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팩션 소설, ‘운종룡 풍종호(雲從龍 風從虎)’ 연재를 시작한다. 김종록 작가가 동양고전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집필한다. 주역은 우주 변화의 원리와 인간사의 길흉을 담고 있는 신비의 철학서다. 주역으로 풀어보면 지금은 하늘과 태양, 남성, 권위를 상징하는 건(乾)의 시대에서 땅과 달, 여성, 포용을 상징하는 곤(坤)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유력한 여성 대선(大選) 주자 박근혜 후보와 여러 남성 대선 주자들 가운데 과연 누가 하늘을 나는 용(龍)이 되어 여의주를 쟁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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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물꼬 트는 자에게 ‘금척’을 주리니 · ⑧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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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통일 물꼬 트는 자에게 ‘금척’(金尺) 을 주리니
지난번 백두옹의 직언은 신랄했다. 대선 후보들이 개혁(改革) 정치를 말하기 전, 그들 자신부터 호랑이처럼 말끔히 털갈이하라고 호령했었다. 백두옹인지 한라봉인지 참 대차다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전에 백두옹은 강권 교수와 함께 경주 이견대를 찾아가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참배한 적이 있다. 신문왕은 100년간 이어진 통일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는데 여기에 대학자 설총(薛聰)의 간언이 주효했다.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꽃을 의인화하여 신문왕을 경계한 설화 ‘화왕계(花王戒)’가 전한다. 꽃의 왕, 모란이 피어나자, 그 화왕을 뵈려고 갖가지 꽃들이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왔다. 문득 붉은 얼굴에 옥같이 흰 치아를 지닌 한 가인이 곱게 단장하고 와서 읊조렸다.
“첩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 하고 맑은 바람을 쏘이는 장미입니다.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때 베옷 입은 늙은 장부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와 아뢴다. “저는 성 밖 큰길가에 사는 백두옹(白頭翁:할미꽃)이라 하옵니다.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왕께서도 그럴 뜻이 있으신지요?”
곁에 있던 어떤 이가 나섰다. “두 사람이 왔는데 왕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가인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찌해야 할꼬?” 화왕은 장미와 백두옹을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여겨 왔건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닙니다. 무릇 임금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이를 멀리하기 마련입니다. 예로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어찌하리오.” 백두옹이 탄식했다. 이에 화왕이 크게 깨우쳤다. “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 되는 그 날은...
‘화왕계(花王戒)’ 에 등장하는 바로 그 백두옹이라면 매섭게 호통 쳐도 뭐랄 사람 없다.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한강 둔치공원을 산책한다.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서늘한 가을이 묻어난다. 그 기세등등하던 폭염의 여름날도 바야흐로 꼬리를 드러냈다. 천기는 이렇게 삽시에 뒤바뀌는 법이다. 흐르는 강물을 보며 역사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혹은 지도자에 따라 꼭 그만큼의 성취를 하며 달려왔다. 따라서 섣불리 너무 큰 기대도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 어젯밤 늦게 강권 교수가 전화로 물어왔다.
“문명의 서진(西進) 현상에 따라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가 일어나고 있고 한반도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온다면서요. 그날이 가까워 옴을 아는 걸까요? 국민은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있는데 왜 백두옹께서는 개혁만을 말씀하시는 거죠?”
-지금 대한민국이 혁(革) 괘 상태라 해도 개혁의 시대인지, 혁명의 시대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네.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의 면면을 보면 그 속에 답이 있지. 시대적 요청은 혁명이지만 그 적임자가 없으면 개혁으로 만족해야 한다네. 개혁만 잘해도 훌륭한 지도자야. 아직 해방(解放)도 안 했으니 혁명은 멀어. “해방된 지가 언젠데요?”
-1945년 8·15 해방을 말하는가? 아쉽게도 그건 미완의 해방일세.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 · 일본 · 미국과 대등한 나라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해방이야. 다음 대통령은 마땅히 통일을 염두에 두고 모든 정책을 펼쳐야만 한다네. 제 6공화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씨를 뿌린 공산권과의 북방 외교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북한 끌어안기로 이어졌지. 그러다 MB 정부에 와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어. 그 5년 동안 남북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달았지. 남북통일 없이 우리 한반도가 인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선도할 수 없다네. 일찍이 초인은 노래했던가.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욱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래 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가시지 않은 목마름 같은, 가실 수 없는 목마름 같은 것이 내 속에 있어 말하고 싶어 하지. 사랑에 대한 갈구가 내 속에 있어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백두옹이시여, 그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해주세요.”
-사랑? 진영 논리에 갇힌 너희가 진정 사랑의 의미를 아느뇨? 집권하면 끼리끼리만 해먹을 속셈뿐인 너희가 아낌없이 줘야 비로소 다시 채워지는 사랑의 본질을 아느뇨? 혹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가슴으로는 증오의 부름켜를 치떨고 있지 않더냐? 이웃을 원수로 여기고 분노의 화살을 당기고 있지는 않더냐? 들을지어다. 이 백두옹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로다. 이 나라 근·현대사의 아이콘이니 부디 나를 역사의 소리로 여기라. 누가 시대적 사명인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겠는가. 그에게 황금의 자, 금척(金尺)을 주리니. 용의 척목보다 더 보배로운 그 금척으로 남북을 재고 온 세상을 재고 마름질 하여 새 시대를 열어라. 그것이 이른바 팍스 코리아나, 얼마나 가슴 떨리는 세상인가.
- 공자는 진리, 예수는 사랑의 화살 쏘다
그쯤에서 강권 교수는 만나기를 청했다. 백두옹은 사직공원 옆 활터 황학정에서 보자고 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백두옹이 오랫동안 활시위를 당겨온 곳이었다. 한강변 산책에서 돌아온 백두옹은 아침을 먹고 늘 해오던 것처럼 독서하고 명상했다. 약속한 시간에 활터에 다다르자 활터를 관리하는 사두(射頭)가 깜짝 반가워하며 백두옹을 맞았다. “어르신, 어인 걸음이십니까?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백두옹은 막 도착한 강 교수를 사두에게 소개했다. “자네 활 좀 잠깐 빌리세.” “활을 쏘기에는 힘이 부치실 텐데요.” 사두가 늙어 꼬부라진 백두옹을 생각해서 주저했다. “걱정 말고 갖다 주게.” 사두가 내어주는 활을 들고 백두옹과 강 교수는 정자 앞에 섰다. 뒤따라온 사두는 백두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세 개의 과녁이 보였다. 백두옹은 깍지도 끼지 않고서 활시위에 활을 먹였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겨눴다. “정말 쏘시려고요?”
“그 사람 참! 천하의 백두옹이 불과 이백 보 앞에 놓인 저 과녁을 맞히고자 여기 온 줄 아는가? 주역에 날개를 달았던 공자는 그 혼란스럽던 춘추시대에 세상을 향해 진리의 활을 쏘았네. 그때는 모두가 비웃었지만 성인이 쏜 화살은 그 후로 자그마치 2500년을 날아서 지금도 우리 가슴에 꽂히고 있지. 중국은 공자 다시 보기를 하고 있고 세계의 지성들이 '논어' 읽기에 빠졌네.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사랑의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 또한 2000년을 날아오고 있질 않은가. 강 교수! 모름지기 대통령이라면 100년 앞은 내다보며 정책을 써야지 않겠나? 고작 임기 5년의 성과에 안달해서야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겨우 밥숟갈 뜨게 됐다지만 지금 이 나라를 어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동의 가치도 지향점도 없이 제각각 흩어져서 돈벌이에만 눈먼 형국 아닌가! 그 사이 사람의 도리가 땅에 떨어져버리고 있다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도 문제네. 창피하지도 않은가!” 백두옹이 핏대를 세웠다. 강 교수는 다가가 그만 활을 내려놓게끔 했다. 강 교수는 보았다. 주름 깊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백두옹의 눈물을.
- 통일 한국이 열강과 대등해져야 참 해방
“어르신, 몸 상하시겠어요.” “젊은 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궁사들은 활터의 과녁을 일장기로 바꿨다네. 저기 한 가지 동(同) 자 과녁 안의 홍심(紅心)이 그거라네. 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려 넣었지. 본래는 맹수의 머리 그림이었거든. 오늘날 이 나라의 분단은 일본에 나라 빼앗긴 데서 연유하네. 어젯밤 전화로 말했지만 진짜 해방은 남북통일 후 열강과 대등해질 때일세. 애오라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건만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니 내 어찌 눈물을 아끼겠는가.” “맞습니다. 사명감이 너무들 없어요.”
강 교수는 백두옹을 부축하며 마루에 앉혔다. 언론매체에는 폭로 기사가 넘쳐났다. 박근혜 캠프의 공보위원이 뇌물과 여자 문제를 들어 안철수의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자넨 대통령 후보들 믿을 만한가?”
“5년마다 반복되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 입니다. 솔직히 전 누구도 못 믿겠습니다. 국민들의 집단지성도 회의적이고요.” “큰일 났군. 믿음을 주지 못하면 개혁 정치가 불가능해. 나는 그래도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같은 후보들의 심성을 믿으려네. 그간 정치인들이 곧잘 마음을 비웠다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재물과 권력욕으로 꽉 채워져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 어느 때보다 심성이 바른 후보들 아닌가. 믿음을 뜻하는 중부(中孚) 괘는 중심이 비어 있는 배의 형상이야. 배는 속이 비어야 물에 잘 뜨고 사람 마음은 속이 비어야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법이지. 믿을 부(孚) 자는 손톱 조(爪)와 아들 자(子)의 합자야. 새는 온 정성을 다해 발로 알을 굴려서 새끼를 까거든. 그래서 어미와 새끼 사이에 돈독한 믿음이 생기는 거야. 신급돈어(信及豚魚)라고 했어. 미련한 돼지나 하잘것없는 물고기에까지도 그 믿음이 미쳐야 큰일이 이뤄지는 거야. 후보들 그런 자세로 국민과 소통해야 해.”
“그런데 통일의 물꼬를 트는 대통령에게 주시겠다는 황금의 자가 뭐죠?” 강 교수가 물었다.
