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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靑原 行思, 南嶽 懷讓 玄覺 永嘉, 智隍 禪師.
行思禪師의 姓劉氏이니 吉州安城人也라 聞曹溪-法席盛化하고
徑來參禮하여 遂問曰하되 當何所務여야
卽不落階級이니까 師曰하시되 汝曾作甚 來인가 曰하되
聖諦도 亦不爲이니다 師曰하시되 落何階級인가 曰하되
聖諦도 尙不爲거늘 何階級之有리까 師께서 深器之하시어
令思首衆하시다
行思 선사의 성은
위씨이니 길주 안성사람이다.
조계의 법석에 모임이 매우 번성함을 듣고
바로 와서 참예하여 뵙고 여쭙기를
"마땅히 어떻게 힘써야
곧 계급에 떨어지지 않나이까?"
하니
"네가 일찌기 무엇을 하여 왔느냐?"
"성인의 진리도 또한 하지 않았나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어떠한 계급(법위)에 떨어졌는가?" 하시니
이르기를
"성인의 진리도 오히려 하지 않거늘
어찌 계급이 있겠나이까?"
조사께서 깊은 그릇(법기)으로 여기시어
행사로
하여금 대중의 머리를 삼으시었다.
강설:
성제(聖諦)란
성인의 봄(불지견)인 헛되지 않고 실다움
즉 성스러운 진리
(예컨대
이 세상 삶은 苦요,
고의 근본은 번뇌요
번뇌가 멸하면 해탈이요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수도의 진리는
四성제인
고, 집, 멸, 도 8정도임)이니
곧 성인을 내는 진리이다.
行思 스님이 六조를 찾아 뵙고
"어떻게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나이까?"
하고 여쭈어 본 것은 질문이면서
상대의 법위를 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문답을 법거량 이라고 하는 것으로
옛 선객들은 이런 법담 가운데
선기를 가늠하였으나
근자에는 거의 사라진듯 한 불가의 세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때 한마디 잘못 일렀다가는 방망이를 면치 못하는 것이니
선객은 항시 깨어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칼날 위에 선 것이다.
계급은
교문인 법위
(1지∼10지위)를 뛰어 넘어(머물지 않고)야 하나,
본성불은 무위 진인의 불지위이니
함이 없고 구할 것이 없음을 들어 물어서
계급(차별경계)이 없는 평등경계인 불지위의
보리경계를
行思 스님이 창 끝으로 찔러 물은 것이다.
六조께서
즉시 "네가 일찌기 무엇을 하여 왔느냐?"
하신 것은
방패로 예리한 창끝을 슬쩍 막으면서
칼날을 세워 역공하신 것이다.
이때 行思 스님이
"성인(부처님)이 보는 바의 진리마저도
하지 않았나이다" 한 것은
부처니 진리니 하는 것 마저 여읜
(부처도 열반도 구하지 않는)
경계를 열어 보인 창끝으로 칼날을 막은
번뜩이는 선지의 발현이였다.
그러나 六조께서
여기서 놓아주지 않으시고 그럼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
즉 "그럼 네 법위가 어느 경계(지위)란 말이냐?"
하고 다시 칼날을 들이 대신 것이다.
이때 자칫하면 喪身失命하는 순간이다.
그러자 "성제도 오히려 하지 않거늘
어찌 계급이 있겠나이까?"
즉 "성인의 진리니 하는 것도 방편임을 깨달아
일체 진실불허의 진여경계를 증득한 바에
무슨 계급 따위를 운운하십니까?"하여
六조스님의 예봉을 막고 창과 방패를 세우니
여기에 이르러 쓰러 뜨려 보겠다고
다시 강공을 더하게 되면
오히려 조사께서
미한 범부에 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상대의 법위를 간파할 밝은 눈을 갖춰야
명안종사라 할만한 것이니
이제 쉬어야 한다,
이쯤되면 악수공행 하게 되는 것이다.
一日은 師謂曰하시되 汝當分化一方하여 無令斷絶하다
思旣得法함에 遂回吉州靑原山하여 弘法紹化하셨다
하루는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마땅히 한 지방을 나누어 맡아서
교화하여 하여금 (법이)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行思 가 이미 법을 얻었음에 드디어
길주 청원산에 돌아 와서 법을 넓게 펴 교화하셨다.
