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을 보고나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한 예매율이 생각만큼 높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역도산>은 주인공 역도산이 스모선수를 거쳐 프로레슬러로써
활동하는 대략 10여년에 걸친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나가고 있었다.
영화는 어떤 극적인 오락성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게 아니다.
그냥 역도산을 마냥 바라볼 뿐이었다. 역도산의 전체 인생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그 시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심심한 영화가 될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이런 뚝심이 좋았다.
어느 시점에서 역도산의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던...바로 그때부터,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역도산의 중심에는 단연코 배우 "설경구"가 있다.
어느 영화나 마찬가지겠지만 <역도산>에서 주인공의 비중은 단연코 높다.
그가 고민을 하고, 그가 영광을 얻고, 그가 행패를 부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는 역도산이 있고 설경구가 있다.
사실 영화 보기 전에 과연 설경구가 역도산에 잘 어울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예고편에서 느낀 그의 분노하는 모습은
기존 설경구가 나온 다른 영화들에서의 연기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경구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역도산의 이미지와
그렇게 잘 부합하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걱정은 기우임이 드러났다.
정말 설경구는 역도산이 되버렸다.
영화를 보면서 설경구의 연기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진짜 역도산이었고,
영화를 보면서 한번도 배우 설경구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고지식하고 비열한듯 하면서도 정이 가는 그런 역도산의 모습을
설경구는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를 해낸 것이다.
우리는 역도산이 마냥 훌륭한 조선인이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한편으론 똘아이적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기도 하다.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고집장이이다.
그리고 "칸노" 회장의 관심을 사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기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조선인이지만, 조선의 영웅으로서 자신의 국적을 드러내기보단,
인생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국적을 숨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마냥 그를 국가적인 영웅으로 그려나가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조금 과격하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모습을 역도산의 최우선의 매력으로 본다.
그리고 그걸 부각시킨다. 영화가 좋았던 것은 마냥 역도산을 한국의 영웅이고,
일본 사회에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가 하는 식으로
영웅화 시키고 영화적 감동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었다.
영화는 역도산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멋진 인물이기도 하지만,
비열하고 바보같고, 멍청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가 죽은것도 다 자신이 초래한 일이다. 역도산은 이런...사람인 것이다.
그 때문에 영화 <역도산>은 신파라는 억지 감동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결정적으로 하이라이트가 될법한 마지막 프로레스링 대결 역시,
막판 뒤집기 승이라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뭔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뒤집기 승을 하는게 그 상황하에서는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승부에서 이겼지만, 사실 진 것이다.
영화는 결국 패배해버린 역도산의 모습을 바라본다.
당연히 극적인 승리에 대한 감동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감동은 싸구려 감동일 것이다.
영화는 역도산의 고집스런 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주변인물을 해볼까?
영화는 영화의 중심에 역도산을 두고, "칸노" 회장과 부인 "아야"가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모습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칸노"와 "아야"는 역도산의 캐릭터를 드러내는데 훌륭한 장치가 된다.
뭔가 길들어지지 않은 거친 역도산의 주위에 어떠한 사람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역도산이 어떻게 성공을 하게되고,
어떻게 좌절을 맛보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칸노"회장 역의 "후지 다츠야"는 회장으로서의 어떤 믿음직한 모습을
훌륭히 연기해낸다. 어찌보면 역도산의 설경구보다 더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거 같다. "아야"역의 "나카타니 미키" 역시 한 남자에 순종적인
일본 여성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오죽하면, 저런 부인이 있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
<역도산>은 송해성 감독의 이전작 <파이란>의 감동을 선사해주진 않는다.
<역도산>은 특별히 어떤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특별한 오락적 재미를 선사해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솔직하다. 그리고 난 그걸 인정해주고 싶다.
상업영화로서의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은채,
역도산의 인생 자체를 솔직하게 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상업성에 매달리지 않은 이 영화의 모습에 난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역도산의 캐릭터에 푹 빠져있게 하는 영화적 완성도는
분명히 인정해야 할 요소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