 말이다. 당꼬바지를 입고 음악다방을 들락거리던 친구가 아니라 군복을 입고 만난 그 친구는 요즘 중국어 공부에 푹 빠져있다. 은퇴 후 중국 대륙을 누비기 위한 노후 대책으로 중국어 공부에 빠졌다.
세상에 공부가 재미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이 친구는 공부가 재미있다고 했다. 얼마나 공부에 빠졌냐하면 매일 새벽 내 사무실에 커피 마시러 오던 새벽 만남의 시간을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는 단칼에 끊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에서 삼백육십일 정도는 우리 사무실로 새벽 출근을 하던 친구다.
의료보험 공단에 근무하는 그 친구는 평생을 이웃으로 살았다. 약속을 해서 이사를 간 게 아니데 같은 단지의 아파트에 살다가 이사를 가니 또 이웃이고 또 구획 정리 지구에 땅을 사서 주상복합 건물을 지으니 걸어서 오 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단독 주택을 짓고 이웃이 되었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평생을 붙어살며 그 집에 숟가락이 몇인지 알고 있을 정도다. 내가 지은 건물은 주상복합 건물이다. 이 층이 사무실이고 삼 층이 집이다. 새벽에 사무실에 내려와 글을 쓰거나 뭔가를 정리하고 있으면 새벽 여섯 시 전후에 이 친구가 매일 헛기침을 내 왔노라 내뱉으며 계단을 올라온다. 이 친구로 하여 나는 늦잠이란 걸 자 본 적이 없다. 오면 커피를 마시며 정치에 대한 얘기나 경제에 관한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며 거의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출근 준비를 하러 간다.
그 친구가 사무실 새벽 출근을 끊고 중국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 들은 말이 다리가 떨리기 전에, 가슴이 떨릴 적에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말 같지만 여행旅行과 관광觀光에 오묘한 차이가 있다는 말도 그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그 친구에게 다리가 떨리기 전에 중국 여행에 경비를 좀 보태는 스폰서로 따라 다닌다는 게 고작 내 노후 계획이다. 아니, 노후 계획은 따로 있다. 지금의 제주도 땅에 집을 전원주택으로 근사하게 지어서 그 곳에서 노후를 보낸다는 계획이다. 아내와 그렇게 노후 계획도를 그렸다. 물론 엉겁결에 제주도 땅을 사고 난 이후다. 늘그막에 들어가서 집을 근사하게 지어서 전원생활을 하자는 계획. 밀감나무를 많이 상하지 않게 집을 짓고 밀감나무 사이에 텃밭을 가꾸자는 소박한 계획. 그게 우리 부부의 앞날 설계도다. 근데 이 친구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중국대륙을 누빈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내 생각도 좀 달라졌다. 제주도로 들어가기 이전, 다리가 떨리기 전에 중국 대륙을 누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떨리는 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가슴이 떨리는 여행을 하는 시기는 참 좋을 때다.
공항 이 층 계단을 내려오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학생들이랑 같이 제주행 비행기를 타지만 설렘의 농도에는 엄청 큰 차이가 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저 아이들은 지금 추억 만들기 위해 공항으로 나왔다.
모두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겠지.
수학여행의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한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초등학교의 수학여행까지 나는 또렷이 기억 한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 수학여행을 준비하며 설렘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일박 이일의 경주여행이었다. 버스 세 대로 비포장 국도를 달려 경주로 갔었다. 첨성대와 왕릉, 불국사를 돌아보고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계단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그 흑백사진이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렸다. 그 때는 카메라가 귀한 시절이라 앨범을 만드는 사진관 사장이 카메라를 두 대나 메고 따라간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학생이 아무도 없다. 모두들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 웬만한 카메라보다 성능이 좋은 카메라가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흑백 카메라가 아니라 몇 십만 화소의 컬러로 찍어서 컴퓨터와 연결하면 바로 출력이 가능한 최첨단 모드다.
