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자리
1998년 12월 14일
미주는 직접 만들어서 말려 놓은 커피 잔 세 개와 흙인형을 로켓처럼 세워 놓은
고구마통 같은 초벌통에 넣고 구웠다.
물론 미주는 코트를 입고 모포를 두른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모든 것은 승우가 다 했다.
삼각 발판이 달린 초벌통은 내부가 4등분으로 나뉘어 있어.
높이가 각기 다른 인형을 크기별로 넣을 수 있었다.
흠이라면 넣을 게 별로 없다는 거였다. 세 개의 커피 잔은 두 번째 칸에, 인형은 세 번째 아래칸에 넣었다.
엄마 인형, 아빠 인형, 아기 인형, 물론 그건 미주가 뱃속의 아기에게 주는 선물이 될 터였다.
승우는 드럼통 위의 두껑을 열고 창고에서 왕겨 포대를 가지고 와 통째로 쏟아 부었다.
바짝 건조된 왕겨가 밑에서부터 차올랐다. 처벌통을 다 채우는 데 두 포대하고 반이 들었다.
맨 위의 짚 한 뭉치에 불을 붙여 넣고 두껑을 닫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왕겨는 열네 시간 정도 위에서 아래로 아주 천천히 타들어 간다고 했다.
아래에 불을 넣으며 삽시간이지만 빼곡한 왕겨들 사이로 불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주철 선배가 말해 주었었다.
온도는 500도에서 600도 사이로 오른다. 그 정도의 온도면 인형을 단단히 굽는 데는 충분하다.
미주는 초벌구이에는 휠씬 더 고열이 필요하는 정도밖에 몰랐다. 커피 잔도 잘 구워지면
분홍빛이나 담홍빛으로 제법 단단할 것이었다. 유약처리를 하고 재벌을 하지 않아
실제로 커피을 타서 마실 수 없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운동장에는 횟가루로 세계 전도가 그려져 있었고,
두 개의 나무 책상을 붙여서 식탁처럼 만든 곳이 세 군데나 있었다.
미주가 나흘 전 지나가는 말로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하는 소리을 듣고 그녀가 잠든 사이에
승우가 횟가루로 운동장에 세계 전도를 그려 놓았던 것이다. 5대양과 6대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지금은 식탁이 차려진 곳은 프랑스 파리와 러시아의 모스크바,
미국의 뉴욕이었다. 전부 다 대도시였다.
꼭 가 보고 싶었는데 못 가 본 곳들이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음악이 풍성한 노천 카페에서 커피을 마심고 연극을 보고,
오페라를 관람하고 거리의 악사들의 연주도 듣고 다양한 음식도 맛보고
고층 빌딩 숲과 눈 덮인 광활한 대지를 보고 싶었었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렸지만
미주는 휠체어를 타고 운동장에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곳곳을 여행했다.
미주가 뭔헨에 멈춰 서면 승우는 해박하게 독일과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그곳 출신 예술가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러면 미주는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을 홀짝이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우는 특히 여러 나라의 민속 음악과 춤에 정통했다. 장화 모양으로 생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가곡과 아리아를 부르기도 했고, 아름다운 항구 나폴 리가 낳은
작곡가와 팝 가수에 대해 소개했다. 그렇게 미주는 승우가 가 보았고 공부하고 익힌
30여 개의 나라를 가 볼 수 있었다.
미주가 다닌 곳은 승우가 가슴에 품고 있던 드넓은 세계이고 마음이었다.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정란은 상운 페교를 다녀갔다. 가지고 온 의약품들을 전달하고
잠시 차 한잔을 마신 후 정란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정란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과 한껏 부풀어오른 배
말라서 더욱 껑충하니 키가 커 보이던 승우, 하지만 그들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정란을 맞았다.
지옥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한데 얼굴이 그렇게 평화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경악스러웠다.
두 사람은, 아니 뱃속에 든 아기까지 세 사람은 아주 단단하게 한 몸으로 뭉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운 페교는 두 사람만의 완전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정란은 어쩌면 미주가 선택한 것이 처음부터 옳았고
정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미주는 자신의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강력한 모르핀에 의해서만 잠깐 잠들 수 있었다.
잠시 후 깨어나면 공기에 침이 든 것처럼 온 몸이 따끔거렸고, 구둣발로 밟아 대는 듯이 욱신거렸고,
양철로 속을 긁는 듯 쓰라렸다. 너무나 아파서 하루에 겨우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나머지는 뱃속에 든 아기를 싸안은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승우가 없었다면,
남편이 없었다면 이 혹독하고 외롭고 처참한 전투를 미주가 결코 치러 내지 못했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승우는 미주의 분신이었다. 한 밤중에 눈을 뜨면 어김없이 승우가 곁에 있었다.