- 중앙선데이 제287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 ⑧ | 2012. 09. 08. | | |
- 국민은 산성 · 중성 · 알칼리성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혁(革:). 위는 못(澤:) 아래는 불(火:) 로 가죽을 벗겨내듯 구태를 벗는 변혁의 시대를 뜻한다. 우물의 도인 정(井:) 괘 다음에 온다. “제아무리 청량한 우물물도 세월이 지나면 때가 끼기 마련이지. 바닥에 진흙이 쌓이고 불순물이 섞이면 마실 수가 없는 것! 그대로 두면 썩어버리므로 깨끗이 쳐내야 해. 정치권에 경제민주화 열풍이 분 지금 이야말로 변혁의 시대가 아니겠는가. 정말 변혁해야 할 곳은 정치권인데 정치인들은 말로만 변하지 자신들은 변할 줄 모르는 것 같네. 어떤가?” 백두옹이 흑단나무 6효 막대를 짚으며 강권 교수에게 묻는다.
“문재인 후보도 ‘국민이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있다’ 고 했지요.” 강권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무음 모드로 해놓았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이쿠! 이건 큰일 났네요.” “왜 그러는가?”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나요? 신문사에 보낼 칼럼!” 강 교수는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때 외손자 며느리가 저녁상 차려놨다고 알려왔다. “아무리 급해도 어디서든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닌가. 한술 뜨고 가게.” 백두옹이 강 교수를 붙들었다. “아닙니다. 원고 쓸 때는 공복 상태가 좋습니다. 곧 다시 찾아뵙죠.” 강 교수는 눈썹이 타 들어가는 사람 행색으로 모습을 감췄다.
- 대한민국은 지금 革 괘 상태
두 차례의 태풍이 잇따라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큰 바람의 위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인간의 오만을 조롱하듯 천지를 할퀴었다. 정치판에도 큰 바람이 불고 있었다.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높이 날리고 위엄을 온 세상에 떨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디서 용맹한 장수를 얻어서 천하태평을 도모할 수 있으리오.” 한 고조 유방(劉邦)이 반란을 평정하고 고향 패현을 지나다 연회를 베풀며 읊은 대풍가(大風歌)다.
지금 어느 대권 후보가 대풍가(大風歌)를 부르고 있는가.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 최종 후보가 거칠 것 없는 광폭 행보를 하고 있다. 지위로 보면 건(乾:) 괘의 4효쯤 오른 상태다. 막 하늘을 날기 직전, 연못에서 뛰어오르는 광경이다. 연못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그 구름을 타고 오르면 그야말로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박근혜 후보는 애초 바람과 거리가 멀다. 처음부터 용의 자식으로 자란 그는 구름을 몰고 다녔다.
선거판에서 바람은 역시 야권의 몫이다. 일찌감치 불어온 돌풍을 탄 안철수. 그리고 오픈프라이머리의 최후 승자가 그 주인공이다. 문재인 캠프에서는 사실상 승리를 예상해 안철수와의 단일화 방식을 두고 전략 논의에 들어갔다 지만 아직 바람몰이의 진원지, 호남이 남아 있다. 정세균의 홈 그라운드인 데다 손학규도 반전을 꾀하고 있어 속단할 수 없다. 어쨌든 먼저 4효의 지위인 연못에 안착해 때를 점치고 있는 안철수와 민주통합당 최종 후보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국민의 주목을 받는 ‘역사적 만남’ 이니까. 쌍방이 이견대인이다. 두 사람이 뜻을 잘 합치면 천하를 도모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 길만이 막강한 박근혜와 어떻게 겨뤄볼 깜냥이 된다.
자연인 문재인은 평판이 좋다. 경선 과정에서도 고운 심성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정치인 문재인을 보는 관점은 인격 문제가 아니다. 일찍이 정치로부터 도덕성을 분리해낸 마키아벨리식으로 말하자면 문재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한 포르투나(Fortuna:운명이자 행운)를 지녔다. 하지만 시민들의 높은 요구를 정치적으로 풀어낼 비르투(Virtu:탁월한 능력)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 문재인, 안철수 넘고 박근혜 이길 수 있을까
백두옹은 한밤중에 외손자 부부를 불렀다. 평택에 공장을 둔 중소기업가 외손자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박근혜 후보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던 때만 해도 속 시원해하며 관심을 좀 보이더니 박 후보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리자 손을 털어버렸다.
“문재인 후보가 뽑히면 안철수를 넘고 박근혜를 이길 수 있을까?” 백두옹은 세련된 외손자 며느리에게 물었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치켜세웠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님, 그는 아주 맑은 영혼의 소유자예요. 사람들이 자꾸 정치적인 능력을 주문하는데 안철수는 뭐 정치력이 있나요? 오히려 더러운 기존 정치 때가 안 묻었으니까 추대한 거라고요. 탐욕스러운 권력의지가 없는 문재인이 안철수와 서로 멋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거라고 봐요.” 외손자 며느리는 낙관적이다. “자기 돈 써가면서 고생 고생한 캠프 사람들은? 죽 쒀서 × 주겠냐고? 다 한자리 해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인데.” 외손자가 냉소적으로 뇌까렸다. “엊그제 강 교수님 칼럼 안 읽었어요? 안철수가 제 3지대 정당을 창당하고 합당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지 않아요. 제가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적당한 지분을 준다면 양보 못할 이유가 없죠. 문재인의 부족한 점은 안철수가 채워주고 안철수의 부족한 점은 문재인이 채워주면 박근혜 충분히 상대한다고 봐요, 전. 당신도 중소기업 하니까 경제민주화 제대로 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해줘요.” 외손자 며느리는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손학규 후보가 맘에 들어. 내 표는 내 의지에 따라 소중히 행사할 거니까 한 침대에서 잔다고 같이 찍자 강요 마!” “강요가 아니라 제안이에요.” “알았다. 이러다 싸우겠구나. 그만들 자자꾸나.”
백두옹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왔다. 종교와 정치문제는 깊이 대화할 거리가 못 된다. 편이 갈리고 곧잘 논쟁이 벌어지니까. 침상에 누운 백두옹은 좀처럼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대선이 100여 일밖에 안 남았는데 모두 무엇을 하겠노라고만 외쳐대지,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였다. 서로 외치는 구호가 유사할 때는 ‘무엇’ 보다 ‘어떻게’ 가 중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검증 포인트는 후보가 살아온 역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캠프 사람들의 면면도 검증 포인트다. 산성인지 중성인지 알칼리성인지를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은 국민이 한다. 리트머스는 이끼다. 이끼는 미미한 존재지만 우습게 봤다가는 여지없이 큰코다친다.
한동안 세상은 태평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고요하기조차 하다. 대선 후보들 검증할 시간이 없어 걱정이라며 언론만 요란 떨었지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이 싱겁고 차분한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결전의 날은 12월 19일로 이미 정해져 있고 하루하루 임박해 왔다. 일마다 기미(幾微)가 있다. 낌새라는 거다. 지혜로운 자는 작은 기미를 알아채고 거기서 천하가 돌아갈 방향을 읽어낸다. 역(易)을 공부하는 자는 이 고요가 태풍의 눈임을 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편히 잠자기 틀렸나 보다. 백두옹은 침상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강일(剛日:뒤숭숭한 날)에는 독경(讀經)하고 유일(柔日:편안한 날)에는 독사(讀史)하라고 했던가. 이런 밤은 경전보다 역사가 맞춤하다. 백두옹은 서가에서 홍재전서(弘齋全書)를 꺼냈다. 조선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개혁군주 정조의 문집이었다. 홍재는 조선왕조 제 22대 임금 정조의 호다. 훌륭하도다. 주역 혁 괘의 상육(上六:여섯째 효)이여. 정자가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비록 마음속으로 감화되지는 못하나 또한 그 낯빛만은 바꾸어 윗사람의 명령에 따른다” 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변화시킬 수 없는 법이니, 요(堯)와 순(舜) 같은 임금에게 묘(苗)와 상(象)이 있었던 것은 대체로 외면만을 바꾸어서이다” 하였도다.
정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정치가였다. 소론과 노론의 권력싸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왕위에 오른 영조의 손자다. 영조는 노론이 집권하게 하면서도 소론 또한 등용했으니 그 유명한 탕평책이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금난전권(상권 독점)을 폐지하는 경제 개혁, 화성 천도를 통한 정치 개혁, 노예제 혁파 등 전반적인 개혁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노론의 저항에 부닥쳤고 의문의 죽음(1800년)을 맞는다. 만일 그의 개혁 정치가 성공했다면 훗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조 이후 조선의 역사는 개기일식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 귀하들은 털갈이 제대로 하셨소이까?
모름지기 지금 대한민국도 혁(革) 괘 상태다. 대저 한 나라의 최고통수권자 된 이라면 누구라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멋지게 개혁하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개혁하고 싶어도 세상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끝내 실패하고야 만다. 혁(革) 괘에서 득중한 5효는 ‘대인은 호변(虎變)한다’ 고 말한다. 호랑이는 용과 더불어 대인을 상징한다. 호랑이의 털갈이는 백수의 왕답게 말끔하여 문채가 난다. 하지만 참모나 고관 들은 그처럼 문채 나지 못한다. 표범의 털갈이 정도이고 소인배는 기껏 얼굴빛 정도만 바꾸려 든다. 그랬다가 아니다 싶으면 불평을 쏟아내고 곧바로 돌아서 버린다. 그게 민심의 본색이다. 하여, 개혁정치가 성공하기란 정말 어렵다.
혁(革) 괘 3 · 4 · 5효는 한결같이 믿음을 쌓으라(有孚)고 말한다. 무엇보다 개혁 주체가 진실해야 한다. 호랑이 털갈이처럼 자신부터 전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호응을 얻어 성공한다.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게 된 안철수 · 문재인 후보, 실현 불가능한 ‘100% 대한민국’ 을 선언하고 종횡무진하는 박근혜 후보에게 백두옹은 묻는다. 귀하들은 털갈이 제대로 하셨소이까? 혹시, 그들 자신이 개혁 대상인 얼치기,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감히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말로만 외치는 건 아니오?