점심을 먹고 담배 피울 곳을 찾아 계단을 내려오니 공항 로비로 들어온 학생들은 대기 의자를 차지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단체로 탑승 예약을 먼저 한 모양이다. 나는 거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것도 유행인가 싶을 정도로 여학생들의 치마가 짧아져 거의 미니스커트 수준이다. 여태까지 학생들을 안 본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 유심히 보니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짧아졌다. 우리 때는 여고생 치마가 무릎 아래까지는 내려왔지 싶은데 지금은 허벅지를 다 드러내어 놓은 게 영 아니다. 그리고 달라진 점은 여학생 입술에 색조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교칙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몰라도 색조가 짙은 화장품은 아니고 윤기 나는 립스틱인데 색깔이 들어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 시절에 학교를 다닌 우리 학창 시절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풀어져있었다. 기억하건데, 우리는 수학여행 때 하의를 교련복을 입고 간 학생도 더러 있었다. 교련복 역시 거의가 당꼬바지였다. 당꼬바지 교련복에 윗도리는 무얼 걸쳐도 어울리고 고등학교에서 좀 노는 학생으로 보였다. 그렇게 입는 게 당시의 유행이었다. 그 당시 나는 지척에 고등학교를 두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신설 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때 고교 평준화가 처음 되었다. 인문계는 평준화가 되었고 실업계는 학교마다 시험을 쳤다. 인문계에 가기는 좀 아까운 성적이라 그 당시에 최고 인기가 있는 국립 전자공고를 택했는데 애석하게 떨어졌다. 성적이 조금만 낮았어도 평준화 인문계를 쳤을 텐데 후회해도 늦었다. 갈 학교가 없었다. 재수를 하려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만류로 재수를 접고 가까운 미달학교를 찾은 것이 강 건너 신설 고등학교였다.
신설된 지 일 년 밖에 되지 않아 입학을 하니 삼 학년은 없고 선배라곤 이 학년이 고작이었다. 그 학교는 지척에 있는 고등학교와 교복 색깔이 달랐다. 친구들이 다니는 지척의 고등학교는 동복은 같지만 하복은 윗도리가 흰색인데 반해 내가 다닌 신설 고등학교는 하복 윗도리가 아랫도리와 같은 재색이었다. 하교를 하고 강을 건너와 친구들과 어울리면 군계일학이 아니라 군학일계 꼴이 되었다. 지금은 지역에서 최고의 사학 명문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원 미달의 꼴통들만 모이는 학교였다. 지금은 낙동강을 횡단하는 왕복 육 차선의 대교가 놓였지만 당시에는 자전거를 타고 농로를 따라가 백사장을 지나서 나룻배로 등하교를 하는, 불편하지만 낭만이 왕창 실리는 등하교 길이었다. 당꼬바지를 입던 시절 하교를 하고 강을 나룻배로 건너와 지척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릴 때면 꼭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다니곤 했다. 하복과 달리 교련복은 두 학교가 같아서 중학생이나 어른들이 볼 때 학교를 식별할 수 없도록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다녔다.
지금은 공립인 지척의 고등학교는 거의 망해서 무슨 미용 특성화고로 전락하고 사립인 신설 고등학교는 지역의 명문으로 탈바꿈했다. 학교는 신설 고등학교를 다니고 놀기는 지척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렸으니 나는 고등학교 동기가 남들의 두 배가 된다. 미달학교라 부끄럽다고만 생각했지 그게 지금은 오히려 덕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내가 하고 있는 업에 자그마한 문제가 생겨 시청에 들어가도 신설학교 동기와 지척 고등학교 동기가 곳곳에 박혀있어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받는다. 업을 하면 그 업이 커든 작든 사람을 많이 아는 게 재산이라는 걸 당시에는 모르고 신설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허나 지금은 어디에 가더라도 누가 물으면 당당히 신설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떳떳하게 말을 한다.
신설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했다. 수학여행을 다녀오고부터는 책을 손에서 놓았다. 당시에 내가 다닌 중학교 삼 년 선배도 미달 학교에 동급생으로 들어와 같이 다녔는데 그 선배와 어울려 담배를 배우고 학교에 가지 않고 강가 백사장 버드나무 숲에서 땡땡이치는 걸 배웠다. 한두 번 땡땡이를 쳐보니 그 맛도 괜찮았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를 달던 아버지 도장을 훔쳐서 결석계를 보내고 땡땡이를 쳤는데 간이 커지자 결석계를 지출하지도 않고 무단결석을 하며 강가의 버드나무 숲에서 소설을 읽으며 둥지를 틀었다. 얼마나 꼴통학교인지 우리가 들어갈 때 이백사십 명이 들어갔는데 졸업한 인원은 고작 백구십 명 정도다. 없어진 오십 명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게 아니다. 자퇴를 하거나 출석일수가 모자라 잘리고 심지어 몇 명은 사고를 쳐서 대학 대신에 소년원으로 진학한 동기생도 있다. 그 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으면 모범생에 속했다. 나는 겨우 출석일수를 채워 졸업장을 받았지만 대학은 꿈도 구지 못할 성적이었다. 당시에 졸업을 하고 바로 사년 제 대학에 간 친구는 열손가락 안이다. 그 정도면 학교의 형편을 알만하다. 나도 바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 년을 학원을 다닌 끝에 지금은 수능으로 변한 당시의 예비고사를 다시 쳤다.
