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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돼지'와 고위관리를 한 사당에 모시다부산 일대에서 순절한 임진왜란 선열들을 제향하는 충렬사
16.07.26 14:53l최종 업데이트 16.07.27 09:08l
▲ 부산 충렬사 외삼문(사진의 왼쪽) 앞에 세워져 있는 '송상현 공 명언비'. 1592년 4월 15일 "길을 비켜 달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대해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일본군과 송상현 부사 사이에는 말이 아니라 글이 오갔기 때문에 이 비석에도 '戰死易 假道難'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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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의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 건물은 본전(本殿)이라 하는데, 본전과 의열각에는 선열 스물세 분, 의병 예순두 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명 용사들 등 모두 93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본전은 충렬사 경내의 가장 높은 지점, 의열각은 그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충렬사를 방문했을 때 사당인 본전부터 참배할 수는 없다. 답사자는, 아직은 본격적으로 충렬사 경내가 아닌, 외삼문 밖 넓은 광장의 '송상현(宋象賢)공(公) 명언비(名言碑)'를 가장 먼저 보게 된다. 1982년에 건립된 이 비석에는 '戰死易 假道難'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사이 가도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 1978년 이른바 '정화 사업'을 하면서 1605년(선조 38) 처음 지었을 때의 본모습을 잃어버린 소줄당(안락서원의 강당),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나타난다. 기념관과 마주보며 서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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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글 아닌 한자를 새겨 두었을까? 하지만 이 비석 앞에서는 한자 사용에 대해 못마땅한 눈길을 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戰死易 假道難'은 1592년 4월 15일 '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나무판자를 성문 앞에 보내온 일본군에게 동래부사 송상현이 역시 한자로 써서 보낸 답서이기 때문이다. '전즉전의 부전즉가도(싸우려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다오)'라는 일본군의 투항 요구를 송상현은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동래성 전투에 대해서는 '왜장들까지 애도 표시한 한 선비의 죽음' 기사 참조)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소줄당(昭崒堂), 왼쪽에 기념관이 있다. 소줄당은 이곳 충렬사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을 받는 데 근거가 된 유적이다. 소줄당에는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의 글이 기둥에 주련(柱聯)으로 붙어 있다.
문신과 무신의 차별 |
고려 '무신 정권'이 문관과 무관을 극심하게 차별한 데서 비롯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부산진첨사 정발과 다대포첨사 윤흥신을 충렬사에 모시는 데에도 문무 차별 의식은 그대로 재현된다. 1711년,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서원에는 문신 위주의 배향이 교육상 바람직하므로 별사(別祠, 별도의 사당)에 정발을 모시고 별사에 있는 교수 노개방을 서원(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상소를 올린다. 1712년, 정발을 별사에 모시고 교수 노개방을 부사 송상현 옆에 모셔진다. 1735년, 경상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서원에 무신인 유응부(兪應孚, 사육신의 한 사람)를 모신 예가 있다. 순절한 자에게까지 문무 차별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별사에 모신 무신들도 래산서원(萊山書院, 안락서원의 별칭)으로 옮기는 것이 온당하다."라고 상소한다. 이듬해인 1736년, 별사가 없어지고 정발이 안락서원 사당에 모셔진다. 1766년, 조엄이 "다대첨사 윤흥신의 공적이 <징비록>을 비롯한 곳곳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충렬사에 향사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 하고 임금에게 호소한다. 이에 윤흥신의 위패도 사당에 배향(配享, 더불어 모셔짐) 된다. |
使君忠節冠千齡
부사(송상현)의 충절은 천년에 뛰어났는데
古廟秋風木葉零
옛사당에 가을바람 불어 낙엽이 지는구나
精返雲天添別宿
넋은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고
氣成河嶽護生靈
기개는 강과 산이 되어 백성들을 지키누나
深羞徹地何年雪
깊은 부끄러움 땅에 사무치니 언제나 씻으려나
怒髮衝冠一夜星
성난 머리카락 관을 찔러 밤새 잠 못 이루네
試上萊山山上望
짐짓 래산에 올라 정상에서 바라보니
蠻煙萬縷至今腥
오랑캐의 연기가 아직도 일만 가닥 자욱하네
부산광역시가 발간한 <충렬사>에 따르면,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윤훤(尹暄)은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忠烈公) 송상현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송공사는 1624년(인조 2)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忠烈祠(충렬사)'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 장군을 함께 모시게 된다.
