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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화 의원=(안부웅 증인에게) 『월간조선』 88년 7월호 조갑제 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2백2페이지에 있는 내용에 보면 오후
2시께(실제 발포시간과의 차이는 착오에 의한 것이다. 편집자)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 증인은 왜 사실과 달리 얘기합니까.
- 안부웅 증인=그 내용이 달리 나왔는데. 31사단 경계병력이 가지고 있던 실탄을 얻은 것입니다.
- 이인제 의원=여기(인터뷰기사) 보면 11여단은 여단에서 실탄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11공수의 실탄이 헬기로 실려가지고 와서 예하 장교 하사관들에게 분배된 것입니다. 그것은 증인이 부정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조갑제
기자와 대대장(안증인)이 시인해 주고 있으니까. 이것을 보면 판단이 그래요.
- 이해찬 의원=실탄인수인계에 관해서 좀더 확실히 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 임정복 증인=그때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장 이용덕 중령하고 96연대 작전장교를 했던 홍 대위를 만나서 확인하니까 철수
할 때 실탄 2박스(1천6백 발)를 어느 소속 공수부대인지는 몰라도 인계해주고 철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광주매일 『正史5?18』 1995,
322-323).
이렇게 하여 광주청문회는 목소리 큰 사기꾼들이 큰소리치는 청문회가 되고 말았으며, 작금의 윤창중 사태보다도 훨씬 더 심하게 언론들이 사실 왜곡에
합류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보도하였다. 그때 5.18 사기꾼들의 기세가 그토록 당당하였는데, 그 누가 반박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조갑제
기자가 “반박되지 않는 거짓은 진실이 된다”고 트위터에서 말한 그대로 되고 말았다.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의 근거도 조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이다.
31사 한동석 중위가 헬기 타고 철수하면서 200 발의 경계근무용 실탄을 넘겨 주었어도 일반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분배되지 않고 장교들에게만
공포탄 발사용으로 분배되었다.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지 않은 발포 명령이라는 것은 없다. 오후 한 시 반경부터 동구청 인근에서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어도 그것은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울 목적으로 시민군(혹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가톨릭센터 옥상에 숨어서 쏜 총에
맞았던 것이지 도청 쪽에서 날아간 총에 맞은 것이 아니었다.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발포 명령도 도청앞 집단 발포도
없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마치 사병들이 연발로 집단 발포할 실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런 거짓말의 근거는 광주청문회 때
“반박되지 못한 거짓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18사기꾼들의 목소리가 광주청문회 때 기세당당하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된 것은 조갑제
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가 증거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5.18 사기꾼들의 거짓말의 모래성은 조갑제 기자의 기고문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조기자의 기사는 확고한 반석이었는가?
http://www.study21.org/518/books/chogabje.htm 하단에서 보듯 그 기사가 그대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제목으로 2007년 10월 3일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책 원본의 인용문 중 앞 문장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렸다.
조갑제 기자가 책에서는 이 문장을 슬쩍 빼버렸을 때 광주청문회 때 5.18 사기꾼들이 위세당당하게 인용했던 말도 없어졌다. 자, 그러면 5.18
진영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도청앞 집단발포가 있었다고 계속 사기치려면 사병들에게 지급할 실탄이 있었음을 입증하여야 하는데, 조기자의
2007년판 책에서 그 문장이 빠졌으니 이제 무엇으로 입증하겠는가?
조갑제 기자는 왜 2007년 책에서는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라는 문장을 빼어버렸을까? 그것은 1988년판
자신의 픽션소설을 섞었으나, 그것은 터무니 없는 허위임을 자각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조갑제 기자는 자기가 광주청문회 직전 했던 거짓말을 슬쩍 없애기 위해 세 개의 문장을 통째로 없애 버렸다. 그런데 안부웅 중령의 말에서 앞의 말
절반을 없애 버리면 그 인용문은 전혀 딴 말이 되지 아니하는가? 5.18 담론에서 문제의 핵심은 발포명령을 내리기 위해 31사 헬기가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실탄을 수송해 주었느냐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발포명령을 내리기 위해 실탄이 수송되었다면 시민군 무장이 조금이나마 명분을
얻는다. 그러나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면 금남로를 누비던 무장단체는 한낱 무장폭도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조갑제 기자는 5.18 연구를 가로 막으며, 진실 탐구를 방해하지만 이것이 그냥 이렇게 끝날 문제인가? 31사 헬기가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실탄을 수송해 주었느냐 않았느냐의 문제는 광주청문회 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지금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이 질문이 명확하게
답변되지 못하면 광주사태 폭동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처럼 중요한 문제인데, 왜 조기자는 2007년 책에서는 그 세
문장을 빼버렸을까?
가장 중요한 세 문장에서 조갑제 기자가 거짓말을 끼어넣었다가 송두리째 빼버릴 때 안부웅 중련의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 만약 계엄군은
말을 못하게 할 것이며 계엄군 말은 기자 맘대로 말을 바꾸어 보도하다가 송두리째 절반을 삭제할 것이라면 광주청문회는 무엇하러 하였는가? 증인은
조기자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왜 통일민주당과 평민당 의원들은 조기자가 꾸며낸 거짓말을 맹신하라고 강요하였는가? 청문회를 그렇게 진행시킨
다음 여론몰이로 국민을 속이고, 5.18 재판용 책도 그렇게 출판하여 5.18 재판을 진행하였으니 이것이 끝인가? 아니다. 이것은 조기자가 우리
입을 막으려 한다고 그냥 끝낼 일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부웅 중령의 말은 철수하는 31사 부대가 실탄통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5.18 사기꾼들의
방패 역할을 해 주었던 조갑제 기자 기사의 수명은 이제 다되었으며, 그 거짓의 실체가 드러났다.