- 중앙선데이 제286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 ⑦ | 2012. 09. 02. | | |
진짜 대인은 아래를 끌어올려 융평 도모해야 · ⑥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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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대인은 아래를 끌어올려 융평 도모해야 (隆平)
“안철수에게 필요한 척목이라면 역시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인 정당이겠군요. 문제는 급조하듯 창당해 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강권 교수가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아무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도 조직 없이는 치를 수 없는 게 선거다. 조직 없이 용케 당선됐다고 하더라도 의회의 도움 없이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고 민주당에 입당하는 건 대다수 지지자에 대한 배반이란 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그러고 있을 수밖에.”
백두옹이 안철수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그래서 안 원장은 민주통합당의 최종 후보가 가려질 때까지는 잠행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여간 고역이 아닐 겁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대선 출마를 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요. 본인의 권력의지보다 대중이 선물로 준 리더십의 한계지요. 범야권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안 원장이 중도 하차하면 야권의 타격이 너무 커. 박근혜 후보가 무난하게 낙승하겠지. 그런 낙승은 결과적으로 박 후보를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만들어 정도령(정도 걷는 대통령) 출현을 어둡게 한다고 봐. 승패를 떠나 안 원장이 완주해야 한국 정치가 거듭나게 돼 있어. 사실 우려는 또 있다네. 안 원장이 잘 버텨 내더라도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 원장에게 양보하려 할까?”
“안 원장의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한창 진행 중인 오픈 프라이머리가 흥행하면 양보할 이유가 없겠죠. 민주통합당은 안 원장의 지지를 받아 내려고 할 겁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처럼요.”
“만지면 자꾸 더 커진다는 안철수 현상은 반새누리당뿐만 아니라 반민주당 정서에서도 기인한 거네. 기성 정치인들로는 안 되겠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만들어 낸 대안이란 말이지. 안 원장이 아니면 막강한 박근혜 후보를 상대하지 못할 것이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거나 캠프 안팎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시민들의 열망에 거스른다면 독박을 쓰게 될 겁니다. 부담이 너무 크죠. 1987년 대선 때 김영삼 · 김대중 후보의 분열보다 더 가혹한 책임론이 따를 겁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 강 교수의 경고였다. 어쨌든 백두옹이나 강 교수도 모두 박근혜와 안철수의 대결구도를 점치고 있었다.
-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합창 실현될까
강 교수!” 백두옹이 짐짓 엄숙하게 강 교수를 불렀다. 강 교수는 대답 대신 백두옹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강 교수는 여야 후보들이 입을 맞춰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나선 걸 어떻게 보셔?”
“후훗!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정치적 레토릭이죠, 뭐.” 강 교수는 코웃음을 날렸다.
“선거용 낱말 장사라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시대적 요청이잖은가?” “개념부터가 제대로 안 잡힌 용어입니다. 도나캐나 민주화만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마 실현 불가능할 겁니다.” 강 교수는 부정적이었다.
“헌법 조항에도 있는걸? 제119조 2항에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말일세.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는 경제민주화 개념을 헌법에 도입하자고 개헌 제안도 했고.”
백두옹은 책상에 놓여 있던, 해당 헌법 조항이 복사된 종이를 들이밀었다.
“‘경제의 민주화’ 는 87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돌연 헌법을 고치면서 엉겁결에 들어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용어입니다. 이후로 자그마치 25년 동안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나선 정부는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조차요. 그때도 국회에는 억울한 중소기업가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집권당인 민주당은 외면했어요. 대기업들의 로비에 놀아난 거죠. 경제민주화 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 했어야지 왜 이제야 하겠다는 거지요? 그때 했더라면 정권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물며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니요? 김종인 선대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의 의견 차부터 좁힐 일입니다. 쉽지 않을걸요.” 강 교수의 예단이었다.
“강 교수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꽤 깊군 그래. 이거 드시게.” 백두옹은 은강이가 소반에 담아 막 들여온 수박을 강 교수에게 내민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 국민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럽니다. 한국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됐지만 그래도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립된 건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법이 있어도 잘 안 지켜지고 강자는 편법, 약자는 떼법을 쓰다 보니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거죠. 저는 그게 유감입니다.”
-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것
강 교수의 소론에 백두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교수가 수박을 집어 든 사이, 백두옹은 반닫이에서 흑단나무로 깎은 6효 막대를 꺼냈다. 강 교수가 바투 다가와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백두옹은 6효 막대를 책상에 올려놓고 손(損:)의 괘상을 만들어 보였다. 레고놀이와 흡사했다.
“위는 산(山:), 아래는 못(澤:)! 아래에서 덜어 위에 보태니 손해라는 뜻을 지닌 괘라네. 기본이 되는 민중의 것을 박탈해 특권층을 살찌게 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손실이라는 얘기야. 손 괘상을 180도 돌리면 반대의 경우가 되겠지.”
이번에는 익(益:)의 괘상이 됐다. “위는 바람(風:), 아래는 우레(震:)!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니 이익이라는 뜻을 지닌 괘가 돼. 많이 가진 쪽에서 덜어 적게 가진 쪽에 보태니 백성의 기쁨이 한이 없는걸세. 대중의 경제적 공익성과 사회적 평등을 나타내는 괘상이야.” “이거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손익계산서네요!”
강 교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주역' 41번째의 손괘, 42번째의 익괘를 붙여 손익계산서를 이끌어 내는 순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양반이라는 특권층의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논리라고 믿어 왔던 그였다. 근대화 시기 유교 망국론이 나왔던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니던가.
“부당함을 바람처럼, 혹은 번개처럼 빨리 바로잡으면 천하를 유익하게 하는 도가 되지만 박탈이 심해지면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네. 주역 철학은 그걸 엄중히 경고하고 있어. 사자성어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출전이 이 대목이야.”
백두옹은 무섭다는 표정을 지으며 돋보기를 썼다. 그러더니 곧 한적(漢籍)으로 된 경전을 펼쳐 보였다. 그는 강 교수에게 익괘 효사와 주석을 꼼꼼히 해석해 줬다. 봉건시대 대표적인 보수파 정자와 주자의 견해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로움은 대중이 다 같이 원하는 바이니 특권층이 사사로운 이익에 눈멀어 대중에게 손해를 끼치면 공격할 거라는 주장이었다.
“주역이 이렇게 무서운 철학이로군요. 뉴욕 월가의 점령시위가 떠올라요.”
강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그렇게 놀라서 어떡하누? 주역은 언제나 특권층이 아니라 소수자 · 약자 중심이야.”
- 서민의 눈물과 땀 닦아주는 이가 대인
안경 너머로 강 교수의 낯빛을 살핀 백두옹은 서가에서 다른 책을 찾아왔다.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였다. 봉사란 상소문을 가리켰다. 백두옹은 1574년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1만2000여 자의 상소문 한 부분을 읽고 해석했다. 기묘사화보다 참혹한 을사의 화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은 숨을 죽이고 눈치나 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감히 국사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권세 높은 간신의 무리가 마음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구법(舊法)이라 하여 준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신법(新法)이라 하여 혁파하였으니, 그 결과는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의 형세가 날로 기울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손상되어 가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털끝만큼이라도 생각했겠습니까.
백두옹은 붓펜으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기를 살찌운다는 뜻의 ‘박민자비(剝民自肥)’를 썼다. 율곡은 주역 손괘의 상황을 바탕으로 깔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함을 바로잡아 안정되고 평화로운 대동(大同)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민중의 불만은 적어지겠지만 하향 평준화가 되는 거잖습니까? 재벌들이 망하면 좋아할 사람들 많을 겁니다. 나라도 같이 어려워지는 건 생각지도 않고요.” 강 교수가 군중심리의 본질을 지적했다.
“그걸 누가 못해? 위를 끌어내릴 게 아니라 아래를 끌어올려 높은 단계의 평준화, 곧 융평(隆平)을 도모하는 게 어렵지. 그래서 북악 산신이 나한테 단단히 이른 거네. 다음 대통령은 함량 미달인 자, 개인적인 탐욕을 가진 자가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렇고 그런 소인배가 아니라 대인이 뽑혀야 정도령이 되지.” 백두옹은 얼마 전, 인왕산 산책로에서 겪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르신께서는 속된 정치인들을 대인으로 보세요?” 강 교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물론 세종대왕쯤은 돼야 대인이지. 박근혜 · 안철수 · 문재인 · 손학규 · 김두관 · 정세균 후보 모두 품성은 두루 좋은 사람들 같아. 적어도 꼼수 쓰는 소인배는 아니란 말일세.”
“저는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서민들이 흘린 눈물과 땀을 닦아 주는 이가 대인이라고 봐요. 가령 남수단의 이태석 신부나 전주 노송동의 얼굴 없는 기부천사, 두 평짜리 쪽방 셋집에 살면서 5년간 40t의 쌀을 이웃에게 기부한 경기도 양주의 50대 아저씨 같은 분들이 진정한 대인이 아닐까요?”
정치는 성자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강 교수는 딴죽을 걸었다. 백두옹은 경전을 다시 펼쳤다. 혁명(革命)을 뜻하는 괘가 나왔다.
- 중앙선데이 제285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⑥ | 2012. 08. 26. | | |
“갓 쓴 女 안철수, 잘 업기만 하면…” 대선 예언 · ⑤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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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쓴 女 안철수, 잘 업기만 하면…” 대선 예언
“괜찮네. 물이나 좀 주게.” 강권 교수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백두옹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아, 진작부터 날 받아놓은 덤 인생인데 목에서 피 몇 방울 나왔다고 웬 호들갑이냐는 핀잔이었다. 배낭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자, 백두옹은 입을 헹군 다음 밭은 목을 축였다.
“이 무더위에 괜한 나들이를 했네요, 어르신. 좀 쉬셨다가 그만 서울로 돌아가시죠.”
물 적신 휴지로 손을 닦아주면서 강 교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백세가 넘은 상노인이라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나 아직 안 죽네. 대선 때까지 할 일이 남았는데 왜 죽어? 갑자기 너무 목청을 돋워서 그래.”