懷讓禪師는 金州杜氏의 子也다 初謁嵩山安國師한데 安이
發之曹溪參 로 讓至禮拜하니 師曰하시되 甚處來인가 曰嵩山이니다
師曰하시되 什 物이 恁 來인가 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師曰하시되 還可修證否인가 曰修證은 卽不無이오나 汚染卽不得이니다
師曰하시되 只此不汚染이 諸佛之所護念이니 汝旣如是하고 吾亦如是하니라
西天般若多羅讖하시되 汝足下에 出一馬駒하여 踏殺天下人하시니
應在汝心하고 不須速說이니라
懷讓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에 숭산 안국사를 뵈었는데
안국사가 조계에 가서 참예하여 물으라고 일러 주심으로
懷讓이 이르러
예배하니 대사께서 이르시기를
"어느 곳에서 왔는가?"
"숭산입니다" 이르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이르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곧 맞지 않나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도리어 닦아서 증득하느냐?"
이르기를
"닦아 증득함은 곧 없지 않사오나
더럽혀 물들 것은 곧 없나이다"
"다만 더럽혀 물들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깊이 새겨 지키(護念)시는 바이니,
너도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께서 예언(讖)하시기를
'너의 발 아래에 한 망아지(마조)가 나와서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리라' 하셨으니
마땅히 네 마음에 두고
모름지기 속히 말하지 말지니라"
강설:
懷讓 스님이 六조를 찾아 뵙자
六조대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슬쩍 건드리시되
"어느 곳에서 왔는가?" 1탄이다
"숭산(혜충국사)에서 왔습니다"
하니
아직 이 답으로써는 문안에 들지 못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2탄이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나이다"
(이름도 성도 없는 진공묘유한 진여를 입을 열어
이름 붙여 이르는 순간 어긋난다) 멋지게 피한다.
그렇다고 놓아주실 六조가 아니시다.
"도리어 닦아서 증득 하느냐?" 3탄이다.
"닦아 증득함은 곧 없지 않으나
(미했을 때는 깨우침이 곧 필요한 것이나)
더럽혀 물들 것은 없(眞空)나이다"
진여자성이 어찌 묻을 때와 묻을 것이 있나
(不垢不淨)하는 부드러우면서도
추호의 틈이 없는 言下의 답으로
총알을 피했을 뿐 아니라 총까지 빼어든 것이다.
이쯤되면 쉬어야 한다.
세번 이상 법을 묻고 떠 보는것은
범부의 어리석음이다.
선지식이라면 세번 이상 묻기 전에
상대의 법위를 간파하여야 한다.
이제 악수공행이다.
"다만 더럽혀 물들지 않는 이것을
제불이 두호(지켜 보호)하는 바이니,
너도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곧 제불과 너와 내가 둘 아니요
또한 증오함도 둘 아닌 것(不二)임을 인가하신 것이다.
※
제27조
반야다라존자의 예언에
"남악 懷讓 스님의 법손 가운데
한 망아지(馬조 도일선사)가 출세해서
천하 사람들을 밟아 죽일 것
(크게 죽어(중생심)
크게 삶(성인의 경계)을 뜻함)이라" 하시고
마음에 묻어 두고 속히 말하면
가짜 행사 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讓이 豁然契會하고 遂執侍左右를 一十五載에 日益玄奧하며
後往南嶽하여 大闡禪宗하셨다.
懷讓 이 막힘없이(豁然) 깨달음에 계합하고
드디어 좌우(가까이)에서 모시기를
15년 동안에 깊고 오묘한 경지가 날로 더해 갔으며
뒤에 남악에 가서 크게 선종을 드날리셨다.
玄覺禪師는 永嘉人이며 姓戴氏이다 少習經論하며
精天台止觀法門인데 因看維摩經하여 發明心地하다
偶師弟子玄策이 相訪하여 與其劇談함에 出言이 暗合諸祖하다
策云하되 仁者께서 得法師誰이요 曰하되
我聽方等經論에는 各有師承이나 後於維摩經에 悟佛心宗이나
未有證明者이니다 策云하되 威音王已前에는 卽得이라도
威音王已後에는 無師自悟는 盡是天然外道이오
云하되 願仁者께서 爲我證據하오 策云하되 我言輕이라
曹溪에 有六祖大師하셔서 四方雲集하여 幷是受法者이니
若去이면 則與偕行하리다
覺이 遂同策來參하여 繞師三 하고 振錫而立하였다.
玄覺 선사는
영가사람이며 성은 대씨이다.
젊어서 경과 론을 익혔으며 천태의 지관법문에
특히 정통하였는데, 유마경을 봄으로 因하여
마음 바탕을 깨달아 밝혔다.
