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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몬이 주는 굴욕에서 길르앗을 구원하는 사울/
자연적인 마음이 굴욕을 벗어나 갱신되기까지/
시험을 극복하는 경험으로 신성한 진리의 확증이 일어나기까지/
윌리암 브루스 지음/배제형 옮김/스베덴보리 관련서적
사무엘상 제11장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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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널려 있는 강력한 적들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새로운 왕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터졌다.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 포위하였던 바
야베스 사람들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굴욕적인 조약인
자기들의 오른쪽 눈을 빼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조건은 그 주민들 자신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포위된 성읍의 주민들에게 가해진 모욕을 막을 수 없다는,
온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의 표시에 해당되었다.
.. 이런 소식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도 전달되었을 때
백성은 비탄에 잠겨 목청을 높여 울었다.
평범한 역사로만 여겨지는 이때의 사울의 상황과 행동은
고전 이야기의 가장 훌륭한 부분에 버금간다.
(The condition and conduct of Saul on this occasion,
considered only as ordinary history,
is equal to the finest parts of classic story.)
즉, 예언자와 제사장의 손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자의 위엄에 영감을 받아 스스로 일으킴 받은 사울은
이전 직업에로 되돌아가서
이제 소떼를 따라 들판에서 귀가하던 중
비통한 자기 백성들에 관한 소식을 들어 알게 되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 왔고
이에 사울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대 군대를 소집해서 포위 공격당하는 성읍을 건져낸다.
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상황들은
말씀이 씌어지도록 하기 위해
기독교인의 생활과 체험의 여러 상태 중 어느 하나를
표징적 방식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삶은 전투다.
육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을 거스른다.
이러한 불일치는 빈번한 충돌을 야기하고,
우리 본성의 악이 우리를 지배하여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는 것을
막기 위한 끊임없는 주의를 필요로 하게 한다.
이 악들은 아주 다양하고 무수하며 강력한데
그들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품은
주변 국가나 백성들로 표징 되었다.
그들 각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인애로부터
비롯되는 선에 거의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확실한 악을 표징 했다.
이런 악들 중 하나가 암몬족으로 표현되고 있는 바,
이제 우리는 그 악의 본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모압과 암몬은 롯이 자기 딸들과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두 아들이었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성경에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면으로 등장하고 있다.
좋은 의미일 경우, 모압과 암몬은
자연적인 선과 진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나쁜 의미일 경우, 그들은
선과 진리를 변질시키고 모독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롯의 후손이 거주하는 지역에 당도했을 때,
그들에게는 모압과 암몬 후손들과 어떤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되고
그 지역을 점령해서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주께서 그 지역을 그들의 후손들의 소유로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명령된 이유는
그들이 거인들을 무찌르고 난 후 그들의 땅에 거주했기 때문으로,
선과 진리가 비록 외적인 것일지라도
그들이 악과 거짓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일 경우
주님은 그들을 막거나 쫓아내지 않으시는 것이다.
(When goodness and truth, however external,
remove evil and falsity, and take their place,
the Lord does not disturb or disinherit them.)
반면 자연적 선과 진리는 자칫하면 영적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쉬운 게 흠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명확하고 충분한 예증을
오늘의 모압과 암몬사람들을 통해 본다.
자연적 수준에서 선하고 진실한 자들일지라도,
또 극도로 악하고 거짓된 것을 혐오하여 피하는 자들일지라도
그럼에도 그들은 영적인 모든 것에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동안에는
평안 속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즉 적대적인 반대의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이는 롯의 후손이 그의 딸들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비록 그들의 선과 진리가
진실하지 않은 애정을 수단으로,
그리고 그런 애정의 영향 하에 행동하는 도취된 지성에 의해
생겨났을지라도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Yet while they live peaceably they should be left in peace,
that is to say, free from hostile opposition;
even although their goodness and truth may,
like the children of Lot by his daughters, have been
begotten by an intoxicated intellect acting
under the influence and through the medium of spurious affections.)
그러나 그들이 적대적으로 반대할 때,
특히 그들이 영적인 것을 변질시키고 모독할 때
그들은 적으로 간주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모세와 예언서에서 그들에게 선언된 저주 아래 있게도 된다.
선을 모독한 이들이 영적인 모압이요,
진리를 모독한 이들은 영적인 암몬이다.