백두옹은 이견대 마루에 앉아서 부채질을 했다. 합죽선에 ‘운종룡풍종호’ (雲從龍風從虎)가 휘갈겨져 있다. 대숲 바람처럼 시원스러운 초서다.
강 교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옆에 앉아 있다가 백두옹이 안정을 되찾자,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모셨다. 경주 시내에서 죽으로 점심을 하고 상행선 KTX에 올랐다. 백두옹이 자꾸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강 교수가 말렸다. 당분간 말을 적게 하는 게 좋았다.
“아무리 목이 아파도 이 말만은 해야 쓰겠네. 일본은 1905년 2월 러일전쟁 막바지에 동해에서 전쟁을 유리하게 하려고 독도를 저들 영토로 강제 편입했다네. 그전까지 독도는 변함없는 우리 영토였어. 1902년 대한제국 행정 규칙 자료에도 실효지배 기록이 분명하니까 독도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거리가 못 돼. 진짜 철부지들은 일본의 우익 단체들과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일본 지도자들이야! 난 양식 있는 일본의 시민사회 힘을 믿는다네.”
정말 못 말리는 노익장이었다. 강 교수는 백두옹을 청담동 댁에 모셔다 드리고 꼭 병원에 가보시라고 일렀다. 노인의 각혈은 폐렴이나 폐암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강 교수는 며칠 동안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백두옹의 말처럼 세계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 (power shift)’가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시다발적 으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청산은 고사하고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일본은 껍데기만 의회민주주의 체제이지 국민의식 수준은 신격화한 천황 중심 봉건사회다.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 피로가 누적된 미국과 달리 동아시아는 급부상하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동아시아를 주목한다. 한·중·일 삼국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배타적인 민족감정과 영토분쟁으로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러다가 산통 다 깨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 안철수는 척목 없어 이대론 하늘을 날 수 없지
( 안철수 업으면 누구라도 飛龍在天)
내남없이 큰 지도자, 큰 리더십이 절실하다. 사소한 이익보다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앞세울 때,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참 지도자, 큰 지도자라면 대중이 듣기 좋은 말만 할 게 아니라 과감하게 ‘노(No)!’라고 외칠 수도 있어야 한다. 인기에 영합하는 모호한 말잔치가 세상을 자꾸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신문사에 보낼 칼럼을 정리하다가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 대낮인데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글을 쓰면서 무음 모드로 해놓았던 거 같은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권 교수님이시죠?” 또랑또랑한 아가씨 목소리다.
“그렇소만.” “청담동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못다 한 말씀이 있다며 뵙고 싶어 하세요.” “은강이?” “네. 오시기 힘들면 그쪽으로 가시겠답니다.” “무슨 말씀을! 곧장 건너가지.”
나들이를 하겠다는 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아직 여쭙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글도 잘 써지지 않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강 교수는 택시를 탔다.
백두옹은 거실 소파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강아지를 어린애 어르듯 하는 노인은 휴지 가져오라는 잔심부름까지 시키면서 대견해 했다. 그런 노인의 얼굴은 천진스러웠다. 누가 저 노인네를 주역의 대가이자 당대의 예언자라고 하겠는가.
“어르신, 강아지를 그렇게 애지중지하실 줄 몰랐습니다.” 강 교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날 제일 좋아한다네. 나 죽어 납골당 가면 이 녀석 사진 놓아 달라 했는걸.” 백두옹이 파안대소한다.
“설마요.” “정말일세. 아무래도 인간은 인간과 소통하는 거보다 이런 반려동물이나 화초 들과 소통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것 같아. 집집마다 반려동물과 화초 안 키우는 집 없거든. 따지고 보면 사람만큼 말 안 듣고 말 안 통하는 대상도 드물어. 제 얘기만 해대거든. 모두가 정치인들 욕하지만 그래도 신통한 사람들이야. 반려동물이나 화초 대신 사람을 대화 상대로 선택한 용기가 있잖아. 이 지상에 어디 사람만큼 까다롭고 피곤한 생명체가 또 있던가?”
백두옹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강 교수는 청부살인업자 레옹이 떠올랐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살인극 속에서도 그는 화분 하나를 들고 다니며 정성껏 돌봤다. 사람은 무참히 죽여도 화초는 절대 죽일 수 없다는 듯이.
“진영논리에 갇히면 반대 진영을 개만도 못하게 여길 걸요. 정치인들의 집념은 어떻게 해서든 정권 잡는 거거든요.”
“순 날것들 같으니! 강 교수, 저번에 경주 이견대에서 안철수 원장이 대인이라고 했었지? 야권 후보들이 삼고초려로 만나봐야 할 대인!” 백두옹이 강 교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문수와 안철수, 박근혜와 안철수 그림은 왜 못 그리는 건가?” “에이, 그건 아니죠! 전에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걸 막겠다고 확실히 선언했었답니다.” “허허허, 과연 그럴까? 정치는 생물이라면서.”
백두옹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붓펜을 들어서 편안할 안(安) 자를 써보였다.
“지금으로선 갓(冠) 쓴 여인(女) 안철수(安哲秀)를 잘 업기만 하면 여야 어느 후보라도 비룡재천(飛龍在天)일세. 경상도 말고도 호남 출신이건 경기도 출신이건 얼마든지 대권을 쟁취할 수 있단 얘기야. 민주당 후보 경선 에서 이변이 일어나거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뜻밖의 난기류를 만나거나, 안철수 자신에게 결정적인 변수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갓 쓴 여인 안철수 업기! 재미있는 파자(破字)와 비유네요. 예언자를 자처하신 어르신 말씀대로 안철수는 양중음이라니까 그럴듯해요. 하지만 그 여인은 아주 값비쌉니다. 여야 모든 후보가 안철수를 등에 업고 달리려 하지만 도리어 업히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몽상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주의잡니다. 따라서 안철수 야권 최종 단일후보론에 한 표!” 강 교수가 단언했다.
“예언자라고? 난 예언자가 못 되네. 하여간 자넨 언제나 결단이 빠르고 명쾌하구먼. 중도는 못 잡더라도 광견은 되겠어.” “광견이라고요!”
강 교수는 백두옹이 좀 전까지도 강아지를 안고 있던 광경이 생각나서 내심 언짢았다.
“그 광견(狂犬)이 아니라 공자가 이르신 광견(狂*)을 말하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고, 견자(*者)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거든. 진보적이지만 막말 같은 건 절대 안 하지.”
듣고 보니 칭찬이어서 머쓱해졌다.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붓펜 글씨들을 보면서 주역은 너무 어려우니 그만두고라도 논어(論語)는 시간 내서 정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논어를 봐야 주역도 읽을 수 있다던가.
- ‘안철수 현상’ 타산지석 때 정치 발전
“부끄럽습니다, 어르신.” “안 원장만 대인은 아닐세. 안 원장 입장에서는 다른 후보들이 대인이 되거든. 안 원장이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용단을 내려 그 대인을 선택할 수도 있어.” “성격상 어려울 겁니다.”
강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네. 나는 안 원장의 등장이 한국 정치사에서 아주 값진 일대 사건이라고 보네. 그를 흠집 낼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여야 모든 정치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해. 그러면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하는 거니까.”
“놀랍습니다. 저는 어르신께서 안 원장을 탐탁잖게 여기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을 몰고 다니면서 파랑새 타령이나 한다고요.” 강 교수는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 가운데서 안철수 원장 관련 책들이 몇 권이나 되는 걸 눈여겨보았다.
“날 수구꼴통 취급하지 말게나. 니체는 졸가리 없이 타인들과 똑같은 걸 추구하며 사는 인간을 ‘말종 인간’이라고 했어. 그와 반대로 자기만의 가치기준을 정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를 ‘초인’이라고 했지. 난 초인도, 예언자도, 자네처럼 학자도 못 되지만 부화뇌동하는 인간은 아닐세.”
백두옹은 음유시인처럼 이육사의 시(詩)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설마 안 원장이 그 초인이라는 건 아니시죠?” “…….”
강 교수가 놀라서 묻자, 백두옹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여야가 경선을 치르고 있네. 새누리당 최종 후보는 박근혜가 되겠지만 민주통합당은 아직 누가 될지 몰라. 그리고 안 원장에게는 척목(尺木)이 없다네.” “척목이라뇨?” “척목은 용머리에 달린 돌기로, 하늘을 날 때 날개로 쓰이는 신물이네. 어느 날 ‘대중이 주는 선물인 우리 시대의 리더십’ 을 엉겁결에 부여받은 그에게는 아직 그 척목이 없어. 이대론 절대 하늘을 날 수 없지.”
백두옹 특유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다른 후보들은 다 있는데 유독 안철수에게만 없는 것, 그 척목이 뭘까? 강 교수의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 중앙선데이 제284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⑤ | 2012. 08. 19. | | |
“대선 주자들, 문무대왕부터 만나봐야 해” · ④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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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주자들, 문무대왕부터 만나봐야 해”
여름은 잔인했다. 찜통더위 속에서 시민들은 에어컨에 생명줄을 대고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사이 예비 전력은 블랙아웃 언저리에서 간당간당 적신호를 보냈고 가뭄까지 더해진 한강과 낙동강에는 녹조류가 번졌다.
백두옹의 여름 나기 비법은 방 안에서의 독서다. 그는 지나온 삶을 회상하고 복기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지만 좀처럼 글을 쓰지 않는 그로서는 독서가 차선책이다. 얼마 전까지 대선 후보들이 낸 책들을 밑줄 쳐가며 꼼꼼히 본 백두옹은 적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쓸 만한 참말은 적고 화려한 수사와 그럴듯한 거짓말들이 곧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책만으로는 검증하기 어렵다. 조만간 유력한 주자들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맹자가 옳았다. 눈빛을 마주 대하고 말을 섞어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이른 아침부터 초인종이 울린다.
“할아버님! 누가 찾아왔는데요.” 은강이가 방문을 열고서 이른다.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왜 유명한 논객 있잖아요. 진보 · 보수를 싸잡아 공격하는 분!”
뉴욕에서 살다 보니 은강이는 한국 사정에 대해 그리 밝지 못했다. “강권 교수님예요, 할아버님!” 은강이 엄마가 현관문을 열어주며 말한다.
