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PERSONA)
기다려온 약속처럼 어느새 3월이 왔다. 하지만 지구 환경의 변화 탓인지 봄날다운 기운을 느끼기는커녕 아직도 두꺼운 패딩을 걸쳐야 바깥 외출이 허락된다. 더구나 오늘은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지 않았던가. 이맘때 보기 드문 봄눈 소식이라니 은근히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몸의 추가 멈추었다. 나들이를 잠시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며 앉았다.
흔치는 않지만, 우리 고장에서도 폭설의 봄눈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8, 9년 전쯤 전에 읽었던 어느 소설 속의 『설국雪國』을 떠올릴 만큼 밤새 세상이 온통 폭설에 뒤덮인 때가 생각났다. 통학버스 운행하기가 어려워져 새벽녘에 부랴부랴 직원들과 학부모에게 비상 통신으로 등교 시간부터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세 시간을 늦춘 거북이걸음의 출근길이었음에도 미끄러지고 버려진 차들로 이룬 한바탕 북새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만 했다. 어쩌면 눈을 자주 만나지 못해 눈길 운전에 미숙한 탓도 있었으리라. 직원들과 같이 오전 내내 학교 앞마당과 진입로의 눈을 힘들게 쓸어내는 작업을 하면서도 함께 해 주는 젊은 직원들과 뜨겁게 나누던 땀의 한때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햇살이 내리쬐는 초여름, 조용히 교내 순회를 하다가 눈에 띄는 운동장 잔디밭의 잡초를 하나, 둘 뽑고 있노라면 어느새 따라 나와 같이 뽑는 행정실 직원들도 있었다, 행정사무가 바쁜데도 불구하고 학교장이 움직이니 여지없이 따라 나온 것이었다. 그러지 말라며 말려도 보았지만 결국 내가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눈을 치우는 일이나 잔디밭 잡초를 뽑는 일이나 사회적 통념에 따른 태도였을 것이다. 어쩌면 감추고 싶은 자아의 그림자와 반대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퇴직하던 그해 가을쯤이던가, 참으로 뜬금없이 방탄소년단이라는 아이돌 그룹을 알게 되었다. 알고리즘을 타고 올라오는 영상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소리 내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었다. 갓 20대 초반의 아이돌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자각시켜준 말들이었다.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넘어져도 좋고, 당장은 꿈이 없어도 좋으니 좌절하지 말라며 지금 너희를 이루는 말들은 이미 낙원에 있느니 둘! 셋! 하면 어려웠던 감정들은 잊으라’라는 청년들의 말은 그들보다 한참을 더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아를 여지없이 흔들었다.
그 뒤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소위 월드 스타가 되면서 발표한 앨범 <영혼의 지도: 페르소나>에서 리더 RM은 ‘나는 누구인가 평생을 물어온 질문과 평생 정답을 찾지 못하는 그 질문’, '내가 되고 싶은 나, 사람들이 원하는 나, 네가 사랑하는 나 또 내가 빚어낸 나, 웃고 있는 나, 가끔은 울고 있는 나, 지금도 매분 매 순간 살아 숨 쉬는 Persona’라고 노래한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의 <영혼의 지도>라는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팬들 앞에서 가면에 가려져 살아가는 자신들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 하는 방황과 고뇌의 이야기들이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는 문화변용, 교육, 그리고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서 형성된 인물이다. 즉 ’페르소나‘는 로마 연극에서 배우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하며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개인의 의식적 생각과 감정을 타인에게 감추거나 반대로 드러내게 하여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자아가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정신 요소들 가운데 그림자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의 깊이를 요구하는 책을 읽어 본 지가 꽤 오래되어 사고와 이해의 기능이 많이 떨어졌지만, 책을 펼쳐 들었다. 몇 번을 읽다가 접었다. 다시 펼쳐 읽어가며 그 심오한 철학적, 심리학적인 어휘들의 행간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철저히 내게 필요한 페르소나로 살아왔으며 그 이면의 그림자를 어떤 필요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꽁꽁 눌러왔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의 페르소나가 곧 나 자신이라고 당연히 믿었다. 웃고 있는 나 자신 뒤에는 울고 있는 내가 있으며, 자신감 넘치던 내 등 뒤에는 겁 많고 수줍던 내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개의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던 내 생활이 퇴직과 더불어 그 무대가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무대 뒤에서 다시금 채워야 할 페르소나를 적절히 변화시키지 못하고 숨은 그림자와의 통합에 실패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 따른 대가는 혹독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불면의 시간이 찾아오고, 그 후유증으로 신체적 불편함도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의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으며 약물에 의존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하나의 걱정은 꼬리를 물고 다른 걱정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이 듦에서 오는 자연적인 현상인지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깊이를 모르게 가라앉는 나를 일으켜 세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친구들과의 모임, 한두 시간의 산책, 소소한 쇼핑 등 크게 의미 없는 활동을 시작하고 한 편으로는 나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물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르고 평생 그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는 질문이다. 꼭꼭 묻어두었던 옛 기억들이 한 조각씩 뜬금없이 올라왔다. 별안간 심장이 터질 듯 요동을 치는 시간이면 무의식이 불러온 그림자의 공포가 의식의 자아를 한없이 흔들고 있었다. 울컥 목을 타고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봄날이 기다려졌다. 아니 나는 일 년 내내 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따뜻한 바람을 비집고 날아드는 꽃내음을 맡으며 내 이름과 같은 나의 페르소나를 찾고 싶어진다. 비록 그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을지라도 내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나만의 페르소나를 갖고 싶다. 모든 사람이 알고 몇몇만 아는 이름과 더불어 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내 이름을 자신 있게 불러 주는 나를 찾고 싶다.
비록 가끔 아픔이 찾아오고 상처가 덧날지라도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 여정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오롯한 길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첫댓글 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늘 마음이 쓰이다가 얼마 전 써 두었던 글을 찾아 올려봅니다. 더운 날 건강하시고 늘 행복 하십시오
저도 여러개의 가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어느것이 진짜인지 헷갈릴 때가 있구요.
잘 읽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페르소나 ~사회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것들이 많았던거 같아요
칼 융, 프로이드 . 이런 학자들은 어떻게 그 아득한 마음과 정신의 세계를 탐구 하게 되었는지요. 오래전 <꿈의해석> 잡았다가 바로 내려 놓았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