고의적이었든 실수였든 간에 조갑제 기자의 기사에 오류가 있었음이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입증된다. 그러면 조기자의 언론 횡포로 인해 발언권이 탄압을
받고 있는 탈북자들을 위해서도 말을 해야 한다. 도대체 탈북자들의 5.18 증언 중에서 단 하나라도 오류가 입증된 적이 있는가? 그분들의
발언권을 탄압하기 이전에 그분들도 조기자의 5.18 기사처럼 기록이나 말에 오류가 있었던 사례가 있었는지 입증해 달라.
조갑제 기자는 탈북자들의 증언에 근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5.18 사기꾼들이 31사 헬기가 실탄을 조선대로부터 도청으로 공수했다고 말하는 주장에는
근거가 있는가? 그런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맹신하도록 강요되어 왔기에 이처럼 5.18 이 왜곡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33주년은 이제라도 그 거짓 주장에 반박하여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반박을 가로 막으시는가?
우리는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실린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조갑제 기자가 조작한 인용문이 선의의 실수려니 이해하려 하였으며 그 기사로
인해 광주청문회 때 진실이 밝혀질 기회가 망쳐진 것도 관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기자께서 적극적으로 5.18 사기꾼들을 지원하며 우리의
발언권을 억누르시는 것을 볼 때에는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군이 5월 21일 20 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데, 사실상
전쟁 준비 행위였는데, 이것은 보다 객관적 진실 규명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 날 광주 일원에서 전개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상세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들어본 후 국민대토론에서 결론이 어떻게 나든 들어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33년만에 찾아온 공정한 국민대토론의 기회를 또 망쳐 놓으시다니!
국민대토론이 없으면 다수의 국민은 5월 21일 왜 그리고 어떻게 금남로 일대 시민군이20 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1988년 때처럼 안부웅 중령의 말을 바꾸고 조작하여 보도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의거한 설명이 없으면 아마도 그 날의
무장단체에게 시민군보다는 무장폭도라는 호칭이 적절할 것이다.
2013년 5월 23일 역사학도
"윤한봉의 위장구호에 낚인 인요한과 조갑제"
http://cafe.daum.net/issue21/3IBb/775
황석영의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및 지난 5월 15일 종편 시사프로그램에서 이주성 박사가 한 증언과 일치하는 증언, 즉 광주사태 때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는 뉴스를 북한에서 들었다는 납북 여배우 최은희의 증언 동영상 보기
http://cafe.daum.net/issue21/3IBb/737
경제풍월 5월호 인터뷰기사
http://www.econotalking.kr/xe/index.php?document_srl=88724&mid=interview_2010
"조갑제 기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
http://cafe.daum.net/issue21/3IBb/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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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발견하고 방금 가입했습니다. 일단 궁금한게 사실왜곡이 어떤 부분이란 건가요
세 문장을 끝부분만 옮겼으나 뜻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죠
글구 김목사님 쓰신 책은 아직 안읽어봤습니다만 당시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거는 잘못 아시고 계신 거라 판단됩니다.
감사합니다.
님의 부친께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이 누군지 아셨느냐고 물으시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아니 그 부분은 제가 당시 삼촌으로부터 직접 들은 기억이 있고, 누가 실세냐가 관심대상이었습니다. 이것도 팩트. 다만 포인트로는 마이너합니다만. 다리밑에 거지 때들이 있더라는 둥 연고대생이 왔다는 둥 이런 거가 중요하겠죠.
글고 당시 운동권이 종북성향 계열도 있었을 거라 봅니다. 위수김동 친지김동이란 말이 있다는 걸 처음 들어봤거든요.
누가 실세냐는 나중에 나오는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만약 광주사태 이전에 그것이 관심 대상이었다면 학생들이 "최규하 물러나라" "신현확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을까요?
목사님이시군요... 3월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데모의 구호는 "전두환과 신현학물러가라" 그리고 "김대중 석방하라"였습니다. 이는 당시 사진기록과 동영상과 많은 증언들로 밝혀졌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매일 서울 전역에서 벌어진 데모대열에서 이를 구호로 외쳤던 함성들이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가두시위는 5월 13일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학원내 시위만 있었습니다. 3~4월의 시위구호는 "어용교수 퇴진"이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기사를 시인하고,고백할 용기도 없는 그릇이었군요.지금까지 그의 기사, 발언들은 진정성, 신뢰를 잃었습니다. 배신감마저 듭니다.요즘 , 5.18 북한군 개입을 연일 극구 부인하는 글들의 저의를 알 것 같습니다.
닉네임..역사학도..지조와 절개..수 많은 박해에 맞서서 의롭게 피어난 성삼문 같으신 분! 님의 글들을 보니 정말 존경습럽니다^^* 응원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 카페 가입해군요 ㅎㅎ
과찬의 말씀에는 몸둘 바를 모르겠으나 숙희님의 응원 한마디가 큰 격려가 됩니다.
ㅋㅋㅋ 당신이 진정 신의 말을 따르는 성직자인가?
당당하게 언론매체에 얼굴 좀 보여 주십시오.
에라이.. 썩은 냄새 풍기는.. 잡탕 쓰레기들..... 왜이리 많노?
힘 내셔여 학도님...
네~
5.18은 중요인물 조 사천씨를 홍보용으로만 이용하였지
그 분의 일지는 감쪽같이 속였기때문에 37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분단국가인 남한은 촛불시위와 태극기시위의 남남갈등으로 다투고있는것입니다..
조 사천씨가 총에맞은것을보고 호남인들은 전 두환의 발포명령이라 트집을잡고있으나
이미 다 드러난지금 누가왜곡시킨단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