우연히 조사의 제자인 현책이 찾아와
서로 만나 그와 더불어 많은 대담(법거량)을 했는데,
하는 말이
모든 조사와 은밀히 합하였다.
현책이 이르기를 "仁者께서 법을 얻은 스승은 누구십니까?"
이르기를
"내가 방등경론을 들을적엔 각각 스승이 이어있었으나,
그 뒤 유마경에서 부처인 마음의 종지를 깨달았으나
증명해 줄 분이 없었소이다"
현책이 이르기를
"위음왕불 이전에는 곧 그럴수 있었을지라도
위음왕불 이후에 스승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모두가 바로 천연외도인 것이요"
이르기를
"원컨대 인자께서 나를 위해 증명해 주시오"
현책이 이르기를
"내 말은 가벼운지라 조계에 六조대사가 계시어서
사방에서 모여 와서 법을 받고들 있으니
만일 가시겠다면 곧 함께 가겠소이다"
玄覺 이 현책과 같이
조계 六조를 뵙고 조사 둘레를 세 번 돌고서
석장을 떨치고 서 있었다.
강설:
玄覺 영가스님이 젊어서부터
경(부처님의 말씀),
론(보살,조사들의 서술인 유식론 구사론등)을 익혔고,
지자 천태스님의 지관법을 통했어도 지식일 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다가 유마경을 보다가
기연이 닿아 심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玄覺 영가스님은 현책선사와 현랑스님과 더불어
사형 사제간이었다.
현책선사는
일찌기 六조 문하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선지식이 되었는데 우연히 玄覺 스님을 만나
법담을 해보니 선지가 밝았음을 보고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는가를 물으니
"방등경론(화엄, 반야, 법화, 열반경, 四부 외의
대승경전)을 들을 때는 일러준 스승이 각각 있었으나,
유마경을 보다가 부처인 마음의 종지를 깨달았으나
이것을 밝게 깨달았나 하는 것을 증명
(인가)해 줄 분이 아직 없었다" 하였다.
이때 현책선사께서 "위음왕불(최초 출현하신 부처님)
이전에는 곧 그럴 수 있었을 지라도
(불가능한 일) 위음왕불 이후에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은
모두 천연외도(삿된 도인)"라 하였다.
그렇다 요즈음 너 나 없이
법맥을 이은 선지식의 인가를 받은 바 없이
스스로 깨쳤다고 떠들고 스스로 명안종사 흉내를 내며,
무엇이 큰지 큰 스님 대접을 받고자 하여
어디서 얻어 금란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가관인 것은 머리에 까지 괴상한 것을 만들어
뒤집어 쓰고 칼날같은 법의 무서움도 모르고
겁 없이 사자좌에 올라 주장자를 굴리며,
주어 듣고 읽은 남의 소리를 그럴싸하게 뱉어내는
말법시대의 진풍경을 종종 보면서
중생을 바르게 제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오도(誤導)를 하는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다시 말을 이어 살펴 보자.
玄覺 스님이
현책선사에게 자기를 인가해 주기를 간청했으나,
현책선사는 내 말은 가벼우니
六조대사를 찾아가 "점검을 받고 인가를 받아
법을 이으라"고 안내한다.
(옛 조사들은 이토록 겸허했다.
조주선사께서도
스승 남전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가까이 모시다가
스승이 천화하신 뒤에 입을 열어 법을 펴기 시작하셨다)
이런 행적을 귀감으로 삼아야 하거늘 조금 알았다 하면
스승까지 뛰어 넘어 아상, 아만을 키우는 세태가 되고 있다.
다시 살펴보자.
玄覺 스님이 조계 六조대사를 찾아 뵙고
위의를 갖춰 예를 올리기 전에
공격부터 먼저 시작한다.
六조대사를 오른쪽으로 세번 돌고 나서
석장을 떨치고 버텨서 서 있었다.
다음 장에 이어서 이 일촉즉발의 순간을
살펴 보도록 하자.
師曰하시되 夫沙門者는 具三千威儀-八萬細行하거늘 大德은
自何方而來기에 生大我慢인가 覺曰하되 生死事大하고
無常迅速이니다 師曰하시되 何不體取無生하며 了無速乎인가
曰하되 體卽無生이요 了本無速이니다 師曰하시되 如是如是하시니
玄覺이 方具威儀하여 禮拜하고 須更告辭하니 師曰하시되
返太速乎인가 曰하되 本自非動인데 豈有速耶리까 師曰하시되
誰知非動인가 曰하되 仁者께서 自生分別하니다 師曰하시되
汝甚得無生之意로다 曰하되 無生인데 豈有意耶니까 師曰하시되
無意면 誰當分別인가 曰하되 分別亦非意이니다
師曰하시되 善哉로다 少留一宿하시다 時謂一宿覺이라하다
後에 著證道歌 及永嘉集하여 盛行于世하였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무릇 사문은 3천의 위의와
8만의 세행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기에 큰 아만을 내는가?"