“바쁜 사람이 어인 일인가?”
백두옹이 거실로 나오자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강 교수가 허리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윤곽, 예리한 눈빛이 빈틈없는 당대의 논객답다.
“하도 답답해 어르신 모시고 바람이나 쐬려고요. 기력은 여전하시네요.”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붉은 안색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백두옹이 아끼던 제자의 아들이었다. 제자는 이미 고인이 됐고 그의 아들이 이렇게 장성해 이따금 찾아오곤 했다.
“그 성격에 요즘 정국, 참 답답하겠지.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오시게.” “밖에 택시가 대기 중입니다.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죠?” 다짜고짜 강권이다.
“어딜 가려고?” “저와 함께 바람 쐬시고 이따 저녁 무렵에 돌아오시죠.” “그 사람 참!” “할아버님, 어디든 함께 다녀오세요. 요즘 실내에만 계셨잖아요. 강 교수님이 오죽 알아서 잘 모시겠어요?”
외손자 며느리는 곧 옷가지와 모자를 꺼내놓는다. 집에서 나온 백두옹은 강 교수와 함께 서울역으로 달렸다.
“어딜 가는데 이러는가?” “경주요.” “그 먼데까지 왜?”
백두옹 같은 상노인에게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다. 그래서 강권 교수는 자동차 대신에 KTX 편을 택했다. 워낙 치밀한 그라서 매사가 똑똑 떨어졌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열차에 오른 둘은 특실에 마주 앉았다.
“피곤하시면 편하게 눈을 붙이세요.” “나 아직 팽팽하다네. 그런데 경주에 누가 있나?”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두피를 두드려 마사지하며 묻는다. 정수리 부분의 모발이 약간 빠졌지만 여전히 빼곡한 백발이었다.
“대왕이 기다리고 계시지요.” 깐깐한 강 교수가 해설피 웃는다.
“생뚱맞게 대왕이라니?” “동해 바다용이 되신 문무대왕요.” “옳거니! 대왕암이 보이는 이견대 가는 게로구나.”
백두옹이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런 때는 늙은이가 아니라 꼭 소년 같다.
- 경주 감포 바닷가에서 본 한민족의 꿈
역시 촉이 빠른 노익장이라고 생각한 강 교수는 백두옹의 깊은 주름살 너머 형형한 눈빛을 응시한다. 지혜가 담긴 귀한 눈이다. 귀인이란 나이가 들어 꼬부라져도 추한 구석이 없어야 한다. 어차피 몸뚱이는 무너져 내리게끔 돼 있다. 인간의 고귀성은 불멸의 정신과 그 실천에 있는 것이다. 그게 빈약하니까 돈에 집착하게 된다. 돈마저 없으면 사람 대접 못 받으니까. 슬픈 일이다.
“이건 정말 궁금해 여쭙는 건데요. 세계 최고의 자살률, 만연한 성범죄와 정치 부패, 국가관과 역사의식 부재 상태가 지금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국민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지향점조차 합의하지 못한 분단국가죠. 그런데 무슨 수로 인류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선도한다는 건가요?”
열차가 한강철교를 건너자 강 교수는 푸르죽죽한 강물을 바라보며 조목조목 따지고 나왔다.
“늙은이가 입바른 소리 몇 마디 했다고 나도 공격하는 겐가?” 백두옹이 웃으며 강 교수를 건너다본다.
“공격이라뇨. 정말 궁금해서….” “강 교수! 난 구한말부터 그 험한 꼴 다 보고 겪으며 살아왔어. IMF 경제위기 때 모두가 고생했고 내년에 퍼펙트 스톰이 온다고 야단이지만 이 나라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게. IMF 구제금융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가 놀라는 비약을 했단 말일세. 잠재력이 폭발하면 위기 속에서도 기적을 낳는 걸세. 산술적인 논리로는 내 말 이해 못해.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일정하게 자라는 건 아냐. 극적으로 점프하는 대목이 있단 말씀이지. 지나봐야 비로소 알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따져 물을 수가 없잖습니까?” 강 교수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철부지들 천지에 내가 뭔 얘기를 해.” 백두옹은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아버린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중(時中)은 때를 알고 그때마다 필요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때를 모르면 헛수고일 뿐이다. 때를 모르고 나대면 철부지가 된다. 철부지(지혜,사리분별의 능력-不知)는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다. 철(凸)은 싹이 돋아나는 모양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다. 싹이 트는 때도 모르고 나대는 어린 것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리켜 철부지라고 한다. 철부지들이 공개석상에서 국사를 논하고 감히 한 나라를 다스려 보겠다고 설친다. 그들이 열매 맺는 때를 알 리 만무하다. 답답하다.
3시간 뒤 그들은 경주 감포 바닷가 이견대(利見臺)에 도착했다. 언덕배기 정자에 서자 바닷속 문무대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왜구들이 수시로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화장한 그의 분골은 바닷속 바위에 안장된다. 오죽 골칫거리였으면 삼한강토를 통일한 대왕이 동해 수중릉에 묻히길 원했을까. 대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감읍해 근처 에다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신기한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신기한 대나무로 만든 피리, 이것을 불면 나라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고 傳함)을 얻는다. 이에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에 이견대를 세웠다. 이견대(利見臺)는 건괘 2효와 5효의 이견대인(利見大人·대인을 만나보면 이롭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2효는 재상이 될 현자이고 5효는 제왕에 해당한다.
-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 발휘해야
“어르신, 저는 주역의 말씀처럼 대선 후보들이 언제 어떻게 대인을 만나보느냐에 따라 판세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머잖아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 야권 후보와 안철수가 삼고초려 형식으로 만나 대권 드라마를 연출할 것 같지 않습니까? 문왕과 강태공, 유비와 제갈량, 정도전과 이성계처럼요.”
“이곳 이견대에 와서 청와대 새 주인이 될 이가 만나봐야 할 대인을 가늠해본다? 안철수가 대인이라…. 그거 재밌는 걸!” 백두옹은 강 교수가 주선한 이견대 여행이 뜻깊다고 생각했다. “박근혜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 대선을 ‘남북전쟁과 슬픈 용병들’ 로 정리합니다.” “뜬금없이 웬 남북전쟁이누? 선거철 돌아오니 또 그놈의 지긋지긋한 지역감정 타령인가?” “그게 아니고요. 문재인, 김두관, 김태호, 안철수의 경남과 박근혜의 경북! 경남과 경북의 대권 싸움에 호남인이 앞다퉈 용병으로 나서지만 별로 얻을 건 없다는 것이죠.”
예리한 통찰이라고 여기는 듯한 강 교수를 향해 백두옹은 혀를 끌끌 찬다.
“이 사람아, 어느 때보다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때에 남북전쟁이니 슬픈 용병이니 하는 표현들은 옳지 않아. 독도가 바로 저 바다 너머지?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독도 방문을 결행했는데 그거 어떻게 생각해?” “주도면밀한 일본이 분쟁지역화할까 걱정이네요. 외교적으로도 득보다 실이 클 거 같고요.” “그런가? 문무대왕은 뭐라 하실까? 아마 백 번 잘한 일이라고 하실 거네. 대통령이 우리 영토에 갔는데 그게 왜 문제가 돼? 대왕께서는 더 당당해지라고 주문할 거네.”
백두옹은 단호했다.
“결정적일 때 써야 할 마지막 카드를 국면전환용 이벤트로 써먹어버렸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 사람아, 이해(利害)가 걸린 문제는 시비(是非)부터 따지는 게 원칙이야. 옳으면 취하고 그르면 버리는 게 군자고 신사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온 역사가 어언 1500년이네. 임진왜란과 한 · 일강제병합이 대표적이지. 그래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의 역사 접근 태도가 문제야. 우리야 힘이 약했던 죄밖에 더 있어?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우리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들 거야. 두고 보게. 우리가 약해지면 반드시 준동할 거네. 치욕스러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 이 늙은이 말 허투루 듣지 말게. 나는 그만그만한 대선 후보들이 맨 먼저 만나봐야 할 대인은 문무대왕이라고 보네. 후보들이 여기 와서 문무대왕께 맹세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는 혈연·지연·학연·정파 다 떠난 대통합의 국가 리더십을 발휘하겠노라고. 그리하여 남북을 통일하고 일본을 능가하는 문화강국의 초석을 다지겠노라고 말이야. 그게 독도 문제의 해법이야!”
목에 핏대를 올린 백두옹은 연방 마른기침을 해댔다. 그러다 손으로 입을 훔쳤는데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 어르신!”
소스라치게 놀란 강 교수가 백두옹을 부축했다.
- 중앙선데이 제283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④ | 2012. 08. 12. | | |
박근혜 안의 안철수 (陰中陽),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 (陽中陰) · ③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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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중양 (陰中陽)인가 양중음 (陽中陰)인가
강건한 남성보다 온유한 여성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역철학은 말한다. 대지의 어머니, 곤(坤:)의 미덕을 지닌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여성 대통령’ 이라는 얘기는 아니란다.
불볕더위가 이어졌다. 말복으로 치달으면서 밤중까지 푹푹 쪄대는 통에 여름 나기가 하루하루 고역이었다. 아스팔트는 이글거리고 시민들은 녹초가 된다. 하필이면 이런 때, 여야 대선주자들이 경선을 치르고 있어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 런던 올림픽 기간이어서 더 그랬다. 올림픽이 끝나더라도 ‘주연만 있는 새누리 드라마’ ‘조연만 있는 통합민주 드라마’ 라서 시청률(?)이 잘 나오기란 애당초 글렀다고도 한다. 박근혜 대세론과 안철수 신드롬이 여야의 당내 경선을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꼭 그 둘 중 하나가 청와대 새 주인이 되라는 법은 없다. ‘거지 다음에 올 중’ 은 아직 가변적이다.
“할아버님! 듣다 보니 그 중, 개념 한번 알쏭달쏭하네요. 승려도 됐다가 민심을 파고든 후보도 됐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외손자며느리가 얼음 띄운 오미자 화채를 내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선후보들이 낸 책들을 훑어보던 백두옹은 큼지막한 돋보기를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한다. 안철수의 생각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사람이 먼저다 저녁이 있는 삶 아래에서부터 김문수는 말한다 같은 책들이 책상에 쌓여 있다.