이 주제를 우리 마음에 적용해 볼 때
암몬은 모독된 진리 자체를 표징하고, 결과적으로는
그 모독으로부터 발생하는 거짓의 설득이나 죄악의 실행을 표징 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모독과 그 모독으로 인한 거짓의 설득이나
죄악의 실행에 의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변질시키고 그 가르침을 왜곡하여
진리가 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To profane truth is to pervert its meaning and falsify its teaching,
so as to make it appear to favour evil.)
진리는 선의 선생이요 목사이다.
선과 관련이 없는 진리는
엉터리 선생, 속이 없는 이름뿐인 진리이다.
그것은 어떤 우수함도 없고 쓸모 있는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대상이나 주제에 관련되는 것 없이는
거의 생각될 수 없는 바, 진리만의 발견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일 진리가 선에 관련이 없다고 하면
대체로 그것은 악에 관련을 가진 것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때의 진리는 변질된 상태로 발견되는데
그렇게 변질된 상태에서도
그 진리는 아주 높게 경외 받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인간 스스로는 오직 악할 뿐이며
참되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는 선행이라고 하는 것이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변질된다.
이리하여 등장하는 것이,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신뢰를
그리스도의 공로에 두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이다.
이런 진리가 한 걸음 더 진전된 모독을 하게 되면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은 악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그러므로 악은 믿음을 통해 의로워진 이들을 단죄하지 못한다는
원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인간 스스로 선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힘을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똑 같이 사실이다.
진리가 그들에게 부과한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벗어나려는) 열망과 노력에는
변질된 진리가 취하는 교리적 형태와
인간 마음 속 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부상한 교리적 형태 외에
일상생활 속, 마음의 평범한 작용에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취하는 다른 형태도 있다.
인간 본성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사회 속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공존함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한 부류는 자신의 행위를
자기가 안 원리에까지 옮기려고 분투하는 부류이고,
또 다른 부류는 자기가 안 원리를
자신의 행위에 갖다 맞추려고 끊임없이 분투하는 부류이다.
전자에 속하는 이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을 양심적으로 채용해서
자기 삶에서 그 진리를 실현해 보려고 분투하는 이들인 반면,
후자에 속하는 부류는
그것이 올바른 원리라고 알고 고백은 하면서도
관습이나 필요성 등 현실을 구실 삼아
원리가 행위에 맞춰지게 하는 바,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계속 애를 쓰는 부류이다.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암몬의 특성을 우리 각 개인의 마음에 응용해보려 할 경우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인들 사이에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거듭나는 삶 안에 진입한 이들이
진리의 모독자로 행동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들은 때때로 이 큰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될 수는 있다.
몇몇 사람에 의해 실제로 저질러지는 악들은
잠재적으로는 모든 이들 안에 존재하며
다만 그 악들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은
신중한 생각과, 통제하고 교정하는 진리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거듭나는 삶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 본성 속의 악들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동기와 관련하여 우리 내부에서 작용하는
악령의 영향으로 자극되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면제받을 수 있는 시험을 겪을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완성은
악을 범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악을 범하려는 성향까지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악은 매우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이다.
선을 행하는 의무보다 악을 피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선은 마음에서 악이 근절되지 않고도 행해질 수 있지만
악이 근절되면 반드시 선을 행하게 된다.
악이 제거되기 전에 행해진 선은 다만 바깥 측면의 선이지만
악의 제거를 수반한 선은 안쪽 측면의 선으로
따라서 구원하는 선이다.
역사를 그 특별한 의미에서 볼 경우,
암몬의 나하스가 야베스 길르앗을 취하려는 시도와
장소, 백성, 주변 정세 등 이 모든 것에 의해서는
‘진리를 모독하는 시험’이 표징으로 묘사되어 이 주제에 빛을 던져주고
또 공격에 대한 굴복의 결과에 관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시험되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시험하는 쪽은 나하스이기 때문이다.
길르앗은 요르단 강 건너 쪽이다.
그곳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상속으로 주어진 땅이었고
또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땅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강을 건너기 전의 땅을 2½ 지파의 상속분으로 허락한 곳인데
이는 소 떼를 키우기에 적절한 목초지가 풍부했던 까닭에서였다.
