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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大陸朝鮮)반도조선(半島朝鮮)! 지세(地勢)를 논하다 (1)
2천리(千里) 뻗은 산세(山勢)가, 갑자기 2백리(百里)?
○ 대륙조선(大陸朝鮮)이냐? 반도조선(半島朝鮮)이냐? 이것은 생사(生死)를 가르는 일이니 만큼, 누구도 양보(讓步)할 수 없고, 꼭 지키려할 것이다.
㈠ 대륙조선(大陸朝鮮)이라함은, 일만(一萬)년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진실(眞實)을 담은, <하늘(天)과 땅(地)과 인간(人間)의 이야기>, 곧 조선사(朝鮮史)가 되며, 근세기(近世期)에 만들어진 ‘한족(漢族)이란 정치적 구호(政治的口號)’는 소멸(消滅), 삭제(削除)되며, ‘왜(倭)가 말하는 태백지손(太伯之孫) 천황(天皇)’이란 이름도, 즉시(卽時) 소멸(消滅), 삭제(削除)된다.
㈡ 반도조선(半島朝鮮)이라함은, 그림책에 그려진 조작(造作)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그림책 이야기이다. 또한 이는 : 근세기(近世期)에 만들어진 정치적 구호(政治的口號)인 “한족(漢族)”은 살아남게 되며, 왜(倭) 천황(天皇) 역시(亦是) 태백지손(太伯之孫)으로 살아남게 되고, <조선인(朝鮮人)은 ‘조센징’으로, 2등 국민(二等 國民)으로, 식민지(植民地)백성(百姓)>으로 각인(刻印)되어, 남아있게 될 것이다.
㈢ 생사(生死)를 가르는 일이니만큼, 주장(主張)을 달리하는 양측(兩側) 모두, 자신(自身)들의 주장(主張)만이 옳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의 판단(判斷)은, 지형(地形)지세(地勢)밖에 없다,> 고 본다. 지형지세(地形地勢)만큼은 왜곡(歪曲), 또는 조작(造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하나하나 지형(地形)지세(地勢)를 따져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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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에 있으며,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의 평범(平凡)한 산(山)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에 옛 부터 북진(北鎭)이 설치(設置)되어, 북방(北方)의 흉노(匈奴)를 제압(制壓)하고 있다.> 라고 전(傳)한다.
➨ 이곳이 어떻게 대륙(大陸)의 북(北)쪽이 되고, 이 산(山) 뒤로 어떤 흉노(匈奴) 종족(種族)이 있었다는 지, 무인지경(無人之境)인 이 땅에, 그렇게 중요(重要)한 북진(北鎭)이 설치(設置)되었다는 것인지, 이해(理解)불가(不可)하다.
북경(北京)에서 이곳을 보면 : 동(東)쪽에 가까운 곳이다. 이곳이 북(北)쪽도 아니요, 또 어떤 흉노(匈奴)가 있었는지 조차 불분명(不分明)한 곳임에도, 북진(北鎭)을 설치(設置)하여, 북방(北方)의 흉노(匈奴) 또는 오랑캐를 제압(制壓)했다는 이야기는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19세∼20세기 초까지도, 이곳은 무인지경(無人之境)과 같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대한 역사통설(歷史通說) 이야기를 보자.
⒜ 백과사전 : 의무려산(醫巫閭山) : 광녕위(廣寧衛)성 서쪽 5 리 되는 곳에 있다. 순(舜)임금이 봉해진 곳으로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하였다. 세시에 제사를 지냈는데 명조에서는 더욱 융성히 하였다. 이 산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는데, 이 산(山)은 6겹으로 감싸고 돌아, 육산(六山)이라고도 한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우뤼 산(중국어 정체: 醫巫閭山, 간체: 医巫闾山, 병음: Yīwūlǘ Shān, 의무려산), 또는 간단히 뤼 산(중국어 정체: 閭山, 간체: 闾山, 병음: Lǘ Shān, 려산)은, 중국 동북부의 3대 명산의 하나로, 랴오닝 성 진저우 시에 속하는 베이전시(北鎮市)의 5킬로미터 서쪽에 있다. 최고봉은 해발 867 미터이다. 산 이름은 원래 만주어로 '푸르른 산'을 의미한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 《의무려산(醫巫閭山) : 음산(陰山)산맥(山脈)의 분지(分支)로, 2백 여리 뻗어있으며, 요순(堯舜)이 봉한 12산 중의 하나이며, 이 산(山)이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이다. 주례직방(周禮職方) : 東北曰幽州, 其山鎭曰醫無閭. 수(隋) 개황(開皇)중에 이곳에 북진(北鎭)을 두었다. 이 산은 6겹으로 감싸고 돌아, 일명(一名) 육산(六山)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과 백과사전(百科事典)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대한 설명(說明)이 똑같다.> 정말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녕성 심양(瀋陽)과 대능하(大凌河) 사이에 있는 산(山)일까?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대륙(大陸)의 옛 고도(古都)인 황하(黃河)변에서 북(北)쪽이 아닌 동북(東北)방향(方向)이며, 북경(北京)에서는 동(東)쪽에 가까운 방향(方向)이다.