아무튼 계단을 내려와 재잘거리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다 남학생과 수학여행에 관해 얘기를 하고 공항 청사 밖으로 나와 담배를 연거푸 두 대나 피웠다. 그 시간대에 제주로 가는 비행기가 저가 항공까지 삼십 분 간격으로 세 대나 있었다. 같은 비행기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탑승 준비를 하며 검색대를 통과하다보니 학생들과 같은 비행기였다.
검색을 마치고 들어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경표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한 시 반 비행기로 제주에 간다고, 가능하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라고 하려 했는데 녀석은 통화도 길게 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고 제주공항에서 성산택시를 부르라고 했다. 제주 택시를 타고 성산까지 오면 비싸고 성산택시가 제주에 나가 있는 걸 부르면 반값에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성산택시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하자 114에 연락해서 물어보라고 하고 끊었다.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다.
녀석의 전화로 미루어 제주에 들어가면 녀석의 뒤치다꺼리로 일주일을 보내다 나오지 싶다. 지금이 파종기라고 했다. 녀석은 주인이 육지인인 땅을 어마어마하게 빌려서 몇 년에 걸쳐서 개간하여 블루베리, 콜라비 등 특수작물을 노지에서 월동재배 한다. 수확기는 내년 삼사월이다. 육지에서는 재배 불가능한 작물들을 유기농으로 재배해서 육지의 지주들에게 맛보기로 보내고 인터넷으로도 판매하고 나머지는 서울 공판장으로 보낸다. 농사일이 힘들어도 돈 만지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공대를 나온 녀석이 농사일에 이렇게 빠질 줄은 몰랐다. 녀석은 내가 제주에 간다고 연락하니 허드레 일꾼 하나 오는 것쯤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내가 편하지만은 않다.
당꼬바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녀석은 오늘도 당꼬바지를 입고 어느 밭에서 일을 할지 모른다. 작년에 내려갔을 때 보니 당꼬바지를 입고 일을 하고 있었다. 당꼬바지가 어디서 나왔는가. 모두 내가 준 옷이다. 작업복으로 입으라고 녀석이 우리 집에 들른 작년 봄에 허리가 작아서 못 입는 바지와 낡은 티를 한 박스 싸서 보냈다. 한번 씩 입고 버리라고 준 옷인데 허벅지가 풍덩해서 밭일하며 앉았다가 일어서기에 그만이라며 기장은 좀 길지만 줄이지 않고 그대로 빨아서 입곤 했다. 작업복으로도 잘 어울렸다. 당꼬바지는 무용복 이외에도 주름을 칼같이 세워서 입는 외출복인데 작업복으로 입으니 그것도 봐 줄만 했다. 하긴 녀석에게 안 어울리는 옷이 있을까?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겐 어떤 복장도 어울린다. 빈둥거리는 놈은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행기가 기류에 의해서 다시 한 번 요동을 쳤다.
이젠 뒷좌석에 앉은 학생들이 우우 괴성을 지르며 그 요동을 즐기고 있다. 돌아보지 않기 미음 먹었건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빼고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여학생의 흰색 팬티가 바로 보였다. 앗! 뜨거워라 싶어 고개를 되돌렸다. 아직도 자세를 고쳐 앉지 않고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스마트 폰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교복치마의 유행으로 인하여 곤혹스러운 여행이다. 저 치마도 곧 유행을 따라 좀 길어질 것이다. 유행이란 그렇게 갔다가 때가 되면 다시 오는 것이다. 더 짧아지거나 아예 벗고 다니는 유행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분명 다시 길어지는 유행이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겪었던 나팔바지와 당꼬바지, 그리고 쫄바지가 유행 따라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처럼. 제주도에 도착하면 녀석에게 허리가 작지만 당꼬바지를 하나 받아서 입고 다니며 그 옛날의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충동이 불쑥 일었다,
비행기가 다시 가볍게 요동을 쳤다.
학생들이 뒤에서 또 우우 괴성을 내지르지만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고 의자 깊숙이 등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 때 잠시 후에 제주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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