▲ 기념관 안에서 볼 수 있는 충렬사의 본래 현판(인조 2년인 1624년에 만들어졌다.). 아래에 부착된 작은 안내판에는 '구 충렬사 현판'이라고 쓰여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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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652년(효종 3) 충렬사는 지금 자리로 옮겨진다. 이때 선열들의 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강당(소줄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했다. 사우(祠宇, 사당)와 서원의 기능을 두루 갖추었던 것이다. 소줄당은 임진왜란 선열들의 충절은 해와 달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으로, 한유의 '이제송(夷齊頌)'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昭乎日月 不足爲明) 줄호태산 부족위고(崒乎泰山 不足爲高)'에서 따온 당호(堂號, 집이름)이다.
임란 당시 부산 전투 상황을 엿보게 해주는 기록화들
그 후 1709년(숙종 35), 충렬공 송상현과 충장공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과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백(宋伯), 부민 김상(金祥)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別祠, 별도의 사당)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다시 1736년(영조 12),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합향(合享, 함께 제사 지냄)했다. 1772년(영조 48)에는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공도 모셨고, 임진왜란 때 충렬공과 충장공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현재의 의열각)을 세웠다.
▲ 안락서원과 소줄당 현판이 걸려 있는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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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맞아서도 훼철되지 않았다. 하지만 1978년, 이른바 '정화 사업' 때 현재와 같은 9만 5119m²의 면적과 건물들로 확장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렸다. 다만 충렬사, 안락서원, 소줄당의 현판만이 남아서 지난 역사를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을 뿐이다. 소줄당의 기능은 충렬사 정문 바깥에 2010년 건축된 '충렬사 안락서원 교육회관'이 대신하고 있다.
소줄당은 기념관과 마주보고 서 있다. 기념관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상황을 엿보게 해주는 기록화들과, 선열들이 남긴 서적과 유품들 102점이 보관되어 있다. 기록화로는 1760년(영조 36) 동래부사 홍명한이 변박을 시켜 부산진성 개전 상황을 그린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보물 391호)>와,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이 쓴 화기(畵記)가 전해지는 <동래부순절도(東來府殉節圖, 보물 392호)의 영인본부터 먼저 보인다. 전국 곳곳의 임진왜란 관련 현창시설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이 두 그림의 원본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기념관에는 1978년 정화 사업 때부터 걸린 거대한 기록화들이 다수 걸려 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말하면, 정발 부산진첨사 관련 <부산 분전 순국도>('왜적들이 그의 첩까지 칭송한 장군' 참조), 송상현 동래부사 관련 <내성 수사 결의도> 및 <동래 보국 충정도>, 동래성 민중 참전 관련 <동래 민중 분전도>, 윤흥신 다대포첨사 관련 <다대진성 결전도>('임진왜란, 쏟아지는 칼날... 형 안고 죽은 이복동생' 참조), 수영성 의병 관련 <수영 유격 전투도>('지휘관은 도망가고, 25명의 백성들이 왜적 상대' 참조) 등이 바로 그들이다.
▲ 충렬사 기념관에는 부산진첨사(정발), 동래부사(송상현), 다대포첨사(윤흥신)가 입었던 갑옷과 투구의 모형도 볼 수 있다. 정발은 검은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별명이 '흑의 장군'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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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기록화들 외에도 여러 가지 유품들과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동래부사, 부산진첨사, 다대포첨사가 입었던 갑옷과 투구들이다.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직접 입고 썼던 바로 그 갑옷과 투구는 아니지만 18세기에 제작된 것이어서 세 분의 갑주와 대동소이한 모양일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부산진첨사의 갑주는 빛깔이 검다. 진열된 갑주를 보노라면 정발 부산진첨사의 별명이 '흑의 장군'이었다는 사실이 저절로 연상된다.
기념관 안에서는 충렬사, 안락서원, 소줄당의 현판들도 볼 수 있다. 현대식 건물에 붙어 있는 것들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저절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주는 고색창연한 현판들이다. 또 1741년(영조 17) 임금이 송상현 공을 좌찬성으로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敎旨), 송상현 공의 부인 이씨를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한 교지들과, 1717년(숙종 43), 1750년(영조 26), 1832년(순조 32) 송상현 공의 충절을 치하하여 임금이 내린 3종의 제문(祭文)들도 있다.