“그 중이 그 중인 게야. 음(音)이 같으면 뜻도 같은 거니까.”
백두옹은 오미자 화채로 목을 축였다.
“어째서 그런 거죠?” 사십 대 후반 외손자며느리는 똑똑한 체는 다 하면서도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백두옹은 붓펜을 들어 이면지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나이 탓에 손이 떨렸으므로 글씨는 꿈틀거렸다.
출가중(出家衆) 득중(得中)
“‘중’은 ‘출가중’ 의 준말이란다. 불도를 닦기 위해 집 떠난 무리, 대중을 뜻하지. 불교의 키워드가 중도(中道) 아닌가. ‘중’은 중도를 행하는 수행자들이란 말씀이야.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여섯 개의 효 가운데서 2 · 5효로 각각 하괘, 상괘의 중심자리! 무리의 중심이지. 이때 1·3·5효는 양(陽)의 지위, 2·4·6효는 음(陰)의 지위인데 득중도 하고 지위도 음양에 걸맞으면 ‘중정(中正)’ 이라고 하거든. 대중(大中), 대정(大正)이라 중도로써 올바로 행하게 되는 게야. 아 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도 바로 주역에서 따온 거야. 아,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건 아냐. 단테가 신곡에서 말했던가?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자에게는 지옥에서 제일 뜨거운 자리가 배정된다고. 주역에서 말하는 득중은 비겁하게 중간에서 서성대는 게 아니거든.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필요한 곳을 정확히 찾아가는 거지. 때에 적합한 도리, 시중(時中)이라는 건데 그거 아주 어려워. 그거 잘하면 맹자처럼 준성인이야.”
“김대중 이름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외손자며느리는 중도나 시중이라는 철학용어보다 김대중의 이름이 주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에 더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인가
“그런데 할아버님! 은강이 아빠는 우리나라가 아직 여성 대통령을 뽑기에 시기상조래요.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고요.” “허허허, 그 애가 정말 그랬다고? 이재오 의원이 그 말을 했다가 박근혜 후보 에게 ‘21세기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느냐’ 고 한 방 얻어맞았지 아마?”
백두옹은 짓궂게 웃으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은강이 아빠 은근히 마초적인 데가 있어요.” “넌 그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눈치던데?” “사실 요즘 세상에 남자다운 남자 드물잖아요.” “그래서 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게로구나. 특전사 출신이라고?” “게다가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거든요.”
외손자며느리의 눈가로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눈가의 미소는 억지로 꾸밀 수가 없다. 감정을 속이고 조작 가능한 입가 미소근육과는 전연 다르다. 그래서 입이 아니라 눈으로 말할 때 진실에 더 가까운 거다. 아무튼 좌파 문재인이 강남 중년여성에게 이렇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게 새롭다. “은강이 아빠는 김문수 지사 열성팬이지 않니? 대학 선후배지간이기도 하고.”
“우리 부부는 정치적으로 완전 상호 불간섭이에요, 할아버님. 선택 기준이 보수, 진보도 아니고 학연, 지연이라니. 그건 아니라고 봐요.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얼마나 세련된 가치판단 기준이에요?”
그러면서 짐짓 우아한 몸짓을 해 보인다. “아귀다툼 정치판에 너무 세련된 기준 같구나.” 백두옹은 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외손자며느리가 보기 좋았다.
“할아버님, 정치는 본래 갈등을 기반으로 먹고사는 거잖아요. 적대세력이 사라지면 그 순간, 정치인은 실업자로 전락해버리겠죠.”
“그래서?” “여야가 드잡이하며 다투지만 사실은 서로 단짝이라고요. 상대와 대립각을 세우며 화려한 언변으로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미래를 약속 하죠. 결과는 피장파장!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 몇이나 있겠어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다고 자기최면 걸고는 뒤에서 도적질하더라고요. 비리의원 보호막 수단으로 써먹는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그거 코미디잖아요.”
낭만파라고 여겼더니 이런 정치혐오증이 있었다. 강남아줌마, 역시 녹록지 않다.
- 한반도, 공명정대 원리로 전환하는 시기
“얘야,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치풍토가 사뭇 달라질 게다. 머리 밝은 국민이 정도를 걷는 대통령을 뽑고 만들어갈 테니까 너무 냉소적으로 보진 마라.” 백두옹은 붓펜으로 쓱쓱 지도를 그렸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러시아, 일본열도, 호주,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이 펼쳐졌다.
“봐라. 우리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한 그루 생명나무야. 뿌리박고 있는 아시아 대륙은 흙이자 물이고 남극 쪽이 하늘이 되지. 사람으로 치면 우리 한반도는 소년(少年)이고 미국은 소녀(少女)거든. 꽃다운 소년 소녀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음양 충화로 이른바 동양과 서양, 간태(艮兌)의 합덕(合德)이라. 꽃다운 남녀 무리는 그 옛날 화랑도를 떠올리게 하지. 이들이 주축이 되어 바야흐로 새로운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싹틀 거라는 얘기야. 동서양 문화의 꽃과 열매지.”
백두옹은 대륙을 유기체와 사람으로 비유했다.
“탄허 스님 예언과 똑같네요.” “네가 탄허를 어찌 아는고? 그 스님 날 여러 차례 찾아왔었지. 예전에 있었던 역우회(易友會)로 말야.” “정말요?” “이 나라 걸출한 인물들 가운데 나 모르고 간 이들 몇 안 돼.”
백두옹은 눈을 감고 왼손으로 알 듯 모를 듯한 수인(手印)을 지었다. “하긴 할아버님께서는 우리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시니까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부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고스란히 목격하셨죠.” 외손자며느리는 앙모하는 눈빛으로 백두옹을 우러렀다.
“목격만 한 건 아니지. 필요할 때마다 적임자를 만나 사명감을 불어넣어 줘왔거든. 대부분 사이비 교주 취급했다만 들을 건 다 듣더구나. 그게 어디 내 얘긴가? 탄허 스님 얘기도 아니고.”
“그럼 누구 말씀이라는 거예요?” “대경대법(大經大法)이야.” “네?”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이라고. 역리(易理)랄까, 역도(易道)랄까. 주역철학에 근거한 정역에 다 써놨어. 19세기 중반 때 이미 정리해 놓았다고. 뭐, 요샛말로 한반도 메시아 사상쯤으로 이해해도 될 거야. 너무 알려고 들지 마.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니까.”
“언제 그런 세상이 열린다는 거죠?” “글쎄다. 혹자는 1984년 하원갑자(下元甲子)를 들던데 콕 짚어낼 수야 없지. 요즘 세월이 그 길목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1984년? 섬뜩해요.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독재자 빅 브러더가 떠올라요. 요즘 세상에 메시아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박근혜와 안철수에게서 독선과 위선의 냄새를 맡거든요. 막연하고 공허한 희망보다 절망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편이 차라리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외손자며느리는 여운이 미묘한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백두옹은 물끄러미 뒤태를 응시했다. 인류가 걸어온 길, 희망보다 절망으로 난 길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 역사를 써나가는 데 있다.
온갖 핍박과 고난의 연대를 건너온 땅, 한반도! 남의 나라 식민지 노예가 되고 동족끼리 피 흘리는 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여전히 분단된 나라는 상처가 깊다. 그 상처들을 어루만질 리더십은 어머니의 품 같은 것이다. 분노와 질시가 아니라 포옹과 보살핌이다.
- 차기 대통령, 어머니 미덕 지녀야
백두옹은 역사의 이름으로 말한다. 다음 대통령은 분명 대지의 어머니, 곤(坤:)의 미덕을 지닌 지도자 몫이다. 강건한 남성보다는 온유한 여성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뜸 박근혜 후보를 떠올릴 게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그는 유력한 여성리더니까.
하지만 주역철학은 그렇게 표피적이거나 단순하지가 않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박근혜 의원은 음중양(陰中陽)이다.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내면에 누구보다도 강건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안철수 교수는 양중음(陽中陰) 이다. 겉모습은 남성이지만 내면에 유순한 여성성을 품고 있다. 말소리며 머리 스타일, 행동양식이 모두 다소곳한 여인 같기만 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는 서양학자의 이론으로 바꿔 말하자면, 남자 안에 있는 여성적 요소 양중음은 아니마(Anima)이고 여자 안에 있는 남성적 요소 음중양은 아니무스(Animus)인 셈인데 안철수와 박근혜는 그 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절묘한 역리요, 기가 막히게 부응하는 후보들 아닌가. 이것이 어찌 우연일꼬. 박근혜 안의 안철수, 안철수 안의 박근혜 찾기에 정치적 상상력을 발동해보자.
- 중앙선데이 제282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③ | 2012. 08. 05. | | |
문둥이 다음에 거지가 왔고, 그 다음엔 중이 온다! · ②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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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고.
폭우가 그치면서 이글거리는 태양이 나왔다. 백두옹은 바위 그루터기 위에 엉거주춤 서서 젖은 모시 두루마기를 벗어 짜기 시작했다. 그때 적삼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 지금 어디 계세요? “은강이로구나. 인왕산 산책로란다. 비를 흠뻑 맞았어.” 은강이는 백두옹의 고손녀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 와 있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모시러 갈게요.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를 끔찍이 위하는 은강이는 마지막 조선왕조 인물이 폐렴이라도 걸릴까봐 안달이다. 그는 고스란히 20세기를 관통해왔고 눈과 귀가 흐리긴 하지만 사지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다. 신문도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서 보고 컴퓨터도 하며 스마트폰도 쓴다. 나이 먹었다고 못 따라갈 백두옹이 아니다. 털어 입은 옷이 절반쯤 말랐을까. 고손녀가 장밋빛 오픈카를 타고 왔다.
“강남쪽은 비 한 방울도 안 왔어요.”
“그래서 여름 소나기는 소 등에서도 갈린다고 하는 게야. 청와대 앞으로 해서 가자꾸나.” 차에 탄 백두옹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행인들의 이목을 끌며 산길을 내려간 그들은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를 천천히 달렸다.