때로는 한없이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때로는 옆에서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자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언제나 잡혀지는 거리에,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승우는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따라 함께 걸어온 사람. 그가 가여웠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그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는 한 남자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미주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미주는 인정했다.
하루하루가 절박했지만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미주가 임신한 사실을 처음 말했던 날 밤, 승우는 자신이 오리온자리를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말했었다.
오리온자리?
응 별 네 개가 바깥에 네모나게 위치해 있고 그 네모 속에 한줄로 세 개의 별이 일렬도 반짝이잖아.
근데?
이럴 때부터 난 별이 보이는 곳에 가면 늘 서쪽 하늘에 기울어져 있는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곤 했어.
겨울 성좌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에 항상 봤던 기억이 나고...........
난 참 행복하게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오리온좌는 아주 아름다운 집과 가족을 뜻하는 거라고 해석했거든,
그러니까 바깥 사각진 네 개의 별은 집이고 세 개의 별은 그 집 속에 든 가족이야. 엄마 별, 아빠 별, 아기 별!
오리온자리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역시 사람은 운명이 있나봐.
꼭 그렇게 됐잖아. 우린 집이 있고 미주 당신과 나 그리고 아기........
그 말에 목이 메어 와 고개를 돌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의 소박하고 단정한 운명을 자신이 망쳐 놓았다는,
그때 미주는 슬며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하늘에 있는 우리 집 주소는 오리온자리구나.
그렇지.
그러면 만약........누가 먼저 죽으면 나중에 죽는 사람이 오리온자리로 찾아오면 만날 수 있겠네?
그렇지. 우리는 하늘에도 집을 정해 놓았으니까 죽어서도 서로를 찾지 못해 헤맬 염려는 전혀 없는 거지.
아아, 정말 생명 보험보다도 더 멋진 거네. 갑자기 나 기분이 아주 좋아지고 힘이 나는 것 같아.
그렇니? 진작 가르쳐 줄 걸 그랬다.
만약 내가 먼저 가면......오리온 집을 예쁘게 단장해 놓고 기다릴게,
승우 씬 다른 여자 집 문을 노크하지 말고 곧장 찾아와야 해 알았지.
그러긴 하겠지만...........이제 기분이 좀 우울해진다. 아기를 가진 여자가 하는 말로선 좀 그래!
그런가?
분위기 파악을 못했네, 나 어쩌다가 감상적일 때가 있잖아.
풀풀풀 웃으며 넘겼던 그 말들이 가슴을 점점 저리게 만들었다.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하고 자신이 죽고 난 뒤 승우 씨는 겨우 서른두 살이 아닌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젊고 살아야 할 길이 너무 멀다.
더군다나 남자 혼자서 아기를 어떻게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요 며칠 동안 수시로 그런 생각이 떠올라 미주는 자꾸만 침울해졌다.
그때 자기가 참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죽은 뒤에도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는 것이 몹시도 서글프고 비참했다.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바꾼 아기가
생판 모르는 낯선 어떤 여자의 손에서 길러진다는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계모! 계모 밑에서 주미가 자라난다면! 그 생각만 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고 싶었다.
주미가 어는 낯선 여자에게 뺨을 얻어맞고 우는 모습, 머리칼을 쥐어뜯겨 비명을 지르는 모습,
더러운 양말을 신고 머리도 빗지 않는 초라한 모습,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열리지 않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모습......... 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10대에는 가출을 할 것이고,
불량 소녀가 될 것이고 몸과 마음을 마구 굴릴 것이고 술과 담배에 찌들 것이고...........
만약 하늘에서 딸의 그런 모습을 내려다봐야 한다면! 오. 그것보다 더한 형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암이 주는 통증만큼이나 미주를 괴롭혔다. 만의 하나 아기가 겪게 될 고통과 슬픔과
학대를 생각하니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철없으며 자기 기만적이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짓인가 싶어 살이 벌벌 떨렸다.
미주는 극에 달하는 육체적 고통과 극에 달하는 마음의 고통 그 이중의 지옥에 빠져
허덕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승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불신이 사라지고 믿음이 가슴에 자리잡았다.
저 남자는 내가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저 남자는 자기만큼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 주미의 엄마를 만들어 줄 거야.
나보다 주미를 더 사랑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눈부시게 곱고 착한 그녀와 주미.
그리고 저 남자는 정말 지상에 오리온자리 같은 가정을 만들 거야. 난 승우 씨를 믿어.
승우 씨를 믿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아무것도, 그래 정말로 아무것도 없지.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 불안과 공포는 완전히 뿌리뽑히지 않았다.
매번 돌아볼 때마다 쑥밭처럼 삽시간에 일어나 목을 조르는 듯했다.