송상현의 친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천곡수필>
서책들도 다수 진열되어 있다. <천곡수필(泉谷手筆)>은 송상현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직접 집필한 책으로, 공의 친필로는 현존 유일의 것이다. 송시열이 1655년(효종 6) 송상현의 일대기로 집필한 <충렬공 행장>, 송상현이 순절 직전 아버지에게 남긴 시를 서예가 윤봉구가 1756년(영조 32)에 새로 쓴 <천곡결서(泉谷訣書)>, 동래부사 박기수가 1818년(순조 18) 동래성에서 순절한 이들의 약전을 적은 다음 그 감회를 시로 나타낸 <래성감고시록(萊城感古詩錄)>, 송공단, 정공단, 윤공단 등의 연혁과 규모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동래부지(東萊府誌)> 등도 있다.
▲ 송상현 공의 친필을 볼 수 있는 <천곡수필>은 공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집필한 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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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둘러본 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정화 기념비', 왼쪽에 의열각(義烈閣)이 있다. 정화기념비는 애써 찾을 일이 없고, 의열각 앞으로 다가선다. 의열각 앞 안내판에는 '(의열각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의녀(義女)들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성 전투에서 왜적과 기왓장으로 싸웠던 무명의 두 의녀와, 당시의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부산첨사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 애향(愛香) 두 열녀 등 모두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당 앞에 놓여 있는 향로에서 묵념을 한 후 돌아선다. 한참 높은 곳에는 충렬사가 마치 답사자를 내려보는 듯이 서 있다. 여성 네 분을 제향하는 별사(別祠) 의열각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있는 정당(正堂) 충렬사에는 남성 선열들만 모셔져 있다. 이렇게 남녀 선열들을 별도의 사당에 모시고 있는 것은 정화사업이 진행된 1978년의 남녀 차별 의식이 낳은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1772년에 금섬과 애향을 충렬사에 바로 모시지 않고 사당을 별도로 건립하여 제향한 때문이라 할 것이다.
충렬사에는 충렬공 동래부사 송상현, 충장공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 세 분을 수위(首位, 가장 높게 모셔진 신위)에 모시고 있다. 그런데 수위 자리 좌우 바로 뒷줄에 부산진 전투, 다대포 전투, 동래부 전투, 부산포 해전에서 전몰한 무명 용사들을 기리는 위패도 함께 놓여 있어 참배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개'와 '돼지'로 천대받는 일반 평민들의 위패가 충렬사에서는 존귀하게 대우받고 있는 것이다.
▲ 정화기념비 앞에서 쳐다본 충렬사 사당,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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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용사들의 위패와 나란히 서편에 배위(配位, 수위와 더불어 모신 신위)되어 있는 신위들은 정운(鄭運). 노개방(盧蓋邦), 윤흥제(尹興悌, 다대포첨사 윤흥신의 이복동생), 양조한(梁潮漢), 송봉수(宋鳳壽), 송백(宋伯)의 것이고, 동편의 신위들은 조영규(趙英圭), 이정헌(李庭憲), 문덕겸(文德謙), 신여로(申汝櫓), 김희수(金希壽), 김상(金祥)의 것이다.
동서 열여섯 배위 좌우로 다시 일흔 신위가 종위(從位, 뒤따라 모셔진 신위)되어 있다. 39위가 모셔져 있는 서편을 살펴보면 부산 출신으로 임진왜란 종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책봉된 66인 중 특별히 의병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스물네 분의 별전공신(別典功臣), 즉 김정서(金廷瑞), 정승헌(鄭承憲), 문세휘(文世輝), 정순(鄭順),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송창문(宋昌文), 김근우(金根祐), 강개련(姜介連), 김흘(金屹), 이언홍(李彦弘), 김대의(金大義), 오홍(吳鴻), 박인수(朴仁壽), 김달(金達), 송남생(宋南生), 김기(金琦), 황보상(皇甫祥), 이응필(李應弼), 송계남(宋繼男), 이복(李福), 오춘수(吳春壽), 김복(金福), 송의남(宋義男) 선열의 위패를 볼 수 있다.
