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하게 사랑하기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차도하 시인
- 1999년 출생
- 한국예술대 서사창작과 재학 중
◆ 심사평(서효인 시인)
-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는 천진한 어투
(...) 차도하 씨의 '침착하게 사랑하기' 외 4편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골똘하게 보냈던 긴 예심 시간과 달리 본심에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탁월했다.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무엇보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 (...)
<조극래/초보 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중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공포심으로 인해 극한 상황을 유발한 대상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 현상을 말
한다. 은행 강도가 은행 직원을 인질로 삼은 스톡홀름 노르말름 스토리 사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은행 강도들이 4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
치하는 동안 인질들은 은행 강도들과 애착관계를 형성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질들은 은행 강도들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했고, 심지어 인질범들을 옹호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가해자가 친절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피해자의 자아(ego)는 이를 유일하게 생존할 방법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가해자의 폭력적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발생한다.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에서 자존감이 낮은 연인이나 아이들이 어쩌다 베푸는 친절에 더 큰 사
랑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폭력의 주체를 신(神)으로 표현했다.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
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의 문장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의 스톡홀름 증후군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데이트 폭력에 대해 유달리 관대하다. 폭력 후 상대방의 친절한 변명 때문에 아픔은 사그라든다. 겨우 내뱉는 말이 "저를 사랑하기는
하세요?"다. 그러자 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설교는 창대하고 우주적이고 구원의 손길이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맞은편에서는 다정한 연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랑에 막눈을 뜬 연인이다.
아직 폭력의 실체를 모른다. 그들에게는 토닥거리는 장면조차도 낯설다.
"저분들 싸우나 봐"는 방관이다. 그들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용인되고 묵인된다. 소곤거리는 게 전부다.
신의 사랑에 대한 설명은 기도처럼 길다. 폭력에 대한 변명은 사랑으로 포장된다. 그렇지만 화자는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보며 걷는다. 그러면서 “사랑은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진다. 그러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에서 볼 수 있듯이 눈치를 보던 구타는 사랑을 빙자해서 또다시 자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