玄覺이 이르기를
"생사의 일이 크고, 무常이 신속하나이다"
사께서 이르시기를
"어찌 남이 없음은 체달해 얻지 못했으며
빠름 없음은 요달하지 못했는가?"
"체달함에 곧 남이 없고
요달함에 본래 속함이 없나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그렇고, 그렇다"하시니
玄覺이 바야흐로 위의를 갖추어 예배하고
잠시 있다가 하직인사를 아뢰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돌아감이 너무 빠르구나"
이르기를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아닌 데
어찌 빠름이 있으리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누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시는가 하나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심히 남이 없는 뜻을 증득했도다"
이르기를
"남도 없는 데 어찌 뜻이 있겠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뜻이 없으면 누가 마땅히 분별하는가?"
이르기를
"분별 또한 뜻이 아니이다"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갸륵하도다,
잠시 하룻밤이라도 쉬어 가도록 하라" 하셨다.
그때(의 일로 그를)
"일숙각(깨치고 하룻밤 잠)이라" 하였다.
뒤에 증도가와 영가집을 지어서
세상에 성행케 하였다.
강설:
사문은 출가승이며
3천 위의는 비구 250계 4(행, 주, 좌, 와)
3(세)의 자세를 갖춘 행이며
8만사천 대행은 대승이 닦을 미세한
일체를 갖춘 행을 이르는 말이다.
"승려가 아만으로 조사를 친견하는 태도가
어째서 그러한가?"
하고
玄覺스님의 공격을 역공하여 반문하신 것이다.
"생사의 일이 크고(일대사) 덧 없어 급하거늘
무슨 위의니 아만이니 한가히 분별하시오?"
하고 제빨리 공격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자 조사께서
"어찌 생사 급함은 알고 생사 없음은
증득하지 못했으며 오고감이 없어
빠름이란 본래 없음은 밝게 깨닫지 못하고
생사가 급하니 뭐니 떠드는가?"
하고 한방 크게 내려치시자
"깨달아 통해 이르러 봄에
남이 없고 밝게 깨달은
즉 빠름이 없나이다"하여
방어와 동시에 자기 견처를 밝히자,
조사께서
"그렇고 그렇다"
두 번 인정하여 확실하게 인가하셨다.
이로써 서로를 간파하였음에
玄覺선사가 제자의 깍듯한 예로써 절을 하고
곧 떠나려 하자
"돌아 가는 것이 너무 빠르구나"
하고 상대의 동태를 떠 보시며 권하자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아닌데(不動)
어찌 빠르고 더딘 것이 있나이까?"
하고 다시 반격하자
六조께서 놓아 주시지 않고 다시
"움직임(作用)이 없다 하면
무엇이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 하여
찔러 보신다.
"스승께서 오히려 분별을
(아는 놈이라는 이름을 둠을) 내시고 있나이다"
하고 반격으로 뒤집어 쒸운다.
그러자
"네가 깊이 무생법인을 증득했도다"
하고 다시 인가하였으나,
玄覺이 물러 서지 않고
이쯤 서로를 간파한 차재에
한판 놀아 보자 하고
"남이 없거늘 무슨 뜻이니 하는 것
(相)이 있습니까?"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六조께서 이놈 봐라 하시고
"뜻이 없다 했는데 그렇다면
분별해 아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다시 공격해 보신다
"분별도 뜻이 아니라"고
분별이니 뜻이니 하는 것이 거짓이름이요
일체가 비어 공한 그 가운데 이름도 상도 없이
갖추어 작용함을 드러 보이니
다시 옳게 깨우쳤음을 인정하여
기특히 생각하시고
"하룻밤이라도 묵어 가라"
하고 자비를 여셨다.
이렇게 격전이 끝을 맺었으니
모름지기 학인들은 깨어 있어야 하며,
법이 이토록 날카롭고 위험한 취모검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런 기연으로 영가 玄覺선사는
깨쳐 하룻밤 묵었다 하여
"일숙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그후 증도가와 영가집을 펴 오늘날까지
널리 유포되게 하신 선지식이다.