북(北)쪽의 중요(重要)한 산(山)에 설치(設置)하여, 그 북방(北方)에 있는 이민족(異民族)들을 제압(制壓)하고 있어야 할 북진(北鎭)이, 방향(方向)조차 뚜렷하지 않은, 저 멀리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땅, 동북방(東北方) 귀퉁이 산자락에 두었다는 것, 이게 코-메-디다.
○ 조선사(朝鮮史)라고 할 수 있는, 연행록(燕行錄)속에서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대한 <지세(地勢)·방향(方向)·기후(氣候)·특이지형(特異地形)·고적(古蹟)·종족(種族)>등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中心)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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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려산(醫巫閭山)
(1) 赴燕日記 / 往還日記 五月 二十四日。壬戌 : 《蓋此山自東而來.必是白頭山西北麓.而自此爲毉巫閭.又南爲山海關爲盤山.終爲西山.本是一山數千里行龍者也. : 대개 이 산(山)은 동(東)쪽으로부터 왔으니, 필시 백두산(白頭山)의 서북(西北)쪽 기슭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또한 남(南)쪽으로 산해관(山海關)이 되고 반산(盤山)이 되며, 끝으로는 서산(西山)이 되니, 본시 한 산(山)의 용맥(龍脈)이 수천(數千)리 까지 간 것이다. 盤山下有李愿盤谷云.以此推之則盤山之北爲太行.而所謂白頭山爲太行之東脉也. : 반산 밑에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이 있다 하니, 이로 미루어본다면 반산의 북쪽은 태항산(太行山)이니 이른바 백두산(白頭山)은 태항산(太行山)의 동(東)쪽 맥(脈)이 되는 것이다.》
➊《蓋此山自東而來.必是白頭山西北麓. : 대개 이 산(山)은 동(東)쪽으로부터 왔으니, 필시 백두산(白頭山)의 서북(西北)쪽 기슭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있는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뻗은 줄기>라는 뜻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백산(長白山)과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그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다.> 장백산(長白山)은 동북(東北)에서, 서남(西南)으로 뻗어 내린 장백산맥(長白山脈)의 한 봉우리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山脈)에서 분기(分岐)한, 작은 줄기의 봉우리(867m)일 뿐이다.
➋《而自此爲毉巫閭.又南爲山海關爲盤山.終爲西山.本是一山數千里行龍者也. : 여기서부터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또한 남(南)쪽으로 산해관(山海關)이 되고 반산(盤山)이 되며, 종당에는 서산(西山)이 되니, 본시 한 산(山)의 용맥(龍脈)이 수천(數千)리 까지 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 867m)의 남(南)쪽은, 곧바로 요동만(遼東灣) 바다이고, 바다(海)인 이곳에 반산(盤山)이 있을 턱이 없고, 더더구나 서산(西山)도 없다. 또한 산해관(山海關)도 없다. 산해관(山海關)은,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서남(西南)쪽 멀리에 있을 뿐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곳을 이야기하고 있다.
