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산을 선택한 창녕성씨 성여완의 풍수적 지혜
[출처] 서울풍수연구소 | 작성자 유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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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풍수이야기(15)] 월간사람과산 2012년6월호
왕방산을 선택한 성여완의 풍수적 지혜
왕방산(王方山, 737m)은 포천의 진산으로 신라 헌강왕이 도선국사를 만나러 방문했던 곳이라고 하며, 이성계가 왕방사에 잠시 머물렀으며, 이방원이 젊은 시절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기도 하다.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무덤이 왕방산 기슭에 있어서 오래전부터 왕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지금은 산봉우리와 산 아래 곳곳에 군부대가 진을 치고 진압을 하여 산의 정기가 뻗치지 못하고 있지만, 서쪽으로 흐르던 한북정맥이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는 것을 보면 땅의 기운이 넘치는 땅이다. 고려멸망과 동시에 왕방산으로 들어온 왕방거사가 있었는데 그의 고민과 풍수적 선택을 살펴보자.
우측 높은 봉우리가 왕방산 정상이고 중앙의 봉우리가 국사봉이다.
글 사진|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성석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몽주가 선죽교를 지나다가 죽은 지 석달이 지났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친구 성석린(1338-1397, 성여완의 장남)의 집에 가서 평소에 즐겨마시던 술을 마시고 가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석린은 야은 길재(1353-1419), 목은 이색(1328-1396)과도 교류가 있었으나 조선개국 후에는 삼은(三隱)과는 궤를 달리하여 조선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선포했으니 이미 때는 놓쳤다. 아버지 성여완의 고려에 대한 충정이 강하여 설득이 되지 않아 조선개국공신이 되는 기회도 날렸다. 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킨다면 패가망신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다. 조선에 협조를 하면 세상의 손가락질은 받는다고 해도 가문과 식솔들이 건재할 수 있다. 고려가 중요한 만큼 성씨가문의 생명줄도 가볍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계류촌 계곡 암벽에 <창녕성씨천>이라는 안내문이 새겨져 있다. 창녕성씨의 묘가 있다는 의미이다.
성여완(밀직제학:정3품)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맏아들 성석린을 부른다. 아비 때문에 개국공신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못 본척할 수 없다. 아비로써 아들들이 조선에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더 이상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힘도 없다. 그들은 나이도 젊고 식솔도 많다. 5촌 조카인 성사제(직제학:정4품)는 이미 개풍군에 있는 광덕산으로 들어가 조선과는 인연을 끊고 고려의 충신으로 절개를 지키겠다고 선언하여 두문72현이 되었다. 성여완은 이미 나이 83세로 천지의 원리를 터득한 세월을 지녔지만,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그가 고려의 충절을 지켜주어야 창녕성씨 가문의 명분이 선다. 그러나 이성계의 독촉이 여간 심하지 않다. 진주 강씨는 조선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죄로 곤장을 맞기도 했다. 이 나이에 더 이상 호강할 일이 무언가.
성여완의 묘이다. 왕방산을 바라보고 있다. 왕방산이 고려왕조를 뜻하는지, 조선왕조를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성여완 자신뿐이다.
창녕성씨 인물 중에 성여완(1309-1397)에게 초점을 두는 것은 그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른 가문에서는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도 다양한 인물을 배출한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명문가라고 해도 대부분 일신이나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성여완의 후손 중에는 사육신, 생육신, 동방18현, 대제학4명 등 감히 어느 가문도 넘겨다보기 힘들 정도로 학자와 충신이 배출된다.
그가 광덕산이 아닌 왕방산을 선택한 것은 비록 자신은 고려를 배신할 수 없지만, 자식들은 조선에 협력하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명 왕망산(王望山)이라고도 하는 왕방산은 곧 조선의 왕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려의 왕을 의미하기도 한다. 굳이 누구를섬기겠다고 말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의 호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이헌(怡軒)인 것을 보면 시대적 혼란기를 뛰어 넘는 유유자적한 도가적 풍미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신도비에 따르면, 조선 개국 후 이성계는 한양으로 대족을 이사시켰는데, 성여완은 한양이 들어가지 않고 도성 밖 한림동에 우거한다. 자식들의 권유에 못 이겨 태조4년에 경회루 연회에 나아가지만, 이성계를 만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왕방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을 올린다. 그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는 왕방거사가 된다.
성여완의 묘와 살던 집은 왕방산 정상에서 국사봉(754m)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능선이 이어지며 북쪽으로 30리길을 용맥을 타고 가다가 회룡고조형의 땅에 국사봉을 마주하고 앉은 계류촌의 계곡이다. 왕방상의 북쪽 사면의 계곡을 따라 가면 개성으로 가는 길이지만, 그가 앉은 자리는 남쪽 왕방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세월은 고려의 백성으로 살았지만, 마음은 조선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좌측이 성여완의 무덤이고 우측이 성석린의 무덤이다. 장남은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려서인지 포천골짜기까지 들어와서 부친을 모시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성석린도 고려왕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이유인가?
창녕성씨는 고려후기에 5대를 연이어 1품에서 3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성석린(정당문학,종2품) 성석용(밀직제학, 정3품) 성석연(지평, 종3품무관)은 성여완의 아들인데 이들도 고려의 높은 벼슬아치였다. 조선조에서 성석린은 영의정을, 성석용과 성석연은 대제학을 지낸다. 조선개국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조건개국공신 반열에 오르지 못했으나, 성여완의 기지와 희생으로 자식들은 고려를 넘어서 조선에서 더욱 찬란한 벼슬을 이어간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성석린, 성석용, 성석연의 풍수적인 감각도 남다른 점이 엿보인다.