그런데 므낫세에 관하여는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
그 지파 반쪽은 가나안에 자기들 몫을 할당받았고
다른 반쪽은 길르앗에 체류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치로 인해 가나안에 자리 잡은 반쪽 지파는
인간 안쪽에 있는 교회의 원리를 표징 했고,
가나안 밖인 길르앗에 체류한 반쪽은
인간 바깥쪽에 있는 교회의 원리들을 표징 했으며
따라서 므낫세는 인간의 안과 밖을 결합하는 매개체를 표징 했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영적인 선과 진리 또는 인애와 믿음을 표징 했다 .
그러나 가나안 밖의 므낫세 반쪽 지파는
자연적 마음에 있는 선과 인애를 표징 했다.
그러므로 ‘므낫세 반쪽 지파에 속하게 된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자연적 마음, 또는 외적 인간에 있는 인애 또는
상호적인 사랑을 표징 했다.
그런데 그들은 교리를 의미하는 성안에 있었고
따라서 야베스 길르앗은
상호적인 사랑 또는 인애에 관한 교리를 표징 했다.
교리는 교리가 함유하는 원리들에 대한 방어벽이다.
마치 성벽이 그 안에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과 같다.
야베스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그런 이름으로 불리운 것은
그 지역 위에 있는 태양의 열로부터인데
그 까닭은 그 지역이 산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성과 주민들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오늘 본문 이전 꼭 한번 있었다.
그리고 그 언급은 오늘 본문에 드러나 있고 영적으로 중히 여겨지는
위험의 본질과 원인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그들은 가장 독특한 책인 판관기에서
가장 독특한 일처리(transactions) 중 하나와 연관되어
언급된다.
(판관기 19~21장)
한 레위인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밤을 맞아 베냐민 성읍 중의 하나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성읍의 무뢰한 자들이 그의 첩을 잔인하게 욕보여 죽게 하였다.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열 두 조각내어
이스라엘 온 지역에 두루 보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끔찍한
범죄자를 처단하고자 하나로 뭉쳐 일어났다.
그리하여 심히 가혹한 보복이 감행되었고
그 결과 베냐민 지파의 대부분이 죽게 되었으며
다시는 베냐민 지파에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내 이 백성들은 뉘우쳐 통곡했는데,
그 이유는 딸을 주지 않으면
베냐민 지파 하나가 자기들 지파에서 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아 도망친 소수의 베냐민 사람들은
사막의 견고한 바위로 피했으나
다른 지파들은 그들에게 아내를 주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그 지파의 멸종은 불가피해보였다.
그런데 미스바에 모여
딸을 베냐민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빠진 지파가 하나 있었음이 조사를 통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었다.
그래서 만 이천 명의 군인이 야베스를 치러 보내졌고
베냐민 사람의 아내로 찾아낸
사 백 명의 처녀를 제외하고 전 주민을 죽였다.
레위인의 아내에 대한 사악한 베냐민 사람의 끔찍한 위법 행위가
모독의 범죄와 관련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중대한 불법을 처단하는데
협력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이 범죄를
묵인한 결과가 되므로 그들도 이 범죄에 가담한 자로 처단되었다.
그리하여 사백 명의 처녀만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말았는데
이것은 그렇게 엄청난 악의 거짓에
더럽혀지지 않고 하나 되지 않은 애정들만이
구원되어 진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징한다.
범죄를 저지른 베냐민 자손과 그것에 동의했던 야베스 사람 중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죽은 뒤,
한 지파의 잔류민인 남자들과 또 다른 지파의 잔류민인 여자들이
구원되어 새롭게 지파를 건설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때로 영적 측면에서도 똑같다.
종교의 원리와 행로(path)에서의 이탈이 아주 심각해지게 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모든 지각과 선함에 대한 모든 애정이
거의 소멸 상태에까지 치닫고 만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에 의해
그들의 남겨진 것들은 구원될 수 있는데
회개와 개심이 거행될 때
선하고 참된 것들 중 남겨진 것들은 서로 모여
삶의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이루도록 하나가 된다.
(본문에서 암몬의)나하스가 야베스 사람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다루어진 주제가 모독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전 범죄가(판관기에서 야베스인들의 행위)
그들에게 지금의 전쟁을 불러온 원인으로 추정해볼 수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표징적 특성 측면에서
그러한 공격의 근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판관기와 본문의 야베스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의 표징적 특성이 반드시 바뀐 것은 아니다.