➌《以此推之則盤山之北爲太行.而所謂白頭山爲太行之東脉也. : 이로 미루어본다면 반산의 북쪽은 태항산(太行山)이니, 이른바 백두산(白頭山)은 태항산(太行山)의 동(東)쪽 맥(脈)이 되는 것이다.》
<장백산(長白山)과 태항산(太行山)은, 그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다.> 장백산(長白山)은 동북(東北)에서, 서남(西南)으로 뻗어 내린 장백산맥(長白山脈)의 한 봉우리고, 태항산(太行山)은, 남북(南北) 일천(一千)여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특히 지형도(地形圖)를 보면 :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을 흐르는 요수(遼水)유역은 저지대(低地帶)로 평원(平原)을 이루고 있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어떤 산(山)이나 산맥(山脈)도 그 맥(脈)이 이어진 곳이 없다. 전혀 다른, 별도(別途)의 산(山)들이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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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강희(康煕) 때 도어사(都御史) 서원홍(徐元珙)이 태상시(太常寺)로 있을 때 학사(學士) 서건학(徐乾學)ㆍ한담(韓菼)과 더불어 예(禮)를 의논한 상소에 이르기를, “삼가 참고하건대, 북진 의무려산(北鎭醫巫閭山)이 지금 봉천부(奉天府) 지경에 있는데, 산이 이미 북진(北鎭)이 되었으니 물도 북해(北海)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북해제(北海祭)로 개정하고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나아가 조칙을 내리심이 가합니다.” 하였다.》
➊ 본래(本來)의 것으로 보면 : <북진(北鎭) 의무려산(北鎭醫巫閭山)이, 지금 봉천부(奉天府) 지경에 있는데, 산이 이미 북진(北鎭)이 되었으니, 물도 북해(北海)가 될 수 있습니다.>하였다고 하는데,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그곳이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으니, 북방(北方)을 수호(守護)하기 위한 북진(北鎭)을 두었고, 그곳은 북해(北海)가 될 수 있다.
➋ 그러나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짝퉁 의무려산(醫巫閭山)은 : 북방지대(北方地帶)도 아니요, 그 뒤에 달자(韃子)나 달단(韃靼)도 없었으며, 사막지대(沙漠地帶)도 아니며,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던 곳이다. 서(西)쪽 지방(地方)에서 이동(移動)시킨 짝퉁 “의무려산(醫巫閭山)”일 뿐이다. 아래 (4)를 참고(參考)
➌ 왕조실록(王朝實錄) 정조 9년 을사(1785, 건륭 50) 4월 19일(무술) : 사은사 서장관 이정운의 별단 :《臣於路次,逢欽差使人探問,則內閣侍讀學士尹贊圖,奉命往祭北海廟堂及盛京福昭陵,興京永泰陵.北海廟堂,在於長白山,以淸朝發祥之地,倉建廟堂云. : 신(臣)이 길에서, 흠차사신(欽差使臣)을 만나서 탐문하였더니, 내각(內閣)시독학사(侍讀學士) 윤찬도(尹贊圖)가, 어명을 받들고 북해묘당(北海廟堂)과 성경복소릉(盛京福昭陵)·흥경영태릉(興京永泰陵)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북해묘당(北海廟堂)은 장백산(長白山)에 있는데, 청조(淸朝)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묘당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위의 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한 구절(句節)이다. 이곳에서는 <북해(北海)는 곧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장백산(長白山)에 북해(北海)의 묘당(廟堂)을 두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불어 청(淸) 태조(太祖) 노이합적(努爾哈赤)의 발상지(發祥地)가 바로 북해(北海)의 장백산(長白山) 남(南)쪽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북해(北海)란 말인가? 북해(北海)는 어디에 있는 건가? 이건 코-메-디다. 지형지세(地形地勢) 또는 자연환경(自然環境)등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곧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장백산(長白山)은, 짝퉁이란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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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燕 途 紀 行. 中. 日錄 / 병신년 순치(順治) 13년 (1656, 효종 7) 9월 5일(경술) : 《醫巫閭乃廣寧鎭岳.雄峙城北.以禦大漠.從古此地.雄才迭出.眞所謂人傑地靈也.聞山上有仙家石盆. : 의무려(醫巫閭)는 곧 광녕(廣寧)인데, 진악(鎭岳)이 웅장하게 성 북쪽에 서 있어 이것으로 큰 사막(沙漠)을 막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웅재(雄才)가 계속해 나왔으니, 참으로 이른바 ‘인걸은 지령으로 난다.[人傑地靈]’는 것이다. 들으니, 산 위에 신선의 집 석분(石盆)이 있다고 한다. 燕 途 紀 行. 中. 日錄 / 병신년 순치(順治) 13년 (1656, 효종 7) 9월 13일(무오) : 東臨大漠.西望居庸.氣象浩蕩.令人有憑虛御風.不知其所止之思.(中略). : 동쪽으로 대막(大漠)에 임하고, 서쪽으로 거용(居 庸)을 바라보니, 그 기상이 호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허공에서 바람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➊《醫巫閭乃廣寧鎭岳.雄峙城北.以禦大漠. : 의무려(醫巫閭)는 곧 광녕(廣寧)인데, 진악(鎭岳)이 웅장하게 성 북쪽에 서 있어 이것으로 큰 사막(沙漠)을 막고 있다.》고 하였다. 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에게는, 미안(未安)하고 죄송(罪悚)한 이야기지만 :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중심(中心)으로, 사방(四方) 어느 곳에도 사막(沙漠)이란 특이지형(特異地形)은 없다. 더더구나 수천(數千)년, 수백(數百)년 전(前)은, 사막(沙漠)지대(地帶)가 존재(存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人間)들의 환경파괴(環境破壞)로 인한 기후(氣候)변화(變化)로 인해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서(西)쪽으로부터 동(東)쪽으로 확장(擴張)되고 있기 때문이다.