禪者智隍은 初參五祖하고 自謂하되 已得正受라하고 庵居長坐를
積二十年하였다 師弟子이 玄策遊方하다가 至河朔하여 聞隍之名하고
造庵問云하되 汝在此하여 作什 인가 隍云하되 入定이라하자
策云하되 汝云入定하니 爲有心入耶인가 無心入耶인가
若無心入者이면 一切無情한 草木瓦石도 應合得定이요
若有心入者이면 一切有情인 含識之流도 亦應得定하니
隍曰하되 我正入定時에는 不見有有無之心이노라
策云하되 不見有有無之心이면 卽是常定이거늘 何有出入인가
若有出入이면 卽非大定이니라 隍이 無對良久하다가
問曰하되 師嗣誰耶이오 策云하되 我師는 曹溪六祖이시오
隍云하되 六祖께서 以何爲禪定이요 策云하되 我師所說은
妙湛圓寂하여 體用如如하여 五陰本空하고 六塵非有라
不出不入이며 不定不亂하여 禪性無住라 離住禪寂하며 禪性無生이라
離生禪想하여 心如虛空이나 亦無虛空之量하자 隍聞是說하고 徑來謁師했다
선객 智隍은
처음에 五조를 참례하고서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미 바른 가르침을 얻었도다"
하고는 늘 암자에 있으면서 (눕지 않고)
오래 앉기를 二十년을 하였다.
六조대사의 제자 현책이 사방을 다니다가
하삭이란 곳에 이르러서 智隍의 이름을 듣고
암자에 들려서,
일러 묻기를
"그대는 여기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는가?"
智隍이 이르기를
"정에 드노라" 하자
현책이 이르기를
"그대가 定에 든다하니 마음이 있어 드는가?
마음이 없이 드는가?
만일 마음이 없이 든다면
모든 무정물인 초목이나 기와나 돌도
모두 다 응당 합당이 定을 얻을 것이요,
만일 마음이 있어 든다면
유정물인 정식을 갖고 있는 무리들도
또한 응당 정을 얻을 것이로다?"하니
智隍이 이르기를
"내가 바른 정에 들 때에는 있다 없다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노라"
현책이 이르기를
"있다 없다는 마음을 보지 않는다면
곧 이것이 항상 정이거늘 어찌 나고 드는 것이 있는가?
만일 들고 남이 있다면 곧 큰 정이 아니니라"
智隍이 대답없이 한참 있다가 일러 묻기를
"스님은 누구를 스승으로 (법을)이었소?"
현책이 이르기를
"나의 스승은 조계의 六조대사이시오"
智隍이 이르기를
"六조는 무엇으로써 선정을 삼으오?"
현책이 이르기를
"우리 스승이 설하시는 바는
묘하게 맑아 둥글고 고요하며
그 체와 작용이 如如하여 다섯 가지 쌓임
(5온)이 본래 비었고 육진경계가 있지 않음이라
나감도 아니고 들어옴도 아니며,
머물러 있기만(定)한 것도 아니요
어지럽지도 않아, 선의 성품이 머무름이 없는지라
선의 고요한 것에 머무름을 여의었으며,
선의 성품이 남이 없는지라
선이라는 생각을 냄도 여의어서,
마음이 허공과 같으나 허공과 같다는
헤아림도 없으시오"
하자
智隍이 말을 듣고 곧 와서 조사를 뵈웠다.
강설:
智隍스님이
五조 홍인대사를 참례한 뒤 스스로
"이미 정법을 증득했다"하고
늘 암자에서 장좌불와로 20년을 定에 듦을 일삼았으니,
요즈음도 큰 스님이라는 분을 한 두번 참문하고는
인가를 받았느니 법을 이었느니 하고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칭 도인 노릇들을 하는 이가 많음을
보게된다.
스승없이 깨쳤다 하는 짓은 천연외도며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남까지 삿된 길로 끌고 들어
지옥 축생의 길로 빠져 들게 됨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수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현책선사가 智隍스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동체대비의 자비심의 발로인 것이다.
智隍스님을 만난
현책선사가 그를 몰아쳐 스스로 삿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첫 화살을 겨냥하여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묻자 "定에 드노라"하고 당당하게 응수한다.
이제 과녁을 향해
"그럼 定에 든다하니 마음이 있어 定에 드는가?
마음이 없이 드는가?
