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싶은절|불암산 학도암(서울노원구)| 작지만 큰 도량
김유식의 펜화로 찾아가는 사찰기행] <7> 서울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명성황후 기도처로 서울시민의 휴식처
불암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날아와 노닐었다는 전설
암벽에는 거대한 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발길 멈추게 해
학도암과 마애관세음보살좌상. Pen drawing on paper, 74x56cm.
학도암은 절 주위의 불암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이곳에 날아와 노닐었다고 하여 ‘학도암’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중랑구와 남양주 별내를 아우르는 위치에 있으며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 등장할 법한 멋진 바위들이 많은 불암산 자락에 위치한 조그마한 이 암자는 건강산책로를 따라 당고개 아파트 단지까지 30분 정도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고즈넉한 사찰이다.
이 산책로를 올라가다 보면 불암산의 명예산주인 최불암 선생님의 글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학도암은 차량으로 진입하려면 도로가 좁아서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 보면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흐르며 멋진 바위들이 주변에 포진해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곳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임이 틀림없다.
사찰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면 지장보살님 좌상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계신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전각이 별로 없지만 대웅전 뒤편 암벽에는 거대한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이 새겨져 있어서 여기서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게 만든다.
마애관세음보살좌상으로 올라가는 입구바위에 이전 주지스님들이 쓰시던 목탁을 걸어놓아 학도암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마침 절을 찾았을 때 무심히 핀 상사화가 애처롭게 피어 있어 속세와의 인연도 부질없는 것임이 느껴지는 순간 이를 펜화로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웅전과 거대한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이 바라다 보이는 구도는 이 절을 대표하는 펜화에 적합한 장면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광을 담기 위해서 대웅전 뒤편 바위에 돋을 선각으로 새긴 이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을 자세히 알현하러 올라가 보니 과연 거대한 규모였다. 높이는 건물 4층 정도인 13m가 넘고 우리나라에서 열손가락에 꼽히는 거대한 작품에 속한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연화좌대의 결가부좌한 모습이 상당히 근엄하다.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의 상징인 아미타불이 새겨진 화관을 쓰고 있고 보살상이 조각된 각 부분은 전체적인 균형미가 있어 매우 자연스럽다.
화관 테두리 양편에는 귓전 위에서부터 한 줄씩 보주를 단 마름모 모양의 영락이 양쪽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어 디테일한 세련미가 돋보인다. 하지만 상호의 윤곽은 비교적 약하게 새겨졌고 눈은 가늘고 길며 코는 두툼하고 입술은 아주 얇고 작은 편이다. 왼손 손목에 장엄된 만자무늬(卍)가 새겨진 두꺼운 팔찌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등 석공이 제법 솜씨를 자랑하려 한 것 같다. 나는 이 빼어난 수작을 석양 빛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 속에서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 절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아서 조선 후기 인조 때 무공스님이 불암산의 한 암자를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창건한 사찰이라 한다. 주지 묘장스님에게 들은 바로는 이 절은 조선 후기 고종 때 벽운스님이 중창하고 일제강점기에 성담스님이 주지로 계시면서 불상을 조성하였지만 6·25전쟁 당시 절이 소실되었고, 이것을 1965년 주지 명호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불교TV ‘생활 속의 깨달음 생각’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사찰은 서울에 있으나 특이하게도 김천 직지사의 말사라고 한다.
이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의 조성 기원을 알아보니 매우 흥미로웠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조선 말 명성황후가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을 하게 되었지만 고종은 귀인 이 씨만을 가까이 하였고 완화군까지 낳았는데 첫 아들이었기에 귀인 이씨는 고종 및 흥선대원군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때문에 고종은 명성황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녀는 늘 독수공방할 수 밖에 없었다. 명성황후도 왕자를 낳기를 바랬던 터라 궁녀의 권유를 듣고 명당으로 알려진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상을 새기기로 했다.
목탁과 상사화. Pen drawing on paper, 33x24cm.
이에 명성왕후는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었던 석공을 참여시켜 학도암에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셋째까지 출산하게 되는 경사를 맞게 되는데 셋째는 후에 순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인 이 씨는 궁에서 쫒겨나게 되었고 명성왕후는 계속 고종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게다가 고종의 사랑은 지극해져서 명성왕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를 당한 후에도 매일 홍릉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하니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의 영험을 짐작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절에는 석굴형식으로 조성된 약사전이 있다. 석굴 안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어 매우 특이한데 이는 좁은 절터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석굴 형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과 친구의 무병장수를 빌며 석굴을 나서니 삼성각이 보인다. 삼성각에 올라 서울 시내를 굽어보는데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경내는 작고 아담한 사찰이라도 멋과 여유로움은 가히 제일이다. 내려오는 저녁 산책길. 보이는 서울의 아름다운 석양을 감상하는 것도 잊고 계속해서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로운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usikm@naver.com
[불교신문 3713호/2022년 5월3일자]
김유식 / 펜화가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