➋《東臨大漠.西望居庸.氣象浩蕩.令人有憑虛御風.不知其所止之思.(中略). : 동쪽으로 대막(大漠)에 임하고, 서쪽으로 거용(居庸)을 바라보니, 그 기상이 호탕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허공에서 바람을 타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쓴 저자(著者)는, 지금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있으면서 <동(東)쪽으로 큰 사막(沙漠)에 임하고, 서(西)쪽으로는 거용(居庸)을 바라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거용(居庸)이란 말은, 진시황(秦始皇)때, 태자(太子) 부소(扶蘇)와 장군(將軍) 몽념(蒙恬)이 30만∼50만 대군(大軍)을 동원(動員)하고, 용공(庸工)들을 징집(徵集)하여 북(北)쪽에 장성(長城)을 쌓을 때, 용공(庸工)들이 임시적(臨時的)으로 살던 곳을 말하는 것이다. 그 후에 이름이 ‘거용관(居庸關)’으로 바뀌었다.
➨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동(東)쪽 어디에 큰 사막지대(沙漠地帶)【대막(大漠)】가 있는가?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조작(造作)할 수 없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요녕성(遼寧省)에 만들어 놓은 것은, 조선(朝鮮)을 그 동남(東南)쪽 반도(半島)로 밀어 넣기 위한 조작(造作)이다.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서(西)쪽에 있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땅으로 이동(移動)시킨 것이다. 새로운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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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계산기정(薊山紀程) 순조(純祖) 3년(1803) 음력 10월 /《의무려산(醫巫閭山) : 무려(巫閭)는 주례(周禮)직방(職方)에 보인다. 순(舜)이 기주 (冀州)의 동북쪽을 갈라서 유주(幽州)로 만들었는데 이 산(山)이 그 주(州)의 진산(鎭山)으로, 순(舜)이 봉한 열두 군데 산 가운데 하나다. 산세(山勢)는 동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서쪽으로 달려갔다. 동쪽으로 가서는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이 되었고 서(西)쪽으로 가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다. 2,000리에 연달아 뻗어 있는데 북진묘(北鎭廟)에 올라가면 그 전체를 볼 수 있다. 중략(中略). 한 산맥은 장백산의 조종이 되고 : 一 脈 祖 長 白 / 천 리에 걸쳐 사막을 누르고 있다 : 千 里 鎭 沙 漠. 중략(中略).》고 하였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산천(山川)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산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막았다. 서북(西北)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무려산(醫巫閭山)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明)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지어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➊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가짜다. 짝퉁이란 이야기다. 이것을 무엇으로 증명(證明)하느냐? 바로 이거다. 《본래(本來)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산세(山勢)는, 2,000리에 연달아 뻗어 있는데 ,북진묘(北鎭廟)에 올라가면 그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산세(山勢)는 겨우 200 리에 뻗쳐있다.》 고 하였다.
➋ 또한 『<일천(一千)여리에 걸친 사막(沙漠)>이 없으니, 그 <사막(沙漠) 일천(一千)여리>를 막을 일도 없다.』 또한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장백산(長白山)은 그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다. 장백산(長白山)은 동북(東北)에서 서남(西南)으로 뻗어 내린, 장백산맥(長白山脈)의 한 봉우리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은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山脈)에서 분기(分岐)한, 작은 줄기의 봉우리(867m)일 뿐이다.