고려 문종 21년(1067), 이곳에 이궁(離宮)이 설치되었다. 이궁은 임금이 도성 밖에 세운 별궁이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그 후원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의욕적으로 경복궁을 재건하지만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39년 총독 관저가 세워지고 7~9대 총독이 해방 직전까지 사용했다. 1945년 12월, 이곳은 미국 극동군 사령부 하지 중장의 관저로 바뀌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들어오면서 경무대(景武臺)로 이름을 바꾼다. 경무대는 경복궁의 ‘경’ 자와 궁의 북문인 신무문의 ‘무’ 자를 따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경무대의 주인 노릇을 했다.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靑瓦臺)로 명칭을 바꾼다. 말도 많은 5·16 군사정변(혁명)으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들어오지만 차례로 횡액을 당하여 18년간의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다. 이후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으로 이어진다.
- 정도령은 正道걷는 대통령
“은강아, 넌 정도령이 청와대 새 주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 백두옹이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은강이에게 묻는다.
“촌스러워요. 꼼수 안 쓰고 ‘정도를 걷는 대통령’ 이 ‘정도령’ 이죠 뭐.”
은강이는 그렇게 내뱉으며 가속기를 밟아 속력을 냈다. 늙은이가 고민하던 걸 한 방에 쿨하게 해결해 버린다.아, 바로 이거다! 정도(正道)를 실천하는 대통령이 정도령이었다! 정도령은 진인(眞人), 곧 참말을 하는 지도자로 성씨나 성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누가 됐건 심보만 바르면 정도령이 될 수 있는 거다. 이처럼 쉬운 걸 어린 손녀한테서 배운다.
백두옹은 디지털 세대의 순발력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른다. 디지털 시대에는 연륜과 경험이 더 이상 노하우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되레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 단적인 예가 ‘현대판 신’이라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활용능력이다. 할아버지 · 할머니들은 어린 손자·손녀들에게 열심히 묻고 배워야 한다. 디지털 기술 활용능력은 정확히 나이에 반비례하니까 말이다.
학문도 그렇다. 물리학이 바뀌면 철학이 바뀌고 신학의 입지가 좁아진다. 철학과 종교는 더 이상 세상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차는 남산 제1호 터널을 통과하여 쏜살같이 한남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압구정로를 거쳐 청담동 집까지 순식간에 주파해 버린다. 말을 타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근대 과학문명은 시간을 단축시키고 공간을 살해해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백두옹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외손자 며느리가 구수한 모카커피를 내온다. 아들딸, 며느리들은 이미 죽었거나 병원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자가 인생의 최종 승자라지만 자식들을 앞세우고 혼자만 오래 사는 건 고독이자 형벌이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고종명(考終命,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은 오복(五福 즉 壽, 富, 康寧, 유호덕攸好德, 考終命)의 매듭이니까 말이다.
침상에 누워 생각을 달리던 백두옹은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를 검색한다. 대선 후보 지지율 여론조사가 뜬다. 안철수의 고공행진이다. 예상했던 바지만 그래도 놀랍다. ‘운종룡풍종호(雲從龍風從虎)’는 그가 올해 정초에 쓴 휘호다.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다섯 번째 효사인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 (利見大人)’을 풀이하면서 든 비유다.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좇듯 사람들은 서로 같은 기운과 취향을 따른다. 누가 용이고 누가 호랑이인가. 눈치 빠른 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터. 문제는 누가 승자가 되느냐다.
백두옹은 침상에서 일어나 강화반닫이를 열고 오동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흑단나무로 깎은 6효 막대와 대나무에 옻칠한 서죽 50개가 들어있었다. 벼슬길이 끊이지 않았던 가문 대대로 물려온 보물이었다. 어지럽던 시절, 선조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면 반드시 주역을 활용했다. 백두옹은 지금껏 좀처럼 점을 치지 않았다. 작년에는 단 한 차례도 치지 않았다. 굳이 점을 치지 않아도 기미만 보고 알 수 있는 직관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올해는 한 차례 쳐볼 참이다. 여야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진중하게 물어 보리라. 그리고 은강이 말마따나 정도(正道)를 실천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도울 참이다. 자본주의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건 모두 천덕꾸러기이자 거지발싸개다. 주역 철학은 곧잘 미신 취급당한다. 동양문화를 이끌었던 철학서가 무지한 점쟁이들의 오남용으로 불명예를 떠안았다. 세종대왕이 아시면 여주 영릉에서 벌떡 일어나실 노릇이다. 대왕은 주역철학을 바탕으로 바른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고 갖가지 제도를 정비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대에 오직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생각해서였다. 태극(太極:)이 낳은 양의(兩儀:ㅡ,ㅣ)는 함께 모여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된다. 여기에 주역 하도(河圖)의 원리를 곁들여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모음을 얻었다. 자음은 하늘(ㅇ)과 땅(ㅁ)과 사람(ㅅ)의 형상에 구강 구조를 더해 얻었다. 과학적인 문자의 원리에 주역철학이 있었다.
동서양 고전 가운데 주역은 유일하게 디지털 코드로 된 철학서다. 이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가 어떻게 고대 사회에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주역은 디지털 혁명의 선구자다. 온줄(■)과 도막줄(■■)을 여섯 층으로 겹쳐서 64괘를 만들고 그것을 범주로 하여 가치를 모색한다. 2진법을 발명한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 양자역학의 창시자 닐스 보어,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이 주역을 열독하고 거기서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건 상식이다.
한마디로 주역은 에너지의 흐름을 패턴화한 책이다. 은비학(隱秘學)이라며 신비화시킬 것만도 아니다. 흐름을 알면 예측이 가능하다. 사리사욕 없이 보면 일마다 해법이 있다.
주역에 날개를 단 공자가 일렀던가.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고.
- 대권 거머쥘 중은 박근혜인가 안철수인가
바야흐로 지금은 백가쟁명이 아니라 천가쟁명, 만가쟁명의 시대다. 말이 홍수처럼 넘쳐난다. 자칫 거기에 휩쓸려 파묻혀버릴 염려가 있지만 이제 나, 백두옹은 말한다. 때가 됐음에 하는 말이니 이는 피할 수 없는 시명(時命)이기도 하다. 꼭 10년 전, “문둥이 뒤에 거지 온다”는 참언(讖言)이 있었다. 나는 같은 문법으로 천명한다. 청와대 주인으로 문둥이 다음에 거지 왔고, 거지 다음에 중이 온다!”
문둥이와 거지가 누구였는지는 천하가 다 안다. 거기 까진 적중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중은 누구인가?
박근혜는 일찌감치 대권 선두주자 자리를 확보한 불세출의 여성 리더다. 그는 중처럼 독신이다. 남녀불문하고 당대 어느 정객이 있어 박근혜의 우아한 풍모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 필적하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의 기세를 꺾어버리는 압인지기(壓人之氣)가 아니다. 부드럽고 조용한 카리스마다. 그는 확고한 국가관과 소신 있는 언행으로 국민적 신뢰를 얻고 있다. 가는 곳마다 지지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그의 정치적 고향, 영남이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고향 충청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타관, 호남에서조차 예외가 아닌 듯하다.
이런 박근혜에 맞서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 손학규 · 김두관 후보의 지지율은 미미하다. 현재로선 셋 모두를 합쳐도 박근혜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무소속 안철수 교수의 경우는 다르다. 공식 출마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생각을 정리한 책을 낸 것뿐인데 시민들은 열광한다. TV 예능프로에 출연한 이후 안철수의 지지율은 급격히 상승해 박근혜를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문약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 왔던 그는 민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당(黨)도 없는 그가 창호지에 물 스미듯 그렇게 시나브로 세(勢)를 얻으며 ‘득중(得中)’, 곧 중을 얻었다.
누가 대권을 거머쥘 진짜 중인가? 박근혜인가? 안철수인가? 전환시대의 역사는 결코 수월한 길로만 가지 않는다.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 손학규 · 김두관 등의 후보군이 경선 레이스를 펼치며 바람몰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승자가 안철수를 등에 업고 가려 할 것이다. 안철수에게는 없는 게 그들에게는 있다. 바로 정당 정치라는 구조다. 개인은 구조를 깰 수 없다. 안철수를 야권 단일후보로 명예롭게 추대할 수도 있겠는데 아전인수식 탐욕의 정치판에서 그걸 기대하기란 너무 이상적이지 않는가. 진짜 중 가리기,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 중앙선데이 제281호 | 김종록의 ‘대선 소설’② | 2012. 07. 29. | | |
북악 산신이 찾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 ① 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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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별.
청와대 뒷산 북악은 별 같은 산이다. 해맑은 날,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을 우러러 보라. 영험하고 청수한 기운이 뻗친다. 가히 천하제일 복지답다. 세계 어느 나라 수도 중심에 이런 명산이 있는가. 경복궁 궐내를 거닐어 북문 신무문(神武門)을 나서면 곧바로 청와대 본관이 보인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끌어 냈던 장소다. 나라는 융창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대통령들의 말년은 비참했다. 이를 두고 잡술 서적 몇 줄 읽은 속사(俗士)들은 이 복된 터를 탓해 왔다.
북악이 무정하게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느니, 지기(地氣)가 다했느니, 산신의 영역까지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노(怒)했다느니 온갖 참언으로 쑥덕공론을 즐겼다. 가당찮은 잡설이다. 터가 나쁜 탓에 대통령은 불행하고 나라는 온 세계가 놀랄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멸사봉공의 터가 되는 거지, 왜 나쁜 터란 말인가.
인왕산 산책로에서 동쪽 청와대 터를 건너다보라.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명당이 틀림없다. 터가 문제가 아니라 공간 구성이 문제고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심보가 문제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저마다 업적도 컸지만 과오도 컸다. 대통령 자신도 그랬지만 친 · 인척이나 비서진, 측근들의 비리가 끊임없었다. 그렇다면 최고 권력을 쥔 자들이 누린 탐욕의 대가를 응당 치른 것이므로 터를 탓할 일이 아니다. 퇴임 후에도 국부로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오게 되면 청와대 터의 오명은 그날로 말끔히 씻길 것이다.