본문의 경우 우리는 야베스 사람들에게서
나하스의 공격에 굴복하려는 성향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암몬 자손을 섬기겠다고 제안하다가
그들에게 부과된 힘든 조건 때문에 그것을 단념하기 때문이다.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이제 우리는 이런 조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에까지 왔다.
우리는 그 조건들을 자연적인 근거 위에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오른쪽 눈을 빼는 것은
당시의 야만적인 관습에 따라 엄지와 엄지발가락을 잘라내는 것처럼
전쟁에 부적합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 자연적인 이유는 영적인 의미와 모순되지 않는다.
육체의 눈은 마음의 이해성에 상응한다.
오른쪽 눈은 선에 대한 이해성에,
왼쪽 눈은 진리에 대한 이해성에 상응한다.
눈에 대한 이런 의미, 특별히 오른쪽 눈에 대한 이 의미는
신성한 언어의 방식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는데
이를 신약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병들었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마음은 영적인 몸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 언급되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에 적용된다.
눈이 악하면 악한 눈, 즉 눈 속에 든 악은 제거되어야
육체 자체가 보존될 것이다.
“눈(right eye)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마태 18:9)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오른쪽 눈을 뽑는(pluck) 것과
하느님의 적과 같은 인간의 뜻에 복종하여
오른쪽 눈을 빼는(thrust) 것은 정 반대이다.
전자는 선에 대한 지각을 방해하는 악을
이해성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자는 선이 지각되는 능력 자체의 파괴와 관련이 있는데
이 파괴는 진리를 모독한 결과로
그것은 선을 지각하는 힘을 마음에서 박탈하고
오른쪽 눈을 뽑아낸다.
따라서 이것은 온 이스라엘에 치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선에 대한 이해성이 파괴될 때
온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제들에 있어서 오류들은(Errors)
이해성을 흐리게는 하지만 심정을 부패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오류들이 눈에 있는 티끌이다.
이 티끌은 눈이 물체를 명확하게 보는 것을 방해하지만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리는 눈 속의 들보 같은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오류들은 우리가
구원의 대장이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주님의 군사로서
우리 영혼의 적들, 곧 자기 심정의 악들과 싸울 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오른쪽 눈을 빼는 것과도 같지 않다.
바로 그러한 악이 사울을 주님의 백성의 대장으로서 첫 행동을
시작하게 한 것으로 표징된 악이다.
(Such is the evil represented by that which first brought
Saul into action as the captain of the Lord's people.)
야베스 주민이 처한 곤경과 굴복을 강요당해온 소식을
그가 접했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와서
그의 분기가 크게 타올랐다.
진리의 영으로 생기가 불어넣어진 진리가
열정(zeal)으로 그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그 열정은 관대한 감정으로서의 분노다.
(Truth, animated with the spirit of truth, inspired him with zeal,
which is anger as a generous sentiment.)
고결한 분노가 열정이다.
이는 잘못된 것에 대한 사심 없는 의분(indignation)이요,
부당함에 대항해서 결백을 입증하려는 열렬한 바램이다.
이런 측면에서 열정은 통상적인 분노와 다르다.
열정은 그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으나
분노는 그 안에 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바깥쪽 형태에서는 아주 비슷하나
안쪽 상태에서는 아주 다르다.
분노와 열정 사이에 있는 외관(appearance)의 유사성으로 인해
분노는 성경의 글자에서 하느님께 귀속되는데
이는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외관에 따라 씌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의 영적 의미에 담긴 진정한 진리는
주님이 성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언제나 열정만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진리의 영과 그 열정은
그들이 행동에 나타날 때까지
마음속의 생각과 애정들을 통해 전파되고 퍼져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일깨워
괴로워하는 형제들을 즉시 구출하도록 했다.
그는 황소 한 쌍(겨릿소)을 끌어다가 각을 떠 온 이스라엘에 보내어
야베스 주민을 구출하는데 협력치 않는 자의 소도
그와 같이 하리라 위협했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모든 이들은, 특히 겨리(yoke, 멍에) 아래 있는 이들은
부름에 기꺼이 순응해서 신성한 진리의 깃발 아래
악하고 거짓된 것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진리가 명하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은
진리가 그들을 산산조각 내는 칼이 되고
자연적인 마음의 모든 지각과 애정들을 찢어 흩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름은 널리 응답되었고 주님을 두려워함이
그들 위에 내려와 그들을 한 사람으로 나아오게 했다.