만일 마음이 없이 定에 든다면
모든 무정물이 모두 다 定을 증득할 것이니
定이란 아무 정식이 없이 되는 것일 뿐이요,
만일 마음이 있어 定에 든다면 異類유정물들도
마땅이 定을 증득할 것이니
有無가 있어 상견에 끄달리는 가운데
定을 증득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도리이니
어떤 것이 定에 듦인가?"
하고 화살을 쏘았다.
智隍이 그 화살을 막고자 손바닥을 들어
"내가 정에 바르게 들 때에는
(定에 들고 들지 않음을 가려 놓고)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노라"
하고 방패로 쓰고자 하자
현책스님이 틈을 주지 않고 즉시
"있다 없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항상 이것이 정인데 나고 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들고 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큰
(본성의 큼<마하>인) 定인
참으로 定이라 할것이 아닌 거짓된 定인 것이다"
하고 힘껏 활을 한방 더 쏘자,
智隍스님이 더 이상 대항하여
살 수 있는 활로를 찾지 못하고
두손을 들어 항복하여
"스님께선 누구로부터 법을 인가 받았습니까?
하고,
현책의 법사이신 六조대사께서는
"무엇으로 선정을 삼으십니까?"
하고 공손히 여쭙게 된다.
"묘하게 맑아 (갓없이)둥글고 고요하며
(묘유) 체와 용이 공하고 공하다는 것도
공하여(如如) 5온(색, 수, 상, 행, 식)이
본래 공하고 六진경계(일체相)가
본래 공하여 나퉈 있으되
필경 공하여 있어도 있음이 아니며
(一相삼매) 나고 듦이 달리 있음이 없음에 밝아,
머물러 있음(定에 국집)도 아니요 산란하지도 않아서
선정의 성품이 가만히 머묾이 없는 것
(항상 작용함: 묘용)이므로 선이라는 고요함에
국집하는 것도 여의었으며
선이라는 것이 생멸이 없는 것이라
선이라는 생각도 여의어서 본성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허공같이 확트여 비었으나 허공 같다는 분별도
없음(일행삼매)이라" 하자
智隍스님이 역시 선근이 상근기라
현책의 법위를 간파하고 자기 허물을 알아서
대종사를 지체없이 참예하게 되었으니
요즈음은 법을 구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나
아상만 키울 뿐 법문을 듣고 자기 삿된 소견을
뉘우치고 스스로 선지식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희소한 실정이 된 교계를 돌아 보게 된다.
용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뱀 대가리가 되겠다고
저마다 배움을 구하기 보다
자기 소견을 갖고 남을 가르치려고들 하니
자기도 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까지
동업중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그 죄업이 크도다.
師問云하시되 仁者何來인가 隍이 具述前緣하니
師云하시되 誠如所言이니라
汝但心如虛空하되 不着空見하면
應用無 하여 動靜無心케되며
凡聖情忘하여 能所俱泯하고
性相如如하여 無不定時也니라.
조사께서 물어 이르시기를
"그대는 어찌 왔는가?"
智隍이 지난 인연을 갖추어 말씀드리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참으로 (현책이)말한 바와 같으니라,
그대는 다만 마음을 허공처럼 하되 비었다는
소견에 집착하지 않으면
應하여 씀에 걸림이 없어서 움직이고 고요한데
마음(분별심)이 없게 되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精(알음알이)이 없어 주관(能)과 객관(所)이 함께
다(멸진)하고 자성과 나타난 상(現像)이 如如하여
定(일상, 일행삼매)이 아닐 때가 없느니라”
강설:
현책이 설한 법
(진의)은 六조대사의 법을 이었으니
異설이 있을수 없으니 그 설한 바가 바른 것임을
확인시켜 주신 뒤 다시 정리하시어
六조대사께서 설하신 것이다.
"다만 마음을 허공같이 空
(無相, 無念)하게 하되 허공같이 비었다는
분별하는 생각(허공같이 空한 것이 있다는 것이
도리어 相見)에 집착하지 않으면 인연 따라 경계에
응해 쓰되 걸림이 없어서(끄달리는 분별심이 없는
지혜로써 일체상이 허망한 것임을 밝게 알아)
動靜간에 움직임과 고요하다,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분별심이 없으며, 주관(能)과 객관(所)이 함께
다하여(분별망상을 여읨: 일상삼매) 자성이 같고,
같음(如如)이 곧 항상 定인 것(일행삼매)이다"
하셨다.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하는
오매일여는 오매일여함을 아는 분별심이 있으면
참 오매일여가 아닌 것이요,
定을 얻어야 한다는 그 또한 삿된 소견이요
크게 그르치는 망견임을 분명하게 들어서
일깨워 주신 것이다.
