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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여성 시인이다.
명문 신 안동 김씨 가문의 후손으로 역시 명문가인 은진 송씨 송요화[2]에게 출가하였다.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논란이 될만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어떤 날은 장사치들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신랄하게 깠다고 한다. 시 내용 중에는 미친 백정놈이 돈만 밝히네! 돈만 밝히다 활활 타버리리! 등의 매콤한 시가 있고 페미니스트적인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 정치적으로 상당한 논란이 되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김호연재의 시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호연재(浩然齋) 김씨는 (신)안동김씨로 고조부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고 증조부는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金光炫,1584~1647)으로 충청도 홍주(홍성) 갈산면 오두리(갈뫼)에서 고성군수 김성달(호조참판 고균 김옥균의 7대조)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배움 아래 소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익혔다.
김성달(金盛達,1642~1696)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좌의정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의 증손녀인 부인 이옥재(李玉齋,1643~1690)과 함께 서로 술을 즐기며 바둑과 시문을 주고 받았다고 하는데, 안동세고(安東世稿) 연주록 같은 시문집을 남길 정도로 부부시인으로 유명하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김호연재는 20살 차이가 나는 여러 형제들을 가르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화목한 집안분위기에서 자랐으나, 안타깝게도 시집간 은진 송씨 가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남편은 밖으로 나돌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시가와의 사이도 그리 좋지 못해 겉돌았다. 본인 스스로 이런저런 실수가 많았음을 실토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피하기 위해 술과 담배에 빠져 예찬시를 쓰기도 했다. 한이 많았는지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어미는 귀신의 희롱을 받아 반평생 일신에 차질이 많았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호연재의 영정은 2019년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인 윤여환에 의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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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04.02 10:27
<춘한>
복숭아꽃 어지러이 흩날리고 오얏꽃 향기로운데
나비는 분분히 작은 집을 둘러싸며 도네.
적막한 공산에 봄은 절로 흘러가고
법천의 저녁나절 이별의 시름 길도다.
<春恨(춘한)>
桃花亂發李花香(도화난발이화향)
胡蝶紛紛繞小堂(호접분분요소당)
寂寞空山春自去(적막공산춘자거)
法泉斜日別愁長(법천사일별수장)
위의 <춘한(春恨)>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법천의 봄 풍경과 이별의 시름을 노래한 것이다.
김호연재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宋堯和, 1682~1764)와 혼인을 함으로써 회덕 법천(法泉)의 여성이 되었다. 열아홉 살(1699년)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김호연재는 친정오라버니들로부터 ‘법천누이[法泉妹]’로 불렸다. 법천누이로 불린 것은 혼인 후 첫 번째 집이 지금의 송촌동 고택이 아닌 법동이었기 때문이다. 법동 집은 시부모 송병하와 안정나씨 부부가 송촌에서 분가하여 이주하여 살았던 집이다. 지금의 법동초등학교 근처로 파악된다. 이곳에 김호연재의 시아버지 송병하는 시냇가 너럭바위 위에 작은 정자를 건립하고(1689년), 바위에 ‘법천석총(法泉石潨)’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지금 법천석총 바윗돌은 중리동 송애당 앞으로 옮겨져 있다.
▶법천석총(法泉石潨). 김호연재 시아버지 송병하의 글씨.(송용재 탁본)
법천은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법동 일대를 관통하여 읍내네거리와 대화공단 옆을 지나 원촌교 밑을 통과, 갑천으로 합류하는 큰 시냇물이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인하여 모두 복개 도로가 되어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법천의 물줄기만큼은 복개된 도로 밑으로 변함없이 흘러내려가고 있다. 도시 개발 이전에는 계족산과 맑은 시내가 어우러져 천혜의 형국을 이룬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김호연재의 시집 은진송씨는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가 회덕 백달촌(白達村)에 거주하면서부터 대전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송유는 오늘날 중리동에 있는 자신의 집 동쪽에 사당을 짓고, 별당인 쌍청당(雙淸堂)을 건립하여 당대의 인사들과 맑은 교유를 즐기며 시를 창작하였다. 그 때 함께한 벗들이 박연・박팽년・안평대군・김수온・조위 등이다. ‘쌍청’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맑고 밝은 바람과 달을 의미한다. 그 바람과 달은 비가 개고 난 뒤의 상쾌한 바람과 달이다. 송유가 자신의 삶속에서 추구하고자했던 삶의 모습을 반영한 당호이다. 그 뒤, 송유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한 마을은 자연스레 ‘송촌(宋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일부가 지금의 송촌동이 되었다.