➌ 진산(镇山)이란, 도읍지(都邑地)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定)하여 제사하던 산(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진(北鎭)이라는 명칭(名稱)은 북방(北方)의 진산(鎭山) 곧 북방(北方)을 수호(守護)해주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란 뜻에서 유래(由來)한다.
➨ 그런데 북(北)쪽 방향(方向)이 웃기지 않는가? 「중진(中鎭)이, 기주(冀州)의 곽산(霍山) : 산서성(山西省) 임분 곽주(霍州)시」라고 한다면, 북진(北鎭)은 그곳의 북(北)쪽 지방이 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긴데, 생뚱맞게 동북방(東北方) 저 멀리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니…‘짝퉁’이란 증거(證據)다.
곽산(霍山)의 북방(北方)에 있는 대청산(大靑山) 2,337m 이나, 동북(東北)의 항산(恒山) 2,016m 등이 있다. 특히 대청산(大靑山)은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황하(黃河)가 대청산(大靑山)에 가로막혀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 성계(省界)로 직각(直角)으로 꺾여 흐르는 곳에 있어, 토묵천(土黙川)평원(平原)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동북방 멀리, 별 볼일 없는 외진 곳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북방(北方)을 수호(守護)하는 북진(北鎭)을 두었다고! 순(舜)임금이 지하(地下)에서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다.
➍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 북진(北鎭)은, 짝퉁이란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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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계기정(燕 薊 紀 程) ○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 8일 : 《風寒.二道井五十里午炊.小黑山五十里宿.自一板門以後.遙見點點山勢.出沒隱映於野色迷茫之際.毉巫閭支派也.遂橫亘千餘里.爲北方之鎭.一出遼野.風沙撲人.眯目噤口.殆不可堪.而此地尤甚.唐太宗征遼時.馬尾曳柴.攀援以過云.築路自永安橋.至胡家窩棚而止. :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이도정(二道井) 5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소흑산(小黑山) 50리를 가서 잤다. 일판문(一板門) 이후부터는 멀리 여기저기 산줄기들이 들 빛이 아득한 어름 에 아른거리는 것이 보이니 의무려(醫巫閭)의 지맥이다. 드디어, 1000여 리에 가로 걸쳐 북쪽의 진(鎭)이 되어 있다. 한번 요동(遼東) 벌로 나오니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을 갈기어 눈은 어둡고 입은 벌리지를 못하여 거의 견딜 수가 없는데, 이곳이 더욱 심하다. 당 태종이 요동을 정벌할 때 말꼬리에 섶을 끌리어 그것을 붙잡고 의지하여 지나갔다고 한다. 쌓은 길이 영안교(永安橋)에서 호가와붕(胡家窩棚)까지 이르러 그쳤다.》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이 가로질러(橫) 1,000 여리에 걸쳐있어, 북쪽의 진(鎭)이 되고 대(大)사막(沙漠)을 가로질러【좌우(左右)로】 막고 있다.」는 말은, 현재(現在)의 지리(地理), 지형적(地形的)으로 볼 때 불가능(不可能)하다.
현(現) 의무려산(醫巫閭山)은 : 「사막(沙漠)은 없고, 산세(山勢)는 불과(不過) 2백 여리에 걸쳐 있을 뿐이다.」 위에서 말하는 곳은 :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 또는 하북성(河北省) 땅이 아니다>라는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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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燕轅直指 3 留館錄 상 / 임진년(1832, 순조 32) 12월 24일 / 몽고관기(蒙古館記)
《蒙古館記:蒙古.或稱㺚子.元順帝北走.其後分爲四十八部落. : 몽고는 더러 달자(韃子)라고도 한다. 원 순제(元 順帝)가 북쪽으로 달아나고 난 뒤에 48부락(部落)으로 나뉘었다. 長城北醫山以外.皆其地方也.無五穀宮室.其人常騎橐駝.逐善水草居之. :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 의산(醫山) 바깥은 모두 그들의 땅이다. 그곳에는 오곡(五穀)과 궁실(宮室)이 없으며, 그 사람들은 늘 낙타(駱駝)를 타고서, 좋은 수초(水草)를 좇아 산다. 以穹氈爲屋.以射獵爲業.噉肉飮血.蓋北藩習俗.自古然也. : 궁전(穹氈)으로 집을 삼고 사냥으로 업을 삼아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 이런 것은 대개 북번(北藩)의 습속으로서, 옛날부터 그러하였다.》고 하였는데,
➊ <蒙 古. 或 稱 㺚 子 : 몽고(蒙古)는, 혹은 달자(韃子)라고도 한다.> 그렇다. 몽고(蒙古)는 곧 달자(㺚子) 또는 달자(韃子)라고도 하며, 달단(韃靼 : 타타르)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동방(東方)인종(人種)이 아닌, <러시아계 인종(人種)>으로, 오늘날에는 우랄산맥(山脈) 서(西)쪽의 타타르공화국(共和國)이 있다.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봐도 당시(當時)의 달단(韃靼)들은, 바로 흑해(黑海)와 카스피 해(海)주변에 있었다.