성석린(호 독곡)이 자리 잡은 교동은 향교가 있던 동네라는 고려조의 이름이고 지금은 경운동이다. 교동초등학교가 있어서 이름이 아직 남아 있는데 편안하고 좋은 곳이다. 삶의 터전의 성격대로 독곡의 자식들은 화려한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 편안한 생활을 영위한다.
헌법재판소이다. 이곳은 교동영역으로 조선의 사대부 저택이 자리잡은 곳으로 추정된다. 전에는 창덕여중학교가 있었다.
성석용(호 회곡)은 형의 집과 가까운 화동 정독도서관 자리에 집터를 정한다. 이곳은 북악산-응봉-감사원-맹사성집터-정독도서관-덕성여중-조계사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강한 용맥위에 주택을 짓고 살면 후손 중에 성정이 매우 강하거나 독특한 사람이 태어난다. 회곡의 증손자 중에 사육신(성삼문)과 생육신(성담수)을 배출한 것이 우연이 아님을 말해 준다. 계유정란으로 왕좌를 찬탈한 세조는 성승(성석용의 맏손자)과 그의 아들 성삼문,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 그리고 그의 손자 6명까지 모조리 죽여 소위 종손의 씨를 말린다. 성삼문은 한글창제의 주역이다. 둘째아들의 맏손자인 성담수도 생육신으로 후사가 없다. 왕방거사가 억눌러 놓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용솟음이 50년 후에 터진 것이다.
정독도서관자리이다. 전에는 경기중고교가 있었고, 그 전에는 김옥균의 집이, 또 그전에는 성석린의 집으로 성삼문이 살던 곳이다. 응봉에서 감사원, 맹정승댁으로 이어지는 능선마루이다. 학교나 공부하는 도서관자리로서는 안성맞춤이다.
맹정승의 집터도 감사원을 지나 암벽에 의해 만들어진 봉우리에 자리 잡았다. 지대가 높아서 가난한 사대부의 자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맹사성(1360-1438)이 대사헌으로 재직할 때 태종의 사위 조대림을 역모로 고문하였다가 오히려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아들은 장형으로 죽고 자기도 처형될 위기에 있
었으나 영의정 성석린이 변호하여 구해준다. 그 후 맹사성은 성석린을 부모처럼 여겼다는 후문이다. 그가 선택한 집터도 용맥 위에 있었으니 맹사성도 성격이 외골수로 바르고 곧았던 모양이다.
맹사성 정승댁 집터이다. 위의 사진 푸른지붕 좌측옆의 이층기와집이 맹정승집터이다. 용맥위에 집을 지은 고불의 뜻이 의미심장하다. 그도 풍수지리의 대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통례로 용맥위에는 사람이 사는 집을 짓기를 피한다. 이미 죽었던 목숨 여벌로 사는 셈치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성석연(호 상곡)은 큰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예 사대문을 박차고 나가 중림동 약현에 자리를 잡는다. 약현은 안산(鞍山)자락의 능선으로 목(木)의 기운이 강하여 학자와 벼슬들을 많이 배출한 땅이다. 이곳에서 상곡의 증손(성현)과 고손(성세창)이 부자 대제학이 된다. 우면동에 누워 청계산을 바라보고 있는 성석연의 묘를 보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약현성당. 약봉, 약현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무학대사가 성석연에게 집터로 천거한 자리로 오래토록 창녕성씨가가 살다가 집안이 한미해진 후로는 많은 사대부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창녕성씨는 조선중기이후로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은 것은 창녕성씨의 올곧은 성품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이유이다. 상곡의 현손인 성수침은 북악산 서쪽 기슭에 청송당을 짓고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고, 아들 우계 성혼은 동방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또한 왕비를 세우거나 부마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기운데 가문은 쇠약해지고 지리멸렬해진 단계까지 왔다. 200년 동안 최고의 문벌을 유지했던 창녕성씨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해진 것은 권력에 대한 결벽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청송당터 표지판에서 바라보면서 겸재의 그림을 떠올리면 청송당이 보이는 듯하다.
청송당표지판은 경기상고 후원에 있고 그 아래 암벽에 청송당유지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실제로 청송당유지는 경기상고 담을 넘어서 청운중학교 안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래도 한 평생이고 저래도 한 평생이지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삶은 그만큼 의미 있는 삶이다. 역사에서 누구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 깊은 의미일 수도 있고 허무할 수도 있다. 단지 개인에 매몰되지 말고 뜻을 세워야 한다. 이제 창녕성씨는 권력에 대한 결벽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의 인재로 거듭나기 바란다. 국가의 인재가 되면 가문의 인재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창녕성씨 후손들은 조상의 풍수적 지혜를 저버리지 말기 바란다. 나의 자리를 내가 잡지 못하면 이미 남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매순간 자리를 선택해야 한다. 그 방법을 터득하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해보자. 당신들의 조상처럼.[q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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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두문72현의 이름이 모두 전해지지 않으며, 성사제의 후손 성석주(1649-1695)가 기록한 <두문동선생실기>에 따르면 조의생, 임선미, 상사제, 박문수, 민안부, 김충함, 이 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의 이름이 언급된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원장. www.locationart.co.kr)
[출처]왕방산을 선택한 창녕성씨 성여완의 풍수적 지혜 (서울풍수연구소)|작성자유산지수
[출처] 왕방산을 선택한 창녕성씨 성여완의 풍수적 지혜|작성자 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