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오랜 기간 백수생활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 거대한 조직 사회에서 나 혼자 튕겨져 나온듯한 버림받은 느낌, 톱니바퀴가 한 치 오차도 없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저 거대한 세계의 틈바구니 속으로 다시는 진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 떨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당신을 삶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마지막 동아줄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썩은 동아줄이어서, 당신이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 오다가 밧줄이 끊겨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삶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그 순간 썩은 동아줄의 유혹은 당신의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나에게는 전설 속의 감독이다. 영화에 매혹 당했던 내 젊은 날, 코스타 가브라스라는 이름은 접근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 안에 갇혀 있었다. 그가 만든 정치 영화 [Z][계엄령] 등은 풍문만 있을 뿐 실체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암흑의 루트를 통해 힘들게 [Z]의 비디오를 입수했을 때의 그 두려움을 여기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군부독재 시절,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반체제 운동과 동일시되엇다. 1969년 만들어진 [Z]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칸느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 주었지만, 그의 영화들은 그의 조국인 그리스에서는 여전히 상영 금지되었었다.
80년대 중반 그의 영화들이 해금되어 [Z]를 비롯해서 [계엄령] 등 그의 대표작들이 국내 개봉했을 때, 이미 그 정치성의 약효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파쇼적인 억압적 세계의 그늘 속에 갇혀 있던 우리들에게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1933년 그리스에 출생했지만 그의 부모가 반체제 운동을 했기 때문에 군부독재 치하의 그리스 대학들은 그의 입학을 거부했고, 코스타 가브라스는 파리에서 대학을 다녀야만 했다. 그가 졸업한 영화학교 의젝은, 국내 감독들 중에서도 박광수 김인식 감독이 수학한 영화전문학교다. 그의 데뷔작은 이브 몽땅, 시몬느 시뇨레 주연으로 1965년에 만든 [Sleeping Car Murders]다. 이브 몽땅과는 지속적으로 작업을 했는데, 두 번째 작품인 [Z]는 그의 조국 그리스 출신의 작가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군부독재 국가에서의 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음모와 암살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칸느 심사위원상 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다. 그후 [계엄령][미싱]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영화 3부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가장 뛰어난 정치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사라지고 국제적인 데땅트 분위기 속에서 그는 1980년대 호라동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긴다. 걸작 [뮤직박스]는 할리우드의 아낌없는 물량지원 속에서 완성된 수작 필름이다. [배신의 계절][매드 시티] 등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은 여전히 코스타 가브라스표 특유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잃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초기의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는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세상과의 음험한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직시한 결과였다.
지난 2005년 제작된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도날드 웨스트레이크의 미스터리 소설 [The Ax]를 영화화 한 것이다. 처음 소설을 읽고 이 작품의 영화화를 결심한 그는, 그러나 이 소설의 판권이 이미 파라마운트사에 팔렸고 영화를 만들 제작자와 감독도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부인이자 제작자인 미셀 레이 가브라스의 도움으로 원작자와 영화사를 설득하여 코스타 가브라스는 결국 이 작품을 영화화 할 수 있게 되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소설의 원작 뼈대는 가져왔지만 세부 내용을 시나리오 단계에서 과격하게 수정하여 장르의 변주를 시도하였다. 그래서 구조조정으로 대기업에서 정리해고 된 한 사십대 가장이 다시 소비 자본주의 시장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바꿔 놓았다. 블랙 유머가 지배하고 있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에는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이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인간관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해학으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브뤼노 다베르(호세 가르시아 분)는 15년동안 성실하게 제지회사 홍보요원으로 근무하다가 팀장까지 올라갔지만, 구조 조정으로 대량 감원에 포함되어 직장을 잃는다. [자네는 걱정이 안돼. 자네가 일자리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거야]라고 직장 상사는 말하고 브뤼노 역시 의기양양하게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15개월치 월급이 바닥날 때까지도 그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2년 반동안 실접자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는 공격적인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게는 퉁명스런 남편이 되었다.
브뤼노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다가 기발한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다른 직종으로 옮겨갈 생각은 없었다. 평생 제지회사 일만 해왔기 때문에 그가 새로운 직장을 구할 곳도 역시 제지회사 홍보직이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경쟁자인가를 아는 것이 급선무다. 그는 유령회사 허위광고로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입수한다. 자신보다 낮은 등급을 제치니까 모두 5명이 남았다. 그는 자신의 잠재적인 경쟁자인 그들을 차례로 없애기로 결심한다.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관객들을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괴롭힌다. 관객들은 이성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브뤼노의 범죄에 동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오랜 실업기간 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브뤼노의 범죄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는 감정을 형성하게 된다. 아이러니와 위트, 그리고 파라독스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를 끌고 가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그렇다고 관객들이 살인에 동조하거나 브뤼노의 살인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끼어 넣는 블랙 유머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적 재미를 선사한다.
스릴러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사회풍자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생존을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신의 적들을 차례로 제거해야만 하는 비정한 사회의 한 단면을, 주인공 브뤼노를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일종의 약육강식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비판하는 하나의 우화다. 일상적 삶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한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은 존재인지,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