어제 아침에 넣은 불은 다음날 밤이 새도록 계속해서 탔다. 로켓포 자세인 초벌통은
왕겨가 일으키는 지독하게 집념 어린 불꽃으로 인해 연분홍색으로 달아 있었다.
벼을 찧고 남은 한낱 쭉정이들이 모여서 내는 놀라운 열기였다.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앞으로 쭉정이란 말을 쓸 때는 가려서 써야겠는데!
미주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온 승우가 손을 내밀어 난롯불을 쬐듯 미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야 식겠는걸, 그때나 열어서 당신 작품을 꺼낼 수 있겠어.
작품은 무슨.......하지만 각별하긴 해. 내 마음이 담긴 것들이니까.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저것들을 거실에서 제일 좋은 위치에 올려 놓자.
주미랑 당신이랑 나랑은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을 거야.
미주는 이젠 쉽사리 그런 말에 맞장구 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미주도 승우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주는 휠체얼르 밀어 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그네 쪽으로 갔다.
미주는 휠체어에 앉고 승우는 그네에 앉았다. 저편에 선 거대한 은행나무는 이미 나뭇잎이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미주는 아담한 교사와 담장, 가마, 창문들, 나무들, 연못, 농구대, 횟가루로
세계 전도가 그려진 텅 빈 운동장, 그 위에 놓인 몇 개의 걸상과 책상들을 아주 천천히 돌아보았다.
미주야 그만 들어가자! 바람이 차다.
난 좋은데 나 봐, 온 몸으로 모포로 친친 감고 얼굴만 쏙 빼놓았잖아. 거북이같이.
바람이야..........겨울바람!
시리긴 시리다. 그런데 너무 기분이 좋아. 시린 바람이니까.......
미주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시린 바람이니까 하는
승우 씨, 우리 나중에 여기 다시 와 보자,
물론이지. 주철 선배하고 경희 선배가 돌아오면 아예 기숙사는 우리가 별장으로 쓴다고 말해야겠어.
돈 내라고 하면 돈도 내지 뭐. 난 주미를 낳고 주미가 걸음마를 할 정도가 되면 여기로 올거야.
주미를 보행기에 태우고 은행나무 앞으로 가서 이렇게 말 할 거야. 엄마가 너를 뱃속에 가졌을 때
이 나무 아래서 아빠랑 엄마랑 멋진 춤을 추었단다. 하고 말이야.
그래, 그래야지. 노란 은행잎이 원형으로 깔린 멋진 황금빛 무대였으니까.
그런데 참 대체 나머지 한 그루 은행나무는 어디 있지? 난 그게 궁금했었어.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마주 서 있어야 잎이 열리고 은행이 달리는 거 아닌가?
근데 저 나무말고는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던데?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겠지. 나무들은 바람으로 포자를 날리고 수정도 되니까 그건 왜?
혼자 서 있는 게 좀 그렇잖아.
안 되겠어. 그만 들어가자! 감기 들겠어.
그래도 어제 보다는 덜하다. 어젠 정말 방에서 나오기도 싫었거든, 승우 씨. 근데 오늘 운동 안 했지?
응?
매일 운동장 세 바퀴씩 돈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부실하면 승우 씨라도 튼튼해야지.
우리 주미를 위해서 말이야. 아빠 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어서 돌아!
좀 봐줘라. 낼 아침에 돌게!
빨리 돌아! 금방 돌잖아. 내가 여기서 지켜볼게!
승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휠체어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고 승우는 미주 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박수 세례을 받으면서 그는 교문 가까운
코너 쪽을 헉헉대며 돌고 있었다. 으읍...........읍! 그때 불현 듯 거대한 통증이 미주의 몸을 휘감아 왔다.
미주는 배를 움켜쥐었다가 고개를 뒤로 와락 젖히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잡아뜯으며 새하얀 수증기 같은 가쁜 숨을 내쉬며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이번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할 만큼의 급습이었다. 머리의 두개골을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전기톱의 둥근 톱니로 단번에 절단해 버리는 것 같은. 몸 속에 잠복해 있던 그림자들이
내장 전체를 휘저어 토막내는 것 같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무섭고도 끔찍한
그러면서도 둔중한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양극의 날을 가진 통증이었다.
흐흐읏, 흣......흐읏!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새하앴다. 미주는 휠체어의 팔걸쇠에 놓인 손을 푸드덕거리다가
눈자위가 뒤집어지며 등받이 쪽으로 스러져 까무라쳤다.
첫댓글 무서운 형벌을 받으며 사랑에 의해서 견딘다는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감사합니다
잘봤읍니다~
승우의 사랑이 참 섬세하고 크다는 걸 느끼게하는 글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