우리들에게 가해진 의무교육(義務敎育) 또는 공교육(公敎育)이란 미명하(美名下)에 벌어진 세뇌(洗腦)된 역사교육(歷史敎育)으로 말미암아, <몽고(蒙古)하면 떠올리는 것이 오늘날의 몽골 땅이다.> 그러나 본시(本是)의 몽고족(蒙古族)은, 색목인(色目人)이며, 이들의 선조(先祖)는 인종(人種)으로 보면, 오손(烏孫)계열이며, 또한 그와 같다.
타타르(韃靼)공화국(共和國)은, <우랄산맥과 모스크바>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타타르가 몽고족(蒙古族)이라면, 왜 이들은 독립(獨立)된 동아세아(東亞世亞) 몽고(蒙古)땅에 돌아오지 않고, 구라파(歐羅巴)지방에 눌러앉아, 자치공화국(自治共和國)을 만들었을까? 그곳이 그들의 고향(故鄕)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아세아(東亞世亞)인이, 아닌 구라파(歐羅巴)계열(系列)의 백인(白人)계였기 때문이다.
원(元)의 마지막 왕(王)이었던 “순제(順帝)”는, <대륙(大陸)의 서북(西北)쪽인 사막(沙漠)의 북(北)쪽으로 도주(逃走)했다.>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으로 도망(逃亡)간 것이 아니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지 말자.
➋ <長 城 北 醫 山 以 外. 皆 其 地 方 也. :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 의산(醫山) 바깥은 모두 그들의 땅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 시황제(始皇帝)때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하북성(河北省)을 지나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진실(眞實)을 말하는 것일까?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 무리들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곳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고사하고, 일반적(一般的)인 성(城)도, 존재(存在)하지 않는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땅이었다. 요녕성(遼寧省)에「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짝퉁>을 만들어 놓아야만 그 동남(東南)쪽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처박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가짜이며, 짝퉁이다. 그 증거(證據)는,
「천리(千里)에 걸쳐 사막(沙漠)을 누르고 있다 : 千 里 鎭 沙 漠」 고 했기 때문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이나 동(東)쪽이나, 서(西)쪽이나 남(南)쪽이나 그 어느 곳에도, 특이지형(特異地形)인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으며, 더더구나 대막(大漠)이라고 불리는 수천 리(數千里) 사막지대(沙漠地帶)는 ,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곳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2천리(千里)”라고 하였음.
➨ 지형도(地形圖)를 놓고 보면 :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北)쪽은,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山脈)이 뻗어내란 고원지대(高原地帶)이다. 이곳에 ‘달자(㺚子)=달자(韃子)=달단(韃靼)’족들은, 그림자도 비출 수 없었던 자(者)들이다.
다만 이곳 의무려산(醫巫閭山) 북방(北方)에 최근(最近)의 환경파괴(環境破壞)로 인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일부(一部) 형성(形成)되었다고 하는데, 科爾沁沙漠(과이심사막)이라고 한다.
