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붓다는, 느긋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너희들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미가다야의 수목들의 모습을 보아라.
줄기가 굵으면, 그 뿌리도 넓게 퍼져 있는 것.
가지는 줄기에서 나오고, 작은 가지는 큰 가지를 발판으로 하여,
녹색의 잎을 무성하게 한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수목도 있다.
만약에, 가지가 줄기보다 굵고, 줄기보다 뿌리가 작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잎이 가지보다 무거우면 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뿌리와 줄기, 줄기와 가지, 가지와 작은 가지가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거목은 비바람에 시달려도 안정되어 있다.
뿌리를 뻗은 줄기와 가지와 잎은 중도(中道)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의 길도 이와 같다.
마음이라는 줄기를 잊고,
법(法)이라는 뿌리를 잃고,
오관(五官)이라는 가지와 잎의 번뇌에 휘둘려지기 때문에
올바른 인생을 보낼 수가 없다.“
다섯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붓다의 말씀을, 온 몸을 귀로 해서 듣고 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중도에서 벗어난 인생을 걸어왔다.
권력을 배경으로, 무엇 하나 불편한 것이 없이, 유복한 생활을 누려왔다.
그러나 욕망이 채워져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족한 생활을 거듭할수록, 의문이 커져 갔다.
성 안의 무사와 성 밖의 가난한 노예의 생활은, 너무나 격차가 심하다.
같은 인간이면서, 어째서 불공평한 계급제도가 있는 것일까.
태양의 빛은, 계급을 초월하여, 두루 비춰주고 있다.
인간 세상만이 불공평하다. 왜 그럴까.
나는, 생모의 얼굴을 모른다.
의모에게 키워져, 아무 부자유함없이 키워져도 생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부터,
생모에의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 파괴, 죄없는 자의 죽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
사계절에 따른 별장들이 있어도, 마음의 평안은 없었다.
인간의 깨달음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카필라를 떠난 6년간은, 의식주(衣食 住)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고,
적을 의식할 것도 없는 안온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번뇌를 소멸하겠다는 가혹한 육체 고행은
오히려 육체에 휘감기는 집착을 만들어내어 정도를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카필라의 가치없는 생활도, 가혹한 육체 고행도,
똑같이 정도를 자각할 수 없는 수행방법인 것을 깨달았다.“
붓다의 목소리의 파동은
다섯 무사의 마음속 깊이 울려, 눈을 감는 자, 고개를 숙이며 끄덕이는 자.
카필라의 무렵과 6년 여의 수행을 회상하는 자.
서로의 모습은 다르지만, 지금까지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붓다는 설법을 멈추고, 코스타니야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코스타니야.
그대는 가필라 성에서 기녀들이 타는 가야금 소리를 기억하겠지.
그 가야금 줄을 강하게 조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약하면 어떤 음색이 되는지 알고 있는가.”
“예, 옛...”
갑작스러운 붓다의 질문에, 코스타니야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강하게 조이면 줄이 터집니다.
약하면 조화된 음색이 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한번 말해 보아라.“
“예, 가야금 줄은 중간 정도로 조여야만이 고운 소리가 납니다.”
“바로 그 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야금 줄처럼 강하면, 끊어져 버린다.
가혹한 육체 고행은, 오히려 번뇌를 만들어내어,
자칫 잘못하면 육체를 잃게 되고 마음은 집착의 화신이 되고 만다.
육체는 인생을 항해하는 배(舟)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배의 선장인 마음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짜 자신이라는 것을 잊고
육체의 오관(五官)에 번롱당하여, 본래의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이다.
둥근 마음의 자기 자신을 잊으면
원망, 질투, 험담, 노여움,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진짜 자기 자신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 괴로움은 자신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고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어났기 때문에(生), 병들고(病), 늙고(老), 죽어 간다(死).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말해도 좋다.
인간이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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