이 두려움은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의 심각한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의 표현인 신성한 이름,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순종했는데
이는 그것이 거룩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베섹은 가나안 왕 아도니 베섹에게서 빼앗은
유다 성읍 중의 하나였다.
당시 이 왕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렸는데 그는 이것을,
그의 상 밑에서 부스러기들을 챙기던 일흔 명의 왕들에게도
자신이 똑 같이 한 것에 대한 정당한 응징으로 인정했다.
“내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한 왕이 칠십 명이나 되더니,
하느님께서 내가 한 대로 나에게 갚으시는 구나.”(판관기 1:7)
이와 같이 잔인한 절단은
악을 저지른 자에게 악이 가져다주는 힘의 박탈에 대한 상징이다.
보복의 법칙은
비록 그들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가해진 것임에도
이것은 천국과 지옥을 똑같이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대로 우리에게도 행해질 것이다.
므낫세의 적(암몬의 나하스)이 그들에게 가하겠다고 위협한 것과
같은 성질과 의미를 지닌 벌이
유다의 적(아도니 베섹)에게 가해진 것으로
기억에 남는 곳(베섹)에서 지파들이 모여 계수를 받았다.
(참고 : 야베스 길르앗은 므낫세 반쪽 지파에 속해 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유다와 이스라엘이 모든 지파를 포함하는 것으로
함께 언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후 이 두 이름이 거론될 때는
대체로 주님의 왕국과 교회를 구성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보편적 원리에 대한
표징으로 자주 언급된다.
백성을 계수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한 뜻과 지혜에 따라 행해질 경우,
교회의 원리들이
올바른 질서에 따라, 그리고 적절한 종속 안에 정렬함으로
주님 자신이 하나의 머리가 되시고 그 아래 조화와 연합을 이루며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표징 했다.
(The numbering of the people, when done in conformity
with the Divine will and wisdom,
represented the arrangement of the principles of the Church
according to just order, and in due subordination,
so that they may act in harmony and unity under one head,
and that head the Lord Himself.)
숫자 자체는 교회와 종교를 구성하는 원리들의 결합된 특성,
즉 그 품위와 덕목들을 표현한다.
이는 1000은 선과 그리고 3은 진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인데
그들 중 진리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질서의 일반 원리가
세 부대로 나눠지는 것에서 더 진전된 시사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것은 또 의지와 이해성, 행동,
그리고 사랑, 믿음, 일이라는 세 부분과도 관계되는데
교회의 원리들은 그들로 인해 충만해지고 능력을 지닌다.
도움을 구하려고 왔던 전령들은
다음날 햇볕이 한창 뜨거울 때 야베스 사람들이 구원되리라는
소식을 들고 이제 떠났다.
그 소식은 그들의 심정을 기쁘게 하여
다음날 그들이 적들에게 나아가겠다고 통보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그 응답이 7일 중 마지막 날이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은 암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날은 새로운 전황이 초래되었다.
새벽녘에 사울은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적의 진영 한가운데로
쳐들어가서 햇볕이 뜨거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둘이 함께 있지 못할 만큼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란 새로운 상태의 새벽,
즉 시험에서 건져지는 상태로
그것은 빛의 상태에서 사랑의 상태로 나아가는 상태였다.
이른 아침부터 한낮의 뜨거울 때에 이르기까지 확인된 바
암몬 사람들은 아주 완전히 흩어져
그들 중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대량살육에 이어진 흩어짐은 아주 완전해서
악과 거짓이 함께 남아있지 않았다.
선과 진리가 의로운 자의 힘을 구성하듯
악과 거짓은 사악한 자의 능력을 구성한다.
그들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들의 힘은 사라지고 만다.
전투가 끝나 지도자로서의 사울의 자질이 확고히 되었을 때
승리로 흥분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됨을 멸시한 자들을
끌어내 죽이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울은 영혼의 참된 고결함으로 말하였다.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다.’
하나의 시험을 극복하는 것이 때로 다른 시험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특이하지만, 그럼에도 사실이다.
우리가 자신의 능력으로 시험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공적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시험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공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한
다른 이에게서는 그것을 부정해 버린다.
사울의 말은 이 두 부분의 악을 바로 잡고 있다.
그는 이날 이스라엘이 구원된 것을 주님에게 돌리고
가장 높은 이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명백히 보인 이 날,
사람이 죽음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고 있다.