- 한반도는 終萬物 始萬物의 땅.
“그 화상 누군지 입바른 소리 한번 잘한다!” 산책로를 거닐던 백두옹(白頭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이 음성은 분명 속기가 빠진 자의 것이었다. 그는 노안을 조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심히 지나가는 등산객들뿐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중을 건너가는 바람 소린가. 백두옹은 이내 바위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인구 천만 거대 도시의 빌딩숲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개화기의 초라했던 거리 풍경과 한국전쟁 때의 포연 짙은 폐허를 떠올렸다. 돌아보면 옛 선인들이 일렀던 개벽의 땅이 바로 이곳 서울이다.
“들을지어다. 나는 북악의 진국백(鎭國伯)이니라.” “아, 국사당 산신님!”
백두옹은 북악을 향해 몸을 곧추세웠다. 120세란 두 갑자의 세월을 떠받쳐 온 등은 다소 굽어 있었지만 귀에 걸칠 정도로 길게 자란 흰 눈썹 밑으로 눈빛이 번뜩였다.
“백두옹 자네. 왜 이제야 왔는고?”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국운이 좋았는걸요.” “한데 왜 늙어 꼬부라져서야 나타나 청승을 떠누?” “주역(周易)에서 말한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꽃이 한반도에서 피어난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종만물 시만물(終萬物始萬物)의 땅?” “그렇습니다. 한반도는 인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백화점이자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빚어내는 용광로니까요. 불과 30년 전만 해도 허황하다며 시큰둥하더니 요즘에는 제법 귀를 기울입니다.”
백두옹은 한국전쟁 후 유엔 구호물자와 식량으로 연명하던 나라가 세계 일곱 번째 교역대국으로 발돋움한 현대사를 꿈결처럼 더듬었다. 그리고 이제는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감격스럽게 서울 도심을 조망한 게야?” “내심 걱정도 큽니다.” “내가 걱정이지 이녁이 무슨 걱정? 친형을 감옥에 보낸 청와대 주인장의 깊은 시름이 내 시름일세.” 북악 산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MB는 마지막 구시대 대통령이 될 겁니다. 머리 밝은 국민들이 다양한 SNS를 통해 뒤틀린 제도권 정치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어요. 국민들의 높은 기대치를 효과적으로 수용할 지도자가 필요한데 지금으로선 누가 돼도 걱정이 태산이로군요.” 백두옹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내 고민이 바로 그거야. 나는 정도령을 찾고 있느니. 새 시대, 새 나라를 열어 갈 새로운 국가 리더십 말일세. 입에 참기름 바른 정치 구호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라 생각, 국민 생각, 겨레 생각하며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좋겠어. 그놈의 터가 나쁘단 소린 다시 듣고 싶지 않아. 그대 말마따나 국가의 명운이 달린 아주 중요한 시기야. 여태까지는 국민총화에 행운까지 더해 이만큼 성장해 왔지만 앞으로는 오리무중이야.” 북악 산신의 목소리는 시름겨웠다.
“그런데 웬 정도령 타령을 하세요? 정감록이니 격암유록이니 하는 예언서들은 진작 용도 폐기된 위서(僞書)들입니다.” “이런 답답한 화상 같으니. 공부가 깊은 줄 알았더니만…. 역시 인간의 어법과 신의 어법은 다르구나. 너는 정도령의 진짜 의미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나마 청와대 터가 천하제일복지라고 인정하고 주역을 좀 읽었다니 함께 대권을 논할 수는 있으려나? 너는 필시 주역으로 이번 대권을 저울질하려고 하렷다!”
“그렇습니다. 주역 그리고 한국 역학인 정역(正易)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가치관의 대전환기가 시작되었어요. 국가권력 주도의 사회, 승자독식 자본주의는 끝났습니다. 남녀 양성평등 사회가 돼가면서 여성 리더들이 급부상하고 있어요. 주역과 정역(正易)의 변화원리 그대로입니다. 이번 대선은 주역 철학을 확실한 나침반으로 쓸 수 있습니다.”
- 12월 19일은 용띠해 호랑이 날
백두옹의 머릿속으로 대선 주자들의 면면과 64괘가 오버랩되었다.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손학규, 김문수, 김두관, 김태호, 정세균…. 그들은 모두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중요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얼핏 축복으로 들리지만 지독한 저주다. 인류사를 훑어보면 중요한 시대에 태어난 자, 하나같이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영혼의 심지를 바짝바짝 태웠다. 이번 대선은 능력자의 몫이다. 단지 권력욕에 눈멀어 어물쩍 취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판이다.
18대 대권! 손에 쥐어 줘도 슬그머니 내려놓아야 할 신물(神物) 같은 것.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성장과 복지, 남북화해 그리고 국위선양! 개념은 제대로 잡히는가. 해법은 정말 있는 것인가?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다.
대저 축복받은 인생이란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경이 어디까지인지 알 바 없이 그저 한가로이 밭고랑 갈고 흙덩이 깨며 노래 부르던 이들이었다. 날이 저물어 지등(紙燈) 같은 달이 뜨면 베잠방이에 이슬 적시며 집으로 돌아온다. 양친부모 모시고 처자식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토장국에 보리밥 말아먹던 목가적인 풍경은 그야말로 아주 사소한 시대의 흔해 빠진 풍속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도시 문명의 한복판에서 애면글면(몹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양) 사는 이들은 그 시절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리.
“내가 너에게 큰 붓을 주련다. 맘껏 휘둘러서 청와대 터에 맞는 주인공을 가려라. 그리하여 오는 12월 19일 호랑이날, 국민과 함께 신명이 내린 자의 입에 여의주를 물려라. 춤추는 그 용이 동방의 하늘을 날면 온 천하가 떨쳐 일어나 호응하리라. 그가 바로 반만 년을 기다려온 정도령이니라.” 그때 먹장구름이 삽시에 몰려들면서 번개가 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그 모습이 흡사 성난 독룡의 혓바닥과 같았다. 귀청을 때리는 천둥이 몇 차례 울더니 후두두 장대비가 쏟아졌다. 백두옹은 태백산 오래된 주목(朱木)처럼 서서 그 비를 흠뻑 맞았다. “한 가지 명심할 지어다! 지금까진 내가 꾹꾹 참아왔다만 또다시 함량미달인 자, 탐욕스러운 자가 청와대 주인 행세하겠다고 들어올 것 같으면 이번엔 가차 없이 불을 뿜어 주살(誅殺)하리라!”
- 건괘 다섯 번째 지위가 飛龍在天
요란한 장대비 소리와 뒤섞인 그 음성은 소름이 끼쳤다. 앞을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폭우를 맞고 서서 백두옹은 불현듯 용을 떠올렸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코는 돼지,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한데 변신의 귀재였다. 마음대로 변하지 못하면 용이 아니었다. 때로는 산, 때로는 물, 때로는 불이 되었다가 사람의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까 나에게 말한 북악 산신 또한 용일 수도 있었다.
동양문화에서 용은 상서로운 영물이자 왕을 뜻한다. 목 아래에 거꾸로 박힌 비늘, 역린(逆鱗)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누가 됐건 사정없이 물어 죽여 버린다. 왕조시절, 제왕의 심기를 건드린 자 또한 목숨을 보전키 어려웠다.
우리는 대선 후보를 잠룡(潛龍)이라고 부른다. 잠룡은 주역 건(乾)괘 여섯 개의 효(爻:가로 그은 획) 중 맨 아래 지위다. 출마 선언을 하면 어느 정도 실체가 드러났으므로 두 번째 지위인 현룡 (見龍)이 된다. 대통령 하겠다고 나선대서 아무나 불러다 쓸 수는 없다. 리더십을 검증받고 지위를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 다섯 번째 지위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다. 하늘을 나는 용이니 대권을 거머쥔 대인을 뜻한다. 맨 위까지 올라가 권력을 다하게 되면 항룡(亢龍)으로 후회할 일만 남게 된다.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은 일찍부터 항간에 만사형통(萬事兄通:모든 일은 형과 통한다)이라는 백만 달러짜리 신조어를 낳았는데 그 말로(末路)는 1.9평짜리 감옥행이었다.
북악 산신이 찾는다는 정도령! 메시아 같은 그는 누굴까? 여야의 잠룡, 현룡들 가운데 정씨가 하나 있긴 하지만 너무 까마득하여 족탈불급(足脫不及,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는 누가 뭐래도 박근혜 후보인데 엉뚱한 도령이라니? 도령은 총각을 대접하는 말,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는 아니라는 말인가?
- 중앙선데이 제280호 | 김종록의 ‘주대선 소설’① … 2012. 07. 22. | |
※ 팩션 (Faction=Fact + Fiction)은 ‘사실’을 뜻하는 fact와 ‘상상 혹은 허구’를 의미하는 fiction의 결합으로 생긴 신조어이다. 즉, 역사적 사건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오락적 요소를 가미시켜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해내는 문화작품을 흔히 팩션(faction)이라고 부른다. ‘팩션’ 의 매력인 ‘사실과 허구’ 를 뒤섞는 소설기법은 권력집단과 지배문화의 억압으로 침묵해 온 또 다른 목소리를 발굴하고 조명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효과적’ 이다. 이들 소설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의 즐거움과 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준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작가들이 전문가가 되다시피 자신이 다루는 분야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뛰어난 상상력과 새로운 기법으로 그것을 재미있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역(周易)은 오경(儒學 五經)의 하나. 만상(萬象)을 음양(陰陽) 이원(二元)으로써 설명하여 그 으뜸을 태극(太極)이라 하였고 거기서 64괘(卦)를 만들었는데, 이에 맞추어 철학ㆍ윤리ㆍ정치상의 해석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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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록. 소설가 1963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 국문과, 성균관대 대학원 한국철학과을 졸업했다. 24세 때인 1987년 『파수병 시절』로 제17회 삼성문예상 수상하며 등단. 이듬해인 1988년 장편 『칼라빈카』로 제1회 불교문학상 수상.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1.2.3』 와 『달의 제국』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바이칼』 ‘동동’ ‘왕자의 눈물’ ‘제왕의 길’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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