隍於是에 大悟하여 二十年所得心에 都無影響이었다
其夜에 河北士庶이 聞空中有聲云하되
隍禪師가 今日에야 得道하다
隍後禮辭하고 復歸河北하여 開化四衆하셨다
智隍이 이에 크게 깨달아서
20년 동안 얻은 바가 마음에 도무지 영향
(미치는 그림자나 울림)이 없었다.
그 밤에 하북땅의 선비와 일반이 들으니
공중에 소리가 들리기를
智隍선사가 오늘에야 도를 얻었다" 하였다.
智隍이 예배하고 하직한 뒤에 다시 하북에 돌아가서
사부대중을 깨우쳐 교화하셨다.
강설:
상견의 분별심이나
六조대사의 말씀 아래
몰록 일체 분별심의 반연(攀緣)함을 여의게 되어
상구보리(자리)하였으므로 본래 머물던 하북으로
돌아가 하화중생(이타)하여 범부를 깨우침에 들게
교화하였던 것이다.
一僧이 問師云하되 黃梅意志를 甚 人得이니까
師云하시되 會佛法人得이니라
僧云하되 和尙께서 還得否이니까
師云하시되 我不得이노라
僧云하되 和尙께서 爲什 不得이니까
師云하시되 我不會佛法이라시다.
한 승려가 조사께 여쭙기를
"황매의 의지(法)를 어떤 사람이 얻었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니라"
승이 이르기를
"화상께서 곧 얻지 않았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얻지 못했노라"
승이 이르기를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얻지 못했나이까?"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하노라" 하셨다.
강설:
한 승려가 조사께 묻되
"황매 五조대사의 의지(뜻: 법)를 누가 얻었는가
(법을 전해 받았는가)?"하니
"불법을 아는 이가 얻었다"
하신 것은
법은 주어도 줌이 없고 얻어도 얻음이 없음으로
깨달아 아는 자가 이심전심으로 얻는 것이므로
얻었다는 생각이 곧 相見이라 둘로 벌어지므로
六조께서 "내가 얻었다"하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화상께서 얻지 않았나이까?"
함에도 같은 도리로
"얻지 못했다"
즉 얻어도 얻어 가질 것이 없다 하신 뜻이며
"어찌 얻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에
"나는 불법을 알지 못하니라"
하신 것 또한 안다는 것은 아집이요
상견이기 때문에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
이것이 참으로 아는 妙有인 것이다.
師께서 一日에는 欲濯所援之衣하시는데
而無美泉因하여 至寺後五里許하여
見山林鬱茂하시니 瑞氣盤旋함에 師께서
振錫卓地시니 泉이 應手而出하여 積以爲池거늘 乃
膝하고 浣衣石上시는데 忽有一僧이 來前하여
禮拜云하되 方辯은 是西蜀人이온데
昨於南天竺國에서 見達磨大師인데
囑方辯하시되 速往唐土하라 吾傳大迦葉의
正法眼藏 及僧伽梨가 見傳六代하니
於韶州曹溪에 汝去瞻禮하시어 方辯遠來오니
願見我師-傳來衣鉢하소서
조사께서 하루는
받으신 법의를 빨고자 하시는데
좋은 샘이 없음으로 인해
사찰뒤 5리 쯤 가셔서
울창한 숲을 보시니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음에
조사께서 석장을 떨쳐 땅에 세우시니
샘물이 應하여 솟구쳐 나와서 못을 이루거늘
이에 무릎을 꿇고 바위 위에서 옷을 빠시는데
홀연히 한 승려가 앞으로 다가 와서 예배하고
이르기를
"저 방변(이름)은 서촉(인도)사람이온데,
어제 남천축국에서 달마대사를 뵈었는데
방변(저)에게 분부하시기를
'속히 당나라로 가라
내가 전해 준 대가섭의 정법안장과
승가리(가사)가 전해진 六대(조사)가 있으니
소주 조계산에 네가 가서 예배하라' 하시어
방변이 멀리서 왔사오니 智隍
원컨대 전해온 의발을 저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강설:
白坡선사는 要解하기를
"의발을 빨았다고 하는 것은
세인들이 의발에 대한 집착을 갖는
전법(相見)에 대한 때를 벗겨 주고
사람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종지를 은밀히 보이시려 함이다.