죽음이 아닌 생명만이
진정한 영적 승리의 상태를 나타낸다.
(Not death but life marks the state of true spiritual triumph.)
따라서 모든 능력과 모든 공적을 선의 무한한 원천에 돌림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보다 낮은 생각들은
더 높은 생각들에 의해 책망 받고 교정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가 길갈로 가서 거기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하고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더라.”
사울이 왕으로 삼아지게 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것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과 지파들 사이의 제비뽑기로 된
그의 임명에 대한 갱신(renewal)과 확증이었다.
그것에는 사울의 표징적 특성과 관련하여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분명히 있다.
처음과 두 번째의 경우, 사울은 백성들의 직접적인 선택이나
자발적인 행동 없이 왕으로 선임되었다.
백성들은 제비뽑는 방법이 하느님이 임명하시는 것으로
아무 의심 없이 인정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그들 스스로의 자발적이고
또 충분히 생각한 후의 행동이었다.
영적으로 주님의 백성들도 이와 같다.
진리가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이르고
율법과 증거에 의해 입증될 때
그들은 진리를 볼 수 있고
또 그 진리가 주님으로부터임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가 그들 자신의 경험의 증거를 가질 때까지,
특히 그들로 하여금 악을 이기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할 때까지
그들 자신은 진리를 확증하지 못하고
또 진리의 통치를 그들 자신의 마음과 삶에 확립하지 못한다.
(So with the Lord's people spiritually.
They can see the truth, and acknowledge that it is from the,
Lord, as it comes to them through the Word
and is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testimony ;
but not until it has the testimony of their own experience,
especially in enabling them to overcome evil
and obtain deliverance from it, do they themselves confirm it
and establish. its reign in their own hearts and lives.)
이 확증의 행위에 있어서 왕국의 갱신이 일어나는 장소
역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두 가지 행위들이 있었던 관계로
상당히 중요한 장소로 기억되는 곳이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 한복판에서 취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기념비를 세운 곳이며
언약궤와 백성들이 요르단 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의 발이 서 있던 곳이다.
또 이스라엘 온 남자가 거룩한 땅에 들어간 후
할례를 받은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이 장소가 길갈로 불린 것도 이 경우와 관련되어 나온 지명이다.
즉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에집트인들의 수모를 벗겼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지금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여호수아 5:9)
이는 진정으로 새 삶의 시작,
즉 자연적 에집트의 삶과 분명히 구별되는
영적 가나안의 삶의 시작인 것이다.
따라서 길갈은 교회로의 소개 역할을 하는
자연적 진리의 교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삶의 질서에서는 첫 번째가 마지막 것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살핀 바와 같이
영적인 삶과 그 안의 세부적 상태들은
최 말단(ultimate)에서 시작하고 끝맺기 때문이다.
사실 첫 번째 상태와 마지막 상태는 그 품질이 다르다.
마음은 지식과 경험이 쌓여 첫 상태로 되돌아오고
차후 습득하는 것에 대한 확증을 마음의 첫 번째 진리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길갈에서의 왕국의 갱신은
거듭나는 마음 속 신성한 진리의 확증에 대한 표징이고
왕국의 갱신이 실제로 신성한 진리의 확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신성한 진리야말로 사실상 생각과 애정을 통치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The quality of the first and of the last state is indeed different.
The mind returns to its first state invested with
knowledge and experience, and finds in its first truth
the confirmation of its subsequent acquirements.
The renewal of the kingdom in Gilgal is thus representative
of the confirmation of Divine truth in the regenerate mind,
by which it is made, actually, because practically,
the governing principle in the thoughts and affections.)
그들이 사울을 왕으로 삼았을 때 주님께 바친 제물과 화목제,
그리고 왕과 백성들 사이에 있는 상호적인 큰 기쁨은
거듭나는 마음의 왕국 속에 질서가 세워질 때
그로 인해 결과되는 주님과의 결합, 그리고 그 왕국의 원리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함께 기뻐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The sacrifices and peace-offerings which they sacrificed to the Lord
when they had made Saul king, and the mutual rejoicing
between the king and the people,
tell us of the conjunction which is effected with the Lord
when order is established in the kingdom of the regenerate mind,
and its principles, the ruling and the governed,
exist in harmonious relation to each other, and rejoice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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