▶김호연재의 혼서지(1699년 10월 16일).김호연재의 시숙 송요경이 썼다.
김호연재의 친정은 선대부터 시집 은진송씨와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송유의 증손녀 송씨(宋順年의 딸)는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 1462~1539)의 처인데, 정광필과 송씨 부부는 김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의 외고조부와 외고조모이다. 송・김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는 문중의 위선사업 곧, 무덤의 비석이나 각종 건축물들의 편액과 기문(記文) 등을 써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쌍청당의 현판과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 무덤에 있는 빗돌의 두전(頭篆), <쌍청당송공묘표음기>・<선무랑송여집묘갈명>・<사헌부장령송희진묘갈명> ・<병조좌랑송방조묘갈명> 등을 쓰고 지었다.
김상헌은 <쌍청당송공묘표음기>에서, 송준길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송유의 무덤 앞에 세울 빗돌에 글을 지어주길 바란다는 요청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지평 준길이 나 상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저의 선조이신 쌍청공의 묘소에 예전에 묘표를 새겨 놓은 것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깎여 문드러졌습니다. 이에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도 역시 송씨의 외손이시니, 삼가 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고 말하였다.
이 글에서 송준길이 김상헌에게 ‘당신도 송씨 외손[子亦宋氏之彌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김상헌의 외고조모가 송순년의 딸 은진송씨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송유→송계사→송순년→정광필(송순년 사위)→정복겸→정유길→김극효→김상헌(송순년의 외5대손)으로 내려오는 가족관계이다.
송・김 두 집안이 본격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제월당 송규렴(宋奎濂, 1630~ 1709)과 안동김씨(1632~1701)의 혼인이다. 송규렴은 송준길의 11촌 조카, 안동김씨는 김상헌의 손녀이다. 그 다음으로 이루어진 혼인이 김호연재와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이다. 김호연재는 김상용의 현손녀로 송준길의 둘째손자 송병하의 며느리로, 김제겸은 김상헌의 현손자로 송준길의 셋째손자 송병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김호연재의 친정과 시집 사람들은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송준길과 송시열, 김창흡・김창협 등은 상호간에 사제 관계를 맺어 학통을 형성하였다. 송요화도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흡에게 『주역』을 배웠다. 이렇듯 두 집안은 학맥 또는 혼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연재와 송요화 부부는 선대로부터 맺어온 두 집안 간의 깊은 인연으로 하여 성사된 혼인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을 즐겨 노래했다. 법천을 떠나 송촌으로 이사하고(1714년) 난 뒤에도 자주 법천을 방문하였고 또 법천시를 썼다. 김호연재가 읊은 법천은 개울이 휘돌아 흐르고, 위태로운 돌을 밟아 물을 건너 오솔길과 모퉁이를 돌면, 무성한 풀 속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 찌르르 울어대고, 그 곳 어느 지점에 초당과 정자가 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일라치면 달빛이 숨 막히게 쏟아지는 그런 곳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의 하늘 아래에서 스물 세 해를 살다 갔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독에 온 몸을 떨 때, 고향 오두리 바다 물결과 형제를 그릴 때, 자신의 능력이 아까우나 규방 여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귀밑머리 흰 가닥 두어 서넛 비칠 때, 괴로이 잠 못 이룰 때 마다 법천의 산・바람・달・구름・안개・물소리・새소리・소나무・매화・복숭아꽃・대숲・사립문・나비・이슬 등을 친구 삼아 시로써 달래곤 하였다. 이러한 법천의 벗들이 있었기에 고독을 참아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300여 년 전 김호연재가 살아냈던 법천의 하루가 아스라하기만 하다.
문희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