➌ 科爾沁沙漠(과이심사막) : 중국 길림성 남부의 서요하강 중하류에 있는 사막. 면적은 5만 600㎢이다. 중국의 4대 모래 땅 가운데 하나로, 정식명칭은 沙地이다. 吉林省과 遼河省 사이, 西遼河의 중하류에 위치한다. 한반도에서도 가까워 신의주시(新義州市)에서 북서쪽으로 500㎞도 떨어져 있지 않다. 유동사막(流動沙漠)으로, 『1950년대 이전(以前)에는 초원(草原)지대였으나, 중국(中國) 정부가 1980년대까지 대규모(大規模) 개간(開墾)을 하면서, 초원(草原)이 파괴(破壞)되고, 빠르게 사막(沙漠)화가 진행(進行)되었다.』특히 197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한반도(韓半島) 쪽으로 남동진해 30㎞ 주변이 이미 황무지로 변했고, 4㎞가 사막화되었다. 더욱이 지구온난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새로운 황사의 발원지로 떠오르면서 국제연합에서도 유동사막 재해지역으로 선포한 곳이다.<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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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중요(重要)한 것은, <의무려산(醫巫閭山)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明)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天)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지어 준 것이다.>는 거다.
곧 <횡(橫 : 東西)으로 2천리(또는 일천리)에 뻗어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北)쪽 사막(沙漠)에 살고 있는 자(者)들은 이(夷)=오랑캐요, 그 남(南)쪽은 화(華) 곧 중국인(中國人)들이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화이(華夷)를 나눴다>는 이야기다.
➨ 그렇다면 :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남(南)쪽은 중화(中華)요, 북(北)쪽의 사막지대(沙漠地帶)엔 이적(夷狄)이 있다.>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정남(正南)은 요동만(遼東灣)이고, 요동반도(遼東半島) 끝이며, 그 동남(東南)쪽은 반도(半島) 땅이요, 서남(西南)쪽은 대륙(大陸)의 산동성(山東省)이다. 도대체 어디가 중화(中華)인가?
이것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이름만 같을 뿐, 짝퉁이다 보니, 이런 결과(結果)가 도출(導出)되는 거다.’ 대륙(大陸) 서북(西北)지방에 있었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으로 이동(移動)시키다 보니, 이런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역사(歷史) 소설(小說)이 되어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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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퉁인 줄도 모르고, 조작(造作)된 것인 줄도 모르고, 왜곡(歪曲)된 것인 줄도 모르고…반도조선(半島朝鮮)을 주창(主唱)하는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들!
반도(半島)땅의 기득권(旣得權) 세력(勢力)들은, 대부분(大部分) 과거(過去)의 친일파(親日派)들로써, <지들이 불리(不利)하면 종북(從北)타령이요, 좌파(左派)타령으로, 전문(專門)몰이꾼들을 동원(動員)하여, 반대세력(反對勢力)들을 색출(索出), 제거(除去)해 버리는데, 고문(拷問)과 세뇌(洗腦)작업(作業)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기도 하고, 그 후유증(後遺症)으로 모진 고생(苦生)을 하면서,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境遇)도 많다.>고 한다. 특히 국가기관(國家機關)인 공안(公安)세력(勢力)들이 전문(專門)몰이꾼들이 되어, 이 나라를 친일파(親日派)들이 득실거리는 나라로 만들었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것일까? 열도(列島) 애들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갈 건가? 도대체 뭘 어쩌자고 일제(日帝)가 만들어준 매국(賣國)사학(史學)에 매달리는 것일까?
➨ 이해(理解)를 넓혀보려 아무리 노력(努力)해도, 이해(理解)되지 않는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이를 어쩐다?
2016년 12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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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도사학은, 뭘 어쩌자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2등국민으로, 친일파들을 기득권세력으로 추앙하며, 이들의 놀이터 앞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건가?
대대손손 친일파들의 더러운 이야기들을 되뇌이며 살아갈 건가?
참 답없는 이 나라, 오늘의 현실! 뭘 어쩌자는 것일까!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지, 친일파들이 아니다.
주인답게, 이제는 성숙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자.
北海를 長白山이라 하였다면 ,1685~1730련까지 燕慶에 크고작은지진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궁궐 (장춘원
기춘원,이화원)이 무너지고 이때 "北海"의 물이 쏟아져들어와 통주강이 범람하였고 , 淸皇이 무려 일련여간이나 장막속에서 생활해야할 정도로 그 피해가 대단하였다고 실록에 있는데 북해의 물이 장백산 설원이 만든 물이었다면 어느정도는 이해가됩니다. 북해가 장백산을 일컬음이라. 어떤분은 북해가 북극 바다물이라고비정하던데 오늘 북해는 장백산임이 밝혀졌으니 이제연경지진이 이해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