절 뒤 5리 근방에 이르렀다 하는 것은
五대에 걸쳐 전해 왔음을 뜻하며,
빨았다는 것은 일체 중생의 때를 뜻하고,
山林은 일체중생(많은 번뇌)의
본분(본성)을 보임이고,
상스러운 기운은 눈앞 평상경계를 뜻하며,
석장을 땅에 세워 샘물이 용솟음쳤다 하는 것은
물건마다 부처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는
천진본연의 면목을 설파하신 것이라"고 했다.
師乃出示次問하시다
上人은 攻何事業인가
方辯曰하되 善塑하나이다
師正色曰하시되 汝試塑看하라
方辯罔措하다가 數日에 塑就眞相하니
可高七寸이요 曲盡其妙라 呈似師하니
師께서 笑曰하시되 汝只解塑性하고
不解佛性하시고 師께서 舒手하여
摩方辯頂曰하시되 永爲人天福田하라시다
조사께서 이에 (가사를)내어 보이신
다음 물으시었다
"그대는 어떤 일을 익혀왔는가?"
"조각을 잘 하옵니다"
조사께서 정색하시고 이르시기를
"그대가 시험하여 새겨 보여라"
방변이 망설이다가
며칠 만에 진상을 조각해 나아 가니,
높이는 일곱치요 묘하고 세밀함을 다한 것을
조사께 바치니,
조사께서는 웃으시며 이르시기를
"너는 다만 조각된 성품 만 알고
부처의 성품은 알지 못하도다"
하시고
조사께서 손을 펴서
방변의 이마를 어루만지시며
이르시기를
"길이 사람과 하늘 나라에 복밭이 되라"
하시었다.
강설:
조각한 六조대사의 상호를 보신 조사께서
방변에게
"너는 조각된 성품은 알되
부처의 성품은 알지 못하도다
"하신 것은 불조의 성품인 불성은
상이 있음이 없는 眞空妙有한 진여이지
상에 있지 않으므로 이 조각의 묘하고
세밀하게 잘 만들어진 것이
밖으로 상호는 잘 살펴 잘 보였으나,
조사 곧 부처의 본래면목은 모름을 타이르시고
이로 인하여 인천의 복전이 되어
(공덕을 닦아) 응공을 받을 것
(법을 이어 선지식이 될 것)임을 수기해 주신 것이다.
이후 이 조각상은 고천사라는 절에 모셔져
기도영험이 있다고 전해졌다.
이로써 방변은 훗날 六조의 법을 잇게 되었다.
有僧이 擧臥輪禪師偈云하되 臥輪는
有伎倆하여 能斷百思想하여
對境心不起하여 菩提日月長이라
師聞之曰하시되 此偈는
未明心地이니 若依而行之하면
是加繫縛이라시고 因示一偈曰하시되
惠能沒技倆하며 不斷百思想하며
對境心數起하며 菩提作 長이리오.
한 승려가 와륜선사의 게송을 들어서
이르기를
와륜이 재능이 있어 능히 백가지 생각을 끊어서
경계를 대함에 마음이 일어 나지 않아
나날이 보리가 자라네.
조사께서 듣고 이르시기를
"이 게송은 마음 바탕을 밝히지 못했으니
만일 (이대로)쫓아 행한다면 얽히기
(잘못됨)만 더하리라"
하시고 인하여
한 게송을 보여 이르시기를
혜능은 재능이 없으며
백가지 생각을 끊지 않으며
경계를 대함에 마음이 일어나며
보리가 어찌 자라는 것이리오.
강설:
와륜선사의 게송을 살펴 보면
재능이라는 것이 와륜선사에게 있게 되어서
끊을 갖가지 만상이 있어 끊었으며,
따라서 경계를 대함에
마음이 일어 나지 않게 되어
나날이 보리(불지견)가 자란다 했으니
말은 그럴듯하나 자성의 본분상을
직시한 경계가 아닌 것이다.
본래 끊을 번뇌도 망념도 없거니와
보리는 본래부터 원만 구족한 것이라
다시 자랄 것이 없거늘,
나날이 자란다 하는 것은
상견을 벗어 나지 못한 소견인 것이다.
본성(心地)을 깨달은 오도의 게송이 못되기에
六조께서 신수대사의 게송에 대치해 읊은 것처럼
재능은 곧 반야라
혜능대사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있어도 있음이 없는 묘유의 구족된 반야이며,
끊을 망념이 있음이 없으며, 항상 경계를 보되
경계에 끄달리지 않을 뿐 분명하게 보아
(대원경지) 응하며, 보리란 본래 구족한
일체종지인 불지견이라,
자라고 말고 할 것이 없음을 설파 하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