종들의 위패도 당당히 모시고 있는 충렬사 사당
그리고 1991년 9월 10일 합사된 정철(丁哲), 정린(丁麟), 문택룡(文澤龍), 박경립(朴擎立), 김호의(金好義), 김사위(金士偉), 박천추(朴天樞), 정호인(鄭好仁), 문도명(文道明), 정언룡(鄭彦龍), 이성춘(李成春), 이춘상(李春祥), 송용경(宋龍景) 등 열세 분의 선열도 함께 모셔져 있다. 놀라운 것은 송상현의 시신을 찾아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동래부의 종 철수와 만동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다. <충렬사>는 별전공신 중 박인수도 관노인데도 군자감주부에 증직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24공신 공적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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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와 배위의 동쪽으로 모셔져 있는 서른한 분 종위들을 살펴본다. 서른한 분 중에는 수영성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펼친 김옥개(金玉戒), 이희복(李希福), 정인강(鄭仁彊), 최한손(崔汗孫), 최송엽(崔松葉), 최한련(崔汗連), 최수만(崔守萬), 최막내(崔莫乃), 박지수(朴枝樹), 최끝량(崔唜良), 김팽량(金彭良), 김달망(金達亡), 박응복(朴應福), 김덕봉(金德奉), 심남(沈南), 이실정(李實貞), 김허농(金許弄), 정수원(鄭壽元), 주난금(朱難金), 박림(朴林), 김종수(金從守), 이수(李壽), 이은춘(李銀春), 신복(辛福), 김진옥(金進玉), 즉 '수영 25 의용인(義勇人)'이 포함되어 있다.
그 곁으로는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동래 지역 선열들 가운데 미처 충렬사에 모셔지지 못했던 분들 중 1996년에 세 분, 2003년에 한 분, 2007년에 한 분을 추가로 제향한 위패가 모셔졌다. 박귀희(朴貴希), 구영취(具榮鷲), 이위(李瑋), 김망내(金亡乃), 이응원(李應元), 바로 이 다섯 분이다.
부산진성 종 용월, 동래읍성 관노 만동, 철수, 박인수
그런데 동쪽 종위에도 종이 모셔져 있다. 용월(龍月)이다. 용월은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이 전사할 때 곁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순절한 인물로, 관노였다. 뿐만 아니라, 정발을 기려 세워진 정공단(鄭公壇, 부산광역시 기념물 10호)에도 용월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충렬사 본전에 용월이 제향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히, 송상현을 모시는 송공단(부산광역시 기념물 11호)에도 철수와 만동을 기려 세워진 비석이 있다. 철수와 만동 역시 우연히 충렬사에 모셔진 것이 아니라, 충절의 정신을 보여준 선열이면 신분과 관계없이 숭앙하겠다는 시대정신의 소산이라는 말이다.
▲ 순절한 여인들을 기려 세워진 의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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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본전을 참배한 후 계단으로 내려오지 않고 서쪽으로 나가면 머잖아 '임란 24공신 공적비'를 참배할 수 있다. 1988년에 세워진 이 비에 귀한 이름을 올린 분들은 조금 전 사당에서 뵈었던 선열들이다. 잠시 묵념을 하고, 지금까지 충렬사 경내를 순회하면서 들렀던 길을 생각해본다. 송상현공 명언비- 외삼문(충렬문)- 소줄당(안락서원 강당)- 기념관- 내삼문(현판이 없음)- 의열각- 본전의 순서대로 다녔고, 이윽고 24공신 공적비에 닿았다.
이제 답사를 마치고 내려가야겠다. 낮은 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 관리사무소와, 그 옆의 의중지(義重池)로 간다. 관리사무소 아래의 작은 연못은 1978년에 조성되었는데, 의중지라는 무거운 이름은 1990년에 얻었다. 옳을 의(義)와 무거울 중(重)을 결합시켜 못 이름을 정한 까닭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송상현공 명언비 앞에 오니,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에 병사 10여 명이 두 줄로 도열해 있다. 병사들은 해설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충렬사 참배에 앞서 사전 교육을 받는 모양이다. 임진왜란을 당해 부산 지역에서 순절한 선열들을 모신 곳에 병사들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나도 슬그머니 그늘 아래로 들어가서 해설사 선생의 말씀을 한번 들어볼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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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현공 명언비(사진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 앞 큰 나무그늘 아래에서 충렬사 답사를 앞두고 설명을 듣고 있는 병사들. 사진 오른쪽의 건물은 충렬사 관리사무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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