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사회주의자. 바르멘 출생. K.마르크스의 친구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공동창시자이다. 1837년 엘버펠트의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섬유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일을 1년쯤 도운 뒤 브레멘에서 2년 반 동안 업무를 견습하는 한편, 여가를 이용하여 평론과 시를 써서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41년 베를린 근위포병여단에 지원 입대하여 병역 의무를 다하는 1년 동안 틈틈이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등을 청강했으며, 헤겔 좌파에 가담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아버지가 공동 경영하는 영국 맨체스터의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의 방적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동안 여가를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실정을 돌아보고, 노동운동·차티스트운동·사회주의운동과 접촉한 뒤 공산주의자의 입장을 굳히면서 몇 편의 논문을 썼다. 그 동안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노동자 M.번스를 알게 되어 43년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44년 K.마르크스와 A.루게가 발간한 《독불연보(獨佛年報)》에 발표한 《국민경제학비판대강》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연구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44년 8월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오던 중 파리에 들러 마르크스를 만나 의견의 일치를 발견하였으며, 이로써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우정과 협동이 시작되었다. 그 최초의 사업이 헤겔좌파를 비평한 《신성가족(1845)》의 공동집필이다. 그 뒤 바르멘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면서 맨체스터에서의 견문과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썼다. 45년 4월 집을 나와 마르크스가 거처하고 있던 브뤼셀에 주거를 정하고, 그곳에서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파악 방식인 유물사관을 제시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자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고, 47년에는 의인동맹(義人同盟)에 가입한 뒤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동맹의 강령 작성을 목표로 해서 《공산주의의 원리》를 기초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공산당선언》이 집필되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로 되돌아가 마르크스와 함께 《신(新)라인 신문》을 발간했으며, 나아가 의용군의 부관으로서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으나, 혁명의 패배로 인하여 마르크스의 뒤를 따라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런던에서는 마르크스의 《신(新)라인신문·정치경제평론》 발간에 협력하였고, 《독일농민전쟁》 등의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으나 생활이 궁핍하여 50년부터 다시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에서 근무하며 20년 동안 비즈니스맨 생활을 하게 되었다. 50∼60년 사원, 60∼64년 업무대리인, 64∼69년 사무소지배인으로 일했으며, 계속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하였다. 그동안 교외에 있는 집에서는 친구들과 정치·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이중생활을 하였다. 63년 교외에 있는 집에서 함께 살던 번스가 죽었으며, 64년 번스의 여동생 리디아를 아내로 맞아들었다. 69년 7월 회사 근무를 그만두고 70년 가을 런던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의 집 가까이에 거처를 정한 뒤 저술과 정치활동에 몰두하였다. 《자연변증법》 《K.E.뒤링의 과학의 변혁(1876)》 《공상에서 과학으로(1884)》 《L.A.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1886)》을 집필하였다. 엥겔스의 학식에 대한 넓이는 경제학·철학·문학·신학·언어학·자연사(自然史)·화학·식물학·물리학 등에 이르렀으며 20개 외국어를 구사했고, 또한 군사학에 관해서는 크림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 등에 관한 탁월한 전황판단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게네랄(장군)>이라고 불렸다. 83년 마르크스가 죽은 뒤에는 마르크스의 유고(遺稿)에 기초한 《자본론(資本論)》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여, 제2권을 85년에, 제3권을 94년에 간행하였다. 또한 1889년에 창설된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원조와, 90년 런던에서 열린 제1차메이데이에의 참가 등 국제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에 지도와 참가를 계속하였다. 95년 마르크스와 자신의 저서에 대한 전집 준비를 시작했으나, 8월 식도암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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